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관 尹瓘 [尹彦頤 尹鱗瞻 尹世儒 尹商季]
윤언이, 윤인첨(鱗瞻), 윤세유(世儒), 윤상계(商季)의 전기가 포함됨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1
○尹瓘字同玄坡平縣人
윤관의 자는 동현(同玄)이니 파평현(坡平縣)사람이다.
高祖莘達佐太祖爲三韓功臣父執衡檢校少府少監.
그의 고조 윤신달(莘達)은 태조(왕건)를 보좌하고 삼한 공신(三韓功臣)칭호를 받았으며 아버지 윤집형(執衡)은 검교 소부 소감(檢校少府少監)벼슬을 지냈다.
瓘文宗朝登第歷拾遺補闕肅宗時累遷東宮侍講學士御史大夫吏部尙書翰林學士承旨.
윤관은 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 보궐을 지냈고 숙종 때에 여러 번 승진되어 동궁 시강 학사 어사대부 이부 상서 한림학사 승지로 임명되었다.
女眞本靺鞨遺種隋唐*閒爲*勾高麗{高勾麗}所幷後聚落散居山澤未有統一其在定州朔州近境者雖或內附乍臣乍叛.
여진은 본시 말갈(靺鞨)족의 유종(遺種)으로 수(隋)나라와 당(唐)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병탐(倂呑)되었다가 후에는 산림 속과 천택 가에 부락(聚落)을 형성하고 여기저기에 산재하여 전체가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그중 정주(定州)와 삭주(朔州) 지방 근처에 사는 자들이 간혹 고려 측에 귀순하여 복종하다가도 때로는 배반하곤 하였다.
及盈哥烏雅束相繼爲酋長頗得衆心其勢漸橫.
영가(盈哥)와 오아속(烏雅束)이 계속하여 추장(酋長)으로 되어 자못 군중의 지지를 받게 되자 점차 그 기세가 횡포하게 되기 시작하였다.
伊位界上有連山自東海岸 起至我北鄙險絶荒 人馬不得度*閒
이위(伊位)의 경계선 지점에 연달아 산줄기가 있는바 그것이 동해안으로부터 불끈 솟아서 고려 북부 국경까지 뻗쳤는데 지세가 험준하고 수림이 무성하여 인마(人馬)의 통행이 지극히 곤란하였다.
有一徑俗謂甁項言其出入一穴而已.
그 사이에 단 하나의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것을 ‘병목(甁項)’이라고 하는바 그것은 단 한 구멍으로 출입하는 까닭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邀功者往往獻議塞其徑則狄人路絶請出師平之.
그런데 공명심이 강한 사람들이 가끔 건의하기를 “단 한 줄기의 오솔길을 폐쇄하면 오랑캐(여진)의 통로가 끊어질 터이니 바라건대 군사를 파견하여 그것을 평정하시라”고 하였다.
七年女眞來屯定州關外疑其圖我誘執酋長許貞及羅弗等囚廣州 問果謀我也遂留不遣.
숙종 7년에 여진이 정주(定州)의 관문(關) 밖에 와서 머물러 있었으므로 혹시나 우리 나라를 침해하려는 것이나 아닐까? 의심하여 그들의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광주(廣州)에 잡아 가두고 고문한즉 과연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는 것이 판명되어 그만 그들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會邊將李日肅等奏: "女眞虛弱不足畏失今不取後必爲患." 烏雅束又與別部夫乃老有隙發兵攻之來屯近境王命林幹往備之幹邀功引兵深入擊之敗績死者大半.
때마침 국경 수비 군관 이일숙(李日肅) 등이 보고하기를 “여진은 허약해서 두려울 바 없다. 이런 시기를 잃고 정복하지 않으면 후에 반드시 우환거리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추장 오아속이 다른 부락의 부내로(夫乃老)와 분쟁이 생겨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하고 국경 계선 근방으로 와서 주둔하였으므로 왕이 임간(林幹)에게 가서 방비하라고 명령하였더니 임간이 공 세우기에 급급하여 깊이 쳐들어갔다가 패전하여 전사자가 태반이었다.
女眞乘勝 入定州宣德關城殺掠無
여진이 승전한 기세로 정주 선덕관(宣德關)의 성까지 침입하여 살해와 약탈을 무수히 감행하였다.
乃以瓘代幹爲東北面行營都統授 鉞遣之.
그래서 임간 대신에 윤관을 동북면 행영 도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임명하고 부월을 주어 보내었다.
瓘與戰斬三十餘級我軍陷沒死傷者過半軍勢不振
그런데 윤관이 적과 접전하여 적병 30여 명을 죽였으나 사상당한 고려군도 반수 이상이나 되었으므로 사기가 떨치지 못하였다.
遂卑辭講和結盟而還.
그래서 겸손한 언사로 강화를 청하여 적과 맹약을 맺고 돌아왔다.
王發憤告天地神明願借陰扶掃蕩賊境仍許其地創佛宇.
이 때문에 왕이 분노하여 천지신명에게 고하기를 “원컨대 신명은 은근한 도움을 내리시어 적을 소탕하게 하여 주시면 그곳에 절을 창건 하오리다!”라고 하였다.
瓘遷參知政事判尙書刑部事兼太子賓客奏曰:
윤관이 참지정사 판 상서 형부사 겸 태자 빈객으로 임명되었을 때 왕에게 아뢰기를
"臣觀賊勢 强難測宜休徒養士以待後日且臣之所以敗者賊騎我步不可敵也."
“제가 보기에는 적의 세력이 완강하여 무슨 변을 일으킬지 예측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병졸과 군관을 휴식시켜 후일에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제가 전일에 패전당한 원인은 적들은 말을 탔고 우리는 보행으로 전투한 까닭에 대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建議始立別武班自文武散官吏胥至于商賈僕隸及州府郡縣凡有馬者爲神騎無馬者爲神步
이때부터 비로소 별무반(別武班)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는바 문(文) 무(武)의 산관(散官) 서리(史胥)들로부터 상인 사환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과 주(州), 부(府), 군(郡), 현(縣)에서 말을 기르는 사람들 전부를 신기군(神騎軍)에 편입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神步軍)에 배속시켰다.
跳蕩梗弓精弩發火等軍年二十以上男子非擧子皆屬神步西班與諸鎭府軍人四時訓鍊又選僧徒爲降魔軍
그리고 조탕(跳蕩-돌격대), 갱궁(梗弓-활 쏘는 병종), 정노(精弩), 발화(發火-화공 부대) 등의 병종을 편대하였는데 20세 이상의 남자로써 과거 글공부를 하지 않은 청년은 모두 신보군에 배속시키고 무관(四班)과 각 진(鎭), 부(府)에 속한 군인들은 4철 계속하여 군사 훈련을 시켰으며 또 중(僧徒)을 선발하여 항마군(降魔軍)을 편성하였다.
