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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75회. '조선시대에도 학생회가 있었다' (2000.07.01.)
75회 : 조선시대에도 학생회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학생회가 있었다
방송일: 20000701 조회수 : 2069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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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청금록 6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청금록. 이 책엔 조선유학자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 정인홍 6 그런데 광해군때 세상을 놀라게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영의정까지 지낸 정인홍의 이름이
이 책에서 삭제된 것이다.
# 학생들 재연 9 이 엄청난 사건을 주도한 것은 조선시대 대학인 성균관의 학생회였다.
# 크레인 9 조선시대 대학생들은 도대체 무슨힘으로 이런 일을 할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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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틀 조선시대 대학에도 학생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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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1.
# 명륜당 실사배경으로
대학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드넓은 캠퍼스, 패기와 지성이 넘치는 학생들, 축제, 미팅 이런것들이 아닐까 하는데요.
400년전 조선시대 대학과 대학생들의 모습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대학과 대학생들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명륜당 계단 올라가고
이곳이 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명륜당입니다.
지금의 강의실에 해당되는 곳인데요. 이곳에서 200명의 대학생들이 공부를 했습니다.
성균관이 국립대학이었던 만큼 등록금은 없었습니다.
당시 대학생들은 등록금은 물론 학용품과 생활용품 심지어 용돈까지 지급 받았습니다.
그런만큼 성균관에 입학하기는 쉽지가 않았는데요.
# 생원,진사글자발생
요즘 행정고시의 1차 시험이라 할 수 있는 문과초시를 통과해야 입학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이들을 생원과 진사라고 하는데요. 생원은 경전시험에, 진사는 문장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균관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이는 최고의 학부였던 셈이죠.
# 계단내려오고
그런데 조선시대 대학에는 요즘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제도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침 저녁으로 하루 두 번, 식당에서 출석체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것이 성균관 내에 있는 식당에서 이뤄졌다고 하는 것인데요.
그러면 도대체 왜 식당에서 출석체크를 했던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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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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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이소 듣고
# 북치는 FS 10 성균관의 아침은 식고소리로 시작된다.
북소리에 깨어난 유생들은 명륜당에서 성현들에게 인사를 올린후 식당으로 향한다.
# 식당 FS 5 그런데 식사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 윤여빈 INT 여기가 진사식당이다. 줄 맞춰들어와 도기를한다 . 이름밑에 도기하고 식당으로 간다.
# 윤여빈가르키고 자막나오면 10 도기는 지금의 출석부로 식사때마다 식당입구에서 행해졌다.
출석확인을 해야만 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 무명자집 15 영,정조때 학자인 윤기의 유고시집인 무명자집.
이속엔 윤기 자신이 20여년동안 성균관에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220여편의 시들이 반중잡영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 반중잡영 시 13 반중잡영에 따르면 당시 도기는 첫머리부터 차례로 써가는데
우물정자로 된 칸속에 서명을 하고 도기가 모두 끝나면 몇 명이 왔는지를 끝부분에 적도록 돼 있다.
# 교수도기설명 우물정자는 써놓고 그 칸에 먼저 성명을 쓰고 그밑에 수결을 한다. 그것이 도기의 기본이다.
# 원점자막나오면 16 출석일수를 점수로 매겨졌는데 이를 원점제도라 한다.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출석하면 1점을 주고, 이 점수가 300이 넘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다.
# 정낙찬 INT 원점을 만든 두가지 이유는 유생들의 근면함과 태만함. 인간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
두 번째는 생원이나 진사가 예비관료 이들을 모아둠으로써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기위한 측면.
원점은 인간교육과 체제옹호라는 양면성을 지닌제도다
# 실록 14 출석점수인 원점은 과거의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이기도 했다.
과거시험에서 동점자가 나오면 원점, 즉 출석점수가 많은 사람을 우선 합격시켰기 때문이다.
# 도기과답안지보는 2S 20 원점은 봄,가을에 시행되는 도기과라는 특별과거에도 활용됐다.
이는 도기과에 응시한 한 유생의 답안지에서도 확인된다.
도기과는 원점이 일정점수 이상된 유생들만 볼 수 있었는데, 왕이 직접 출석부를 보고 선발했다.
# 실록1 20 이처럼 출석점수가 중시되면서 원점을 높이기 위한 부정행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종실록은 원점이 부족한 유생들이 출석점수를 기록해 놓은 원점 치부책을 훔쳐,
추가로 기재하는 이가 30여명에 이른다고 쓰고 있다.
