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인물] 조선시대 청백리 청련 이후백 -②
김영선 입력 2020-03-23 05:00 수정 2020-03-20 14:10
직언 서슴치 않는 강직한 관료로 덕망
종친회, 탄신 500주년 맞아 학술발표회
[아시아타임즈=김영선 기자] 연안이씨 부사공파 이후백은 조선 중기 대표적인 사대부의 한사람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계진, 호는 청련, 또는 송초이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서슬 퍼런 임금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는 강직한 관료로 유명하다.
"나라의 왕이 된 사람은 세금 걷는 액수가 적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민심을 잃을까 근심해야 한다. 지방수령들이 사사로이 헌납하는 것은 탐관오라들이 백성의 피를 긁어모아 일부를 임금에게 상납하는 것이니 그대로 받아들이면 나라는 병들고 원망의 소리는 임금에게 돌아오게 된다. 나라는 물질적인 이득으로 이익을 삼지 않고 의로써 이익을 삼아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는 이후백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일화다.
이런 이후백이 죽자 선조는 관작을 추봉하고 사패지를 내린 동시에 도승지 지휘로 경남 함양에서 파주 광탄면 선영 옆 언덕에 예장했다.
이후백의 묘는 원형으로 병풍석을 둘렀고 비·상석, 향로·문인석이 가지런히 놓인 가운데 아랫단에는 망주석이 마주보고 있다. 팔각주신은 끝이 뾰족한 연봉형으로 운두는 여의두문을 둘렀고 연주를 한줄 새겼다.
묘역 터는 떼가 자라지 못하는 토질로 대가 센 사람이 아니면 묘를 쓸 수 없는 자리로 주위에 세 마리의 학 명당중 하나다.
1993년 해남에서 파주로 옮긴 사당은 이후백 선생 영정과 행서체의 탑송 시, 금박홍지 교지가 걸려있다.
신위의 훈호와 관직, 시호가 종으로 한줄 적혀있는 신주에는 청련 선생 신위는 깨알 같은 글자가 백여 자가 넘어 부인 남양홍씨 신위 16자인 것과 비교가 된다.
올해 이후백 탄신 500주년을 맞이한 종친회는 오는 5월2일 역사박물관 학술발표회를 계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