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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온유를 배우라
2000년 3월 22일 / 대예배 / 마 11:29-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학식을 배우고, 많은 정보를 배우지만 마음을 배우라고 초청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배워야 할 것 가운데 최고의 배움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특별한 스승으로 모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가르치는 특별한 스승이 바로 예수님뿐이십니다. 인간의 행복도 마음에 있고 불행도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 23:7-8 / 길에 나서면 거드름을 피우며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랍비'라거나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바란다. 8)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불러 주기를 바라지 말라. 하나님만이 너희의 랍비이시고 너희는 모두가 형제이기 때문이다.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지옥으로, 지옥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월리암 제임스는 “우리 세대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꾸므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 행복, 불행, 삶의 모든 자유가 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 5:3 /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5) 온유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7)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8)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래서 “내게 와서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만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인간의 모든 고통을 마음에서 보면서 고해와 생로병사(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를 말하면서 여기에서 끊임없이 자기 몸을 고행을 해서 ‘자기’를 깨뜨리려는 것이 불교요, 기독교는 내가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깨뜨려 주시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면서 한 가지를 더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온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온순(溫順)과 온유(溫柔)는 다릅니다. 온순은 자연적인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우리에게 주신 마음입니다. / 온순은 겉사람의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속사람의 성품입니다. / 온순한 사람은 성품이 양 같지만(부드럽게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자기 고집(자기 방식, 자기 뜻)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삽니다. / 온순하면서도 예수를 안 믿을 수 있지만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끝까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고, 화평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 2:5-8 /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인간)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8)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 그러면 어떻게 이 마음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방법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를 멘다는 말은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멍에 아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멍에라는 말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것을 멍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배우고, 따르고, 본받아야 할 사람이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날마다 그 삶 속에서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은혜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죄 사함 받으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받는 사건이요, 초보적인 은혜입니다. 물론 이 은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단계인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멍에를 메고 일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교육을 하셨습니다. 특별 과외공부도 많이 시키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이 더욱 배워야 할 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지식은 이론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진리로 예수님과 함께 멍에까지 메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십자가까지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배움입니다.
▶ 성장과 성숙은 다릅니다. 성장(growth)은 사람의 양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몸이 커가고 지식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을 ‘자란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에 비해서 성숙(maturation)은 사람의 질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사고의 깊이가 쌓여가고, 마음의 폭이 넓어가고, 인격이 고상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은 우리말로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유대 탈무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아무도 어른이 되지 않는다. 아이로서 나이를 먹을 따름이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키도 다 크고 배울 것도 다 배워 알아도 성숙하지 못하면 여전히 아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얼굴에 깊이 주름이 패인 아이, 수염을 기른 아이, 지팡이를 짚은 아이들이 쉽게 볼 수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성장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성숙해야 합니다. 벼가 다 자라도 알곡이 누렇게 무르익어서 고개를 숙여야 추수를 합니다. 우리 인간도 성장할 뿐 아니라 성숙해야 사람구실을 합니다. 어른다운 어른, 인간다운 인간이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성장과 신앙성숙은 다릅니다. 신앙성장이란 신앙의 외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에 관해 아는 것이 늘어납니다. 교회생활에 이력이 붙습니다. 점점 직분도 높아집니다. 이에 비해서 신앙성숙이란 신앙의 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신앙인격이 원숙해 집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나게 됩니다.
신앙이 성장했다고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성장했지만 신앙이 성숙치 못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 오래해서 직분은 남보다 높고, 맡은 일은 많은데 그 사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성장과 또 다른 신앙성숙에 대한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성숙을 위한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성숙의 열매를 맺혀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 어거스틴은 신앙성숙에 가장 필요한 덕목을 묻는 사람에게 첫째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무엇이냐 묻자 둘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셋째는 무엇이냐고 묻자 역시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성숙의 우선적인 덕목 즉 요건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우리가 겸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바로 알 때 비로소 겸손은 시작됩니다.
