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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사산비명에 관한 글
영축산추천 0조회 25422.11.29 19:13댓글 9
최치원의 사산비명에 관한 글
불꽃처럼 살다가 홀연히 사라져 존재를 미궁 속에 가둔 전설적 인물이 있다. 논리와 이성의 세계를 섭렵한 후 초월과 신비의 세계로 넘어간 신라 최고의 지성 최치원이다. 그의 삶과 사상의 단초는 ‘사산비명(四山碑銘)’ 안에 녹아 있는데, 최영성 교수는 그 난해한 문장의 해석에 30년 세월을 바쳤다.
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잉태될 때 꾸는 꿈을 태몽(胎夢)이라고 한다. 태몽은 그 사람이 앞으로 전개될 운명의 핵심 줄거리를 미리 예시해주는 그 어떤 단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태몽을 가끔 물어본다. 나만 물어본 게 아니라 옛날 우리 조상들도 물어보았다.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옛 선인들의 일생을 기록해 놓은 비문(碑文)이나 행장(行狀)을 보면 그 사람의 어머니가 꾸었던 태몽을 기록해 놓은 경우가 많다. 왜 태몽을 기록해 놓았을까? 옛 사람들도 태몽이 지닌 예언적 의미를 간파했기 때문 아닐까.
나의 태몽은 ‘흰 염소’였다. 어머니가 시골 장에서 흰색 염소를 끌고 집으로 오는 꿈이었다. 백양(白羊)은 무엇을 예시할까? 40대까지만 해도 나는 이 백양의 의미를 학교 선생 내지는 학자 직업으로 생각했다. 나는 학교 선생이 천직인가 보구나! 학교 선생이 ‘분필장사’ 하는 직업이니까 그 ‘분필장사의 연장선상에서 글을 쓰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일 주소도 ‘goat(염소)’로 정해서 쓰고 있다.
논어에 보면 ‘학야녹재기중’(學也祿在其中:학문을 하면 녹(밥)은 따라온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학(學)은 곧 필(筆)이다. 학문한 사람치고 글 안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글도 어떤 분야에 대해서 쓰는 글인가는 각기 다르다. 나는 이상하게도 경영·행정·법학 등 실용적 분야보다는, 유·불·선 3교와 옛날 동양의 세계관과 같은 비실용적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이 비실용적 분야에 대한 글을 많이 쓰는 편이다.
왜 이런 분야에 꽂혔을까? 얼마 전에 그리스 신전을 답사하게 되었다. 신전 중에서도 가장 신탁이 잘 맞았던 영험한 신전이 델피(Delphi) 신전인데, 델피에 처음 갔을때 신전 뒤의 엄청나게 가파른 바위 절벽 중간지점에 야생의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순간 “이게 델피가 내게 주는 신탁이구나” 하고 판단했다.
델피의 야생 염소에서 운명을 예감
다른 사람에게는 별 의미 없는 장면이었겠지만, 왜 나에게는 이 장면이 와 닿았는가? 어떤 장면에서 의미를 부여하는가 안 하는가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판단은 주관적인 것이다. 2700년의 역사를 지닌 델피 유적지가 나에게 선물한 신탁은 “너는 원래 신전의 바위절벽 뒤에 사는 염소(山羊)였느니라!”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주된 서식지는 신전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종교적인 신전(사찰·도관·고택) 전문이라는 말이다. 그것도 바위 절벽이 있는 곳을 선호한다. 그동안 내가 왜 바위산을 그렇게 좋아했는가 하는 의문도 델피의 야생 염소를 보면서 납득하게 되었다.
산양은 깎아지른 절벽에서 사는 법이다. 평지의 도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먹는 것도 풀만 먹어야 한다. 고기를 많이 원해서도 안 된다는 메시지 아닌가! 염소가 고기 먹는 거 봤는가. 돈과 권력이 붙지 않아도 자족해야 되는 것이다. 삼시세끼 밥이나 먹는 수준에 족해야 한다.
