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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3 /
‘작은 조각의 선’에 담긴 구원의 생명력과 섭리의 깊이
주님의 섭리로 우리 안에 ‘남겨진 것(Remains)’을
‘작은 조각의 선’ 혹은 ‘보존된 순수한 선의 흔적’이라 부르는 것은,
이 용어가 지닌 영적 특성을 더욱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먼저 ‘보존된 순수한 선의 흔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설명해본다.
‘남겨진 것’이 단순히 과거의 기억이나 파편이 아니라
‘순수한 선의 흔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서도 지옥의 어둠에 단 한 번도 오염된 적 없는
주님의 순수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선을 만들거나 보존할 능력이 없기에,
주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당신의 빛을 투영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순수한 영역을 따로 갈무리해 두셨다.
따라서 우리가 부르는 이 흔적은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유입되어 보존된 거룩한 생명의 씨앗이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선은 인간의 의식 중심부에서 밀려나 저변으로 숨어버렸다.
우리 자아의 표면에는 온통 악과 거짓이 뒤덮여 있기에,
우리가 보기에는 선이 마치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자취'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즉, 선의 실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악에 의해 가려져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흔적'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선은 인간의 성격이나 습관이 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의식 영역 저편(잠재적 영역)에 '인(seal)을 쳐 두신 것'이다.
의식의 주인공인 '자아'가 그것을 직접 경험하거나 소유할 수 없기에,
주체적인 존재인 자아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것이
내 안에 있는 지워지지 않는 주님의 '낙인'-'흔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반면, ‘작은 조각의 선’은 타락한 영혼이 지옥의 절망 속에서도
주님과 이어질 수 있게 하는 생명의 탯줄이다.
‘흔적’이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감추어 두신 보존의 ‘상태’를 뜻한다면,
‘작은 조각의 선’은 때가 이르자
그 보존된 상태로부터 비로소 영적 생명력이 뿜어져 나와
주님과의 연결을 가능케 하는 ‘역할적 실체’를 의미한다.
극악한 자에게서도 구원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 영혼 깊은 곳에 주님께서 친히 보존해 두신 선의 흔적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바로 그 정적인 상태에 머물던 흔적이
‘작은 조각의 선’이라는 동적인 통로가 되어 주님께 닿아 있기 때문이다.
AC 1594항에서 가르치는 ‘보존된 선’은,
자기 의라는 무거운 껍질을 깨고 완전한 무력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본질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비록 스베덴보리의 원문 텍스트에 ‘작은 조각의 선’이라는 문구가
고유명사처럼 문자 그대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이 표현은 그가 남긴 신앙의 원리들을 정교한 추론으로 결합하여
도출한 신실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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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개념 도출은 명확한 영적 법칙을 따른다.
우리는 흔히 선을 자신의 성품이나 도덕적 노력의 결과로 오해하지만,
영계의 법칙은 정반대이다.
자아(Self-merit)라는 날카로운 빗장을 치우고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통감할 때,
비로소 우리 내면 바닥에는 주님께서 심어두신 생명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지 않기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선(Good not from self)’이라 불린다.
바로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강조한 주님으로부터 ‘남겨진 것
(Remains, Reliquiae)’의 실체이다.(AC 468, 530, 560 등)
주님께서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은밀히 보존해 두신 이 순수한 선의 흔적은,
인간이 ‘자기 의’를 제거했을 때 생명을 받아들이는
유일하고 확실한 최소 단위의 그릇이다.
우리가 이를 '작은 조각의 선'이라 부르는 것은,
자아의 거대한 악에 비해 미세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생명을
담아내는 최소 단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주님으로부터 유입되어 보존된 선(Inflow of good from the Lord)’이라는
교리적 진리를 현대인이 이해하기 쉽게 은유로 재탄생시킨 개념적 인용이다.
구원은 인간이 선의 거대한 산을 쌓거나 스스로 희망을 만들 수 있다는
오만한 기대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된다.
자아의 성벽을 허물지 않는 한 주님께서는 그 작고 보잘 것 없는
조각 하나를 닻 삼아, 우리 영혼 전체를 지옥의 압박으로부터 건져 올리신다.
‘작은 조각의 선’이 가진 생명의 원리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이것은 온전히 '주님의 소유'라는 점이다.
인간의 자아에서 비롯된 선은 이미 자기 의라는 독소에 오염되어 있을지 모르나,
주님께서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남겨두신 이 선은
이기심이라는 지옥의 원리에 단 한 번도 물든 적 없는 거룩한 섬과 같다.
비록 그 양이 1그램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오염되지 않은 주님의 생명 그 자체이기에 지옥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순결함을 유지한다.