遂鍊兵畜穀以圖再擧
그리고 군사 훈련과 군량 축적을 하여 재차 진공할 것을 계획하였다.
進中書侍郞同平章事.
윤관은 관직이 중서 시랑 평장사로 승진되었다.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2
睿宗卽位以喪未遑出師二年邊將報:
예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국상으로 인하여 출병할 겨를이 없었으나 그 후 2년에 국경 경비 군관의 보고에 의하면
"女眞强梁侵突邊城其酋長以一胡蘆縣雉尾轉示諸部落以議事其心 測."
“여진이 강해져서 우리 국경 도시에 자주 침입하고 있으며 그 추장이 한 개의 바가지(胡蘆)를 갈가마귀 꼬리(雅尾)에 달아서 각 부락으로 돌리면서 대사를 의논하고 있으니 그들의 심중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王聞之出重光殿佛龕所藏肅宗誓* 以示兩府大臣大臣奉讀流涕曰:
왕이 이 보고를 듣고 중광전(重光殿)의 불감(佛龕)속에 두었던 숙종의 발원문(誓疏)을 가져다가 양부(兩府) 대신들에게 보이니 대신들이 그 글을 읽고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聖考遺旨深切若此其可忘諸?" 乃上書請繼先志伐之王猶豫未決命平章事崔弘嗣筮于*大廟遇坎之旣濟遂定議出師
“선대 임금께서 남기신 뜻이 이 같이 심절하신데 어찌 적에 대한 복수를 잊을 수 있으리까?” 라고 결의를 표명하고 이어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여진을 토벌할 것을 청원한다.”
고 대신들이 상소하였으나 왕이 유예하면서 결심을 채택하지 못하고 평장사 최홍사(崔弘嗣)를 태묘로 보내 길흉을 점치게 하였더니 감지기제(坎之旣濟) 괘가 나왔으므로 드디어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以瓘爲元帥知樞密院事吳延寵副之. 瓘奏:
윤관을 원수로, 지 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을 부 원수로 임명하니 윤관이 왕에게 아뢰기를
"臣嘗奉聖考密旨今又承嚴命敢不統三軍破賊壘拓我疆土以雪國恥."
“제가 일찍이 선왕(聖考)의 밀지(密旨-음밀한 명령)를 받았고 이제 또 전하의 엄명(嚴命)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3군을 통솔하고 적의 보루를 격파하여 우리 강토를 개척하고 지난날의 국치(國恥)를 씻지 않겠습니까?” 라고 결의를 다지었다.
延寵頗以爲疑微語瓘瓘慨然曰:
그러나 오연총은 자못 성공을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윤관에게 가만히 속삭이니 윤관이 개연히 말하기를
"微公與我誰能出萬死之地以雪國家之恥策已決矣又何疑焉?" 延寵默然.
“당신이나 내가 아니면 그 누구가 능히 죽음의 땅으로 가서 국가의 치욕을 씻을 수 있단 말이요? 국책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무엇을 의아 하고 있는가?” 하고 타이르니 오연총은 잠자코 있었다.
王幸西京御威鳳樓賜 鉞遣之.
왕이 서경으로 가서 위봉루(威鳳樓)에 올라 거기서 부월을 주어 보내었다.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3
瓘延寵至東界屯兵于長春驛凡十七萬號二十萬
윤관과 오연총은 동부 지방(東界)에 이르러 군대를 장춘역(長春驛)에 집결하였으며 약 17만 명의 대군이었으나 20만이라고 선전하였다.
分遣兵馬判官崔弘正黃君裳入定長二州 謂女眞酋長曰:
그리고 병마 판관 최홍정(崔弘正)과 황군상(黃君裳)을 정주(定)와 장주(長) 두 고을에 파견하여 여진의 추장들을 꼬이기를
"國家將放還許貞羅弗等可來聽命." 設伏以待
“조정에서 허정과 나불 등을 석방하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와서 명령을 받으라.” 하고 일변 군대를 매복시킨 후 올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酋長信之古羅等四百餘人至飮以酒醉伏發殲之其中壯 者五六十人至關門持疑不肯入
추장들은 곧 고라(古羅)를 비롯한 4백여 명이 도착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술을 먹이어 취하게 만들고 복병을 발동시켜 놈들을 섬멸하였는데 그 중에도 장건하고 꾀 많은 자 50∼60명은 관문까지 와서 의심을 품고 좀처럼 들어오지 않았다.
使兵馬判官金富弼錄事拓俊京分道設伏又使弘正帥精騎應之
그래서 병마 판관 김부필(金富弼)과 녹사 척준경(拓俊京)으로 하여금 각 통로마다에 군사를 매복하게 하고 일변 최홍정으로 하여금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응원케 하였다.
擒殺殆盡.
이리하여 적들을 거의 다 잡아 죽였다.
瓘自以五萬三千人出定州大和門中軍兵馬使左僕射金漢忠以三萬六千七百人出安陸戍左軍兵馬使左常侍文冠以三萬三千九百人出定州弘化門右軍兵馬使兵部尙書金德珍以四萬三千八百人出宣德鎭安海拒防兩戍之*閒船兵別監吏部員外郞梁惟 元興都部署使鄭崇用鎭溟都部署副使甄應圖等以船兵二千六百出道鱗浦.
그리고 나서 윤관은 자신이 5만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 병마사 좌 복야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7백 명을 거느리고 안륙수(安陸戍)로 가고, 좌군 병마사 좌 상시 문관(文冠)은 3만 3천9백 명을 거느리고 정주 홍화문(弘化門)으로 향하고, 우군 병마사 병부상서 김덕진(金德珍)은 4만 3천8백 명을 거느리고 선덕진(宣德鎭)의 안해(安海), 거방(拒防) 두 초소(戍)의 중간 지점으로 나가고, 선병 별감(船兵別監) 이부 원외랑 양유송(梁惟첞)과 원흥(元興), 도부서사 정숭용(都部署使鄭崇用), 진명(鎭溟)과 도부서 부사 견응도(甄應圖) 등은 해군 2천6백 명을 인솔하고 도린포(道鱗浦)로 떠났다.
瓘過大乃巴只村行半日.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통과하는 데 한 나절이 걸렸다.
女眞見軍勢甚盛皆遁走唯畜産布野
고려 군대의 기세가 매우 강대한 것을 본 여진 사람들은 모두 도망치고 다만 가축들이 들에 널려 있었다.