덴마크의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단독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단독자(憺者)란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존재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들은 모두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참다운 겸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 창 18:27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기도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느끼면서 자신을 티끌과 같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겸손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 바울의 경우를 대표적으로 봅니다. ❶ 고전 15:9을 보면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사도인데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깨닫고 나니 사도 중에 정말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❷ 엡 3:8에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사도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믿는 성도들 반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❸ 딤전 1:15을 보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보니 자신을 차마 성도의 반열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인의 반열로 더 내려갑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죄인들 중에서 괴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를 뼈저리게 느낄수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 자신의 모습도 점점 바로 깨닫게 됩니다. “내가 정말 별 것이 아니로구나!” 이런 점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눈으로 보니 다른 사람들이 다 나보다 낫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참다운 겸손이 꽃을 피우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 그대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단계에 비로소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 1. 아, 아~~~~값지게 하시었네 아, 아~~~~값지게 하시었네 / 우리 눈을 뜨게 하소서 어두운 우리 눈을 우리 손을 들게하소서 굽어진 우리 손을 / 우리 맘을 열어주소서 차가운 우리 맘을 우리 입을 열어주소서 닫혀진 우리 입을 / 나 세상욕심 버렸네 나 주님만 사랑하네 나 세상노래 버렸네 주님만 사랑해 / 나 세상소망 버렸네 나 주님만 자랑하네 나 세상노래 버렸네 주님만 사랑해 쓸모없는 이몸을 값지게 하시었네 나의 모든 인생을 주님위해 살겠네 / 아, 아~~~~값지게 하시었네 아, 아~~~~~값지게 하시었네 주님이.........
2. 주님 나를 잡아주셨네 넘어진 이 몸을 / 주님 나를 깨워주셨네 잠들은 내 영혼을 / 주님 나를 채워 주셨네 허전한 내 인생을 주님 나를 세워 주셨네 쓰러진 이 세상에서 / 나 세상욕심 버렸네 나 주님만 자랑하네 나 세상노래 버렸네 주님만 사랑해 / 나 세상소망 버렸네 나 주님만 자랑하네 / 나 세상노래 버렸네 주님만 사랑해 / 쓸모없는 이몸을 값지게 하시었네 나의 모든 인생을 주님위해 살겠네 / 아, 아~~~~~값지게 하시었네 아, 아~~~~~값지게 하시었네 주님이........
■ 네덜란드 출신의 코리텐 붐이라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나치의 핍박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동적인 간증으로 세계적인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분입니다. 한 번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저들이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간증이 끝날 때 청중들이 기립하여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 때 이 코리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기자가 물었습니다. “코리 여사님 기쁘지 않으십니까?” 이 때 코리 여사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귀가 착각하면 쓰겠는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연도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칠 때 주님이 타셨던 나귀가 자기보고 환호하는 줄 안다면 착각이 아니겠는가? 라는 말입니다. 자기는 단지 주님께서 타신 나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이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인 것을 깨달은 후로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로 살게 되며,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착각하고 교만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2.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첫 아담의 후손입니다. 우리의 존재 뿌리가 바로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아담의 성품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아담의 성품을 대표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남들보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 이런 교만이 아담의 성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주어진 존재로 태어난 것처럼 이 교만 역시 내 안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뿌리로부터 교만의 양분이 올라와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존재 뿌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의 성품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채워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서 우리의 성품 안에 이 겸손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우리의 모델 삼아서 본받고 배워가되 특히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1.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겸손 / 낮은 곳에 마음을 두십시다.
성경이 보여주는 주님의 모습은 철저하게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이 낮고 천한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왕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섬기셨습니다. 저 높은 예루살렘 왕궁이나 성전에 계시지 않고 저 낮은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지도자들, 부자들, 권력자들 그들 곁을 버리시고 병자들, 죄인들, 소외된 사람들 곁으로 오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철저하게 낮은 곳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높은 자리에 마음을 둡니다. 그 곁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낮은 곳에 마음을 쓰지 못합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여기서 교만이 싹트는 것입니다.