둘째, 이것은 영혼을 지탱하는 '구원의 닻'이다.
영혼이 삶의 모진 풍랑을 만나 악의 수렁으로 끝없이 하강할 때,
우리 안에 남겨진 이 조각의 선은 주님과 연결된 생명의 끈이 되어
영혼이 완전히 파멸로 침몰하는 것을 막아준다.
인간이 죄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 일어설 힘을 잃었을 때에도,
주님은 그 '닻'을 붙들고 계신다.
이 조각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한,
인간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이른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언제든
다시 부르실 수 있는 '돌아올 수 있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셋째, 이것은 영원한 '성장의 씨앗'이다.
이 보존된 선은 정지된 채 머물러 있는 흔적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대면할 때마다
그 빛을 흡수하며 확장되는 역동적인 씨앗이다.
주님은 영혼 전체를 당신의 형상으로 재구성하시기 위해,
바로 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흔적을 통해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신다.
그러므로 이 씨앗이 지닌 가치는 현재의 크기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영원의 가능성에 의해 결정된다.
이로 보건대 구원이란 악을 스스로 제거하는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주님이 미리 보존해 두신 이 작은 생명의 조각을 통해 그분과 다시 연결되고,
그 힘으로 악의 지배력을 거부해 나가는 거룩한 동행이다.
우리의 실천은 주님의 생명이 내 안에 숨 쉬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며,
악한 행동을 멈추기로 결단하는 찰나마다
주님은 이 씨앗을 통해 당신의 나라를 우리 삶에 구현하신다.
그럼에도 자신의 직감에 의존한 신앙은
삶 속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비율로 구원을 계산하려 든다.
악의 거대한 무게에 짓눌려, 내 안에 남은 작은 선으로는
구원에 이르기에 부족할 것이라며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구원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한 점의 조각이 누구의 생명인가 하는 '근원의 문제'이다.
우리가 말하는 그 ‘작은 조각의 선’은 결코 보잘것없는 부스러기가 아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서도 어둠의 세력에 결코 잠식되지 않은 채,
주님께서 친히 보존해 두신 '거룩한 생명의 불씨'이다.
이 조각의 가치는 인간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영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우리 영혼이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한 줌의 먼지처럼 희미할지라도,
그 안에는 주님의 무한한 생명력이 담겨 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미미한 흔적을 닻 삼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리 영혼을 붙들고 계신다.
따라서 그 조각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주님 은혜의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생명의 표식이다.
자신 안에 '선이 부족하다'고 탄식할 때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그분의 빛을 담을 통로를 예비해 두셨다.
구원은 우리 스스로 쌓은 공로가 아니라,
주님이 심어두신 생명의 씨앗을 끝까지 지키시는
그분의 신실한 섭리에 의해 완성된다.
우리가 행하는 하찮은 선이 사실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할 때,
영혼의 그 조각은 비로소 주님의 빛과 결합하여 지옥의 중력을 이겨내는
거대한 생명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거대한 선이 있을 때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의 분량이 적고 진리가 희미해 보일 때조차
그 흔적을 소중히 보존하시며, 그것을 통해 다시 일하신다.
인간의 눈에는 미약해 보이는 것이라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회복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데 큰 위로가 있다. (AC 2429, 2431, 468)
주님은 사람이 스스로 무너져도 완전히 끝나게 두지 않으시고,
다시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불씨를 보존해 두신다.
사람은 자기 안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보존해 두신 것을 통해 다시 일으켜진다.
또한 주님은 개인의 영혼 속에만 흔적을 남기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신앙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남겨진 것’들을 끝까지 보호하신다.
그 신비를 스베덴보리의 기록을 통해 확인해 본다.
AC 530
‘지금까지 말해 왔듯이, 이 장에서 사용된 이름들은 교회들(Churches),
혹은 같은 말로 교리 체계들(doctrinal systems)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 교리에 의해 존재하고 그 이름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아(Noah)'는 고대교회(Ancient Church),
또는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로부터 남겨진 교리를 의미한다.
교회나 교리의 상태는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곧 그것들은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신앙의 선과 진리가 더 이상 남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 이르면,
말씀에서는 그 교회를 ‘황폐된 것’(vastated)이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남겨진 것’(remnant)은 보존된다.
즉, 아무리 적은 수라 할지라도 신앙의 선과 진리가 남아 있는 사람들이 보존된다.
만일 그러한 사람들 안에 신앙의 선과 진리가 보존되지 않는다면,
천국과 인류 사이의 결합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2항은 더욱 중요하다.