至文乃泥村賊入保冬音城
문내니촌(文乃泥村)에 다다르니 적들은 보동음 성(保冬音城)으로 들어가서 농성하였다.
瓘遣兵馬鈴轄林彦與弘正率精銳急攻破走之
윤관이 병마 영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최홍정을 보내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급격히 공격하여 적들을 패주시켰다.
左軍到石城下見女眞屯聚遣譯者戴彦諭降女眞* 曰:
좌군은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렀을 때 여진군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통역 대언(戴彦)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하니 여진군이 대답하기를
"吾欲一戰以決勝否何謂降歟?" 遂入石城拒戰矢石如雨軍不能前
“우리는 한 번 싸워서 승부를 결정하려는데 어째서 항복하라고 하는가?” 하고 드디어 석성(石城)으로 들어와 항전하는데 그 화살과 돌이 빗발 같이 쏟아져서 아군이 진공할 수 없었다.
瓘謂俊京曰: "日 事急爾可與將軍李冠珍攻之." 曰:
이때 윤관이 척준경에게 “날이 저물면 사태가 위급하게 될 터이니 그대는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합력하여 공격하라.” 고 명령하니
"僕嘗從事長州過誤犯罪公謂我壯士請于朝宥之. 今日是俊京殺身報 之秋也."
척준경은 “제가 일찍이 장주에서 종군하다가 과오로 죄를 범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당신이 나를 장사(壯士)라고 하며 조정에 특청하여 용서받았으니 오늘이야 말로 바로 저의 한 몸을 희생하여 국가에 보답할 날입니다!”라고 하면서
遂至石城下 甲持楯突入賊中擊殺酋長數人
드디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추장 몇 명을 쳐죽였다.
於是瓘麾下與左軍合擊殊死戰大破之
이때를 타서 윤관의 휘하 대군과 좌군이 합세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격전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다.
賊或自投巖石老幼男女殲焉.
이때 적들은 혹 스스로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자도 있었으며 남녀 노소 섬멸되었다.
賞俊京綾羅三十匹又遣弘正富弼錄事李俊陽擊伊位洞賊逆戰久乃克之斬一千二百級
척준경에게 비단 30필을 상 주었으며 그리고 최홍정과 김부필이며 녹사 이준양(李俊陽)을 파견하여 이위동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적이 역습하여 왔으나 오랜 후에 승리하여 적 1천2백 명을 목 베었다.
中軍破高史漢等三十五村斬三百八十級虜二百三十人右軍破廣灘等三十二村斬二百九十級虜三百人左軍破深昆等三十一村斬九百五十級
중군은 고사한(高史漢) 등 35개 촌락을 격파하고 적 3백80 명을 죽이고 2백30 명을 포로하였으며 우군은 광탄(廣灘) 등 32개 촌락을 격파하고 적 2백90 명을 죽이고 3백 명을 포로하였으며 좌군은 심곤(深昆) 등 31개 촌락을 격파하고 적 2백50 명을 죽이었다.
瓘軍自大乃巴只破三十七村斬二千一百二十級虜五百人
윤관의 부대는 대내파지(大內巴只)촌을 비롯하여 37개 촌락을 격파하고 2천1백20 명을 죽였으며 5백 명을 포로하였다.
遣錄事兪瑩若告捷王喜賜瑩若爵七品命左副承旨兵部郞中沈侯內侍刑部員外郞韓 如賜詔奬諭兩元帥及諸將賜物有差.
그래서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 승전 보고를 올리니 왕이 기뻐하며 유영약에게 7품 벼슬을 주고 좌부승지 병부 낭중 심후(沈侯)와 내시 형부 원외랑 한교여를 전선으로 보내서 두 원수와 여러 장령들에게 격려하는 조서를 내리고 각각 차등 있게 상품을 주었다.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4
瓘又分遣諸將 定地界東至火串嶺北至弓漢伊嶺西至蒙羅骨嶺
윤관이 또다시 여러 장군들을 각 방면으로 보내 국경선을 획정(畵定)하였는바 동으론 화곳령(火串嶺)까지 북으론 궁한이령(弓漢伊嶺)까지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까지 이르렀다.
又遣日官崔資顥相地於蒙羅骨嶺下築城廊九百五十*閒號英州火串嶺下築九百九十二*閒號雄州吳林金村築七百七十四*閒號福州弓漢伊村築六百七十*閒號吉州又創護國仁王鎭東普濟二寺於英州城中.
그리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몽라골령으로 보내 터전을 잡아 9백50 간(間)에 달하는 성곽을 쌓고 영주성(英州)이라 이름 지었으며 화관령 아래에는 9백92 간의 성을 쌓고 웅주성(雄州)이라고 이름 짓고 오림금촌(烏林金村)에는 7백74 간의 성을 축조하고 복주성(福州)이라 명명하고 궁한이촌(弓漢伊村)에는 6백70 간의 성을 축조하여 길주성(吉州)이라고 불렀으며 또 호국인왕(護國仁王), 진동보제(鎭東普濟) 두 절을 영주 성 안에 창건하였다.
明年瓘延寵率精兵八千出加漢村甁項小路賊設伏叢薄*閒候瓘軍至急擊之軍皆潰僅十餘人在賊圍瓘等數重延寵中流矢勢甚危急
이듬해에 윤관과 오연총이 정병 8천 명을 거느리고 가한촌(加漢村)의 병모가지(甁項) 소로에 다다르니 적들이 소로 부근 숲 속에 매복하고 있다가 윤관의 부대가 그곳에 당도할 무렵에 급히 돌격하였으므로 윤관의 부대가 모두 괴멸되고 겨우 10여 명이 적에게 포로되어 있을 뿐이며 윤관은 겹겹이 포위당하였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형세가 심히 위급하였다.
俊京率勇士十餘人將救之弟郞將俊臣止之曰:
이때 척준경이 용사 10여 명을 인솔하고 그들을 구원하려 들어갈 때 그의 아우 낭장 척준신(俊臣)이 그를 말리면서 말하기를
"賊陣牢不可破徒死何益?" 俊京曰: "爾可歸養老父我以身許國義不可止."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은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소?” 라고 만류하니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乃大呼突陣擊殺十餘人
고 하더니 이어 크게 호통 치면서 돌진하여 10여 명을 쳐죽였다.
弘正冠珍等自山谷引兵來救賊乃解圍而走追斬三十六級
이때 최홍정과 이관진 등이 산골짜기로부터 군대를 인솔하고 나와서 구원하니 적들이 드디어 포위를 풀고 도망쳤으며 아군은 그것을 추격하여 36명을 죽였다.