# 실록 2 15 이들은 주로 치부책에 쓰여진 원점수를 교묘하게 고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일자를 십자로, 십자를 이십자로 바꿔놓는 것이었다.
# 목민심서자료 16 원점제도에도 예외가 있었다.
부모상을 당하거나 , 70세 이상의 병든 노모가 있을 경우에는 원점수가 모자라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원점이 낮은 유생들이 이를 악용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 정낙찬 INT 부모가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돌아가신 것 처럼 70이상된 노모가 병들지 않았는데 병들었다하는
가짜 진성을 만드는 것.
두 번째는 대리서 명이 많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대리서명이 많은 성종 18년에 오면 기존에 유생들이 자율적
으로 하는 것을 성균관관헌과 양현고 직원이 유생들을 점검하는 타율적으로 변해버리는 면이 있고.
# 실록 25 원점을 속이고 과거에 응시한 유생들에 대한 처벌법도 강화됐다.
영조때 두 유생이 원점이 300점이 이르지 못했는데 이를 속이고 과거에 응시했다.
얼마후 이들이 진사 김윤구와 생원 김익하임이 드러났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 식당 16 과거합격이 지상과제였던 유생들에게 출석점수는 부정을 해서라도 따내야 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결국 성균관의 원점제도는 출석과 과거를 연계시켜 유생들의 면학분위기를 높히려는
국가의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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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
# 식당앞에서 학령
당시 대학생들은 지금의 교칙에 해당되는 학령에 따라 엄격하게 생활 했습니다.
학령의 일부를 잠깐보면 우선 , 장노불경. 유학의 기본서인 사서오경외에 장자, 노자, 불경은 읽지 못하게 했고
또 제자잡기라 하여 수학이나 역학 지리 등의 잡서와 장기` 바둑 등의 잡기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선시대 대학생들은 지금과는 달리 전원이 의무적으로 기숙사생활을 해야했습니다.
# 기숙사배경으로
이곳이 바로 성균관에 있는 기숙삽니다.
당시 학령에 따르면 매월8일과 23일. 즉 한달에 두번은 빨래와 집안일을 보기위해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전국에서 뽑힌 200명의 수재들이 합숙생활을 하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던 셈입니다.
# 약방
그런데 이쪽을 한번 보시죠. 당시 기숙사에는 특별한 목적을 지닌 방이 하나 딸려 있었습니다.
바로 이방인데요, 다른방보다 두배 정도 큰 방, 이 방이 바로 약방입니다.
자 그렇다면 당시 기숙사에 약방을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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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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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방록 16 당시 성균관 유생들의 기숙사생활을 보여주는 책이 최근 발견됐다.
성종때 만들어진 동방록은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사용하던 유생들이 만든 일종의 학생문집이다.
# 이름 설명하는 것 조금 듣고
# 다음장 넘기면 12 글을 쓴 학생들은 각자의 시옆에 이름과 호, 그리고 출신지까지 기록해 두었다.
# 기숙사 부감 6 그러면 당시 유생들은 기숙사에서 어떻게 생활을 하였을까.
# 기숙사 7 기숙사는 동재와 서재 둘로 나눠져 있는데 생원은 동재에, 진사는 서재에 묵었다.
# 공부하는 모습 fs 11 이곳은 지금도 성균관 대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붓과 벼루, 고서가 놓였던 곳에 컴퓨터가 들어왔을뿐 방안 구조는 옛날 그대로다.
# 학생INT1,2 감개무량하다. 퇴계도 이황도 여기서 공부했으니까 공부하는 것도 비슷하고.
/ 저희가 과가고니만큼 옛날 선인들이 공부하던 곳에서 같이 공부하니 동질감도 느끼고
# 존경각 14 성균관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존경각.
당시 이곳엔 수만권의 책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6.25때 대부분 유실됐고, 최근 성균관대학에서 발행한 책과 논문들이 보관돼 있다.
# 듣고
# 책가리키는,타이트 7 아버지때부터 성균관에서 일해 온 이한우씨는 6.25전만해도 옛날 책들이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한다.
# 아저씨 INT 책을 내다가 햇빛도 쐬고 저녁이면 들여놓고.
직접그랬나? 같이 했다. 그때는 아버지 계시고 어렸을때니까 와서 거들고.
# 책꽂이가리키고 듣다가 그러나 이제 남아있는 것은 당시에 사용했던 책꽂이들 뿐이다.
# 교과서 6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논어,맹자,중용등 사서오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 목민심서 17 수업방법은 지금의 교수에 해당하는 교관들이 유교경전의 한 부분을 읽고 해석하면 학생들이
이를 따라하고 암송하는 것이었다.