‘개인 안에 있는 남겨진 것(remnants)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이 적을수록 그가 가진 이성적 개념들과 지식들은
빛을 받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선과 진리의 빛은 ‘남겨진 것들을 통하여’,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남겨진 것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 안에 남겨진 것들이 전혀 없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어떤 짐승보다도 훨씬 열등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남겨진 것들이 적을수록 그는 인간다움이 적어지고,
남겨진 것들이 많을수록 그는 더욱 인간다워진다.’
그리고 유명한 비유가 이어진다.
‘남겨진 것들은 하늘의 별과 같다.
별이 작을수록 그 빛은 약하고, 별이 클수록 그 빛은 더욱 밝다.’
저서는 계속해서 노아 교회에 대해 말한다.
‘태고교회로부터 남겨진 것들은 그 수가 아무리 적을지라도
노아라고 불리는 교회를 구성한 사람들 안에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각(perception)의 남은 것들이 아니라,
온전함(integrity)의 남은 것들이었고,
또한 지각의 교회들이었던 태고교회들로부터 유래한 교리의 남은 것들이었다.
그때 주님에 의해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다.
그것은 성향에 있어서 태고교회들과 전적으로 달랐으며,
우리는 그것을 고대교회(Ancient Church)라고 부른다.
그것이 홍수 이전 마지막 시기와 홍수 이후 첫 시기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고대(Ancient)'라고 불린다.
이 교회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 안에서 후에 다루게 될 것이다.’(AC 530)
(태고교회의 '지각(Perception)'이
주님과 직접적으로 교감하는 직관적 상태라면
노아 교회의 '온전함(Integrity)'이란
지각은 쇠퇴했지만, 지적으로 이해하고 의지적으로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규범과 삶의 일치'를 의미한다.)
AC 530에서 언급된 ‘남겨진 것들은 하늘의 별과 같아서,
별이 작을수록 그 빛은 약하고 별이 클수록 그 빛은 더욱 밝다’는 비유는
‘작은 조각의 선’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별’과 ‘희미한 빛’은
곧 우리 영혼 밑바닥에 보존된 ‘작은 선과 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성경의 ‘남은 자(그루터기)’ 사상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사야 1:9절에는 소수의 생존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남겨진 소수의 생존자를 통해 공동체의 회복과 소망을 이어가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준다.
이사야 6:11-13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어져도 그 뿌리에 생명을 품고 있듯,
우리 영혼 깊은 곳에도 주님께서 심어두신 생명의 씨앗이 존재한다.
이사야 10:21-22절에는 남은 자의 귀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고 돌아오는 소수의 무리만이
구원을 얻을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 개념들이 결합하여, ‘남겨진 것’은 곧 인간의 타락 속에서도 멸하지 않고
주님께서 지켜내신 ‘작은 조각의 선’이라는 신학적 정의로 완성된다.
우리의 영혼이 황폐하여
스스로는 단 하나의 빛도 낼 수 없는 상태처럼 보일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절망의 밑바닥에 당신만의 빛을 가진
‘작은 별’을 남겨두셨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다시 틔우시기 위해
가장 안전한 곳에 숨겨두신 소망의 씨앗이다.
모든 생명의 기원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그곳에서,
비로소 인간의 밤은 별빛이 머무는 거룩한 천국이 된다.
이와 같은 원리는 마태복음 15장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발견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그들의 빈손을 확인하게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이 고작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스베덴보리는 AE 617:22를 통해 이 상징을 이렇게 풀어낸다.
‘다섯 개의 떡(또는 일곱 개의 떡)은 사랑의 선을,
두 마리의 물고기는 그에 따르는 지식들을 의미한다.
이는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존재하는 아주 적은 정도의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
결국 오병이어 사건에 나타난 보잘것없는 음식들은,
인간이 자기 의를 비워내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할 때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남겨진 것(Remains)’의 실체이다.
이는 자랑할 만한 업적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영혼 밑바닥에서 발견되는 주님 은혜의 파편들이다.
주님의 생명은 인간의 위대함이 아닌
철저한 무력함을 통과할 때 풍성하게 드러난다.
AC 5291의 가르침처럼, 제자들이 빈손을 내밀었을 때
주님은 그 작은 조각을 취해 축사하셨다.
주님의 손에 들린 그 ‘작은 조각의 선’은 더 이상 인간의 양식이 아니라,
무한한 생명이 흘러나오는 거룩한 통로가 되어
모든 영적 굶주림을 채우는 기적이 되었다.
‘작은 조각의 선’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스베덴보리의 기록 속에 면면히 흐르는 정교한 영적 법칙이다.
