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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팔에서 카톡까지
이 홍사
짐을 다 꾸렸다.
빠진 것이 없나 둘러보고 잔뜩 부푼 모서리를 눌러가며 지퍼를 겨우 채우고 캐리어를 들어본다.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항공기의 짐이 하나에 25kg을 초과하면 오버차지를 내야한다. 해외를 자주 들락거림으로 마일리지가 쌓여 나는 모닝캄 회원이다. 그 모닝캄이라는 다소 신선하게 조립된 이름이 붙은 회원에게 주어지는 특혜는 25kg 미만의 짐을 두 개 무료로 탁송할 수가 있다. 일반여행객은 두 개를 부치려면 하나는 무료이고 하나는 백오십 불의 오버차지를 내야한다. 캐리어를 들어보며 이게 비료 한 포대 무게가 될까? 비료 한 포대의 무게를 어림잡는다. 순전히, 농촌에서 길들여진 나만의 무게의 가늠 방식이다. 비료는 25kg을 가늠할 때의 기준이고 40kg에서는 무게를 어림잡을 적에는 쌀 한 포대나 추곡수매용 벼 한 가마니 무게를 가늠한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당시에 추곡 수매용 벼 한 가마니가 40Kg이었다. 그리고 60kg에서는 내 몸무게를 기준으로 어림잡는다. 고등학교까지 농촌에서 자란 나만의 무게 가늠방식이다.
중고등을 다니면서는 집안일을 틈틈이 도왔다.
경운기를 끌고 과수원에 외양간의 거름내기는 기본 사양이고 심지어 재래식 변소를 퍼서 과수원이나 보리밭에 거름으로 뿌리고, 농협창고에서 비료를 하도 많이 실어보아서 25kg이란 무게가 몸의 감각으로도 체득되었다. 비료 한 포대는 25kg이다. 당시의 요소비료가 그렇다는 얘기인데, 아버지께선 요소비료를 두고 ‘이십이 다시’ 라고 부르셨다. 물품번호가 22-로 시작되는 요소비료는 복합비료와 달리 작물을 웃자라게 하는 성분이 있어서 모내기를 하고 나서 뿌리가 착근되면 친다.
화학비료란 놈을 어떻게 만들었기에?
정말로 작물을 웃자라게 하는 성분이 있는가?
실험하기 위해서 어느 날 비료를 치면서 아버지 몰래 논을 딱 잘라 반쪽만 곱으로 치고 반쪽은 전혀 치지 않았다. 그때가 아마 고등학교 다닐 때였지 싶다. 한 논에 골고루 뿌려야할 비료를 반쪽에다 듬뿍 치고 일주일 후에 나가보고는 비료의 성능에 놀랐다. 칼로 자른 듯이 논 반쪽은 비료를 치지 않은 쪽에 비해서 한 뼘 정도 벼가 웃자라 있었다. 확실한 차이를 나만 보았던 게 아니다. 새벽에 논에 물고를 보러 나가셨던 아버지께선 아침 밥상을 받으며 교복을 입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내게 물으셨다.
-너 정말 이십이 다시를 골고루 뿌렸냐?
그 물음에 눈을 딱 감고 그렇다고 했다.
-이거 뭔가 이상하네? 같은 종자인데?
아버지께선 고개를 갸웃하셨지만 내가 요소성분을 실험한 것이란 걸 모르고 지나가셨다. 아무튼, 그 요소비료의 물품번호가 22- 얼마로 나가는데 그 물품번호를 줄여서 부르시는 것이었다.
-얘야! 물 건너 창고에 가서 이십이 다시 열 두포 싣고 오너라.
아버지께선 대충 그런 식으로 지시하셨는데 도회에서 자란 친구들은 알아먹지 못할 말이다. 장날 농협에서 끊어 오신 비료전표를 들고 경운기를 끌고 다리 건너 창고로 간다. 창고지기 아줌마에게 전표를 내밀고 창고 안까지 경운기를 끌고 들어가 내가 비료를 싣는다. 그때 들어보던 비료의 무게감이 몸에 익었다. 공교롭게 외국에 일을 벌이고 항공 캐리어 무게 기준을 25kg으로 잡으니 나로선 꼭 저울에 달아보지 않아도 그 무게의 감이 온다.
왜 항공기 짐의 무게를 최대 25kg으로 설정했는가?