瓘等以日晩還入英州城
윤관 등은 해가 저물어지므로 영주성으로 되돌아갔다.
瓘涕泣執俊京手曰:
이때 윤관이 척준경의 손을 잡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自今我當視汝猶子汝當視我猶父." 承制授閣門祗候
“이제부터 나는 너를 자식과 같이 생각할 터이니 너는 나를 아비와 같이 여겨 달라!” 고 하였으며 왕의 제서를 받들어 척준경을 합문지후(閤門祗侯)로 임명하였다.
酋長阿老喚等四百三人詣陣前請降男女一千四百六十餘人又降于左軍
적의 추장 가로환(呵老喚) 등 4백03 명이 군진 앞에 와서 투항하였고 또 남녀 1천4백60여 명이 좌군에게 투항하였다.
賊步騎二萬來屯英州城南大呼挑戰瓘與林彦曰:
이때 적의 보병과 기병 2만 명이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크게 외치며 도전하니 윤관과 임언이 상의하기를
"彼衆我寡勢不可敵但當固守而已."
“적병은 다수이고 아군은 소수이니 대적할 길이 없다. 그저 방어만 하는 것이 상책이다.” 라고 하니
俊京曰: "若不出戰敵兵日增城中粮盡外援不至將若之何前日之捷諸公不見今日亦出死力以戰請諸公登城觀之."
척준경이 말하기를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마다 증가되고 성안의 양식은 점점 없어지며 외부의 원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요? 지난날의 승리한 예를 당신들은 보지 않았나요? 오늘도 또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울 터이니 여러분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시오”
乃率敢死士出城與戰斬十九級賊敗 奔北
하고 결사전에 지원하는 용사들을 인솔하고 성 밖으로 나가 적들과 싸워 19명을 죽이니 적들이 패하여 북녘으로 도망쳤다.
俊京 笛凱還瓘等下樓迎之携手交拜
척준경이 북을 치고 젓대를 불며 개선하니 윤관 등이 성루에서 내려 와서 영접하며 손을 잡고 서로 절하였다.
瓘延寵乃率諸將會于中城大都督府權知承宣王字之自公 城領兵詣都督府卒遇虜酋史現兵與戰失利喪所乘馬
윤관과 오연총이 중성(中城) 대도독부(大都督府)에로 여러 장령들을 소집하였는데 그때 권지 승선 왕자지(權知承宣王字之)가 부대를 인솔하고 공험성으로부터 도독부로 오는 도중에 적의 추장 사현(史現)의 군대를 만나 싸우다가 패전하고 그가 타고 있던 말까지 적에게 빼앗겼다.
俊京卽引勁卒往救敗之取虜介馬以還
그래서 척준경이 즉시 힘센 군사를 데리고 구원하러 가서 적을 격파하고 적에게 빼앗겼던 말까지 탈환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女眞兵數萬來圍雄州
여진군 수만 명이 웅주(雄州)를 포위하였다.
弘正訓勵士卒衆皆思鬪卽開四門齊出奮擊大敗之
최홍정이 사졸을 격려하니 전체 대원들이 모두 적과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결심하여 나섰으므로 즉시 4대문(四門)을 열고 일시에 뛰어나가 힘껏 싸우니 적이 대패하였다.
斬八十級獲兵車五十餘兩中車二百兩馬四十匹其餘兵仗不可勝記
전과는 적 80명을 살해 또는 포로하고 병거(兵車) 50여 대와 중차(中車) 2백 대, 말 40필을 노획하였고 기타 무기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노획하였다.
時俊京在城中州守謂之曰:
그때 척준경이 성안에 있었는데 그 고을 원이 말하기를
"城守日久軍饗將盡外援不至公若不出城收兵還救城中士卒恐無 類."
“오랫동안 성을 지키느라고 군량은 거의 다 소비되어 가고 외부의 원조는 오지 않으니 당신이 만약 성 밖으로 나가서 군사들을 수집하여 가지고 돌아와서 구원하여 주지 않으면 성중의 군사들은 아마도 살아 남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俊京服士卒破衣夜 城而下歸定州整兵道通泰鎭自也等浦至吉州遇賊與戰大敗之城中人感泣.
척준경이 병사의 헌 옷을 입고 밤중에 줄에 달려 성을 넘어 정주로 돌아가서 대오를 정돈하고 통태진(通泰鎭), 자야등포(自也等浦)를 거쳐 길주에 이르러 적과 만나 싸워서 크게 격파하니 성안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었다.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5
瓘又城英福雄吉咸州及公 鎭遂立碑于公 以爲界遣其子彦純奉表稱賀曰:
"윤관이 다시 영주(英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함주(咸州)와 공험진(公險鎭)에 성(城)을 쌓고 드디어 공험령에 비(碑)를 세워 국경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윤언순(彦純)을 왕에게 보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축하의 뜻을 표하였다.
"聖人之德允合於乾坤仁義之兵已平其夷*은{狄}惟將及卒旣 且呼.
“ 폐하의 성덕이 천지와 같이 장하시어 정의(仁義)의 군대가 이미 오랑캐를 평정하고 장수와 병사들이 환희에 들끓고 있나이다.
竊以東女眞潛伏奧區寔繁醜類
생각건대 동여진은 산 구석에 잠복하여 그 종족들을 번식시켜 왔습니다.
遠從爾祖曾之世嘗被我朝家之恩狼貪浸畜其叛心犬吠頻 於戶外侵 關塞寇攘士民
그들은 그 조부와 증조 때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 조정이 혜택을 받아 왔으나 승냥이 같은 탐욕으로 점차 반심을 품고 우리 나라 국경 밖에서 자주 으르렁거리고 있으며 관문 요새들을 침범하고 우리의 군사와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있었습니다.
制御之寬而謂之易陵肆 之志而謂之莫禦.
우리 조정의 관대한 처치에서 버릇이 자라서 우리를 가리켜 하잘것없다고 떠벌리며 감히 침범할 야심을 품고는 우리가 방어할 수 없으리라고 장담하곤 하였습니다.
先皇故憤而欲伐陛下方繼而爲圖以兵危故始憚裁施以謀衆故終歸滯泥.
선황(先皇-숙종을 가리킴)께서 분노하시어 놈들을 정벌하려 하셨고 폐하께서도 그 뜻을 이어 거사하려 하셨으나 무력행사를 위험한 일이라 하시어 처음에는 결정 집행을 꺼리셨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참작하시느라고 이 계획이 마침내 침체되었습니다.