더군다나 염소는 곰이나 호랑이 또는 용이 아니다. 헤비급이 아니라 밴텀급 정도의 동물이다. 철없이 헤비급을 흉내 내면 안 된다. 밴텀급 수준에 맞는 처신을 해야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염소는 또한 격투기 동물도 아니다. 사냥감을 놓고 서로 물어뜯는 육식이 아니다. 풀이나 뜯어먹는 초식 동물 아닌가! 세상사 풍파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종교, 바위산, 필(筆). 이 세 가지 공통점을 지닌 역사적 인물을 훑어보니까 신라 말기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눈에 들어온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문장가를 꼽는다면 최고운이 들어간다. ‘학야녹재기중’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문장 하나로 1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리고 유불선 3교를 모두 아우른 사상가다. 어느 하나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포함삼교(包含三敎)의 포용력을 보여준 학자다. 우리역사에서 최고운처럼 유불선을 모두 깊이 있는 수준에서 융합해낸 인물도 드물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유교만 장땡이고, 불교와 도(仙)교는 모두 이단으로 배척되다 보니, 조선사상사의 볼륨이 형편없이 쪼그라들어버렸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보면 최고운의 폭넓은 사상적 행보가 돋보일 수밖에 없다. 폭이 넓어야 다양한 상황변화를 소화해낼 수 있다. 운신의 폭이 넓은 게 좋다. 왜 우리는 포용력이 부족하단 말인가? 왜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버릇이 들어버렸단 말인가? 최고운에게 또 하나 눈부신 점은 말년에 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점이다. ‘일입청산경불환’(一入靑山更不還:한 번 청산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안 나온다)이라고 하고서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선가(仙家)에서는 최고운을 신선이 되었다고 여긴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청학집(靑鶴集)> <해동이적(海東異蹟)>과 같은 국내의 도가서에서는 최치원을 해동 선도(仙道)의 중요한 계승자로 기술한다. 실제로 지리산이나 가야산 일대에서는 지금도 최고운이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가 상당수 전해진다.
쌍계사 뒤편의 커다란 바위 언덕은 ‘환학대(喚鶴臺)’라고 불린다. 최치원이 가야산으로 갈 때 타고 다니던 학을 부르던 장소라고 한다. 최치원은 한국 민중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신선으로 여겨졌던 전설적 인물이 된 셈이다. 마지막을 신화적으로 마감했다는 점에서 최고운은 매력적이다. 논리와 이성의 세계를 섭렵하고 나서 초월과 신비의 세계로 넘어가버린 것 아닌가!
한국의 학계에서 최치원 전문가는 부여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 있는 최영성(崔英成) 교수다. 최 교수는 그 어렵다는 최치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을 30년간 붙들고 늘어지면서 그 번역에 집중한 인물인 것이다. 최근에 증보판을 펴낸 <校註 사산비명>(이른아침)이 그 결과물이다. 마치 암호와 기호의 나열로 여겨질 만큼 난해하다고 소문난 <사산비명>을 30년간 씨름한 그를 통해서 한문의 세계와 고운 최치원의 여러 면모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싶었다.
최고 전문가를 만나 직접 물어보는 것이 공부의 지름길 아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남아 있는 전통 비문(碑文) 가운데 가장 어려운 비문이 바로 사산비명인 것이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 있는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 충남 보령의 성주사지(聖住寺趾)에 있는 대낭혜화상비(大朗慧和尙碑), 경주 숭복사비(崇福寺碑), 문경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를 가리켜 사산비명이라고 한다. 4군데 산에 있는 비명인 것이다.
왜 최치원의 ‘사산비명’이 어려운 것인가?
“최치원은 아주 박식했다. 중국의 여러 전거(典據)와 고사(故事)에 박통했기 때문에 모든 문장에 그러한 전거와 고사가 뒷받침되어 있다. 마치 단어 하나하나가 지뢰밭과 같다. 수천 년 전래의 중국 유교·불교·도교 고전들과 각종 역사적 사건과 일화를 알아야만 문장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이렇게 어렵게 쓰는 것이 일급 학자의 문체였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쉽게 해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현대는 컴퓨터 색인이 발달하여 단어를 검색해보면 옛날보다는 찾기가 쉽다. 번역에는 기존 선학들의 축적된 연구도 도움이 되었지만, 컴퓨터 색인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도 30년 세월이 걸렸다. 30년간 고운의 문장을 씹고 씹었다.”
‘사륙변려문’은 고운 문장의 트레이드마크
한문에 능통하려면 어느 정도 세월을 투자해야 하는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30년간 하루 1∼3시간씩 매일 한문공부를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싶다. 한문의 문리를 터득하려면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한문 문장을 지어보아야만 한다. 그래야 는다. 한문 공부에서 어려운 부분은 허사(虛辭)다. 우리가 어조사(語助辭)라고 하는 호(乎), 야(也), 언(焉), 재(哉), 어(於), 의(矣) 등의 구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들은 그 글자에 담긴 고유한 뜻은 없지만 문장 속에 들어가 양념 구실을 한다. 이 부분은 선생에게 배워야 한다.
