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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는 한 가지
시편 27:1-6
마음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이 없습니다. 사전은 마음을 ‘사람의 智․情․意의 움직임. 또 그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상태의 총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시비와 선악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정신 활동’이라는 정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마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잡히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참 모호한 실체라는 것은 관련된 어휘들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끌다. 마음을 놓다, 마음을 먹다, 마음 붙이다, 마음에 걸리다, 마음에 두다, 마음에 새기다, 마음을 잡다, 마음을 졸이다……. 그래서인가요? 舜 임금이 禹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전수해 준 통치의 비결은 마음을 붙잡는 법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은 늘 흔들리게 마련이고(人心惟危) 하늘의 마음은 늘 은밀하여 파악하기 어려우니(道心惟微), 늘 세심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하여야(惟精惟一)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을 수 있다(允執厥中)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그 중심을 붙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거리를 달려가면서 소리쳤습니다. “도둑이야, 도둑이야!”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물었습니다. “도둑이 어디 있소?” “우리 집에요.” “그를 보았소?” “아뇨. 보진 못했습니다.” “잃어버린 물건은 있소?” “없어요.” “그럼, 도둑이 당신 집에 들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소?” “침대에 누워 있는데, 도둑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집에 들어와서 잽싸게 움직인다는 사실이 생각났어요. 그런데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틀림없이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와 있는 것 아니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웃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만든 몽상에 갇혀 허둥대는 것은 이 어리석은 사람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주 受生은 受難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목숨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올 때, 그 어려움을 잘 해결해 나갈 때도 있지만 어려움에 짓눌리고 치여 헐떡일 때도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우리 마음에 기어들 때도 있고, 구체적인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두려움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이성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흔들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붙들어야 할까요? 음악을 듣거나, 운동을 하거나, 잠을 청하거나, 왁자지껄한 소음 속에 자기를 던지거나, 술의 힘을 빌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한 어떤 비결을 가지고 계신지요? 오늘 시편 27편의 시인은 흔들리는 그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갑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1)
시인은 두려움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립니다. 마음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내놓고 하나님이 어루만져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은총의 날개 아래서 살아온 지난날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주님은 인생의 어두운 밤을 만난 시인의 등불이셨습니다. 그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피난처였습니다. 잡아먹을 듯 달려들던 적들은 마치 제 발에 걸린 듯 비틀거리다 넘어졌습니다. 가끔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을 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어떤 충고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문제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닥치면 그 문제는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와 우리 시야를 가립니다. ‘눈앞이 캄캄하다’는 말이 그런 정황을 잘 드러내 줍니다. 손가락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눈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게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고, 풀 수 없는 난제도 아니고,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현존 안에서 문제를 바라볼 때, 때로 문제는 오히려 우리에게 복을 가져오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나는 이 문제보다 크다’고 외쳐보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문제가 즉각 해결되지는 않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 태도는 달라져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대로 있지만, 그 문제가 내 삶을 지배하는 힘은 현저히 약화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내 삶 전체를 무너뜨릴 것처럼 보였는데, 좀 떨어져서 바라보니 별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이렇게 별문제 아닌 것 때문에 허둥대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두려움을 크게 만드는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문제와 맞서보기도 전에 우리는 문제의 크기에 짓눌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제아무리 낮게 넘어져도 하나님의 은총 밖으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총이 늘 우리를 감싸 안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중국 무협 영화를 보면 그 스토리나 구성이 대개 비슷합니다. 악인에 의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주인공은 홀로 살아남아 온갖 고생을 겪다가 숨어 있는 고수를 맞아 절세 무공을 수련하게 되고, 마침내 악인을 물리치고 가문을 세우며 정의를 회복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스토리 전개 과정에서 주인공이 악인에게 쫓겨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악인이 주인공을 향해 손을 뻗자 주인공은 눈을 감습니다. ‘이제는 끝났구나’ 싶었겠지요. 그런데 잠시 후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뜬 주인공은 악인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을 봅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주인공의 등 뒤에 절세 무공을 가진 고수가 서서 주인공 속에 기를 불어넣었던 것입니다.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허구이긴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삶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내 힘으로 도무지 어쩔 수 없구나 싶은 순간, 내 속에 어떤 용기가 불어 넣어지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캄캄한 어둠이라고 생각되는 그 때에 내 속에 한줄기 환한 빛이 비춰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 숨결을 불어 넣으셔서 절망과 무기력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경험했기에 시인은 노래합니다.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3)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사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경험해 본 사람의 고백이 이것입니다. 독수리가 나는 것을 보셨습니까? 독수리는 날 때 날개를 퍼덕이지 않습니다. 거대한 독수리가 날개를 편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유영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모릅니다. 조류의 왕다운 모습입니다. 신앙인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바람을 거스르려다 보니 우리 인생이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타고 사는 사람은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두렵지 않다’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타고 산다 하여 세상일을 도외시하고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바람은 때로는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일 때도 있지만, 앞에 있는 장애물을 다 날려버리는 회오리바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깨우는 봄바람일 때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날려버리는 태풍일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을 타고 산다는 것은 때로는 봄바람처럼 생명을 일깨우는 삶을 산다는 것이고, 때로는 거센 태풍처럼 불의에 맞설 줄 아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시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4절입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심술꾸러기 도깨비들도 3가지 정도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데, 이 시인은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의 소원이란 그 소원 이루고 나면 죽어도 좋은 것일 겁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단 하나의 소원입니다. 자기 삶 전체를 하나의 초점에 모으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삶을 하나의 초점에 모으고 살고 있습니까? 지금 인생을 걸고 이루고 싶은 단 하나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백범 김구 선생님은 하나님이 만일 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꿈이 김구 선생을 끌고 가는 힘이었습니다. 오늘 시인의 꿈은 소박하지만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4)
그는 하나님이라는 중심에 자신을 비끄러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인 삶, 곧 一中의 삶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충성스러운 삶이 됩니다(中+心 → 忠). 하지만 마음이 이리저리 분산되어 있는 삶 곧 多中의 삶은 병이 됩니다(串+心 → 患/근심, 병).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때, 우리 삶은 근심에 휩싸일 수밖에 없고, 병든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이 근심에 쌓인 까닭은 다른 것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것 아닙니다. 나를 지우고 또 지워서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려는 것입니다.