然而策勝負者存乎熟知變通者貴乎時事機可乘
그러나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적의 정세를 잘 분석하는 데 있고 임기 응변(變通)을 하는 데는 당시 사태를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聖智獨照先休吾士卒以觀其可用繼慮彼虛實以指其必擒乃命元戎 行大戮而臣受節鉞之制
시기가 추이됨에 따라 폐하께서는 이를 명철히 통찰하시고 우선 군대를 휴식시키면서 다시 진격할 시기를 관망하셨으며 계속하여 적군의 실력 정도를 주시하시다가 기필코 생포할 수 있음을 간파하시자 곧 대군을 동원하여 대토벌을 단행할 것을 분부하셨고 저는 병부(節)와 부월을 주시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擧征鼓而行氣動於軍威加於敵
진군의 북을 울리며 행진하니 사기는 충천하였고 위세는 적을 압도하였습니다.
江河注壑寸膠不能以防之 石轉峯虛卵決然其破矣
적들은 마치 큰 강물이 골짜기로 쏟아지는데 한 줌의 모래가 그것을 막지 못하는 것과 같았고 봉우리에서 굴러 내리는 바윗돌에 속 빈 계란이 깨지는 것과 같이 격파되었습니다.
虜踰於半萬斬獲近於五千委積散於閭閻奔走交於道路
포로한 것이 5천 명 이상이요, 살상이 5천 명에 가까웠으며 적들이 버린 물자는 부락마다 가득하였고 도망치는 적들이 길에 찼었습니다.
山川險阻城池因得以高深原野膏 田井亦從而耕鑿在
적의 땅은 원래 산천이 험준하고 성들도 높고 견고했으며 전야가 비옥하여 경작에 적당한 곳입니다.
昔人求而未得者今玆天與而旣取之上足以謝宗廟在天之靈下足以雪朝廷積年之恥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 땅을 얻고자 하면서도 얻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이제 하늘이 우리에게 주어 차지하게 되었으니 위로는 선조들의 영혼에 감사를 드릴 만한 경사이요. 아래로는 우리 나라의 여러 해 쌓인 치욕을 씻어 버린 대승리였습니다.
且彼周王 之伐漢帝凶奴之征所以拓土開邊而得爲民去害比之今日宜在下風.
또한 옛날 중국의 주나라 무왕이 험윤을 토벌한 것과 한나라 무제가 흉노(凶奴)를 정벌한 까닭은 국토를 개척하여 백성의 피해를 제거하려는 데 있었던 것인바 오늘의 승리에 비한다면 그것은 응당 낮게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此豈微臣淺智駑材能成巨
불민한 저의 능력으로써야 이 거대한 위훈을 어떻게 이룩하였겠습니까?
實由陛下聖謀神 坐定遐
실로 폐하께서 거룩하신 전략으로써 천 리 밖의 작전을 보는 듯이 지도하신 결과로 얻은 것입니다.
苟非其然孰使之矣.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누가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伏乞命書史冊垂耀無窮.
그러므로 이 사적을 역사에 기록하여 영원히 후세에 빛내도록 분부하시기를 바랍니다.”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6
王遣內侍衛尉注簿康英俊賜瓘等羊酒幷賜軍人銀*사一面銀甁四十事.
"왕이 내시 위위 주부(內侍衛尉主簿) 강영준(康英俊)을 보내 윤관 등에게 술과 양(羊)을 보내 주고 동시에 군인들에게 은사라(옛날 군대 용 세숫대야인데 그 형태는 징과 같음) 한 개와 은병(고려 때의 화폐의 일종) 40개를 주었다.
瓘又使林彦記其事書于英州廳壁曰:
윤관은 또 임언에게 지시하여 이번의 사적을 영주(英州) 관청 벽에 다음과 같은 글로써 기록하게 하였다.
"孟子曰: '弱固不可以敵强小固不可以敵大.' 吾諷斯言久矣而今信之矣
“맹자의 말에 ‘약한 자는 원래 강한 자에게 대적할 수 없고 작은 자는 큰 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내가 이 말씀을 외운 지는 오래나 오늘에 와서 확신하게 되었다.
女眞之於國家强弱衆寡其勢縣殊而窺 邊鄙.
여진은 우리 나라에 비할 때 병력의 강약과 인구의 다소에서 현저한 세력의 차가 있는 데도 항상 국경을 엿보고 있었다.
於肅宗十年乘隙構亂多殺我士民其繫 爲奴隸者亦多矣肅宗赫然整旅將欲仗大義以討之惜乎厥功未集永遺弓劒.
숙종 10년에는 우리 나라의 경비가 약한 틈을 타서 전란을 도발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을 많이 살륙했고 또 납치하여다가 노예로 만든 인원 수도 막대하였으므로 숙종께서 진노하시어 군대를 정비하고 장차 정의의 토벌을 단행하시려던 차에 가석할손 그 일을 성사하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今上嗣位亮陰三載甫畢祥 謂左右曰:
금상 폐하가 즉위하신 후 3년의 몽상(亮陰)을 필하시자마자 좌우 시신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女眞本*勾高麗{高勾麗}之部落聚居于盖馬山東世脩貢職被我祖宗恩澤深矣
‘여진은 본시 고구려의 한 부락으로서 개마산(盖馬山) 동편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우리 나라에 조공하여 왔고 우리 선대의 깊은 은혜도 입어 왔다.
一日背畔無道先考深憤焉.
그런데 일조에 무도하게도 배반하였으므로 부왕께서 대단히 노하셨다.
嘗聞古人之稱大孝者善繼其志耳
일찍이 옛사람의 말을 듣건대 ‘큰 효도란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朕今幸終達制肇覽國事 擧義旗伐無道一 先君之恥.'
내가 오늘 3년 상을 마치고 국사를 총람하기 시작하였으니 어찌 정의의 칼을 들어 저 무도한 적을 정벌함으로써 선군이 당하신 치욕을 깨끗이 씻지 않을 수 있겠는가?’
乃命守司徒中書侍郞平章事尹瓘爲行營大元帥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吳延寵爲副元帥率精兵三十萬 專征討.
라고 하신 다음 수 사도 중서 시랑 평장사 윤관을 행영 대원수로 지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 오연총을 부원수로 각각 임명하고 정병 30만 명을 영솔시켜 정벌을 맡아 행하게 하였다.
尹公事業傑然嘗慕庾信氏之爲人曰:
윤공(尹公)은 사업에서 특출한 분으로 항상 김유신(金庾信)의 위인을 사모하며 말하기를
'庾信六月 河以渡三軍此無他至誠而已予亦何人哉.'
‘김유신이 (전쟁할 때) 6월에 강물이 결빙되어 삼군(三軍)을 도하시킨 것은 다름 아닌 지성으로써 이루어진 것일 뿐인데 나도 또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其至誠所感靈異之*跡屢聞焉.