혼자 터득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면 ‘吾不關焉’이 있다. 흔히 ‘나는 관계하지 않겠다’로 해석한다. 이는 마지막 조사인 언(焉)의 해석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제대로 하면 ‘나는 관계하지 않겠다. 그것에 대해서’가 맞다. ‘그것에 대해서’(焉)가 흔히 생략되어 있지만 문맥에는 깔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최치원의 문체는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알고 있다. 사륙변려문이란 어떤 스타일의 문체인가?
“문장의 글자 수를 4자, 6자의 배합으로 구성하는 문체를 ‘사륙변려문’이라고 한다. 물론 기계적으로 4자 다음에 6자씩 꼭 넣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4자 4자 6자 6자의 배열도 있고, ‘4x6’을 벗어나서 5자도 있고 혼합 배열도 있다. 큰 틀에서 ‘4x6’이라는 것이다. 후대에 남겨진 문장 가운데 최치원의 진짜 문장인지 아닌지는 우선 사육변려문인가 아닌가를 먼저 보면 안다.
이 변려문은 당나라의 과거시험에서 요구하던 문체였다. 당시 당나라 지식층 사이에서의 모든 공식 문서는 이 변려문체로 작성해야 했고, 당대의 주류 지식인 사회에서도 통용되던 문체였던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 주류 지식인 사회에서 인정받은 인물로서 중국인처럼 변려문에 능통했던 것이다.”
그 4·6의 외형적 틀에 맞춰서 문장을 쓴다는 것이 대단히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리듬과 운율에는 맞을 것 같다.
“그렇다. 운율뿐만 아니라 대구(對句)도 맞아야 한다. 제국인 당나라의 고급문장에 자유자재로 익숙했던 인물은 아마도 최고운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진입장벽이 높았던 문체였다. 그래서 최고운의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로도 작용했다. 그가 남긴 사산비명에는 그가 축적한 문장의 고급 기술이 모두 발휘되어 있는 셈이다. 고려나 조선의 후배 문장가들이 볼 때는 고운의 문장이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를 통해 당대 일급 인물들에 대한 거침 없는 인물평을 남겼다. 아래 퇴계 이황은 철학적 주제를 논할 때도 문장의 조탁에 힘을 기울여 문학적 향기가 배어 있는 글을 남겼다.
일례로 서거정(徐居正)은 <동문선>의 ‘비갈류(碑碣類)’ 장에서 최고운의 사산비명을 제외했다. 너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지만 긍정적 평가도 있었다. 조선 정조대에 좌의정을 지냈던 홍석주는 ‘다화이불부’(多華而不浮)라고 좋게 평가했다. ‘화려함이 많지만 들뜨지는 않았다’는 평가다. 화(華)가 문제다. 어떤 사람은 화려한 고급 문장으로 보았지만, 어떤 사람은 화려함 속에 담긴 난해함을 본 것이다.”
<석담일기>에 나타난 율곡의 ‘돌직구’ 문장
그렇다면 고운의 문장과 그 이후의 문장 스타일은 어떻게 다른가? 예를 들어 퇴계, 율곡과는 많이 다른가? 물론 다른 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그 사람의 성격과 학문의 폭과 깊이에 따라 문체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문체를 비교해보면 그 사람의 기질과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감히 내가 그걸 다 평가하기는 역부족이다. 퇴계 저술의 대부분은 철학적인 내용이다. 이(理)와 기(氣)에 대한 담론인 것이다. 하지만 문학적 향기가 퇴계 문장에 배어 있다. 딱딱한 주제들이지만 거기에 문학적인 향기가 배어 있다는 것은 퇴계가 문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에도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단어의 조탁(彫琢)에도 힘을 기울였다.
퇴계는 도산서원에서 말년을 보냈다. 산속이다. 대자연 속에 있으면서 자연히 사색적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생활환경이 문장에도 배어들었다고 본다. 반대로 율곡 문장에는 문학적 향기가 거의 없다. 실용문 성격이 강하다.
율곡은 매일 바쁜 현실정치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다. 매일 정치인들을 만나서 현안을 논의하고, 갈등을 조정하려 했고, 때로는 자기주장을 강하게 해야만 하는 때도 있었다.