1936년에 스페인 내전(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압제에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의 저항)이 벌어졌을 때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전쟁의 참상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스페인으로 달려갑니다. 그는 살라망카에서 20세기 스페인 최고의 사상가인 미구엘 데 우나무노를 만납니다. 그는 한 가지 질문을 준비하고 갔습니다. “오늘날 영적인 인간의 의무는 무엇입니까?” 우나무노는 스페인 사람들이 이런저런 깃발을 들고 싸우고 서로를 죽이고 교회를 불태우는 모습이 절망스럽다면서, 그런 혼란의 원인은 스페인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 데 있다고 진단합니다. 우나무노는 그들을 ‘데스페라도(Desperado)’라고 부릅니다. 그 말은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붙잡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정신이 와해되고, 외해된 정신에서 거친 분노가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폭력이 되고 전쟁이 된다는 것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스페인 기행>>, 열린책들)
붙잡고 있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인은 주님의 현존을 늘 경험하고, 주님과 의논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 소망 하나 가졌기에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날 때 누구와 의논하십니까?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주님께 ‘어떻게 할까요?’라고 한 번만이라도 여쭙는다면 우리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이런 문답을 생활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배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먹기 전에 배한테 물어봅니다.
초콜렛을 먹고 싶은데 먹을까요?
—먹지 말아라.
그럼, 사과는 먹을까요?
—먹어라.
두 개 먹을까요?
—아니다.
한 개만 먹을까요?
—그래라.
그래서 초콜렛은 먹지 않고
사과를 그것도 한 개만 먹습니다.
뭐든지 이렇게만 먹는다면
속탈이 날 수가 없지요.
그런데도 만일 탈이 났다면
보셔요, 하늘이 뒤집어졌을 겝니다.
-이현주, <먹기 전에>
우리가 묻고, 듣고, 들은 말씀대로 실천한다고 하면 우리 삶은 분명 가벼워질 것입니다. 묻지 않기에 과식을 하고, 묻지 않기에 헛된 일을 도모합니다. 상식적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을 하나님의 뜻이라며 해치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그들이 기도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했는지 몰라도 듣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뭐하고 하셔도 들을 생각은 없었던 것 아닐까요? 기도는 기본적으로 아뢰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듣는 것입니다. 아까 말한 대로 사람의 마음은 변덕스럽기 때문에 늘 위태롭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을 자꾸자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통한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노예가 아닙니다. 고난의 현실이 닥쳐온다 해도 그는 그 문제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지 않습니다. 문제의 크기보다 정신의 키를 더 높이면 어떤 문제도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니,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5-6a)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는 인간 존재의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삶의 부름에 ‘네’ 하고 대답하는 것을 가리켜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 했습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불행을 내면화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용기이고 믿음이란 말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바로 하나님께서부터 나옵니다. 굽어살피시고, 품어주시고, 북돋워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우리도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시인은 도처에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10)
“이 세상에 머무는 내 한 생애에 내가 주님의 은덕을 입을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13)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겨울이 되면 거리의 가로수와 들판의 이름 없는 들풀들, 그리고 다 말라서 아무 형체가 없는 것 같지만 땅속에서 꽃씨들이 혹독한 조건에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합니다. 이런 가혹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생명을 유지하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땅속 깊이 박혀있는 뿌리에서 필요한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혹독해도 뿌리가 땅속에 깊이 박혀있기만 하면, 봄에 꽃으로 피어납니다. 우리 삶도 저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어코 인생의 꽃을 피우고야 말 것입니다. 인생이 늘 지화자 판일 수는 없습니다. 모진 겨울 추위가 있기에 매화 향기가 더욱 진하듯, 어려움이 있기에 기쁨 또한 더욱 지극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거우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십시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살겠다는 결의, 하나님과 의논하며 살겠다는 겸허한 마음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b) 이러한 확신으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역사의 새봄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
우리 삶이 저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어코 인생의 꽃을 피우고야 말 것입니다.....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