# 이기동 INT 교수 한사람이 5명씩 앉혀놓고 공부를 열심히 가르키고 또 외우게 만들고 문제를 두문제씩
던져준다. 그 문제 중심으로 토론을 하고. 국가의 현실을 걱정하면서 구체적인 대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
# 교과서 그런데 최근에 성균관에서 출판해 당시 유생이 쓰던 교과서가 발견됐다.
사서오경중에 하나인 대학이라는 책이다.
# 책보고 있는 2S 이 책에는 당시 성균관 유생들의 학습에 대한 열정을 짐작케하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 메모타이트 13 놀라운 사실이 또하나 있었다.
바로 한글로 쓰여진 메모였다.
당시 유생들이 한글을 사용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 권호기 INT 당시에는 언해본이 많이 있기 때문에 언해본이 선조때 많이 나왔어 스승들이 문장을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스승이 해석하는 것을 받아쓰는 것이다. 난의 밖에 메모를 하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서 선생이 설명한 것을 잊지않고 연속하도록 메모하는 것이다.
# 선비공부하는 모습 6 유생들의 일과는 명륜당에서 강의를 듣거나 기숙사에서 혼자 자습을 하는 것이었다.
# 실록 15 그래서 심지어 과로로 쓰러져 죽는 이가 생길정도로 공부에 열중했다.
세종실록은 당시 유생들이 한자리에 오래 앉아서 독서를 하다가 자신이 병든 것조차 모른채 죽어간다고
쓰고 있다.
# 성균관-> 기숙사 이때 생긴 것이 기숙사 맨윗칸에 자리잡은 약방이다.
# 듣고
# 문여는모습 약방은 지금의 양호실과 같은 곳이다.
# 정경윤 INT 공부를 하고 잠을 자고 어디가 아프면 간단하게 약을 제조해주는 약방으로 사용했던 방이다.
그래서 다른방보다 크다?네 그렇죠.
# 약방내부 20 약방은 현재 기숙사 학생들의 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유생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혜민서에서 성균관 전담의사를 파견해 유생들을 돌볼 정도였다.
이들이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재들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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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3.
#기숙사 배경
조선이 이처럼 학생들을 합숙시키고 철저하게 공부를 시켰던 것은 단기간에 국가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해
유교이념을 정착시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대학생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 대성전
성균관은 과거시험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요.
그런데 이쪽을 한번 보시죠.
# 나무로 걸어오고
대성전 앞마당에는 재미있는 사연을 지닌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이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던 학생이 며칠 후 열린 알성시에서 장원급제를 했는데요,
그 뒤부터 과거때마다 학생들이 이 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자리 쟁탈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후 이 나무는 장원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 과거 합격이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나무보고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컨닝페이퍼를 만드는 등 각종 부정행위가 이뤄지기도 했는데요.
조선시대 학생들은 어떤 부정행위를 했는지 과거장으로 가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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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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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보는 모습 20 성균관 유생들은 일일시험과 월말시험등을 통해 학습평가를 받았다.
특히 지금의 기말시험에 해당하는 연고는 과거성적에 반영됐기 때문에 다양한 부정행위들이 행해졌다.
이것은 과거시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주변살피는 보고
# 붓뚜껍여는 붓뚜껍에 컨닝페이퍼를 숨겼다가 몰래 꺼내보기도 했고.
# 방에서 시험보는 심지어 콧구멍에 컨닝페이퍼를 넣어두는 유생도 있었다.
# 폐단 CG 또한 합격자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바꿔붙이는 절과라는 행위도 있었고.
남의 답안을 베끼거나 대리시험을 봐주는 차술도 행해졌다.
그리고 일부 유생들은 시험장을 습격하거나 시험관을 구타하는 난동까지 부리기도 했다.
# 이성무 INT 최고지배층이 되려면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시험에 합격을 하면 인생이 바뀐다. 팔자가 핀다. 누구나 거기에 목숨을 걸고 달려
드는 것이다.
# 규장각외경 학생들의 부정행위를 엿볼 수 있는 도구가 이곳에 보관돼 있다.
# 수진본 타이트 이 작은 책자는 조선시대 유생들이 손에 들거나, 옷 소매에 넣어다니면서 보던 휴대용 학습서
였다. 일반상식과 유교경전등이 기록된 책들이다.
# 신병주 INT 이런 책에서 재미있는 것은 휴대가 간편하고 쉽게 몸에 숨기기 좋아 과거시험장에 컨닝페이퍼로
활용. 이것을 옷소매에 넣고 있다가 필요할 때 살짝 꺼내보면서 답안을 썼던 것이다.
# 보고있는 2S 또하나 재미있는 학습도구가 발견됐다. 유생들이 경서를 암기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다.
# 죽첩경서보는 모습 죽첩경서.
손가락 길이만한 천여개의 가는 대나무 살에 경서의 첫구절을 적어놓은 휴대용 학습도구다.