즉문즉답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살았다. 그러다 보니 직설적이고 쉬운 어투의 문장을 선호했다. 돌려서 말하지 않는다. 돌려서 말할 여유가 없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문기사 투의 문장이라고나 할까. 주변 상황도 그렇지만 율곡 자신의 기질도 또한 직설적이고 급했던 것 같다. 정암 조광조의 문장도 율곡과 비슷하다. 조정암 역시 현실정치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문학적 향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암은 개혁의 선봉장 아니었던가. 조정암 스타일의 문체를 ‘숙속지문(菽粟之文)’이라고 표현한다. 콩 숙(菽)자에다가 조 속(粟)자다. 사람이 매일 밥을 먹듯이 콩과 조를 먹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자주 섭취해야 하는 식품이 콩과 조다. 맛으로 먹는 것은 아니다. 조선조에서는 율곡류의 이러한 실용문을 ‘숙속지문’이라 불렀다. 일반사람들이 두루 알 수 있는 쉬운 글이란 의미다.”
율곡의 실용문은 직선적이다. 직선적이라는 것은 돌직구를 날리는 문장을 썼다는 말이다. 그러한 실용적 돌직구 문장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율곡이 남긴 <석담일기(石潭日記)>다. 당대의 일급인물에 대한 인물평이 직선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상당히 위험부담이 큰 문체임에도 율곡은 날렸다.
최영성 교수가 이 <석담일기>를 분석한 논문이 있다(‘<석담일기>의 역사의식과 서술방법’). 율곡이 퇴계를 포함한 당대 인물들에 대한 비판적 인물평이 주된 내용이다. ‘석담일기’에 나타난 율곡의 돌직구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허엽(許曄)에 대해서는 ‘여색을 밝혀서 병을 얻었다’고 했고, 퇴계에 대해서는 ‘별무저서(別無著書)’라고 해서 ‘특별한 저술이 없다’고 평가했다.
‘율곡필하 무완인’(栗谷筆下無完人:율곡의 평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정인홍에 대해선 ‘돌격대장’이라고 했다. 기대승에 대해서는 ‘학문이 정밀하지 못하다. 만약 임금의 신뢰를 얻어 권력을 잡으면 나라를 그르치고야 말 것’이라고 비판했다. 회재 이언적의 저술에 대해서는 ‘옛 글을 인용하였으나 경서의 뜻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 없다’고 매정하게 평가하기도 했다.
퇴계에 가까웠던 우암 송시열의 문체
우암 송시열의 문장은 어떤가?
“장강대하가 굽이쳐 흐르는 듯 유장하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법원의 판결문같이 한 문장이 아주 길다. 마침표 찍기가 어려운 문장이다. 우암 당시에는 이렇게 문장을 길게 써야만 좋은 문장이고 기가 세다고 여겼다. 기가 세다는 것은 호흡이 길다는 말과 같다. 호흡이 길다 보면 문장이 길게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호흡이 짧으면 문장도 짧아진다고 여겼던 시대였음을 고려해야 한다.
우암의 문장은 철학이 있으면서도 실용문의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율곡학맥이지만 문장의 스타일을 보면 퇴계에 가까웠다고 나는 본다. 우암의 철학은 ‘직’(直) 한 글자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는 퇴계의 ‘경’(敬) 철학을 계승하여 이를 수양방법으로 삼기도 했다. 율곡은 성(誠) 철학이다. ‘경’을 통해 ‘성’에 도달하기 때문에 큰 틀에서는 서로 접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여 정신을 다른 곳에 분산시키지 않는 ‘경’ 철학과 우회하지 않고 직진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풍기는 ‘직’ 철학에서는 뭔가 공통분모가 느껴진다. 조선 후기의 학풍이 주자학 일색으로 고착화된 데에는 이 ‘경’ 철학과 ‘직’ 철학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암도 현실정치의 한가운데에 몸담았지만, 율곡의 실용문체보다는 퇴계의 문학적 향기를 어느 정도 담고 있는 문체라고 본다.”
연암 박지원 문장은 어떤가?