이유를 찾아보았더니 장정 한사람이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는 무게의 최대한도가 25kg이라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 무게를 전 세계 항공사가 설정했다고 했다. 어쩌다 분리할 수 없는, 30kg가 넘는 초과 짐을 부치기도 하는데 그럴 땐 공항의 포터들 작업을 하면서 허리를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heavy, 혹은 무거운 짐이라고 쓰인 경고 라벨을 붙이기도 한다.
일어서서 다시 캐리어를 들고 무게를 가늠한다.
비료 한 포 보다 조금 가벼운 듯하다. 그러니까 20kg 내외가 되겠다. 그 언저리의 무게라면 공항에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입고 있던 면을 소재로 한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는다. 등골에도 땀이 흥건하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짐을 다 싸고 욕실로 들어갔다.
에어컨은 켜두었지만 샤워부터 먼저 하면 짐을 쌀 동안 또 땀이 범벅이 된다. 하여 짐을 다 꾸리고 옷을 갈아입기 직전에 샤워를 한다.
이 나라는 지금이 가장 더울 때다. 어제는 차에 있는 온도계가 섭씨 44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더위다.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음 달에 나오면 우기가 닥칠 것이다. 그러면 좀 견딜만할 것이다. 이런 나라에 우기가 없다면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을 것이다. 욕실의 샤워는 금세 끝났다. 하루에 두세 번 샤워를 하니 물을 뒤집어쓰고 땀만 씻으면 된다.
거실에는 두 명의 짐꾼이 기다리고 있다.
공항까지 나를 태워다주고 짐을 들어줄 인간들이다.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담배를 찾아 거실로 나오니 둘이서 망고를 먹고 있었다. 망고가 잘 익은 계절이다.
-형님! 망고 잔뜩 자시고 가야죠? 들어가시면 생각나실 텐데?
-많이들 잡수세요.
-형님 카톡 온 것 같던데?
-카톡?
거실에 임시로 꾸며놓은 집무용 책상위에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카톡을 보낸 사람은 안젤라다. 안젤라! 여동생의 세례명이다. 여동생이 한국의 사무실을 지키며 모든 배차를 도맡아서 하고 있다. 나이는 나만 먹는 게 아니다. 여동생도 신혼 초부터 시작해서 이십 년 넘게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보니 어느 듯 며느리 볼 나이가 되었다. 온순이라는 이름을 부르기가 미안해서 안젤라라는 세례명으로 저장을 해놓았다. 하지만 입에 익지 않아 자꾸 이름을 부르게 된다. 우리의 전통 예법으로 따지면 출가외인, 김 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으니 ‘김실이’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입에 익지도 않을뿐더러 듣는 제가 불편한지 그냥 이름을 부르라고 했다.
카톡으로는 사진이 날아왔다.
배차노트의 기록을 찍어서 사진으로 날린 것이다. 확대해서 읽으면 되는 아주 편리한 방식이다. 매일 보고형식으로 날아오는 사진이다. 나는 사진을 확대해서 찬찬히 훑어보았다. 내일도 변함없이 모든 중기들이 적절하게 배차가 되었다. 참 보기 좋은 배차 상황이다.
‘알았당! 오늘 밤 출발예정^^’
그렇게 답장을 날리고 담배를 물었다. 바람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삼십 분 정도 후에 출발하면 어지간하겠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대한항공은 이곳 시간으로 자정이 임박하여 출발한다. 망고를 먹고 있는 두 인간을 향해 동의를 구했다.
-여기서 아홉 시에 출발하면 되겠지?
-그러면 넉넉합니다.
담배를 물고 그 대답을 듣고 아내에게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카톡을 날렸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몇 년 전만해도 상상도 못할 정보가 이렇게 간단히 오가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 인천공항에 내려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로 내려가는 차표를 카드로 결재하면 그 결재내용이 아내의 휴대폰에 문자로 전송된다. 그래서 아내는 내가 인천공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화를 받지 않고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나는 버스를 타고 아내에게 카톡을 날려 몇 시에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라고 하면 아내가 항상 먼저 나와서 기다린다.
카톡,
한마디로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카카오톡을 줄여서 카톡이라고 불린다.
내가 카톡이란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몇 년 전, 대형 유람선 침몰사고가 있었을 때였다. 그 때 뉴스를 접하며 배에 탔던 수학여행팀 학생들이 카톡을 날렸다는데 그게 뭐지? 궁금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구형 폴더 폰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변경하려면 전화번호가 변경된다. 전화로 일을 주문을 받는 업종을 하는 사람으로서 전화번호가 변경된다는 것은 소홀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신중을 기하고 단골 거래처에는 먼저 바뀐 번호를 알려주어야 하고 자동으로 바뀐 전화번호를 알려주는 시스템도 동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변경하는 걸 미루고 폴더 폰을 고집하고 있었다.
