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면 충이지
꽃멍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다. 활짝 핀 꽃 앞에 서면 너무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화려한 꽃송이 뒤에는 주름살이 깊은 얼굴이 숨어 있다. 나름 굵은 손마디는 장갑 속에 숨겼어도 뙤약볕에 그을린 낯빛은 더 어쩌지 못한다. 티 내지 않으려 애써도 볼에 피어오르는 수줍음. 이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었을까. 젖은 손으로 흙을 만나는 사람의 수고가 다가서는 아침이다.
그런 탓에 이른 새벽부터 호미를 들고 나선다. 꽃멍보다 호미 들고 모종을 옮겨심는 데에 더 의미를 주는 편이다. 정원이 있는 주택을 갈망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애완동물과 삶을 같이하며 가족처럼 동물을 사랑한다. 그러나 식물들과 더 깊은 사연을 쌓고 사는 사람도 많다. 동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감정을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지만, 식물들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다. 비록 영어(囹圄)의 몸으로 한 생을 마감해야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좌절하는 법이 없다. 늘 꿈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도움을 받았을 때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것도 가슴에 새긴다.
아직 꽃씨를 뿌릴 시기는 아니니 정원수부터 손봐야 한다. 가지들이 제 나름대로 열심히 자랐으니 수형이 제멋대로다. 열매 맺는 과실수는 과실수대로, 정원수는 정원수대로 제 모습에 대해 사연이 많다. 가지가 멋없이 옆으로 뻗은 놈은 뻗은 대로, 하늘 높이 우듬지를 키운 놈은 우듬지대로 제 못난 모습에 토를 단다. 전지할 때마다 만만한 건 웃자람가지다.
배롱나무의 수형을 요리조리 살피며 전지한다. 지난해 자란 가지를 두 마디만 남기고 모두 삭발한다. 잔가지가 잘려 나간 배롱나무는 털 없는 치와와 같다. 치부가 다 드러난 나무. 자세히 보니, 하얀 게 여기저기 붙어 있다. 내 얼굴에 붙은 검버섯 같은데 다만 하얄 뿐이다. 어떤 가지는 굴뚝 안처럼 시꺼멓다. 하얀 입자를 건드리자 붉은 피가 흐른다. 나무의 시즙(屍汁)이다. 전지하기 전에는 이런 병균이 있음을 전혀 몰랐다. 전문가에게 묻는다. 팔순도 넘은 그는 실실 웃으며 장난기가 들어 있다.
“배롱나무에 하얀 것이 여기저기 붙었어요.”
“응애군.”
“어떤 살균제를 뿌려야 할까요?”
“눈에 안 보여? 눈에 보이면 충이지.”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린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가 호미 끝으로 검게 변한 껍질을 북북 긁어내리며, ‘끔찍도 해라.’ 했을 때 겨우 알아차렸다. 눈에 보이는 건 모두 벌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도 많다. 살충제를 들고나오자 그의 웃음기는 멈추었다.
지난가을이었다. 밥상에 올리는 채소는 내 손으로 키워서 먹겠다는 생각으로 배추 모종을 한 판 사서 심었다. 거름도 일반 농약상에서 구하지 않고, 소를 기르는 사람에게 연락하여 한 트럭 가져왔다. 질 좋은 거름을 넣었으니, 올해 김치는 좋은 배추로 담글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빛으로 커가는 배추를 지켜보면서 제대로 된 거름을 사용한 것에 만족해했다. 정말 실한 배추가 밭에서 자라고 있었다. 집에 들른 지인에게 김장배추를 제공해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충분한 양이 될 것이 분명했다. 네 쪽으로 나눠야 할 정도로 잘 자랐다.
싱싱한 배추를 수확하여 지인에게 반은 넘기고, 김치를 담그려고 쪽을 나누다가 그만 우리는 낙담하고 말았다. 재배한 우리야 그렇다 쳐도 지인의 놀라움은 어떨까 걱정이 된다.
겉잎은 매우 싱싱하였으나 칼을 대어 자르니 속에는 그시미가 숭덩숭덩 갉아먹어 사람이 먹기에는 흉물스러웠다. 노란 속에까지 들어박혀 제 몸집을 키우고 있던 시꺼먼 별레가 떨어진다. 졸지에 그시미 사육사가 된 것 같아 허망하다. 싱싱한 이파리 속에 숨어 있어 전혀 몰랐다. 저렇게 큰 벌레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니….
작물과 가까이하다 보면 자주 벌레들과 마주친다. 발견하는 족족 잡아 주고, 힘에 겨우면 농약을 꺼내기도 한다. 눈에 보이는 벌레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깨끗하고 싱싱한 먹거리를 위해 그들을 내몰기에 바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어 안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기 일쑤다. 보이지 않는 병균이 붙으면 작물이 폭삭 무너져내리고 만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요즘에 와서 자주 깨닫는다. 작물만이 아니고 모든 식물이 마찬가지다. 꽃을 키우다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병균이 찾아들어 집안의 꽃들을 모두 폐기해야 할 때가 있다. 탄저균에 전염되면 울 안의 식물들이 한순간에 모두 퇴거 명령을 받게 된다.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자신의 사업이 송두리째 거덜 나기도 하고, 한 사람의 삶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으로 착각한다. 너무 보이는 것을 신뢰한 죄로 구렁텅이에 빠진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라고 믿는 내 눈에 경고판을 건 지 오래다. 그러나 수시로 낭패를 맛본다. 아직도 눈에 보이는 벌레와 보이지 않는 균을 분간하지 못하는 눈이다. 정말 세상살이 힘들다.
“눈에 보이면 충이지.”
나보다 삶이 많은 노인의 말씀이 새롭다.
교수님 수필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눈에 보면 모두 충이지"~~!!!
배추 자르셨을 때가 상상이 됩니다..
기분 좋게 쓰윽~ 싸~~~~~악..악. 미운 그시미는 배추도 뜯어 먹나봅니다.
하긴 배추를 싫어하는 생물은 없는 듯해요. 사람 아이들 빼고요.
올해 배추는 그시미 조심 또 조심! 하셔서 풍작 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