그 교리적 질서의 첫 단추는,
인간이 악에 깊이 침잠할지라도 주님께서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생명의 최소한의 씨앗’을 친히 보존해 두셨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그 어떤 선도 잉태할 수 없으며,
스스로의 의지로 그 거룩함을 보존할 능력조차 없는 존재이다.
오직 주님의 전능하신 섭리만이 인간의 영혼이 멸절하지 않도록 붙들고 계신다.
이토록 신비로운 보존의 원리에 관하여
스베덴보리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인간 내면의 선과 진리가 오직 주님의 전능으로 보존되고 있음을 밝히며,
이처럼 섭리에 의해 보존된 거룩한 흔적을
말씀에서는 ‘남겨진 것’이라 한다.’ AC 7556
‘주님께서 각 개인 안에 남은 것들을 보존하지 않으시면
그는 영원한 죽음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데,
그 남겨진 것들 안에는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AC 468
‘남겨진 것들만이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을 담고 있다.’ AC 560
‘사람 안에 있는 진리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선에 정확히 비례한다.
선이 적은 곳에는 진리도 적다. 그것들은 같은 비율과 같은 정도 안에 있으며,
말하자면 서로 보조를 맞추어 나아간다.’ AC 2429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닙니까?’ 라는 말씀은
‘그에게 약간의 진리라도 있을 수 없겠습니까?’를 의미한다. AC 2431
‘선과 결합된 진리들이 자연적 마음의 내면 부분에 저장되고,
이후 삶에서 쓰이도록 보존된다.’ AC 5342
정리해보면 말씀은 이를 ‘남겨진 것(Remains)’이라 부르며,
오직 이 남겨진 것만이 영적, 천적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의가 아닌,
주님으로부터 유입되어 보존된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은 선’,
그래서 ‘자기 의가 실릴 수 없는 선’이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생명의 최소 근거가 존재하기에
비로소 영혼을 살려내는 과정이 시작된다.
이처럼 주님께서 심어두신 작은 선으로부터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신비롭고도 구체적인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선과 진리의 비례 법칙’에 있다.
이 법칙은 단순히 수치적인 계산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주님의 생명을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결정짓는 기준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선)을 주실 때
그 생명은 언제나 그에 걸맞은 깨달음(진리)과 함께 들어오는데,
우리 안에 마련된 ‘선’의 그릇이 작으면
그만큼 담길 수 있는 ‘진리’도 작을 수밖에 없다는 영적 질서이다.
스베덴보리는 위에 인용된 AC 2431항에서
‘그에게 약간의 진리(some little truth)라도 있을 수 없겠습니까?’라며
아주 작고 희미한 영적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약간의 진리(작은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앞서 언급된 AC 2429항의 법칙,
즉 '인간 내면의 진리는 선에 정확히 비례하므로 선이 적은 곳에는 진리도 적고,
진리가 적은 곳에는 선도 적다'는 상대적 원리가 끼어들게 된다.
이는 영계의 법칙 안에서 선과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많고 적음의 영적 분량이 존재하며 늘 같은 비율로 보조를 맞추기 때문이다.
(아래 추가 설명 참고)
따라서 말씀에 기록된 '약간의 진리(작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와 똑같은 크기로 영혼 안에 극히 미미하게 잔존하는 '작은 선'이
반드시 함께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
이처럼 선과 진리가 언제나 크기를 같이한다는
비례 법칙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원문에 명시된 '작은 진리'라는 개념으로부터
우리 영혼을 붙들고 있는 '작은 선', 곧 ‘작은 조각의 선’이라는 영적 실체를
무리 없이 도출하고 그 의미를 충분히 풀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보존된 미세한 조각의 선은 결코 소멸되지 않으며,
구원의 때를 위해 자연적 마음 깊은 곳에 저장된다.
결론적으로 ‘작은 조각의 선’이라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문자적 원문은 아니나,
남겨진 것의 존재, 천적 생명의 내재, 선과 진리의 비례, 미래를 위한 저장이라는
네 가지 핵심 원리를 압축한 은유이다.
다만 이를 이해할 때, 내 안에 독립적인 착한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내면에 보존해 두신 작은 조각의 선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합당하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인간 안의 선과 진리의 비율에 대해 설명해본다.
영계의 법칙 안에서 선과 진리의 ‘본질적인 비율’은 항상 일치하지만,
지상에서 성장하는 과정(시공간적 상태) 속에서는
외적인 양이 일시적으로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적 질서와 과정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겉 사람의 상태에서는 지식의 양과 선의 양이 일치하지 않는다.