카톡!
정확히 어디에서 파생된 신조어인지는 모르지만 카톡으로 통용된다. 아마도 카카오톡이란 프리웨어 서비스를 가장 먼저 제공한 카카오사가 만든 신조어 인데 Auto Talk, 오토토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언어라고 그저 감을 잡을 뿐 나도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카톡’이라고 남들과 같이 명명한다. 언제 짬이 나면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스마트폰의 시대가 되니 이런 소통의 방법이 덤으로 따라왔다. 이런 소통의 방법이 더 과학화되고 더 진화하겠지만 지금도 불편함은 없다. 단지 너무 노출되고 공유되어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으니 불안할 뿐이다.
카톡 그룹에 들어가면 상대를 모르면서 대화를 나누는, 정보의 공유화 시대가 된 것이다. 단언컨대, 나는 카톡을 잘 쓰지 않는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전화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러나 여기선 어쩔 수 없이 카톡을 써야 한다. 꼭 경제성만 따지지 않고 편의성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단지 카톡으로 친구 등록한 사람이 한정되어 있다. 사무실 여동생, 아내, 딸, 중기기사들, 꼭 연락을 해야 하는 사람들로 예닐곱이 고작이다.
카톡으로 하면 따로 별도의 요금이 들어가지 않는데 국제전화로 하면 한 통화에 담배 한 갑 값이 날아가 버린다. 여기는 전화요금이 선불, 카드를 사서 요금을 주입시키는 방법이라 국제전화를 하기 전에 요금이 얼마 남았는지 확인하고 전화를 하고난 다음에 남은 액수를 확인하면 얼마가 날아갔는지 정확히 알 수가 있다.
여동생이나 아내에게 카톡이 와서 어느 거래처의 어느 양반이 전화를 해달라고 하거나, 집안의 누가 아파서 입원을 하거나 친구들 중에서 집안에 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전화를 해야 한다. 그리고 항공기 스케줄을 조정하거나 귀국일자를 변경할 때는 비싸더라도 국제전화를 쓸 수밖에 없다.
내겐 스마트 폰이 네 개나 있다. 다 사용하는 전화기다. 생각하니 나만큼 전화기를 여러 대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한국에서 쓰던 전화를 여기서 그대로 쓰지 못하고 여기서 쓰던 휴대폰은 한국에서 그냥 쓰지 못한다. 카톡 설정을 다시 깔아야하기 때문이다. 한국 전화를 그대로 쓰면 자동 로밍이 되어 요금이 그야말로 헤비급 폭탄이다. 하여 인천공항을 떠날 때 전원 끄기를 해서 가방에 넣는다. 이쪽에 도착하면 이쪽 전화를 켠다.
이쪽 전화도 이동통신사가 여러 곳이라 기지국에 따라 어느 지역에 가면 OLD가 잘 터지고 또 어느 지역에선 MPT가 사용이 용이하기에 두 대의 전화를 가지고 다닌다. 여기서 전화를 하려면 원칙이 있다. 통신사정이 좋지 않아 연결이 될 때까지 걸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은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전화 두 대를 가지고 다녀도 기본요금이 없이 사용료만 나가는 시스템이라 단말기만 두 대지 사용하는 요금은 한 대나 다름없다. 현지인들 중에서 세 대를 들고 다니는 인간도 있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데리고 있는 로칼 매니저 때쑤가 그렇다. 전화기가 자주 먹통이 되어 내가 쓰던 폰을 주니 천오백 원짜리 유심을 사서 번호를 하나 더 만들어서 들고 다닌다. 이동통신사가 많아지자 경쟁차원에서 할인 이벤트가 잦다. 그걸 잘 이용하면 통신료 절반으로 이용할 수가 있는데 그녀는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여기뿐만 아니라 나는 한국에도 전화기가 두 대다.