# 이일용 INT 유학자들이 공부하던 경서의 첫구절과 어느 부분에 있는 것인지를 적어놓는다.
학습방법이 주로 경서를 외우는 암기위주. 자기가 암기한 것을 어느정도 인지 확인하는 학습도구로 추정.
조선시대에 사용됐던.
# 확인하는 2S 성균관대 이민홍교수와 함께 죽첩에 쓰인 것과 경서의 내용이 같은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 죽첩타이트 조금듣다 그런데, 죽첩중에는 성균관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 시경꺼내는 죽첩에 기록된 것은 시경에 있는 문구였다.
그러면 실제로 시경의 내용과 죽첩이 일치할까. 우선 시경에서 죽첩에 있는 글귀를 찾아 보았다.
# 2S->시경+죽첩 사락반수 박채기조.
반수 , 즉 성균관 주변에 흐르는 개울에서 즐겁게 마름풀을 뜯는다는 시경의 문구와 죽첩의 내용이 정확히
일치했다.
# 이민홍 INT 옛날 성균관에서 과거를 봤을 때 부정행위가 곳곳에 있었고 왕조실록에도 부정행위가 나와
있다. 죽통을 땅에 묻어 과거장으로 이어지게 하는것도 있고 , 죽첩도 시험관이 모르는사이 잠깐 빼봤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 자료보는 2S 부정행위가 성행하자 이를 막기위한 조치들도 만들어졌다.
우선, 과거응시자격증을 만들어 응시자격을 제한했고.
관아에서 발급받은 신분증에 4대조의 이름과 관직을 쓰게해 본인확인을 철저히 하는 것이다.
# 답안지보는 채점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정을 없애는 방법도 나왔다.
# 분리된 답안지 채점자가 수험생을 알지 못하도록 답안지의 이름부분을 잘라낸후
채점을 하는 것이다.
# 2S 공정한 채점은 학벌이나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유능한 관리를 뽑는 첫걸음이었다.
답안지에서 응시자의 이름부분을 말아 올린 뒤, 뜯지 못하게 도장을 찍어놓기도 했다.
# 삼일유가도 과거합격은 곧 출세를 의미했다.
당시 과거 합격자는 삼일동안 고향과 이웃을 돌면서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벌였고,
왕으로부터 합격증서와 술을 하사 받았다.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부와 권력과 명예를 한번에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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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4.
# 대성전앞
성균관에는 졸업이 따로 없었습니다.
과거합격이 곧 졸업이었죠.
당시 과거합격은 요즘의 고시합격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었긴 했지만 그나마 성균관 학생들에겐 과거에 합격해
관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 알성시그림 나오고
이 그림을 한번 보시죠.
왕이 3년에 한번씩 성균관을 방문해 성현들을 위한 제사를 지낸후 이를 기념해 치뤄지는 알성시를 그린 것인데요.
이것이 대성전이고, 가운데가 왕이 앉았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시험을 보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알성시외에도 성균관 학생들만 볼 수 있는 특별과거가 많이 있었습니다.
성균관 학생들만 볼 수 있는 관시,
왕이 학생들을 직접 궁으로 불러 시험을 보게하는 정시등이 있었고, 또 공천이라는 특별채용제도도 있었습니다.
# 공천글자발생
공천은 성균관에 머물면서 공부를 했지만 나이가 50이 넘도록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중에서 학문과 품행이
뛰어난 학생을 뽑아 특별채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성균관에서 길러진 유능한 인재들이 과거를 통해 관리로 임용되고
또 국가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만큼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은 대단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지 성균관으로 가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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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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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감 성균관은 조선개국직후인 1397년,
궁궐 바로 옆에 지어졌다. 한양천도를 준비할 당시에 세워진 것이다.
# 자막나오면 성균관의 가장 앞쪽에 위치한 대성전.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 묘정비각 2S 대성전 앞마당에 있는 묘정비.
정종때 학자 변계량이 쓴 이 비문에는 성균관의 설립목적과 규모등이 기록돼 있다.
# 비문 1 성리학을 부흥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나라를 경영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 비문 2 당시 성균관의 규모는 96칸. 한양에서 궁궐다음으로 규모가 큰 대규모 공사였다.
# 이민홍 INT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서울인구가 15만내외였다.
당시 전국인구는 확인할 수 없지만 7,800만 내외 그때 그당시 인구규모로 오늘날 성균관 교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문헌을 보면 국가예산의 절반이 성균관이 투입됐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
# 대성전 2S 그러면 이처럼 성균관을 크게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의 지배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뀌었기 때문에 유교이념을 하루 빨리 보급시키기 위해서다.