“근세의 창강 김택영에 의하면 ‘우리나라 한문학사에서 결국(結局)을 지은 사람이다’라고 했다. 백두대간의 종착역 같다는 말이다. 연암은 중국식 표현을 피하고 가급적이면 당시 조선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당시 고문가들이 ‘정승’을 중국식으로 ‘승상(丞相)’이라 표현하였지만 그는 우리식 표현을 즐겨 썼다. 중국식인 ‘종남산’을 우리식인 ‘남산’으로, ‘장안’을 ‘한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당대 조선에서 통용되는 표현을 고집했다. 정신은 옛사람들의 법을 따르되, 문체는 당대의 표현으로 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연암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수박겉핥기(皮舐西瓜)’란 표현이 있다. 이런 속담류의 표현은 당시 고문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일상 회화에서는 사용하지만 문장의 문어체에선 감히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연암은 이러한 금기를 깨고 구어체를 문장에다 쓴 것이다. 연암도 기질이 다혈질이었다. 몸도 비대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머리도 좋고 체력도 좋은 체질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니까 말년까지 정력적으로 저술작업을 했다. 연암도 태양증이 있었다.”
최 교수에 의하면 ‘태양증(太陽症)’이라는 질환이 선인들의 문헌에 등장한다고 한다. 기가 머리 위로 올라와 뒷목이 뻣뻣해 지면서 골이 아픈 증상이다. 상기증이다. 저술을 많이 남긴 문사들이 이런 태양증에 잘 걸렸다. 기질상 불같이 화를 잘 내고, 말년까지 계속해서 정력적으로 글을 써댔던 체력의 소유자들이 이 태양증에 잘 걸렸다는 것이다. 우암 송시열도 태양증이 있었고 주자, 남명 조식, 연암, 그리고 근세의 간재(艮齋) 전우(田愚)도 이 증상이 있었다. 대체로 말년까지 계속해서 저술을 해내던 인물들이다. 송시열도 말년까지 계속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얻고 유명해지면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 법이다. 여기저기서 원고 청탁이 쇄도한다. 거절하면 되지 않느냐고? 거절 잘못했다가는 앙심을 품게 만든다. 유명해지면 유명세라고 하는 세금을 반드시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 세간법이다. 세금 안내면 탈세범이 된다.
우암에게도 전국에서 자기 조상의 비문이나 행장(行狀)을 써달라는 청탁이 쇄도했다. 우암의 글을 받으면 집안의 영광이다. 우암의 글을 하나 받는다는 것 자체가 피카소의 그림 하나 받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니 줄기차게 부탁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자, 그렇다면 우암은 이를 어떻게 해결했나? 최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우암 집에는 문객(門客)들이 항상 수십 명씩 우글거렸다고 한다. 단순한 식객들이 아니라 그래도 어느 정도 글 줄깨나 한다는 식자층이었다. 우암은 이들 문객을 활용했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비문 청탁을 이들 문객에게 일차적으로 숙제를 주었다. 대강의 얼개를 문객을 시켜 짠 셈이다. 문객이 그 사람의 일생 행적과 특이한 점을 파악해서 대강 줄거리를 짜 오면 우암이 그걸 보고 자기 스타일대로 다듬었다. 우암이 수정보완을 해서 우암의 냄새가 나는 글로 윤색한 것이다.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나타난 고운의 철학
우암이 생전에 전국에서 몰려온 부탁을 받고 써준 비지문(碑誌文)이 모두 522편이나 된다. 정치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500편의 분량은 엄청난 양이다. 비문 1편에는 그 사람의 일생 행적과 특징을 요약해서 키워드를 잡아내야 하는 작업이다. 의뢰자들은 과연 어떤 내용으로 써줄 것인가 하고 주의 깊게 지켜보는 상황이다. 만만치 않다. 우암은 이렇게 많은 분량의 작업을 하면서도 키워드를 하나씩 집어넣는 통찰력이 있었다.
하서 김인후의 비문을 쓰면서 그 일생을 ‘윤의집성(允矣集成)’이라고 요약했다. ‘진실되도다. 학문을 집대성 하시었네’라는 뜻이다. ‘집성’(集成)이 아주 핵심적인 표현이다. 이게 하서 김인후의 일생을 정확하게 요약한 말이다. 근래에 하서 김인후의 후예들이 장성 필암 서원에 교육관을 지으면서 그 이름을 ‘集成館’이라 했다. 우암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후학들이 보기에도 ‘집성’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었던 셈이다.
사산비명의 특징은 무엇인가? 지증대사비는 한국불교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특징이 있다. 8∼9세기 중국의 선종(禪宗)이 신라로 유입되는 과정을 밝혔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도의(道義), 홍척(洪陟), 무염(無染) 선사에 관련된 정보가 함축되어 있다.