사무실 유선 전화를 빼고 휴대폰만 둘이라는 얘기다. 이십 년 전부터 쓰던 번호는 업무상으로 걸려오는 전화가 태반이다. 내 소유의 중장비마다 그 전화번호를 대형 스티커로 인쇄해서 붙여놓았기에 순전히 업무용 전화다. 그래서 외국 출장을 나오면 그 휴대폰은 여동생 휴대폰으로 착신을 시켜 이십사 시간 통화대기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 그게 우리의 일이다. 야간에, 정말로, 긴급으로 오는 전화가 가끔 있기에 그렇게 이십사 시간 통화 대기상태다. 그 업무용 전화를 외국으로 들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전화를 동생에게 착신시켜주고 다니니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또 귀국할 때면 인천공항에서 사무실까지 전화가 없이 다녀야 했다. 꼭 전화를 할 일이 생기면 옆에 있는 승객이나 운전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빌려 쓰곤 했는데 그게 무척이나 번거로웠다. 휴대폰이 보편화되고 달라진 점이라면 공중전화가 줄었다는 점이고 또 공중전화 부스가 자리를 옮겨서 외진 곳으로 갔다는 점이다. 카드로 쓰는 공중전화는 전화카드가 없는 나에겐 무용지물이다. 공중전화 카드와 신용카드, 교통카드를 하나로 쓸 수 있는 카드는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이미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겐 그런 카드가 없다.
그런 불편함을 겪고 있을 때 고등학교 동기 중 한 놈이 바로 우리 사무실 맞은편에 휴대폰 가게를 옮겨왔다. 시내에서 구멍가게로 하던 매장을 버리고 사무실 앞으로 와서 대형 매장을 열었다. 거기에 커피 마시러 들락거리다가 알뜰 폰이 아니라 공짜 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기 놈의 권유로 돈 들이지 않고 마음에 드는 번호를 골라 하나 가입할 수가 있었다. 전화기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저장된 전화번호도 그대로 옮겨주고 음악대신 듣던 영어회화 녹음 파일도 그대로 복사해주었다. 공짜라고 중고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요금에서 단말기 값이 빠져나가는 할부도 아니었다. 그 번호로 육 개월 이상만 통신사를 변경하지 않고 사용하면 된단다. 무슨 루트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공짜로 휴대전화가 하나 생겼다.
전화기가 두 대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전화를 두 대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하나를 착신시켜 한 대만 들고 다닌다. 하지만 두 대로 걸려오는 전화를 다 받을 수가 있다. 외국으로 출장 나오는 날 착신을 해지시켜 동생의 휴대폰으로 업무용 전화는 착신을 시켜주고 한 대를 들고 나오니 참 편리하다.
더 이상 인천공항으로 가며 또 인천공항에서 돌아가며 남의 전화를 눈치로 빌릴 일이 없어졌다. 대신 사용하지 않는 번호만 이쪽으로 왔다가 저쪽으로 착신 시키는 업무용 전화요금을 최저 요금제로 만들어 놓으니 통신비 부담도 과중하지 않다.
대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한국 전화는 인천공항에서 끄고 미얀마에서는 절대로 켜지 말아야한다. 한번이라도 켜면 자동으로 로밍이 되어 전화를 꺼두더라도 로밍이 적용된다. 인천공항에 들어가서 전화를 켤 때까지 보름이고 한 달이고 로밍이 되어 있는 셈이다. 나는 이곳에 도착하면 한국 전화 단말기는 금고에 여권과 같이 처박아 둔다. 그리고 오늘처럼 귀국하는 날 꺼내서 충전시키고 주머니에 챙겨 넣는다.
조심히 돌아오세용^^
동생에게 카톡으로 답장이 왔다.
초저녁잠이 많은 아내는 벌써 자는 모양이다. 두 시간 반의 시차가 있으니 한국은 오밤중이다. 카톡의 편리성과 익명성을 생각하다가 문득 펜팔을 떠올렸다. 지금도 그런 게 있나 모르겠다. 펜팔을 생각하니 갑자기 오른쪽 손목이 욱신거린다.
펜팔.
펜팔이 전염병처럼 확산되어 대세를 이루던 시대가 있었다.
나는 그 펜팔이라는 전염병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직접 펜팔이라는 것을 해보지 않았지만 대필은 죽으라고 엄청나게 했다. 군에 있을 적이었다. 하도 여러 작자의 편지를 대필하는 바람에 선임 중에서 누구의 편지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 되었나 기억도 못하고 지난번에 받은 편지를 보여 달라고 할 정도로 여러 사람의 연애를 대리로 했었다. 편지 쓰라고 시간이 따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자투리 휴식시간이나 취침시간을 할애해서 써야 한다. 후임이라고 대가없는 사역을 치러야 했다.