그의 지성이 감응되어 이루어진 기적도 자주 들리었다.
吳公時之重望天性愼謹臨事必三思其良圖大策施無不中.
오공(吳公)은 당시의 명망이 대단하였으며 그의 천성이 신중하여 매사를 처결할 때에는 반드시 재삼 생각한 후에 실천하였으므로 그가 세운 국가 대책은 성공 못한 일이 없었다.
兩公嘗有志於此聞命憤激擁兵東下出師之日躬 甲胄未及誓衆 淚交 莫不用命 入賊境三軍奮呼一以當百 枯破竹何足喩其易哉!
이 두 분은 전일부터 국방에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왕의 명령을 받고 분심이 격발되어 군사를 영솔하고 동쪽을 향하여 떠났으며 출사하던 날에는 친히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였으며 휘하 장졸들과 선서식을 하기도 전에 벌써 여러 장졸들은 눈물을 흘리며 명령에 충실히 복종할 결의를 한 사람 같이 다졌으며 적군의 경내에 진격하였을 때에는 전군의 사기가 충천하여 일당백의 기세로 족쳤으니 그 기세는 이른바 마른 나무를 꺾으며 대쪽을 쪼긴다는 말로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斬首六千餘級載其弓矢來降於陣前者五十千餘口其望塵喪魄奔走窮北不可勝數.
목을 베인 것이 6천여 명이요. 무기를 바치고 군진(陣) 앞에 와서 항복한 자가 5만 여명이며 기타 아군을 보기만 하여도 혼이 나서 북녘 끝까지 도망친 놈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嗚呼女眞之頑愚不量其强弱衆寡之勢而自取於滅亡如是.
아! 여진의 우둔함이어! 세력의 강약과 병력의 다소를 헤아리지 않고 이같이 스스로 멸망의 길을 취하였도다!
其地方三百里東至于大海西北介于盖馬山南接于長定二州山川之秀麗土地之膏 可以居吾民而本*勾高麗{高勾麗}之所有也
점령한 지방은 면적이 3백 리며 동녘으로는 대해에 접했고 서북방에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녘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 두 고을에 연접하였는바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넉넉히 우리 사람들이 거주할 만한데 이곳은 본래가 고구려의 영토였다.
其古碑遺跡尙有存焉.
그 증거로는 낡은 비석과 유적이 오늘까지도 보존되어 있다.
夫*勾高麗{高勾麗}失之於前今上得之於後豈非天歟.
그런즉 전일에 고구려가 잃었던 영토를 금일에 성상께서 다시 찾으신 것이니 이 아니 천명인가!
於是新置六城一曰鎭東軍咸州大都督府兵民一千九百四十八丁戶二曰安嶺軍英州防禦使兵民一千二百三十八丁戶三曰寧海軍雄州防禦使兵民一千四百三十六丁戶四曰吉州防禦使兵民六百八十丁戶五曰福州防禦使兵民六百三十二丁戶六曰公 鎭防禦使兵民五百三十二丁戶
이에 새로 여섯 개 성(城)을 설치하였으니 첫째는 진동군 즉 함주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兵民)이 1천9백48 정호(丁戶)요. 둘째는 안령군 즉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천2백38 정호요. 셋째는 영해군 즉 웅주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1천4백36 정효요. 넷째는 길주 방어사(吉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백80 정효요. 다섯째는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6백32 정효요. 여섯째는 공험진 방어사(公險鎭防禦使)이니 여기에 속한 병민이 5백32 정호이다.
選其顯達而有賢材能堪其任者鎭撫之詩所謂'于蕃于宣以蕃王室'者也
이상 각 성의 주민들 중에서 현명하고 재간이 있어서 능히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지방을 진무(鎭撫)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곧 시경에 이른바 ‘정복하고 선무하여 왕실의 울타리로 삼았다(于蕃于宣以蕃王室)’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有以見晏然高枕無東顧之憂矣.
이제부터 앞으로는 동녘 국경에 대한 근심이 없어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다.
元帥告予曰: '昔唐相裴晉公出征淮西及其平幕客韓愈爲之碑以廣其事故後之人知憲宗英偉絶人之德而歌頌之.
원수(윤관)가 나에게 말씀하기를 ‘옛날 당(唐)나라 재상 배진공(裴晋公-배도‘裴度’)이 회서(淮西)로 출정하여 적을 평정한 후 종군하였던 문객 한유(韓愈)에게 그 승전한 실황을 기술하게 하여 비석(碑)에 새겨 그것을 세상에 널리 알렸으므로 후세의 사람들이 당나라 헌종의 영특하고 절등한 덕을 알고 그를 찬송하게 되지 않았는가?
子幸從事于此詳其本末曷不作記使吾聖朝無前之偉績垂于無窮乎?' 彦承命援筆誌之.
지금 그대가 다행이 이곳에 종군하고 있는 이상 어찌 이번의 대승전의 전말을 기록하여 우리 나라 임금님의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는 일을 아니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로 나 임언(林彦)이 그 지시를 받고 붓을 들어 기록하노라.”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7
瓘獻 三百四十六口馬九十六匹牛三百餘頭
윤관이 임금에게 포로 3백46 명과 말 96필, 소 3백여 두를 바쳤다.
城宜州通泰平戎二鎭與咸英雄吉福州公 鎭爲北界九城
그리고 의주(宜州)의 통태진(通泰鎭), 평융진(平戎鎭) 등 지방에 성을 쌓았는바 이미 축성한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길주(吉州), 복주(福州) 및 공험진(公險鎭)을 합하면 이것이 북계의 아홉 성(北界九城)이다.
皆徙南界民以實之.
이곳에는 모두 남녘 지방의 백성들을 이민하여서 채웠다.
王拜瓘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延寵 謀同德致遠功臣尙書左僕射參知政事
그후 왕이 윤관에게 추충 좌리 평융 척지 공신 칭호와 문하시중 판 상서 이부사 지 군국 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史部事知軍國重事) 관직을 주고 오연총에게는 협모 동덕 치원 공신 칭호와 상서 좌복야 참지정사(協謀同德致遠功臣尙書左僕射參知政事) 벼슬을 주었다.
遣內侍郞中韓 如齎詔書告身及紫繡鞍具廐馬二匹至雄州分賜之.
그리고 내시 낭중 한교여를 보내 조서(詔書)와 교지(告身)이며 자색 수(繡) 놓은 안장과 구마(廐馬) 2필을 웅주까지 가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凱還王命具鼓吹軍衛以迎之遣帶方侯 齊安侯*서勞宴於東郊.
