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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해월 입도 전의 해월신사 -삼암 표영삼
멩이 추천 0 조회 33 08.01.23 23:0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입도 전의 해월신사

표영삼_ 서울교구·선도사

경주 황오리서 탄생

    신사 해월 최시형(神師 海月 崔時亨)은 1827년(丁亥) 3월 21일(양 4월 16일)에 외가(月城 裵氏)인 경주 동촌 황오리(현재 皇吾洞 229번지)에서 태어났다. 최남주(崔南柱, 1906생)가 갖고 있는 족보(한지에 쓰여 있다)에 의하면 아버지는 최종수(崔宗秀, 1804. 6. 22∼1841. 10. 15)요 어머니는 월성(月城) 배씨(裵氏, ?∼1832. 4. 22)이다. 6세 때 모친상을 당한 후(5세에 모친상을 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1년 후 영일(迎日) 정씨(鄭氏)를 계모로 맞아 섬겼다.
    신사의 명은 경상(慶翔)이요 자는 경오(敬悟)이다. 포덕 16년(乙亥, 1875) 10월 18일에 지도자들을 불러 제례를 올리고 나서 시형(時亨)으로 이름을 고쳤다. 호는 해월(海月)이라 하였으나 『최선생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와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 그리고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어디에도 언제부터 해월이란 호를 사용했는지 기록이 없다. 포덕 30년(1889)경부터 접주 또는 육임직(六任職) 첩지(帖紙)를 발행하면서 해월장(海月章)을 처음 사용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해월이란 호는 이때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신사도 대신사와 같이 암호(菴號)를 사용하지 않았다. 신사가 자라난 곳은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기일동(基日洞, 터일)이었다. 19세에 손씨 부인과 결혼하기 전까지 이 곳에서 살았다. 족보에 선친의 묘소가 이 곳에 있다 했으므로 윗대부터 살아왔던 모양이다. 해월신사는 부친이 살아 있을 때까지 서당에 다니며 초급 한문을 수학하였다. 교중에는 해월신사를 무식한 어른으로 잘못 전하고 있다. 오지영은 『동학사』에서 해월신사를 무식한 어른으로 묘사했다. 즉 “해월 선생은 마음속에 무한한 도덕이 있는 것이지만 문자에 식견이 없고 또는 제도와 의식에 구구한 생각이 없고 …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 하여 한참동안은 춘풍 선생님이라고 하는 비평을 들어온 일도 있었다”고 하였다.
    오지영 뿐만 아니라 『천도교서』에도 “본래 문식이 무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즉 경전을 수찬할 때 “문식이 무하여” 구송(口誦)한 것을 문식이 있는 이가 받아쓰게 했다고 하였다. 신사는 여러 형식의 한시를 남기고 있다. 문식이 없었다면 어떻게 많은 한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포덕 13년에 정선 갈래사 적조암에서 기도를 마치고 지은 한시는 너무도 유명하다. “太白山工四十九 受我鳳八各主定 天宜峰上開花天 今日琢磨五絃琴 寂滅宮殿脫塵世 善終祈禱七七期”라는 이 시는 문식이 뛰어난 사람도 지을 수 없는 한시라고 할 수 있다. 포덕 31년에 금산 복호동에서 내수도문과 내칙을 반포하였다. 경어로 간절히 호소한 이 글은 신사가 처음으로 한글로 지은 글이다. 이 글에는 한문 수준이 높지 않으면 구사할 수 없는 낱말들이 들어 있다. 신사는 15세까지 분명히 한문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을 유념하면 문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신사의 가족관계

    해월신사의 부친 종수(宗秀) 어른은 38세(1841년) 되던 10월에 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교중 기록에는 12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최남주가 소장한 족보에는 신축년(辛丑年)인 15세 때에 별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유족은 신사와 계모, 누이동생 등 셋이었으나 부친상을 마치자 뿔뿔이 흩어졌다. 계모 정씨는 어디로 떠나버렸고 누이동생은 먼 일가로 가서 의탁하였다. 누이동생은 후일 임익서(林益瑞)와 결혼하였다. 해월신사의 손자인 검암 최익환(崔益煥)은 “의암성사께서 임익서를 서울로 데려다 생활하게 한 적이 있었다 했으며 후손들은 김제군(金堤郡) 초처면(草處面, 현재는 鳳南面) 용신리(龍新里)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홀로 남은 해월신사도 곧 먼 친척집으로 가서 의탁하게 되었다.
    오상준의 『본교역사』에, 부친이 돌아가신 후 신사는 “입에 풀칠할 형편이 못되어(糊口之策) 동에서 심부름해주고 서쪽에서 품을 팔았고(東慊西雇), 아침에 절구로 찧어 저녁에 거두는 식(朝春夕收)으로 살았으며, 몸에는 온전한 의복을 입지 못하시며(完衣未着), 입(口)에는 술 찌꺼기나 겨(糟糠)도 마다(厭)할 형편이 못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의 생활을 해월신사는 뼈에 사무치도록 간직하였다. 훗날 가족들에게 타이르기를 도인이 오면 밥을 드셨는가 묻지 말고 밥상부터 차려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옷을 지을 때엔 반드시 새 천으로 안감을 쓰라”고 당부하였다 한다. 낡은 천을 안감으로 만든 옷을 불편하게 입었던 과거를 생각하여 이렇게 타일렀었다. 그리고 하인을 부를 때 “머슴애, 머슴애”라고 부르지 말고 꼭 이름을 불러주라고 하였다 한다. “배고픔이나, 추위나, 힘든 일은 참아낼 수 있었으나 머슴애라는 빈정대는 말은 죽기보다 싫었다”고 했다.