지금은 군에 있는 아들 녀석이 돈을 계좌로 쏘라고 전화가 올까봐 겁이 날 정도로 군에도 전화가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에 군에서 전화는 언감생심, 편지 한 통 받는 것은 일주일 사역이 끝나는 것보다 큰 기쁨이었다. 편지 기다리는 맛으로 군대생활은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편지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어쩌다 운수 나쁘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로부터 행운의 편지를 받으면 그야말로 죽을 기분이었다. 그 편지를 내가 직접 받은 게 아니고 어느 선임이 받아도 대필을 해야 했기에 나는 더 죽을 맛이었다.
행운의 편지?
문득 떠오른 말이지만 지금도 그런 게 있나 모르겠다. 아무튼, 행운의 편지를 받으면 일주일 안에 일곱 통의 편지를 보내야 했다. Lucky7이라서 그렇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예를 들어놓았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행운의 편지를 받고 여섯 통의 편지만 보내는 바람에 암살을 당했다는 내용이 꼭 들어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보내면 안 된다. 일곱 명의 다른 사람에게 보내야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고 행운이 있기를 빈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행운의 편지가 확산된다면 몇 년이 지나면 전 세계 사람들이 매일 편지만 써야하는 사태가 생길 것인데 다행히도 그런 내용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행운의 편지가 잦아들었지 싶다. 어느 선임이 행운의 편지를 받으면 같은 내용의 일곱 통의 편지를 직접 손으로 써야 했다. 그 선임이야 행운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불행이었다. 선임 두 명이 같은 날 행운의 편지를 받으면 그날 나는 열네 통의 편지를 손목이 욱신거리도록 써야만 했다. 죽을 맛이었다.
-누구에게 보내죠?
일곱 통의 편지를 죽으라고 써서 선임에게 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묻는 말이다.
-알아서 보내라.
그러면 나는 어느 잡지의 펜팔 코너의 주소를 찾아서 그리로 보내는 것이다. 주소를 적고도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행운의 편지는 선임 앞에서 내용을 읽지 않았지만 펜팔 하는 연애편지는 편지를 써서 선임 앞에서 읽어주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 다음에야 보내야 했다.
당시의 펜팔은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대필하던 어느 선임은 전역을 하고나서 그 펜팔상대와 결국 약혼했다는 소문이 들려왔고 편지가 왕래되고 맘에 들면 얼굴을 모르던 아가씨가 직접 면회까지 오곤 했으니까. 면회 오면 외출 나가는 것도 선임 대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런 혜택을 주는 선임은 한 명도 없었다.
사진을 보내오고, 면회 오도록 만드는 것은 순전히 나의 지속적인 관심이었으므로 나는 편지에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며, 기가 막힌 표현이 생각나면 이 표현은 어느 어느 상대에게 써 먹었던가 기억을 해야 하고 머리를 짜야만 했다.
-야! 누구는 면회 오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면회 오도록 만들어!
하는 사람은 별 것 아니지만 이 말을 듣는 후임인 나는 죽을 맛이었다. 편지를 대필해야했던 선임들이 하나 둘 전역하자 내 대리 연애 아니, 대가 없는 사역도 줄어들었고 내 사물함에 지니고 있던 주요명부, 주소록에도 하나 둘 빨간 줄이 그어졌다. 당시에 나는 주소가 빼곡히 적힌 노트를 사물함에 보관하고 있었다. 어느 선임의 펜팔 친구는 누구이고 어느 선임의 펜팔 상대는 누구라는 것을 명기해야 했다. 대필로 맡기는 주제에 두 군데 더블 펜팔을 하는 선임도 있었다. 까딱 잘못 헷갈려서 편지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날에는 그 후폭풍을 몸으로 감당해야 했기에 특별히 조심했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었다.
선임 앞에서 읽어줄 적에는 맞게 읽어주었는데 봉투에 넣는 과정에서 바뀌었던 모양이다. 선령이에게 부쳐할 할 편지의 내용이 하정이에게로 날아가며 바뀐 것이다. 하루에 예닐곱 통의 편지를 부치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걸 수습하는데 죽을 고생을 했다. 핑계는 보안상의 이유로 군사우편 검열과정을 들먹이며 그 과정에서 남의 편지와 바뀐 모양이라고 둘러대고 더 진한 말을 하고 싶은데 검열과정이 있으니 생략하더라도 내 마음을 알아달라며 군사우편은 편지를 봉하지도 않고 보낸다고 둘러댔다. 한 군데 해명하는 게 아니라 두 군데 같은 해명을 해야 했다. 두 군데 더블 연애를 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이 같이 날아왔다. 아니라고. 내 속정의 화살은 오로지 선령 씨, 혹은 하영 씨에게 꽂혀있다는 똑 같은 말을 편지로 날리며 그걸 수습하고 정상 궤도에 올리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당시에 가당찮게도 영어실력을 올린다고 국제 펜팔을 하던 선임도 있었다. 그 편지만은 내가 대필하지 않았다.