그들이 개선할 때에는 왕이 환영하는 군악과 의장병을 갖추어 영접하게 하고 대방후(帶方侯) 왕보와 제안후(齊安侯) 왕서를 동교(東郊)에 파견하여 위로연을 배설하여 주었다.
瓘延寵詣景靈殿復命納 鉞
윤관과 오연총이 경령전(景靈殿)에 참배하여 복명하고 부월을 반납하였다.
王御文德殿引見問邊事入夜乃罷.
왕은 문덕전(文德殿)에서 그들을 인견하고 국경 지대의 사정을 물었는데 날이 저문 후에야 인견이 끝났다.
未幾女眞又圍雄州王遣延寵救之復遣瓘征之瓘獻 三十一級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진이 또다시 웅주를 포위하니 왕이 오연총을 보내 구원하고 거듭 윤관을 보내 적을 토벌하게 하였는바 윤관이 적의 머리 31개를 바쳤다.
尋封瓘鈴平縣開國伯食邑二千五百戶食實封三百戶加延寵攘寇鎭國功臣號.
뒤미처 윤관을 영평현 개국백으로 봉하고 식읍 2천5백 호에 식실봉(食實封) 3백 호를 주었으며 오연총에게는 양구 진국 공신(攘寇鎭國功臣) 칭호를 더 주었다.
又明年女眞圍吉州延寵與戰大敗王又遣瓘救之命近臣餞于金郊驛.
그 이듬해에 여진이 또 길주를 포위하니 오연총이 그들과 싸웠으나 대패하였으므로 왕이 윤관을 파견하여 구원하기로 하고 측근자를 금교역(金郊驛)까지 보내서 전송하게 하였다.
瓘延寵自定州勒兵赴吉州行至那卜其村咸州司錄兪元胥馳報:
윤관과 오연총이 정주로부터 대오를 정비하고 길주로 가던 도중 나복기촌(那卜其村)에 도착했을 때 함주 사록(咸州司錄) 유원서(兪元胥)가 급보를 보냈는데
"女眞公兄 弗史顯等叩城門曰: '我輩昨到阿之古村太師烏雅束欲請和使我傳告兵馬使然兵交不敢入關請遣人于我場庶以太師所諭詳實傳告.'"
“여진의 공형(公兄), 요불, 사현(史顯) 등이 성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우리들이 어제 아지고(阿之古)촌에 가니 태사 오아속(太師烏雅束)이 화친을 청하려고 우리들을 보내면서 귀국 병마사에게 이 뜻을 전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전 중이므로 관문(關門) 안에 들어갈 수 없으니 청컨대 우리 곳까지 사람을 보내 태사의 말한 바를 상세히 전달받도록 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瓘等聞之還入城翼日遣兵馬記事李管仲於賊場謂女眞將吳舍曰:
윤관 등이 이 보고를 듣고 성(城)으로 돌아와서 이튿날 병마 기사(兵馬記事) 이관중(李管中)을 적진으로 파견하여 여진의 장군 오사(吳舍)에게 통고하기를
"講和非兵馬使所得專宜遣公兄等入奏天庭." 舍大悅 弗史顯等復至咸州告曰:
“강화하는 일은 병마사가 독단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니 너희들의 공형 등을 보내서 임금께 아뢰어 보라”고 하니 오사가 대단히 기뻐 하였으며 요불, 사현 등이 다시 함주로 와서 말하기를
"我等願入朝時方交戰疑懼不敢入關請以官人交質."
“우리들은 귀국 조정에 가서 교섭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재 교전하는 때라 위험하여 갈 수 없으니 청컨대 귀국의 관리를 인질(人質)로 교환하여 달라”고 하였다.
瓘以孔沃李管仲異賢等爲質 弗等遂來請還九城地.
그래서 윤관이 공옥(孔沃), 이관중, 이현(異賢) 등을 인질로 보내니 드디어 요불 등이 와서 북방의 아홉 성(城)을 반환하여 달라는 조건을 제출하였다.
初朝議以得甁項塞其徑狄患永絶及其攻取則水陸道路無往不通與前所聞絶異女眞旣失窟穴誓欲報復乃引遠地群酋連歲來爭詭謀兵械無所不至
당초에 조정의 견해로는 병목(甁項)만 점령하면 여진족의 교통로가 폐쇄되므로 그들에 관한 근심은 영원히 없어지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 요지를 점령하고 본즉 수로, 육로의 교통로는 어느 곳에도 통하지 못할 곳이 없이 전일의 소문과는 전혀 다른 형편이었으며 여진은 저희들의 소굴을 잃은 후 기어코 보복하려고 맹세하고 잃은 땅을 반환하여 달라는 구실로 여러 추장들이 매년 몰려 와서 전쟁을 야기하여 흉악한 속임수와 갖은 병기로 별별 수단을 다 부렸다.
以城險固不猝拔. 然當戰守我兵喪失者亦多且拓地大廣九城相去遼遠谿洞荒深賊屢設伏抄掠往來者.
우리의 성들이 견고하여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으나 전투와 방어에서 우리 병력의 상실도 또한 많았으며 또 새로 얻은 지역이 지나치게 넓고 아홉 성들의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골짜기가 깊고 수목이 무성하여 적들이 자주 매복하고 있다가 왕래하는 행인들을 약탈하였다.
國家調兵多端中外騷擾加以飢饉疾疫怨咨遂興女眞亦厭苦.
국가에서도 군사의 조련에 비용이 많이 들어 중앙과 지방이 소란할 뿐만 아니라 기근과 유행병이 겹쳐서 인민의 원망이 드디어 일어났으며 여진도 또한 우리를 귀찮게 굴었다.
至是王集群臣議之竟以九城還女眞輸戰具資糧于內地撤其城.
이때 왕이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고 토의한 결과 마침내 아홉 성을 여진에게 반환하기로 결정하고 그 성들에 저장했던 전투 기자재와 식량 등을 내지로 옮기고 성으로부터 철수하기로 하였다.
平章事崔弘嗣金景庸 知政事任懿樞密院使李瑋入對宣政殿極論瓘延寵敗軍之罪王遣承宣沈侯於中路收其斧鉞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참지정사 임의(任懿), 추밀원사 이근(李瑾) 등이 선정전(宣政殿)으로 들어가서 왕에게 면대하고 극렬하게 윤관과 오연총의 패전한 책임을 논죄하였으므로 왕이 승선 심후(沈侯)를 파견하여 그들이 돌아오는 중로에서 부월을 회수하였다.
瓘等不得復命歸私第.