지증대사의 행적을 육시(六是)와 육이(六異)로 압축한 점도 볼 만하다. 육시는 6가지 아름다운 사실이고, 육이는 6가지 신기한 일을 가리킨다. 최치원은 지증대사 비문을 구상하는 데 무려 8년이 걸렸다고 술회한다. ‘영반팔동(影伴八冬)’이란 표현이 그것이다. ‘그림자와 8년간 반려를 했다’는 뜻이다. 8년간 비문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고민했다는 이야기다.
쌍계사의 진감선사비에는 철학사상이 들어 있다. 가장 첫 문장에 나오는 ‘도불원인 인무이국(道不遠人人無異國)’이 그것이다. 첫 문장에 결론이 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출신국가에 따라 능력이 다른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사람이 도를 멀리하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다음 문장인 ‘인무이국’을 강조하기 위해서 ‘도불원인’을 말한 것처럼 보인다. 결론은 ‘인무이국’을 말하려는 것이다. 현대적인 맥락에서 말하자면 지역차별과 인종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최치원은, 변방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천적으로 열등한 유전자를 타고 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감선사는 당시 구백제 지역인 전북 익산의 금마(金馬) 출신이다. 젊었을 당시 진감선사는 돈 없고 신분도 변변치 않았던 모양이다. 진감이 당나라에 유학을 떠날 때 노를 젓는 노꾼(舫人)으로 배를 탈 수 있었다. 당나라에 갈 때 배를 타고 가야 하니까, 배 안에는 다양한 역할 분담이 있었던 모양이다. 취사병도 있었고, 청소부, 식사당번 등등의 역할이다. 바람과 노를 저어가는 고대의 항해에서 노를 젓는 노꾼이 핵심적인 동력이고, 이 일이 가장 힘든 중노동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힘든 중노동이므로 지원자도 적고, 당연히 노꾼이 되면 뱃삯 없이 탈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노를 잘 저을 수 있는 체력과 기술이 있다고 하니까 노 젓는 뱃사공 몫으로 당나라 가는 배편에 겨우 몸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돈 있고 연줄이 있었으면 뱃사공으로 중국가는 무역선을 탔겠는가. 더군다나 망해버린 구백제 지역 출신이었으니 천대받던 하층민이었을 것이다.
<사기> ‘열전’ 방식으로 기술한 낭혜화상비명
일설에는 고구려가 망하자 그 유민들을 백제 지역에 강제 이주시켰다고 하는데, 진감은 이 고구려 유민으로서 금마지역에 살던 뿌리 뽑힌 유랑민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미천한 신분의 진감이 당나라에 가서 귀족이나 공부할 수 있던 불교를 공부해 고승이 되어서 신라로 돌아왔다. 더구나 신라 왕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까지 올라갔으니 대단한 비약이자 신분상승이었다. 미천한 구백제 출신의 진감선사 일생을 요약하면서 ‘道不遠人 人無異國’을 제일 먼저 내세운 데는 최치원의 깊은 배려가 있었다.
문장도 흥미롭다. 넉자 넉자다. 첫 문장의 ‘道’와 다음 문장의 ‘人’이 대구다. ‘不’과 ‘無’도 대구다. ‘遠’과 ‘人’, 그리고 ‘異’와 ‘國’도 각각 대구로 되어 있다. 넉자는 동양고전인 <시경(詩經)>의 문체이기도 하다. 동양의 고사성어는 대개 사자성어 아닌가.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뿌리 깊은 문체가 넉자배기 글이다. 사륙변려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문체다. 인간이 농경사회에서 밭일을 하러 농기구를 걸머지고 걸음을 걸을 때 그 보폭의 리듬에 맞는 글자가 네 글자라고 한다.
충남 보령에 있는 성주사 낭혜화상비는 무엇이 특징인가? 한 사람의 생애를 <사기(史記)> ‘열전(列傳)’방식으로 기술한 점이 특징이다. 열전 형식으로 썼다는 것을 되새겨보면 사람이 결국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주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연대기만 가지고는 부족한 것이다. 이 비문의 글자 수도 매우 많다. 무려 5천 자가 넘는다.