눅 14:7-11 / 예수께서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식탁의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을 눈여겨보시고 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8) `너희가 결혼 잔치에 초대받아 가거든 윗자리에 앉지 말라. 만일 너희보다 더 귀한 손님이 오면 9) 주인이 그를 데리고 너희가 앉은 자리에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주시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창피를 당하면서 제일 낮은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10) 그러므로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 그러면 주인이 너희를 보고 `친구여, 윗자리가 당신을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모든 손님들 앞에서 높아지는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면 낮아질 것이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2.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겸손 / 멍에를 메십시다.
빌 2: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철저한 순종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순종하는 사람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죽으라 하셨을 때 시늉만 하신 것이 아니고 정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가 무엇입니까? 멍에는 짐승들을 길들이고자 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소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도록 하기 위해 씌운 것입니다. 주인이 끄는 데로 가도록 하기 위해 어깨에 씌운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도 멍에를 쓰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신 그 멍에를 우리에게도 함께 쓰자고 말씀하십니다. 그 멍에를 메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멍에를 메고 사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3.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님의 겸손 / 섬기십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정말 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섬기셨고, 병자들을 섬기셨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찾아가셔서 기꺼이 친히 섬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예수님의 겸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요 13장을 보면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을 드시는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요 13:4을 보면 구체적인 예수님의 섬김의 행동이 묘사되어있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오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셨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종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요 13:14-5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일련의 행동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종이 섬기면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충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섬기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선생님이 섬기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 일산의 ○○교회는 6-700명 모이는 제법 큰 교회입니다. 제직회에서 관리집사를 두지 않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 특히 은퇴 장로님들이 팀을 짜서 앞장서서 화장실 청소하고, 권사님들이 예배 전후에 교회 본당 청소를 합니다. 물론 겸손이라고 말하기를 어렵지만 겸손한 모습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직분도 많이 맡고... 그러나 거기서 머물면 안 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품 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낮은 곳에 마음을 두고, 멍에를 메고 살며, 섬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당신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사셨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내말이 아니요. 아버지가 하는 말이요. 내가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하신 일이라.” 예수님은 언어 심사 행동을 모두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사는 동안은 ‘내가 내 왕이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본주의적으로 서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도 합니다. 무엇이 크리스천이 되는 것입니까? 크리스천은 내 마음에 보좌에서 나를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시되 먹고, 마시고, 일어나고, 누우며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순종하는 삶입니다. 신앙생활하는 중에 많은 시련과 환난이 옵니다. 왜 옵니까? 나를 깨뜨리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나’라는 자가 보좌에 당당히 앉아서 큰소리 할 때 하나님께서 앉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 “주 예수 대문밖에 기다렸으나 단단히 잠가 두니 못 들어가시네.” 우리의 마음 문을 내가 채워 놓고 있는데 주님이 어떻게 내 마음에 들어오십니까? 나를 깨뜨리기 위해서 많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무능력하고 무식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스스로 보좌에서 물러 나와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보좌에 앉히실 때 그때부터 순종의 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뿐 아니라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죽음에도 호화스러운 죽음이 있습니다. 비단요와 이부자리에 금침의 베개를 베고 많은 가족들이 우는 가운데서 죽는 사람들도 있고, 병원의 좋은 시설 속에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것은 온 세상 앞에서 벌거벗기고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서 험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코자 인류를 위해서 그 흉악한 십자가의 고난까지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외에는 인류를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죄가 뭐 그렇게 무서운 죄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워서 이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벌거벗고 처참한 고통을 겪어야 청산할 수 있는 죄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 죄를 짊어지고 인간이 그 죄를 스스로 선한 행위로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선한 행위, 고행, 수양, 도덕이 그 무지한 죄악을 청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죄짐에 눌려서 모두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죄악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못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인하여 청산하신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까?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고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데 우리하고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할 사람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보다 특이하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00살이 되어 낳은 이삭을 하나님께서 모리아 산에 데려와서 각을 떠서 장작불에 태워 재물로 드리라고 하실 때에 두말하지 않고 아들을 묶어 장작불 위에 얹어 놓고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자신을 완전히 버린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엄청난 순종입니다.