# 하련대 임금이 직접 성균관을 찾아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하련대는 그때 임금이 타고 온 가마를 내려놓는 곳이다.
# 어도설명 조금듣다 임금은 이 길을 통해 공자와 성현들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으로 올라간다.
# 대성전내부 설명듣고
# 위패들 3년에 한번씩 공자와 성현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는데 성현을 알현한다고해 알성이라고 한다.
# 제기고 당시 사용하던 제기들을 보관하던 곳.
# 아줌마 INT 여기다 정리를 해놨다가 제사때 꺼내 닦아서 올리고 끝나면 여기 도로 갖다 모시는 것이다.
그릇을. 이안에 조금있다. 저런 그릇이다.
# 그릇들 제기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얼마남지 않은 녹쓴 그릇들만이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
# 그릇보여주는 듣고
# 석전제자료 그러나 매년 봄,가을에 열렸던 석전대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기리는 행사인 석전은 온 국민이 유교의 기본정신인 충효와 인의예지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 관장 INT
삶을 살아가는 주체인 인간이 바르게 돼야하고 도덕적으로 향상될 때 모든 삶의 현장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인간의 바람직하고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이룩되기 때문에 이를 성취하기 위한 기능과 목표를 이상으로 출발
했다.
# 명륜당 FS 성균관은 이러한 유교이념을 가르치는 교육의 산실이었다.
# 명륜당내부 당시 유생들의 강의실인 명륜당.
역대 임금들이 내린 친필휘호와 학문을 권장하는 교시문들이 가득하다.
이곳을 찾은 임금은 여름에는 어름을 하사했고 겨울에는 밀감을 내려줬다.
또 유생들과 경서문답을 하면서 이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도 했다.
# 정낙찬 INT
조선은 주자학을 통치로 전환을 가져오는데 그러면 가장 급한 것은 빨리 백성들에게 주자학적인 통치이념을
길들이는 것이다. 그 선두주자가 성균관 유생들이다. 그러면 성균관유생들에게 뭔가 의무도 주지만 권리도
줘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혜택이 많았다.첫째 하나로 모든 것이 무상으로 교육을 받은 것.
# 정록청 pan 당시 성균관의 재정은 약 600만평에 달하는 토지, 즉 학전과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이 바치는
몸값인 신공으로 충당됐다.
# 문여는 모습
성규관의 재정은 양현고라는 기구에서 담당했다. 당시 양현고에 들어오는 물품을 보관하던 이곳은 지금도
창고로 사용되고 있다.
# 윤부장 INT
이 창고는 진사식당옆에 있는 창고다. 옛날 쌀등을 보관하던 곳. 저쪽의 진사식당 옆에있는 저 문을 통해서
이창고로 왔고. 진사식당에서 그 물품을 사용한 것으로 추즉된다.
# 반중잡영 윤기가 쓴 반중잡영은 당시 성균관의 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현고에는 어진이 기르는
물품이 쌓였으니 조선팔도에서 바치는 공물의 절반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 이성무 INT
불교의 재원을 전부 국고화해서 그걸로 성균관 내지 유학교육기관을 장려했는데 불교는 탄압하고 유교는 올라
가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 단순히 돈을 대줬다가 아니고 불교의 돈을 국고로 환수해 그 돈을
유교 일으키는데 썼다.
# 태학지 1758년에 만들어진 태학지.
당시 성균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균관을 둘러싸고 흐르던 개울은 물론 후대로 갈수록 하나 하나 늘기시작한 부속건물들이 모두 그려져 있다.
# 그래픽 태학지를 바탕으로 당시 성균관을 복원해 봤다.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대성전과 112명에 달하는 중국과 한국의 성현들을 모신 동무, 서무.
# 기숙사 20여개의 방으로 이뤄진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유생들의 강의와 학습의 공간인 명륜당.
# 반수 성종때 만들어진 개울로
반궁이라는 성균관의 별칭을 따서 만든 반수. 그리고 주변에 들어선 각종 부속건물들.
# 비천당 현종때 지어진 제2 강의실인 비천당과 비천당앞에 일렬로 세워져 기숙사로 사용된 일양재와 권립재.
그러나 지금은 반수와 계성사, 일양재, 권립재등 후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많이 사라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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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5.
# 기본세트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관심과 지원은 이뿐이 아니었습니다.
역대임금들은 왕세자들도 성균관에 입학을 시켜 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 왕세자입학도 나오고
이 그림을 한번 보시죠. 왕세자입학도입니다.
왕세자가 8살이되면 성균관에 입학을 하는데요.
