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삼상 4:1-21)
1.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하야, 야짜)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하야는 존재하다라는 말이고, 야짜는 나아갔다 라는 말이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충만하다라는 의미이다. 말씀이 충만하게 되면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엘리 가문을 심판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쳤는데, 사울(삼상29장)이나, 엘리나 아벡 전투에서 모두 죽게된다. 하나님의 뜻은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도록 하셨는데,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신도에게 있어서 옛사람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데, 신도들은 자가라는 옛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과 유사한 것이다. 전쟁에서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백성들은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신을 도구화 하는 것이다. 교회 신도들이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많은 헌금으로 보답한다.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기복신앙으로 뭉쳐져 있으면 교회가 아니라 점을 보며 복을 비는 무당과 같은 곳이 되는 것이다.
2-3.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한 원인을 여호와께로 돌린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져가도록 결정한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으면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호와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만군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가져온다는 것이다. 번역상으로는 우리에게(to us) 라고 되어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라는 것이다. 장로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4.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벨리알의 아들들이라고 한 홈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여호와가 아니라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기복주의적인 교회에서 자기를 위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많이 있을 것이다.
5.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으로 환호성을 치게된 것이다. 장로들의 결정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결정이었다고 말을 할 수 있다. 전쟁에서 패한 후에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가지 않고 이런 언약궤를 움직이는 결정을 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을 하자면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신도들과 세속적인 생각을 가진 목사의 연합이 이루어 이상한 종교 집단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6-8.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여러 신들 중에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전에는 신상들이 있는데, 그 신상 중에 하나가 능력이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법궤를 신전에 있는 하나의 신상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9-11.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스라엘이 패하여 장막으로 도망쳤다는 것이다. 전쟁의 완전한 패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주력군인 보병이 삼만명이 죽었다는 것은 그의 궤멸수준이 된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한 것이다. 당시에 전쟁은 승리하면 신상을 가져가는데, 자기들의 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언약궤는 하나님을 상징하는데, 그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과 맛나와 싹이 난 아론의 지팡이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세가지의 모양은 삼위일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완전한 모양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다. 오늘날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지만, 성도가 삼위일체 속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이 된다. 즉 언약궤 속에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므로 은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신도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믿지 못하므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것을 믿는 자가 되는 것이다. 언약궤의 본질도 이와 같은 것이다. 언약궤를 통해서 인간이 죄를 벗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하는데, 세상의 전쟁에서 힘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언약궤는 언약을 의미하는바, 그 언약은 메시야를 의미한다. 언약궤를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하실 메시야를 바라보라는 말이다. 그 본질을 잃어버리면 언약궤는 기복신앙의 우상처럼 단순한 나무 궤짝에 불과한 것이 된다.
12-15.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옆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온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이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그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그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엘리는 대제사장이면서 사사로서 의지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진 것도 문제이지만, 언약궤를 적에게 빼앗겼으므로 이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었다는 것이다.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세로 눈이 어두워졌다는 말은 온 이스라엘의 영작인 상태를 보여준다. 그들은 언약궤가 빼앗겼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언약궤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16-17.그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내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소식을 전하는(바사르)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바사르는 소식을 전하는 자인 메신저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복음을 전하는 자이다. 메신저가 전하는 서식은 이스라엘의 패배, 엘리의 두 아들의 죽음, 언약궤를 빼앗기는 그런 소식이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오늘날 십자가의 죽음은 곧 하나님의 심판이다. 심판 속에는 구원의 소식도 있다. 심판 속에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엘리에게는 심판이지만,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소식도 되는 것이다. 엘리의 죽음은 옛 대제사장의 죽음이고, 새로운 대제사장인 사무엘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오늘날 신도에게서 옛사람의 죽음과 그리스도이신 새사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새사람이 되지 못하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사람은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첫사람 아담은 죽고 부활하신 마지막 아담은 새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신다. 교회 사람들은 마지막 아담을 예수 그리스도로 생각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는 첫사람 아담의 역할을 마지막으로 이룬 분이다. 그리고 마지막 아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인 것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카베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의자는 통치권의 상징인데, 그의 죽음으로 통치권이 막을 내리게 된다. 사십년은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사십년을 생각하게 한다. 케베드는 비대한으로 번역하므로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것 처럼 오해할 수 있으나, 엘리가 다스린 권력이 너무 비대하게 이스라엘을 덮고 있었던 모습이다.
19-22.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죽어갈 때에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 카보드)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갈라) 하였더라.
이 카보드는 영광이 없다는 의미다. 번역상 이가봇이라고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사무엘의 태어남은 새시대를 상징하지만, 이가봇의 태어남은 구시대가 막을 내라는 장면이 되는 것이다. 한나는 기쁨으로 아기의 이름을 사무엘로 지었지만, 비느하스의 아내는 영광이 없는 절망으로 이름을 이가봇으로 이름을 지었다.
빼앗긴 언약궤가 실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기앗여아림으로 돌아오게 된다. 20년간 넘게 머물게 되었는데, 실로는 다 파괴된 것이다. 옛성전은 타 불타버리고 새성전이 구축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32장 26-3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마치 기복신앙의 우상 신전과 같이 취급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실로의 교훈을 배우도록 했다. 이것은 곧 심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말을 하지만, 세상에 세워진 성전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보고 도둑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도둑의 소굴인 옛성전(옛사람)은 파괴되고 새성전이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다.
갈라는 영광이 떠났다고 번역했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포로되어 서로잡혀 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실 때도 갈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덮개를 벗기다, 폭로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면 은혜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옛사람에게는 떠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이고, 하늘의 생명인 부활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 찾아오는 것을 보여준다. 신도들이 현재적 부활생명이 없다면, 그가 다니는 교회는 그저 나무 궤짝과 같은 언약궤를 바라보며 예배하는 자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