“하나님 내게는 그런 말 하지 말아 주십시오. 왜, 저는 그럴 정도의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아직 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하고 나하고는 저만큼 거리가 멉니다. 너무나 위대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외아들을 주기까지 순종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놓은 것을 모형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극한적인 순종은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순종의 삶을 살아야 십자가 밑에서 함께 동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절대 순종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에게 보조를 맞춰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 이자익(李自益) 목사는 예장통합 진주남노회 경내 경남 남해군 이동면 탑정리에서 1879출생하여 훌륭한 목회자요 존경받은 교계지도자였다. 6살 때 돌림병으로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육지로 나가 밥이라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아 곡창지대 김제로 가서 금산의 토호 조덕삼씨 집의 머슴이 되었다. 그의 정직과 성실함이 주인의 마음에 들어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고, 주인의 아들 조영호가 글을 배울 때 어깨너머로 보고 들어서 한문과 한글을 깨쳤다. 그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전북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 남장로교의 최의덕(L. B. Tate)선교사의 전도로 주인 조덕삼씨가 예수를 믿고 그 후 머슴 이자익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주인 조덕삼과 머슴 이자익이 1902년 가을에 함께 세례를 받고 후에 함께 집사직도 받았다. 1909년에 금산교회에는 날로 성장하였다. 교인이 100명 가까이 불어나자 장로를 한분 피택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로 피택에는 조덕삼 옹과 그의 마부 이자익 청년이 함께 나서게 되었다. 반상(班常)을 가리던 그 때로서는 주인과 머슴이 장로 경쟁을 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것이야말로 참된 성서적 교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이 없고, 그 자체로 함께 어울려 사는 신앙의 공동체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런 조덕삼 영수의 모습은 당시 한국교회에 신선하고 커다란 충격이었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사회의 많은 변화들을 주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교회 내에서는 반상의 문제로 진통을 겪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승동교회에는 무어(S. F. Moore) 선교사의 노력에 의해 최하층 천민이었던 백정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정 출신의 박성춘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 신자들이 이에 반발하고 떠나 안국동에 안동교회(홍문석골교회)를 세웠다. 또 서울 연동교회에도 갖바치들이 함께 모였는데, 갖바치 출신인 고찬익 집사가 먼저 장로로 선출되자 그 교회의 양반 신자들이 이탈하여 종묘 근방에 묘동교회를 설립한 역사가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가 ‘우리 모두의 종교’가 아니라 ‘양반의 종교’로 전락되는 것을 내한 선교사들이 막으려고 하던 과정에서 발생한 사례들이었다. 즉, 초기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어느 특권층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길 잃고 죽어가는 죄인들과 함께하는 교회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조 집사와 최의덕 선교사는 이자익 장로의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발견하고 학비를 지원하여 1910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시켜 목사가 되었다. 그 후 조덕삼 씨가 앞장서서 이자익 목사를 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맞이하여 목회를 잘 하였고 대전신학대학교를 설립하여 후진들을 양성하였고 좋은 대우와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문제있는 교회를 목회하면서 어려움을 해결하고 수습하는 일을 잘 하였고 신실한 목회와 덕스러운 생활은 널리 알려져서 1924년, 1947년, 1948년 세 차례에 걸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어 교계를 이끄셨다. 그가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배후에는 조덕삼 장로와 같은 훌륭한 후원자가 있었던 것이다. 장신대학교에서 한국교회사를 지도하셨던 김수진 교수는 “머슴 이자익이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실한 신앙에다 훌륭한 인격자였던 조덕삼씨가 존귀히 여겨 사랑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조덕삼씨도 곧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조영호 씨도 장로가 되었다. 그의 손자 조세형(趙世衡, 1931년 8월 22일~)씨도 장로가 되었다. 그는 조선일보 베트남 종군 기자로,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79년의 10대 총선에서 신민당 국회의원으로 원내에 진입, 13대부터 15대 총선까지 당선됨과 동시에 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의 부총재를 역임하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크고 귀하게 쓰임 받았으니 3대를 이어 한 교회를 섬기는 복된 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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