결혼 이전의 신사

    『시천교역사』에는 신사가 10세 때에 30민의 엽전을 지고 70리 길을 거뜬히 갔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선천적으로 건강했음을 알 수 있다. 친척집에서 머슴살이 일을 하던 신사는 17세가 되자 제지소(製紙所, 한지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신사가 살고 있는 터일(基日洞) 안쪽에는 오금당이란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닥나무가 잘 자라 오래 전부터 집집마다 닥나무를 심어 종이(한지)를 생산하여 왔다. 마을 계곡 밑을 흐르는 시냇물은 물이 풍부하여 한지 생산에 적격이었다. 10평 남짓한 종이 방들은 이 개울가에 있었다. 동리 사람들은 해마다 가을이 되면 여기서 한지를 만들어 냈다. 늦가을이 되면 닥나무를 거두어들여 제지 작업을 시작한다. 이 때가 되면 떠돌이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종이 방에는 늘 불을 지피므로 엄동설한에도 이불 없이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일을 해주고 한겨울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한다. 신사도 늦가을부터 이곳에 들어가 숙식하면서 일을 배웠다. 붙임성이 좋고 부지런하여 남보다 빨리 배웠다. 18세에는 한몫을 하는 기술을 익혔다. 그리고 때때로 흥해나 청하, 포항, 경주, 영덕 등지의 거래처에 한지를 날라다주고 대금도 받아오는 일을 하였다. 생계가 안정되자 신사의 신수는 어느덧 늠름한 청년이 되었다. 19세 되던 어느 날 흥해에 사는 오씨라는 어린 과부가 청혼하여왔다. 오상준의 『본교역사』에는 “오씨라는 여인이 일찍 과부(早寡)가 되었지만 마침(且) 가산이 약간(頗) 넉넉(贍足)하였다. 하루는 신사를 만나(邀) 혼인하자고 사람을 보냈다(請執巾櫛)”고 하였다. 신사는 남의 재산을 넘보는 것 같아 꺼림직하여 거절하였다(絶不許) 한다. 이 해(乙巳 1845년) 가을에 먼 일가의 중매로 흥해 매곡에 사는 밀양(密陽) 손씨(孫氏, ?∼1889. 10. 11)와 부부의 의를 맺었다. 이후 처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림을 차린 것 같다.

