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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돈균] 포클레인-도시의 懷疑하는 기린
일정 수준 이상 도시화를 이룬 사회에서 이 사물을 이렇게 '일상적으로' 보는 일은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도시화가 고도로 진척되었지만 서울은 아직도 공사 중인 도시다. 국가적인 규모에서도 여전히 전 국토는 크든 작든 전후 복구사업을 하듯이 늘 작전 같은 '건설'이 진행 중이다. '문명화' 세계에서 '건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터나 사막 위에 집을 짓는 간단한 테트리스 같은 일이 아니다. 만들고 '재개발'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을 허물고 해체하고 묻어야만 한다. 역사는 골동품이 되며, 과거는 낡은 것이 되고, 원주민은 주변인으로 밀려나는 일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이 제사에는 애도가 없다. 포클레인은 이 현장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 사물이다. 이 사물은 오늘도 무심히 콘크리트 도심의 잔해들을 파헤치며, 땅을 긁어내고, 과거가 되어버릴 도시적 시간의 층 위에 새로운 마천루를 쌓아올리는 데 열중한다. 적어도 한국에서 이 마천루 관행은 시간을 지층의 방식으로 퇴적시키지 않는다. 움직이는 이 사물의 팔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 직선적인 의지로 충만하다. 운동하는 포클레인에는 회의(懷疑)하는 자의 표정도, 뒤척임의 그늘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 사물들 중에는 현대적 삶의 이념과 욕망을 극단적으로 관철시키는 것들이 있다. 맹목적 믿음과 신화적 열광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이런 사물들은 단순한 도구 이상 차원으로 승화되어 있다. 포클레인은 도시의 애도 없는 제사에 쓰이는 제의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혹시 움직이는 포클레인이 아니라, 정지해 있는 포클레인을 쳐다본 적이 있는가. 점심시간에 잠시 서 있는 포클레인을 본 적이 있다. 그때 포클레인은 무언가를 제사지내기 위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큰 팔을 지켜든 사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린과 같은 실루엣으로 긴 목을 드리우며 물끄러미 있었다. 긴 목은 '길게 생각하는 머리' 같았다. 쇠팔과 쇠이빨의 직선적인 단호함은 회의하고 사색하는 머리를 가진 곡선의 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목은 목전에 있는 대상에서 '일단 멈춤'을 할 줄 아는 목일 뿐만 아니라, 유연하게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 줄도 알 것 같은 곡선이었다.
충분히 강력한 힘을 가진 것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쇠같이 돌진하는 직선이 아니라, 기린의 목처럼 회의할 줄 아는 곡선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함돈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