그래서 윤관 등이 왕에게 복명하지 못하고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宰相臺諫請治其罪諫臣金緣李載等伏閤固爭曰:
그 후에도 재상과 대간이 계속 패전한 죄를 추궁할 것을 요청했으며 간관 김연(金緣)과 이재(李戴) 등은 합문(閤) 밖에서 임금에게 견결하게 간쟁하기를
"瓘等*妾{妄}興無名之兵敗軍害國罪不可赦請下吏."
윤관 등이 명목이 서지 않는 병력을 함부로 동원하여 군대를 패전시키고 국가에 손해를 끼친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하옥(下獄)하라는 명령을 내리시기를 바라나이다”고 하였으나
王命沈侯宣諭曰:
왕은 심후를 시켜서 간관들에게 타이르기를
"兩元帥奉命行兵自古戰有勝敗豈爲罪哉?" “
두 원수는 왕명을 받들고 병력을 움직였으며 예로부터 전투에는 승패가 있는 법이니 어찌 죄를 줄 수야 있느냐?”고 하였으나
緣等又爭不已王不得已止免官削功臣號尋拜瓘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瓘上表辭不允曰:
김연 등이 또한 계속 간쟁하였으므로 왕도 부득이 윤관 등의 관직과 공신 칭호만을 삭탈하였다가 미구에 윤관을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관직과 상주국 훈위를 주고 감수국사로 임명하였더니 윤관이 글을 올려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교서를 내리기를
"朕聞昔李廣利之伐大宛也僅獲駿馬三十匹而武帝以萬里征伐不錄其過陳湯之誅 支也矯制擅興師而宣帝以威振百蠻封爲列侯.
“내 듣건대 옛날 이광리(李廣利)가 대완(大宛)을 정벌할 때에 겨우 준마(駿馬) 30필을 노획하고 돌아왔을 뿐이었으나 한 무제(武帝)는 그의 만 리 원정한 공을 생각하고 그 죄과는 기록하지 않았으며 진탕(陳湯)이 질지를 베었을 때에 임금의 명령 없이 독단으로 군사 행동을 하였으나 선제(宣帝)는 그가 한나라의 위력을 모든 오랑캐들에게 떨쳤다 하여 그를 제후로 봉한 일도 있었다.
卿之伐女眞受先考之遺旨 寡人之述事身冒鋒鏑深入賊壘斬 虜不可勝計而闢百里之地築九州之城以雪國家之宿恥則卿之功可謂多矣.
그대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돌아가신 부왕의 뜻을 받든 것이요. 나의 의사를 본받은 것으로서 목숨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 깊이 쳐들어가서 적을 살해하였고 포로한 수도 일일이 계산할 수 없으리만큼 많았으며 백 리의 국토를 넓히고 아홉 성을 쌓아 국가의 오랜 치욕을 갚았으니 그대의 공로야 말로 크다고 하겠다.
然夷*은{狄}人面獸心叛伏不常厥有餘醜無所依處故酋長納降請和
그런데 오랑캐란 외모는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이라 반복이 무상한데 남아 있는 놈들이 의거할 곳이 없어진 까닭에 그 추장들이 항복하고 화의를 청원하여 왔다.
群臣皆以爲便朕亦不忍遂還其地.
그래서 모든 신하들이 그러는 것이 온편하다는 의견을 가졌었고 나 역시 그놈들을 불쌍히 여기고 드디어 그 땅을 반환한 것이다.
有司守法頗有論劾遽奪其職朕終不以卿爲咎庶幾有孟明之復濟也.
그런데 주관 부서의 관원들이 법을 고수하고 자못 탄핵하는 까닭에 그대의 관직을 삭탈하였으나 나는 종시 그대를 허물치 않은 것은 옛날 진나라 맹명(孟明)의 실패를 회복한 것과 같은 앞날의 성공을 기대함이었다.
今朕之授卿者抑卿之舊職也何足以辭
이제 내가 그대에게 준 관직은 그대가 과거에 받았던 관직이거늘 무엇이 사양할 여지가 있는가?
當 眷懷速就乃職." 瓘再表讓又不允
마땅히 나의 보살피려는 심회를 이해하고 속히 직무에 취임하라!”고 하였더니 윤관이 재차 사퇴했으나 왕은 역시 허락지 않았다.
六年卒謚文敬.
그는 예종 6년(1111)에 죽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景)이라 하였다.
#高麗史96卷-列傳9-尹瓘-008
瓘少好學手不釋卷及爲將相雖在軍中常以五經
윤관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장상(將相)이 된 후 진중에 있을 때에도 항상 경서(五經)를 가지고 다니었다.
自隨好賢樂善冠於一時.
또한 어진 이를 우대하고 착한 일을 즐겨 하였으므로 신망이 당대의 으뜸이었다.
仁宗八年配享睿宗廟庭避綏陵諱改謚文肅.
인종 8년에 예종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후에 그의 시호가 수릉(綏陵)의 이름자와 같은 것을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쳐 주었다.
子彦仁彦純彦植彦 彦旼二人祝髮
그의 아들은 윤언인(彦仁), 윤언순(彦純), 윤언식(彦植), 윤언이, 윤언민(彦旼)이요 두 아들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彦純睿宗朝以侍御史如遼賀天興節. 時金兵起路梗又高永昌叛據東京
윤언순(彦純)은 예종 때에 시어사(侍御史)로서 요(遼)나라에 천흥절(天興節-요 임금의 생일) 축하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때 금나라가 전쟁을 일으켜서 통로가 두절되었고 또한 요의 고영창(高永昌)이 본국을 배반하고 동경(東京)을 근거로 삼고 반란중이었다.
彦純與徐昉李德允等爲永昌所拘逼令
윤언순은 서조(徐助), 이덕윤(李德允) 등과 함께 고영창에게 구금당하여 협박에 못이겨 그만 굴복하였다.
上表稱賀彦純不能守節一如所言
즉 고려의 국서를 고영창에게 드리고 축하를 하라는 강요에 대하여 윤언순은 절조를 고수하지 못하고 놈들이 하라는 대로 굴종하였던 것이다.
及還匿情不首事洩有司劾治其罪
그리고 귀국 후에도 그 일을 은닉하고 자수하지 않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해당 기관의 탄핵을 만나 벌을 받았다.
仕至南原府使.
후일에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彦植天資高雅好賓客
윤언식(彦植)은 천품이 고상하고 단아하며 손님 접대를 즐겨 하였다.
官至守司空左僕射.
벼슬은 수 사공 좌복야까지 지냈다.
彦旼聰悟過人善書
윤언민(彦旼)은 총명과 지혜가 유달리 뛰어났고 글씨와 그림을 즐겼다.
仁宗朝爲尙食奉御.
인종 때에 상식 봉어(尙食奉御)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