-형님 오늘 부칠 짐이 몇 개예요?
한참 펜팔 전성시대를 더듬고 있는데 핸디캐리를 전문업으로 하는 승수가 물었다. 그의 관심사는 바로 그것이다. 당구장에서 만나 집까지 따라온 목적도 바로 그것이다.
-두 개인데 작은 것을 기내로 가지고 들어가지. 뭐!
넘어다보니 그는 또 머리통을 쓰다듬고 있었다.
직설적으로 묻기가 무안했던 모양이다. 승수는 빡빡머리다. 앞머리가 조금 빠지고 옆머리가 조금 희끗해지자 그대로 밀어버린 것이다. 옆에 앉아 망고를 먹고 있는 장우는 그 머리를 두고 오입하러 내려온 중놈 대가리라고 일컫는다. 친구지간이니 뭐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승수는 그게 편하단다. 빗을 일이 없고 염색할 일이 없어 편하다고 했는데 말이 막히면 손이 저절로 머리로 올라간다. 머리통을 밀고 나서 생긴 버릇이다. 조금 어색한 말을 하면서도 머리통을 쓰다듬고 당구장에서 편을 갈라 당구를 치다가도 제 잘못으로 마이너스 패킹을 하더라도 초크 묻은 손으로 머리통을 쓰다듬는다.
내가 뭘 생각하다가 말았지?
아! 펜팔, 아무튼 펜팔이 전성기를 넘기고 나서 뭐가 유행했는지 모르겠다. 인터넷 채팅인가? 아, 인터넷 채팅 전에 삐삐라는 물건이 있었다. 무선호출기인데 나는 그것을 사용하며 아내와 서른여섯가지 암호를 정했다. 가령 집 전화번호를 누르고 1번을 누르면 빨리 집으로 전화를 하라는 내용이고 2번을 추가로 입력시키면 아이들이 아프다는 내용이고, 3번을 입력시키면 무슨 내용이도, 하여튼 서른여섯가지를 만들어서 집 전화기 앞에 붙여두고 또 한 장은 코팅을 해서 주머니에 넣어 다닌 적이 있다.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였는데 병폐가 없었다. 허나 인터넷 채팅이 등장하면서 얼굴모르는 상대와 잡담을 나눌 수가 있는 시대가 있었다. 나는 해보지 않았지만 펜팔이나 무선호출기보다는 훨씬 더 진화한 시스템이다. 나는 자판이 익숙하지 않아 독수리 타법으로 채팅을 하라고 해도 못하지만 그걸 하는 걸 보았다. 펜팔이나 무선호출기보다는 익명성이 강하고 훨씬 진한 말들이 오갔다. 아마도 십오 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인터넷이 채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인터넷 채팅!
마냥 편리한 것만은 아니다. 병폐도 있었다. 내가 그 익명성의 폐해를 처음 확인한 곳은 거제도의 어느 PC방이었다.
당시에 일본을 여행하려고 벼르고 별러, 일본어를 전공한 어느 후배와 부산항엘 갔다. 삼박사일 일정으로 준비했던 그 시절에는 일본도 비자가 있어야 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가이드북을 보고 준비를 꼼꼼히 했다. 헌데, 후쿠오카로 가는 표를 끊고 출국 심사하는 과정에서 그 후배의 여권이 만료기간 임박해서 출국이 허용되지 않아 일본행이 무산되었다. 일본행이 불발되자 그 자리에서 거제로도 목적지를 바꾸었다. 어렵게 만든 시간인데, 그 후배는 자신의 불찰이라며 굉장히 미안해했고 내가 가자는 곳으로 군소리 없이 따라다녔다.
제주도를 두고 거제도로 간 목적은 우선 여객선을 타고 싶었고 당시에 내가 인터넷으로 어느 불교카페에 가입해서 매일 불경을 듣고, 유명스님의 법문 동영상을 즐겨보고 있었는데 그 카페지기가 거제도 어느 암자의 주지스님이었다. 그 스님을 평소에도 만나보고 싶었는데 일본행 불발이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후배는 군말 없이 따라다니며 내 비위를 맞추어주기에 바빴다. 거제도로 가는 여객선에서 캔 맥주와 안줏거리를 사오고 거제도 관광안내 책자를 가져와서 관광명소를 일러주었다.