머리로 성경과 교리를 완벽히 암기하고 유창하게 말할지라도,
내면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선(Good)이 없다면
그 지식은 단지 기억의 ‘자료’일 뿐 진짜 영적 진리가 아니다.
반대로 이방인이나 어린아이처럼
지식(진리)은 매우 적어도 선량한 마음(선)을 가질 수 있다.
지상 삶에서는 이처럼 관찰되는 지식과 선의 분량이
어긋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진짜 자기 것’이 되는 속사람의 상태에서는 비례 법칙이 적용된다.
스베덴보리가 AC 2429항에서 ‘진리는 선에 정확히 비례한다.’고 선언한 것은,
기억 속에 머무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영혼이 삶으로 실천하여 '자기 영혼의 생명'이 된 진짜 진리를 의미한다.
인간이 아무리 방대한 교리를 알고 있어도,
실천하는 '선의 분량'만큼만 진리가 영적인 빛으로 작동한다.
선을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영계에 들어갈 때 박탈되지만,
지식은 적어도 순수한 선을 가진 사람은 그 '선의 분량'에 맞춰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진리를 유입 받아 영적 균형을 이룬다.
결국 인간은 지상에서 불균형의 상태로 중생의 과정을 거치지만,
영원한 세상에서는 행한 선의 크기만큼 진리가 남고,
가진 진리의 크기만큼 선이 결합하여 완전한 한 쌍(천국적 결혼)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작은 조각의 선'을 가졌다는 것은,
지금 교리적 지식이 풍부하지 못해 '작은 진리의 조각'만을 붙들고 있을지라도
영혼의 바닥에서는 둘이 정확히 맞물려 구원의 불씨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영적 원리는 단순히 교리적 지식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겪는 신앙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생명으로 살아나는지를 보여준다.
흔히 우리가 겪는 신앙의 갈등이나 지식의 빈곤은
모두 영혼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파도’와 같다.
환경의 변화와 감정의 동요, 그리고 교리에 대한 무지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지만,
이것들은 결코 영혼의 중심까지 파괴할 수 없다.
영혼의 바닥은 그 모든 요동치는 파도 아래,
주님께서 친히 임재하시는 가장 고요하고 순수한 생명의 자리이다.
그곳은 인간의 자아가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며,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직접 유입하시는 유일한 통로이다.
따라서 자신의 내면이 흔들릴 때마다 표면의 파도를 보며 낙심하는 대신,
그 깊은 곳에 주님께서 당신의 터전을 마련해 두셨음을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삶은 선과 진리의 균형을 완벽히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교리적 지식이 부족하여 무엇이 진리인지 온전히 깨닫지 못할 때도 있고,
때로는 실천해야 할 선의 분량이 너무나 미미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영적인 결합의 원리는 인간의 의식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작동한다.
우리가 비록 머릿속으로 모든 진리를 헤아리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 우리 안에 남겨두신 그 ‘작은 선’을 붙들고 살아가려 애쓰는 순간,
주님께서는 그에 상응하는 ‘작은 진리’를 영혼 깊은 곳에서 결합하신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는 선과 진리가 정확히 맞물려
하나의 완전한 영적 단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나 인식이 아닌, 주님께서 직접 이루어 가시는 거룩한 동역이다.
선과 진리가 맞물려 결합하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영적 생명의 순환이 시작된다.
주님의 생명이 선을 따라 흘러 들어오고, 그 선이 진리를 만나 형태를 갖추는 순간,
그것은 어둠을 이겨내는 ‘구원의 불꽃’이 된다.
불씨가 작아 보여도 그 안에 생명의 에너지가 온전히 담겨 있듯,
이 작은 결합이 곧 구원의 시작이자 완성으로 나아가는 강력한 동력이다.
그러므로 ‘나의 지식이 미천하고
내 삶의 선이 너무나 작다.’는 탄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가 이미 맞물려 작동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을 향한 생명 활동을 치열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에는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지금도 당신의 생명으로 선과 진리를 맞물려
구원의 불씨를 피워 올리고 계신다.
우리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탓하며 멈춰 서 있을 때에도,
주님의 섭리는 멈추지 않고 우리 영혼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생명의 순환을 일으키신다.
보잘것없는 ‘작은 조각의 선’조차 결코 헛되이 버리지 않으시고,
그것을 당신의 진리와 결합하여 찬란한 천국의 빛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그 세밀하고 신실한 손길을 우리는 신뢰한다.
우리 안에 이미 시작된 그 거룩한 불꽃은,
지옥의 그 어떤 어둠도 결코 끌 수 없는 주님의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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