검곡서 화전민 생활

    28세(甲寅 1854년)에 이르러 신광면 마북동(馬北洞)으로 이사하였다. 매곡에서 북쪽으로 약 40리 떨어진 곳이며 고향인 터일 바로 옆 동리인 산중마을이다. 교중 기록에는 이 곳으로 이사오자 마을 사람들이 집강으로 추천했다고 하였다. 『천도교서』에는 “방인(坊人)이 해월신사의 공렴유위(公廉有威)하심을 견하고 중망으로 특천하여 일방(一坊) 풍강(風綱, 執綱)의 임을 위(委)하였다”고 하였다. 집강은 지금의 이장(里長) 격으로 가끔 관에서 알리는 일을 동민에게 전해주는 일을 했다. 지면이 넓어 많은 사람을 알고 있었고 마을에는 최씨 일가도 많이 살아 신사를 추천한 것 같다.
    마북동은 땅이 토박하여 소출이 넉넉치 못했다. 식구가 늘어나자 33세(己未 1859년) 되던 봄에 골짜기 안쪽 금등골(琴登谷)로 들어갔다. 『해월선생문집』에는 검동곡(劒洞谷)으로 들어갔다 하였다. 권병덕의 수기에도 금등골로 들어갔다 하였다. 그런데 오상준의 『본교역사』에서 잘못되기 시작하였다. 검동곡(劒洞谷)이라 기록해야 하는데 중간에 있는 동(洞)자를 밑에 붙여 검곡동(劒谷洞)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로부터 각종 교중 기록에는 검곡동(劒谷洞)으로 잘못 전해지게 되었다.
    필자는 포덕 119년(1978) 5월 17일에 처음 찾아갔다. 마복동을 답사하기 위해서 찾아갔다가 검곡의 소재도 알게 되었다. 교중 기록에는 신사가 28세 때에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으로 이사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 인근지역에는 승광면 마복동이란 지명은 없었다. 우연히 흥해 지역을 찾다가 영일군 신광면(神光面) 마북동(馬北洞)을 발견하게 되었다.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과 유사하여 현지에 가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먼저 흥해로 가서 버스로 신광면 소재지인 토성동에 이르렀다. 여기서 알아보니 북쪽으로 8㎞ 거리에 마북동이 있다고 한다. 승광면(昇光面) 마복동(馬伏洞)은 잘못된 기록이다. 가르쳐 준대로 청하로 가는 길을 따라 입석동(立石洞)에 이르러 다리를 건넜다. 청하로 넘어가는 길과 반곡 저수지가 있는 반곡동(盤谷洞)으로 가는 길이 갈라졌다. 왼쪽으로 올라가 반곡동 마을 한가운데 길을 지나 솔밭에 이르러 작은 개울을 건너자 다시 두 갈래로 길이 나뉜다. 왼쪽은 해월신사가 자랐던 터일로 들어가는 길이고 바른쪽은 마북동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바른 쪽으로 언덕길을 오르자 큰 저수지가 나타났다. 왼쪽에 나 있는 길을 따라 1㎞ 정도 들어가자 마북동이 나왔다. 초등학교 분교가 나오고 바른쪽 언덕위로 길게 들어선 집들은 약 10호 정도가 있었다. 마을회관과 같은 집이 보여 찾아가니 마침 뜰에 있던 81세 되는 강철회(姜徹會, 1898년생) 어른을 만났다.
    그는 동학의 주문을 알고 있었으며 신사에 관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해월신사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하였다. 필자의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해주었다. 옛날 이곳은 경주 관내였다고 하며 동리 이름은 마북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검곡은 이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필자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오 3시경에 검곡을 찾아 들어갔다. 당벌등(堂伐嶝, 지금은 당수동)을 지나 인편(仁片)으로 가는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얼마 안 가서 왼편에 깊은 골짜기가 하나 나타났다. 지금은 입구에 저수지 둑이 있어 찾기 쉬우며 여기서 왼쪽으로 1㎞ 정도 골짜기 안쪽으로 가면 검곡이 나온다. 골짜기 끝자락에 이르니 왼쪽 언덕 위에 감나무가 보였다. 가파른 기슭으로 10m 정도 오르자 2백년이 넘어 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옆으로 70평 정도의 계단식 집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집터는 네 채 정도였으나 신사께서 살았던 곳은 알 길이 없다. 노송이 서 있는 곳에서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훤하다. 집터 위쪽으로 5백 평 정도의 밭이 있었고 골짜기 일대에는 여기저기 화전(火田) 터가 널려 있었다. 집자리 북쪽 골짜기에도 잘 정리된 5백 평이 넘어 보이는 계단식 밭터가 보였다. 인근에 샘물이 있어야 한다. 집 뒤 왼편 능선기슭으로 올라가니 말라버린 우물자국이 있었다. 여름철에는 물이 나왔는지 모르나 겨울이 되면 말라버릴 것 같았다. 집터 뒤 바른편으로 10m 정도 올라가자 계곡으로 내려가는 『ㄹ』자 형 길이 나 있었다. 20m 정도의 골짜기 밑에는 수량이 풍부한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기슭에는 오막살이 집터도 하나 보였다. 아마도 이 개울물을 식수나 생활용수로 사용한 것 같다.

용담 찾아가 입도

    동리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땅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았다고 한다. 신사는 33세(己未 1859년) 되던 봄에 식구를 거느리고 이 금등골(劒谷)로 들어와 화전민 생활을 하였다. 몸은 고단했으나 소출도 늘어났고 마음도 평안했다. 35세가 되던 1861년 6월초였다. 하루는 친구가 찾아와 경주 용담에 신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였다. 곧 용담으로 찾아가 대신사에게 인사를 올렸다. 마디마디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왔으며 사람을 감동시켰다. 신사는 이상하게도 대신사를 보자마자 첫눈에 끌렸다.
    추측컨대 신사는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고 입도식을 올렸다고 여겨진다. 신사의 재판기록에는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丙寅年, 1866)에 간성(杆城) 사는 필묵상(筆墨商) 박춘서(朴春瑞)라는 사람에게 소위 동학을 받았다”고 하였다. 박춘서는 간성 사람이 아니라 영덕 사람이며 입도한 연대도 맞지 않는다. 양양 도인을 지도하러 갈 때 신사와 동행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신사가 그에게 도를 정해주었다. 신사가 처음 포덕한 사람이 바로 박춘서였을 것이다. 신사는 1861년 6월 어느 날 스스로 용담을 찾아가 대신사로부터 도를 받았다.
(신인간 145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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