옥포에 도착하니 저녁시간이었다. 그 카페의 암자를 찾아가야하는데 주소를 알 길이 없었다. 인터넷 카페에 들어가면 그 절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는데 당시의 휴대폰으로는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여관을 잡는 것보다 PC방을 찾아서 카페에 들어가 확인하고 전화를 해보고 그 절로 가서 하룻밤 자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PC방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항에서 내려 한 골목 뒤의 이층상가에 커다란 간판을 걸고 있었다. PC방, 말만 들었지 생전 처음 이용하는 곳이었다. 당시에는 컴퓨터에 오백 원짜리 동전을 넣어 이용하는 시스템이었다. PC방 카운터는 동전교환해주는 게 일이었다. 동전을 바꾸어서 컴퓨터 앞에 앉긴 했는데 부팅시키는 방법을 몰랐다.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되질 않는 것이었다. 누구의 도움이 필요해서 옆자리에 눈길을 주었는데 게임이 아니라 채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옆자리 모니터 화면에 실린 문구가 순간적으로 사진이 찍히듯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무슨 내용인지 순간적으로 인식하고 나는 잠시 전율했다.
‘수업시간에 졸라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냐?’
‘학교 화장실가서 손가락 두 개를 삽입하고 질을 쓰다듬어. 오 분간.’
그 문구가 얼마나 예리하게 내 기억에 꽂혔는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농염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그 내용을 보고 화끈거리는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화면을 후딱 끄고 일어섰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녀석이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녀석이 컴퓨터를 부팅시켜주었다. 로그인하고 카페에 들어가서 주소와 전화번호만 알아서 적고는 PC방을 빠져나오는데 삼 분이 걸리지 않았다. 후배는 그 문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쓰다듬으며 주지스님의 폰으로 전화를 했다. 암자는 옥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날 암자에서 예불을 올리고 사찰 음식으로 저녁공양을 하고 스님과 세상 돌아가는 많은 얘기를 나누고 그 암자 객방에서 잤다.
자려고 누웠는데 그 글귀가 계속 눈에 어른거렸다.
인터넷 채팅으로 그런 말들이 오간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그 화면을 목격하고부터는 인터넷 채팅이라면 그 농염한 기운이 도는 가상의 공간이라는 안 좋은 선입견이 심어져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고 카페에 들어가서도 누가 대화를 신청한다고 대화창이 뜨면 무시하고 바로 나와 버리게 되었다.
인터넷 채팅도 구시대적인 산물로 밀려났다.
인터넷 채팅은 컴퓨터가 있어야 하고 또 같은 시간에 같이 컴퓨터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야 가능한데 카톡은 더 간단해졌다. 보지 않아서 모르긴 해도 실시간 날아가고 날아오는 문자에 그때 거제도에서 목격했던 말보다 더 진한 언어들이 이 순간에도 날아다니고 있으리라. 카톡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들고 다니는 휴대폰으로 하니 훨씬 용이해졌다. 버스를 기다리며, 밥을 먹으며, 심지어 남들과 대화를 하면서도 휴대폰을 주물럭거린다.
한국에서는 저녁시간에 술 마실 약속이 있거나, 만들어서 나가면 대리운전이 번거로워 가끔 시내버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나가는 그 시간이 학생들의 하교시간과 겹친다. 버스를 타고 둘러보면 먼저 탄 학생 칠 할이 휴대폰을 주물럭거리고 있고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카톡이라고 울리는 소리를 열 번도 넘게 듣는다. 그 소리가 민감한 귀에 엄청 거슬린다. 옆 사람과 대화할 짬이 없다. 휴대폰 주물럭거리느라고 그렇다.
매스컴에서는 휴대폰 중독이라고, 중독인지 아닌지 자가진단을 하는 기준을 일러주는 걸 본 적이 있다. 휴대폰 중독! 그 말 역시 귀에 거슬려 내가 한국에서 쓰는 폰에는 카톡을 깔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전화를 하는 게 편하고 홀가분하며 깔끔하다.
-형님! 이제 슬슬 출발하죠?
승수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럴까? 망고 다 먹었냐?
