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중2 때 나의 어머니인 막내딸을 일찍 보낸 나의 외할머니께서는, 어머니 돌아가신 지
1년 만에 반야심경을 까막눈으로 책 안 보고 달달 외우셨다.
나는 글을 깨우친 아주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께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계속 썼었는데,
처음엔 어머니가 시켜서 썼으나 나중의 용건은 그저 외할머니께서 내 편지 받아 누구로부터
읽게 하시고는 훌쩍훌쩍 우시며 듣는 것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써드렸었다.
물론 그 편지는 함흥차사처럼 가기만 가고 답장이 온 적은 없었다.
그즈음 나의 세상도 그랬다. 나의 하소연과 아등바등에 세상은 답이 전혀 없었고, 어쩌면
더 살아야 할 일말의 가치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외할머니 성함으로 된
편지가 내게로 왔다. 나는 외할머니께서 누구를 시켜 편지를 쓰게 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며 편지를 열었다.
그러나 거기엔 ‘이 할미가 글자 배워서 첫 번째로 너에게 편지를 쓴다’로 시작하는 이제
막 배우신 이루 말할 수 없이 구불구불하고 더듬더듬한 문자들이 소복하게 있었다.
어디서 배우셨는지는 몰라도 한글을 배우셔서 이 세상에서 가장 첫 번째로 내게 편지를
써서 보내신 것이다. 나는 그 주에 당장 가슴 벅찬 마음으로 외할머니를 찾아뵈었다.
내가 도착한 날에 외할머니는 벌써 반야심경을 한글로 쓰고 계셨다.
외할매. 한글이 보기는 쉬워도 배워 쓰기는 마이 애려븐데요. 우째 이것을 배울 생각을
하셨습니꺼?
개안타. 재미도 있고, 잡생각도 안 나고, 느그 어마이 생각도 안 나고, 시간도 잘 간다.
건아. (아버지께서 구화 삼천 환 주고 지으신 내 이름 끝자인 '권'은 이렇게 헛일이다.
아랫녘 사람들은 발음이 안 된다.) 반야심경이 몇 자인 줄 아나?
모립니더. 외할매요. 반야심경이 무언지도 잘 모르는데, 그기 몇 자인지 우예 알겠심니꺼?
270자다. 니는 인자 높은 학교 가니까 계산도 잘하제? 270자의 4배는 몇 개고?
4*7은 28, 4*2는 8, 1080개 같은데요.
글체? 그기 이 외할미가 절에 가면 느그는 우짜든지 잘 되라고 하루에 그만큼 절한다.
외할매가 1080개를 셀 수 있다고예? 마이 애렵을낀데예? 나는 외할머니께서 절을
1080번이나 하시는 그 수고로움보다 1080을 셀 수 없으실 것에 집착하였다.
안 어렵다. 같이 1080배 하는 아지매들 따라 하면 되지. 나중에 일어나는 기 무릎이
아파 억수로 아프지만 다 느그 잘되라고 하는 일인데 그기 뭐 대수겠노? 니도 부디
힘들어도 참고 내를 봐서라도 어설피 살지 말고 악착같이 잘 살아라. 알았제?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건아.
며칠 전 세어보니 그단새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벌써 35년이나 흘렀다. 아직
내가 잘사는지 못 사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무엇을 하면 그나마 집중력이 있고 좀
악착같은 구석은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외할머니의 첫 편지는 자칫 태만하고 세상을 포기하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을
구원하여 이 세상에 끌어올려 준 훤칠한 계기가 되었음을 나는 잘 안다.
아직도 세상은 그때처럼 어렵다. 나는 아직 반야심경을 모르고 알아보고 싶은 기회도
잡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그게 무언지도 잘 모르면서 악착같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꾸준히 한다. - 音 사인코 남찌락 '오래된 음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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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할무니도 글은 몰랐고
동네 할무니들도 글을 몰라 책을 읽지 못했답니다 모여 앉아있는 할무니들을 위해 울 아부지가 옛날 고담책을 구수한 목소리로 읽는것을 봤답니다 곤이
외할무니께서 글을배워
편지까지 손주한테
편지까지 쓰시니 대단하십니다.
똑똑하신데다가 엄청 감상적이시기까지 해서 나만 보면 손을 잡고 어릴 때 어미 잃어 불쌍타고 타령조의 노래에 자신의 하소연을 한 30분 하셨더랬는데,
외할머니께서는 의지도 대단하시고 머리도 좋으신분 같군요.
글을 모르던분께서 글을 읽고 쓸 줄 아셨다니 그 분 에겐 인생 성공하신거나 마찬가지군요.
엄청 똑똑하셔서 요즘 같으면 판검사했을 것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