이 그림은 왕세자가 궁을 나오는 모습입니다.
왕과 관리들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왕세자가 성균관에 들어가 대성전에서 성현들에게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것을 다짐하는 작헌례의
모습이고 이것이 입학례를 치르는 장면입니다.
모두가 성균관의 위상을 높이고 학생들의 기를 살려주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 였습니다.
# 신삼문열고 나오고
성균관이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인재를 양성하고 유교 성현들을 위한 제사나, 왕세자입학식같은 중요한 행사가
치러지는 곳인 만큼 당시 성균관은 성지로 인식됐습니다.
죄인이 성균관내에 들어와도 함부로 잡을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기도 했는데요.
그래서 성균관은 일명 반궁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궁이라는 이름이 붙을만큼 중요했단 얘깁니다.
# 다리위로 올라가고
그런데 성균관 주변에는 성균관을 둘러싸고 흐르는 개울이 있었는데요, 반궁의 반자를 따서 반수라고 불렀습니다.
이 반수는 성균관과 성균관의 앞마을인 반촌을 구분짓는 경계 역할을 했습니다.
반촌은 주막과 하숙집등이 밀집해 있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가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성균관 학생들이 공부에 지친 스트레스를 풀수 있는 해방구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을 노래한 반중잡영에 보면 이런 글자가 나옵니다.
# 글자발생
청재불허혁기유 - 청재, 즉 성균관내에서는 바둑이나 장기등의 놀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향관청혹반촌유
학생들이 반촌에 나와 향수를 달래고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400년전 조선시대 대학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반촌으로 가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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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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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문나가는 우선 성균관을 둘러싸고 있던 반수의 위치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당시 반수는 현재 성균관대학교 정문앞으로 흘렀는데 지금은 복개돼 도로로 변했다.
# 보다가'물은 이리로 흐르고 있었죠' 다음
성균관에 오래동안 근무한 직원들은 아직도 반수와 여기에 있던 다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 정경윤 INT 돌이 이렇게 넓고 길다. 두껍고. 돌기둥을 세워돌을 이렇게 차곡차곡 놓은 것이다.
# 걸어가는 모습 또다른 다리가 있었다는 곳으로 따라 가 보았다.
# 설명듣다가 정경윤 임금가는 손짓 다음 바로 이 골목에도 창경궁과 성균관을 잇는 다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 알성과거도 실제로 성균관에서 치뤄지는 알성과거나 석전대제등의 제사때마다 임금은 반수의 다리를 건너
성균관으로 들어왔다.
알성과거를 그린 이 그림에는 당시 반수와 반수에 놓여 있던 다리인 반수교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 성균관 부감 PAN 성균관을 둘러싼 반수의 건너편에는 반촌이라는 마을이 형성돼 있었다.
지금의 대학가와 같은 곳이다.
# 반촌 반촌은 현재 명륜동과 혜화동 일대로 반인이라 불리는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들이 주로 살았다.
# 장재천 INT
반인들은 동반촌 서반촌이라고 해서 성균관의 동,서에 모여살았다. 일부는 문묘청소나 유생 뒷바라지를 위해서
안에서 비복청이나 수복청에 근무. 수복은 남자 하인들. 비복은 음식을 장만하는 여종들이다.
# 안향영정 반인은 고려때 유학자인 안향이 기증한 노비의 후손들이다.
# 반중잡영 이들의 고향은 송도, 즉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었고 말씨나 풍습도 많이 달랐다.
윤기는 반중잡영에서 반인들은 송도에서 왔는데 여자의 곡은 노래같고 남자는 사치하다.
호쾌한 의협심은 연나라 ,조나라의 기상을 지녔고 노래도 괴상해 서울과 다르다고 쓰고 있다.
# 숭보사 성균관 근처에 있는 숭보사.
안향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 절하는 모습 반인의 후손들은 지금도 해마다 이곳에서 성균관에 재물과 노비를 기증했던 관리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정경윤 INT 숭보사가 성균관을 설립할 당시에 공이 큰 사람들이 여기다 모신것이다.
그래서 성균관 직원들이 해마다 이렇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정경윤일하는 모습 반인의 14대 후손인 정경윤씨.
성균관에서 태어난 정씨는 30년째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 북치는 모습 정씨는 성균관에서 치뤄지는 각종 의식과 석전제등의 행사를 준비하고 돕는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성균관의 관리일을 하는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 정경윤 INT
임진왜란이 나서 오랑캐들이 서울에 들어와 난리가 났는데 성균관의 진사나 이런 사람들이 피난만 가기 바빳지
위패를 모시지 못하니까 당시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 근무를 했기 때문에 수복으로 있었기 때문에 위패를 짊어
지고 남한산성으로 갔다. 갔다와서 또다시 위패를 모셔 그때부터 대대로 내려온 것이다.