건성으로 대답하며 너머다 보니 망고접시는 비어있었다. 손가방을 열고 책상위에 놓인 잡다한 물건들을 챙겨 넣었다. 휴대폰과 다이어리, 보던 책, 돋보기, 여권과 출국신고 카드 등속이다. 책은 비행기에서 보거나 내가 사는 도시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읽을 것이고 출국신고카드는 공항의 불빛이 어두운 관계로 출발 전에 집에서 늘 적어서 나간다. 집에서 적어도 돋보기가 필요하고 여권을 펼쳐야 한다. 그걸 공항에서 적으면 엄청 불편하다. 하여 내 다이어리에는 출국신고카드가 여분으로 여러 장 꽂혀있다. 책상에 놓인 것들을 정리하여 손가방에 넣고 방으로 들어가 캐리어를 끌고 나오자 승수가 받아서 들어본다.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대략 20Kg 되겠네요.
-그 정도 될 거야.
승수도 무게에 대해선 전문가다. 하는 일이 핸디캐리니 당연하다. 승수는 매일 공항에 나간다. 여기서 한국으로 보낼 급한 물건을 위탁받아서 비행기를 타는 누구의 짐에 딸려 보낸다. 또 한국에서 급하게 들어올 물건을 택배로 받아서 또 비행기를 타는 누구의 짐에 딸려 보내고는 공항 수취 컨베이어까지 들어가 찾아서 보내주고 운송수수료를 뜯어먹고 산다. 아르바이트 수준이 아니라 한인 잡지에 광고까지 내는 기업 형태다. 한국에도 직원이 있고 여기에도 현지인 직원이 있다. 우리가 공항으로 나가면 로칼 직원이 부칠 짐을 가지고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가는 물건은 대게가 봉제공장의 급한 샘플이다. 항공 운송 전문인 DHL보다 싸고 빠른 시스템이다. 지난번 나갈 적에는 내 이름으로 보낸 짐이 여덟 개였다. 오버차지가 항공료보다 더 많이 나왔다. 매일 하는 일이니 수속 카운터까지 따라 들어와서 짐을 부치고 오버차지를 낸다. 내일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그 짐을 내가 찾는 게 아니다. 승수의 직원이 컨베이어 앞에 기다리고 있다가 알아서 찾아나간다. 나는 내 캐리어만 찾아서 나가면 끝이다. 내 얼굴을 알아보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이쪽 공항에서 받은 물품 전표를 던져주면 그만이다. 나는 자주 다녀서 인천공항에 나오는 직원의 얼굴과 인상착의를 알고 있다. 허리가 약간 굽고 깡마른 칠십대 노인이다.
-오늘 부칠 짐이 몇 개냐?
-모르겠어요. 대여섯 개 될 겁니다.
-형님, 미안하지만 밝은데서 사진 한 장만 찍고요.
승수가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를 내 얼굴에 비춘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게 웃으며 적당한 포즈를 취해준다. 어디에 쓰는 사진인지 알기에 그런 웃음이 나온다. 찍은 사진은 바로 한국으로 날아간다. 매일 짐을 찾는 그 노인의 카톡으로, 내일아침이면 그 노인이 내 얼굴 사진을 보고 나를 찾아온다. 벌써 오늘 부칠 짐은 사진을 찍어 한국으로 날아갔지 싶다. 그것도 로칼 직원들이 카톡을 이용한다. 펜팔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실시간 메시지뿐만 아니라 사진도 날아가니 좋은 곳에 적절하게 쓰면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승수는 나 같은 모닝캄 회원인 작자의 이름으로 짐을 부치면 하나는 덤으로 따라간다. 대신 덤으로 이익이 생기는 백오십 불 중에서 백 불 정도는 내가 사는 도시로 내려가는 차비를 하라면서 준다. 명색이 차비지 이름 빌리는 값이다. 나는 그 백 불을 몇 번 받아보았다. 결코 사양할 일이 아니다. 승수는 내가 언제 다시 들어오는지 내 항공스케줄을 휴대폰에 저장하고 있다. 그 백 불을 위해서 두 개의 가방에 들어갈 짐을 억지로 하나의 캐리어에 쑤셔 넣은 것이다.
출발을 하려는데 손가방에 든 휴대폰에서 카톡 신호음이 울렸다. 꺼내보니 아내가 날린 카톡이다. 아마도 자다가 일어난 모양이다. 조심해서 들어오라는 간략한 내용이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편지를 보내놓고 답장을 한 달이나 기다리던 국제 펜팔을 하던 시대가 어제 같은데.......
실시간 날아다니는 카톡! 여기가 한국인지 남의 나라인지 잠시 착각이 일었고 장우에게 내가 ‘들어갔다가 올게’라고 해야 할지, ‘나갔다가 올게’라고 인사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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