도덕경이 5천 자다. 도덕경 글자 수보다 많은 내용이 이 비문 하나에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다. 비문의 끝부분에 ‘논왈(論曰)’이라고 해놓고, 낭혜화상(무염국사)의 일생을 요약해서 평가하고 있다. 내용가운데 정치적인 대목도 발견된다. 낭혜화상의 조상이 태종무열왕이다. 최치원은 ‘왕대 밭에서 왕대 난다’고 기술함으로써 낭혜화상이 신라 김씨 왕조의 혈손임을 강조하고 있다. 김씨 왕조에 약간 아부하는 내용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다.
경주 숭복사비는 교종인 화엄종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른 비문은 선종에 대한 내용들인데, 숭복사비는 교종이다. 화엄종을 변호하는 듯한 내용인 것이다. 최치원은 중국에 가서 빈공진사(賓貢進士)라는 과거에 합격했다. 과거공부는 유교의 경전공부에 해당한다. 시험준비를 하면서 유교는 공부를 한 셈이다. 그리고 나서는 당나라에서 자기가 모시고 있던 무장(武將)이자 상관인 고병(高騈)이 열렬한 도교 신봉자였으므로, 자연히 도교에 대한 공부를 했을 것이다. 불교는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도교 다음에 불교다.
최치원의 친형은 화엄종 승려였다. 당시에는 한 아들은 유교 공부시키고, 다른 아들은 불교 공부시키는 관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 친형이 해인사의 방장이었던 현준(賢俊) 스님이었다. 현준은 화엄종의 대가였다. 최치원이 해인사에 머물면서 병도 치료하고 요양을 했던 것도 친형인 현준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치원은 불교공부를 할 때 선종보다는 화엄종을 먼저 공부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나서 선종 공부를 한 것이다. 이러한 화엄학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에 숭복사비도 찬술할 수 있었다. 최치원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도 모두 화엄종 고승들의 일대기다.
‘굴린차(堀恡遮)’의 수수께끼를 풀다
사산비병을 주석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대목은 무엇인가?
“숭복사 비문 가운데 ‘굴린차(堀恡遮)’라는 단어가 나온다. 여기에서 린(恡)은 아낄 ‘린’자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역대 사산비명 주석가도 이 대목에서 모두 막혔다. 심지어는 불교 전적에 박통하였던 대석학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스님도(순창 구암사에서 머무름)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미상(未詳)’이라고 남겨놓았던 대목이다. 무슨 뜻이란 말인가? 1년 넘게 이 대목에서 막혀 고민하고 있었다.
1998년 여름 장마에 폭우가 쏟아져 집안의 서재에 빗물이 찼던 적이 있었다. 이 서재에는 당시에 거금을 들여 사다 놓은 <신수대장경>이 있었는데, 빗물이 들어오니까 이 대장경을 얼른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겁지겁 서재에 가서 대장경을 옮기면서 물에 젖었나 싶어 이 책 저 책을 한 권씩 뽑아 들고 검사해보았다. 그중에 한 책을 뽑아 들었다. 그 책을 뽑아 들고 잡히는 대로 페이지를 열어보니 본문에 바로 이 ‘굴린차’ 비슷한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굴우차(堀优遮)’라는 단어였다.
굴우차는 비둘기라는 뜻이다. 인도에는 비둘기 이름을 따서 지은 절 이름도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숭복사비를 옮겨 적는 과정에서 ‘굴우차’를 ‘굴린차’라고 잘못 적은 것이다. 굴린차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굴우차는 비둘기를 말한다. 우연히 이 난제를 풀고 나서 기쁨이 오래 갔다. 수백 년 동안 선학들도 해결 못한 수수께끼를 내가 드디어 풀어냈다는 보람이었다.”
최 교수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한국철학으로 석·박사를 마쳤다. 중간에 국민대에서 한문학자 김도련(金都鍊·1933∼2012)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김 교수는 학문 계보상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맥에 속한 학자였다. 이건창(李建昌) 계열이었다.
강화학파는 주자학의 엄숙주의에 구애받지 않다 보니 자유롭게 독서를 했다는 장점이 있어서 문체와 사유방식이 활달한 기풍이 있다. 석사과정에서 김 교수로부터 사산비명을 공부해보라는 권유가 계기가 되었다. “글을 많이 쓸 필요가 없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써라”, “글은 자기 마음에 쏙 들면 된다”와 같은 가르침을 받았다. 강화학파의 개성이다. 1천 년이 넘게 내려오는 최치원의 사산비명에는 이처럼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