# 거리 SK 반인들이 살았던 반촌의 풍경은 지금의 대학가와 다를바 없었다.
당시 이곳은 고기와 야채등 성균관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이 거래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장과 주막, 음식점들이 즐비했다. 엄격한 생활과 공부에 지친 유생들이 스트레스를 푸는 곳이기도 했다.
# 이민홍 INT
원래 반촌은 서울과 전혀 다른 별천지였고 당시 여기 와서 공부하는 학생이 단신으로 홀로 와서 빨래나 모든
문제에 상당히 도움을 줬고 수업이 끝나면 노닐기도 하고. 다만 못해도 음료수를 파는 집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번화했고.
# 하숙 SK 반촌에는 하숙집도 번성했다.
과거때마다 전국의 유생들이 몰려 들었고. 입학정원이 넘쳐 성균관 기숙사에 머무를 수 없는 유생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 부감 400년전 대학가, 반촌.
반촌은 반인들의 삶의 터전이자 유생들의 해방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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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6
# 반수다리위에서
반촌에서의 휴식도 잠시, 학생들은 성균관에 돌아오면 또다시 방대한 학습량과 엄격한 규칙을 감수해야 했습
니다.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이 공부에 얽매여 타율적인 생활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 재회글자발생
여기를 한번 보시죠.
재회- 재회는 당시 대학생들의 자치활동기구 이름입니다.
요즘 대학교에도 있는 학생자치기구인 총학생회와 같은 것이죠.
# 장의 글자
재회의 우두머리는 장의라고 불렀습니다.
장의는 지금의 총학생회장으로 동재와 서재에 각각 1인씩 2명이 있었습니다.
총학생회장에 대한 학생들의 예우는 대단했는데요. 기숙사에 총학생회장 방이 따로 있을 정도였습니다.
# 색장 글자
장의 아래에는 4명의 색장이 있었습니다. 색장은 요즘 학생회의 총무부장, 문화부장 등에 해당되는 임원들입
니다.
# 벽에 벽서붙어있고
조선시대 총학생회인 재회는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이렇게 지금의 대자보와 같은 벽서를
성균관 곳곳에 붙여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기도 했고 국가나 사회에 부당한 일이 있을 때는 수업거부나 동맹
휴학을 통해 젊은학생의 기개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자 조선시대 학생회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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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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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인 성균관에 신입생들이 들어오면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는 지금의 신입생환영회에 해당하는 특별한
행사를 벌인다.
# 듣고 우선 선배 유생이 신입생 한명을 데리고 올 것을 명한다.
# 신입생나오는 이때부터 면책이라는 신입생군기잡기 행사가 시작된다.
성균관 서리들은 신입생이 선배의 방에 도착할때까지 이름을 부르고 밀치며 넘어뜨리기를 계속해 곤욕을 준다.
# 선배얼굴 고려때부터 이어진 이 행사는 선,후배간에 기강과 법도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 명륜당 재회는 자체적인 징계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를 유벌이라고 하는데 학령을 어기거나, 단체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실시됐다.
유벌의 종류에는 식당출입을 금하는 식손. 과거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정거. 성균관에서 쫒아내는 출재까지
있었다.
# 정만조 INT
이들은 소과를 거친 생원진사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단순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니고 인격을 완성해놓은
한사람의 군자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봐서.
자기 스스로의 자치조직이 허용될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때는 유생들도 관료
와 마찬가지로 참여하고 그들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부여되고 그것이 허용됐던 것이다.
# 청금록 유벌은 외부인사에게도 적용됐다.
성균관 유생들은 광해군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홍을 유적에서 삭제했다.
# 위패들 북인정권의 우두머리였던 정인홍이 이황과 이언적을 문묘에서 제외하고 자신의 스승인 조식을 성현
으로 추대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청금록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명부인 청금록.
여기서 이름이 삭제되면 유교를 국시로 삼고있는 조선사회에서 정치 사회적으로 매장이 된다.
# 넘기는 기독교의 파문에 해당되는 엄청난 사건을 성균관 유생들이 주도한 것이다.
# 신병주 INT 정인홍은 광해군때 북인정권의 최고 실력자였다.
그런데 이런 실력자의 정치적인 독주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제동을 걸고 나온 것이 성균관 유생들이다.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생명부인 청금록에서 삭제할 정도로 강경하게 정인홍의 정치노선에 제동을 걸었다
이것은 그만큼 성균관 유생들이 정신적인 기개가 있다는 것과 이들의 공론정치가 역사적으로 상당한 힘을 발휘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사진 유생들은 유희라는 모의조정 행사도 벌였다.
모의과거를 통해 관리를 선발하고 임용까지 하는 이 행사는 훗날 정치무대에 설때를 대비하는 일종의 관리
예행연습으로 실제처럼 치뤄졌다.
# 장재천 INT 관직에 있는것처럼 복장을 하고 흉내를 내니 내시가 그것을 보고 모반을 꾀한다고 아뤄니까
태종은 성균관 출신이니까 그런 궐희에 대한 경험이 있어서 웃으면서 그것은 모반이 아니고 유생들의 문화. 풍속.
놀이라고 웃어넘긴일이 있다.
# 내불당논의 유생들은 현실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448년, 성균관에서는 유생들의 긴급재회가 열렸다. 세종이 말년에 호불로 기울어져 궁내에 내불당을 짓고자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 유소쓰는 유생들은 대표자를 뽑아 내불당 건립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썼다.
불교가 성하면 유교의 도덕이 쇠약해 진다는 내용이었다.
# 걸어가는 모습 곧이어 유생들은 성균관을 나가 궁으로 향하는데 대표자가 상소문과 청금록을 들고 가운데에
가고 그 뒤를 유생들이 뒤따른다.
# 궁앞에 앉아있는 상소를 올린 유생들은 궁앞에서 연좌농성을 하며 임금의 대답을 기다린다.
# 식당 FS 이때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유생들은 식당에 들어가지 않고 단식투쟁을 한다.
# 내부 이를 권당이라고 하는데 식당에서 출석점검도 하지 않고 수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식고가 아무리 울려도 소용이 없었다.
# 청맹권당자료 권당의 방법은 다양했다.
청맹권당은 유생들이 시각·청각장애처럼 행동하며 수업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 벽서붙이는 그래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으면 유생들은 이단이 창궐하고 도덕이 흐려지니 헛되이 성인께 예를
드릴 수 없다는 벽서를 붙이고 성균관을 나가버린다.
# 나오는 모습 이를 공관이라 하는데 문묘수호와 학업을 중단하는 지금의 동맹휴학과 같은 것이다.
# 정재천 INT
공관은 성균관 자체를 떠나는 것으로 일종의 집단 자체 동맹휴학이다.그래서 성균관을 다떠나 반촌에 있거나
집으로 가거나 그래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유생들의 가장 강력한 수단
# 빈 성균관 유생들의 이같은 행동에 대해 임금은 끝까지 관용과 설득으로 대했다.
심지어 정승판서를 유생들의 집에 보내 학교로 돌아오기를 간청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이 뚜렷한 명분과 신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 실록 성균관은 수선의 터로 공론이 있는 곳이다.
이들의 시비가 한때 나라를 어지럽힐 지언정 성균관의 공론을 폐할 수는 없다.
유생들의 기를 꺾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 정만조 INT 관직에 나온 사람들은 현실적인 이해에 걸린다.
유생들은 그렇지 않아 유생들의 의견을 맑을 청자를 써 청론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현실적인 이해도 없고 눈치도
보지않고 자신의 신념때로 투쟁을 하기 때문에 국가의 원기라고 해.
일반관료들을 달라. 반대여론도 있을 수 있고. 그러니 유생들의 의견은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청론이라고
해서 임금이 대부분 받아들여.
# 성균관 Sk 성균관 유생들은 지금의 학생회에 해당하는 재회라는 자치기구를 통해 교내활동은 물론 정치활동
까지 벌였다.
그리고 국가는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음으로 지원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성균관 유생들이 바로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국가의 원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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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7.
# 성균관 실사
성균관 학생들의 상소는
세종에서 고종까지 무려 80여 회에 달했습니다.
학생들의 공관으로 국가 최대행사인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못한 적도 있었고,
대학총장인 대사성이 파면되거나 교체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이들의 정치참여를 인정한 것은 이들에게 국가의 원기가 있다고 보고 언로를 열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 영정나오고
실제로 조선을 이끌어간 대부분의 학자와 정치인들이 모두 성균관 출신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이황, 이이, 조광조, 정약용등 수많은 인물들이 성균관을 통해 배출됐고 ,
이들이 조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성균관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노론, 소론으로 나뉘고, 붕당정치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또 사학이 부흥하면서 쇠락의 길을 걸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개국과 동시에 설립된 성균관이 국가의 관심과 대대적인 지원 속에서 유교정신에
충실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이들이 조선의 사상과 정신을 이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조선최고의 국립대학 성균관.
성균관은 바로 조선왕조 500년을 이끄는 견인차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