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영실코스에서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이시던 김영순 여자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학창 시절 존재감이 없이 재낸 나에게 선생님은 그저 나와는 상관이 없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교편생활 40년 동안 배출한 제자가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또, 한 선생님은 영어를 가르쳤던 정효자 선생님 이십니다.
어느 날, 인터넷을 통해 동창 카페를 알게 된 정효자 선생님께서 김영순 선생님과 함께 제주에 여행을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 안내를 좀 맡아 달라고 하는데 참 난감했습니다. 선생님과의 자리도 어렵고 날씨도 더워서 어디를 모셔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거든요. 나의 감각 없음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김영순 선생님은 30년 만에 뵙는 것이었습니다.
“어머 넌 참 곱게 늙었구나.”
선생님은 저를 기억하셨던 것입니다.
“아니 제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찌 저를 기억하십니까?”
“넌 시골에서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을 많이 봤지. 참 착했어 동네에서 효자라는 소문이 자자했었지”
우린 마치 이산가족처럼 포옹을 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어쩜 이렇게 날씬하십니까?”
통통하시던 선생님으로 저 역시 선생님을 기억 하고 있었거든요.
같이 오신 정효자 영어선생님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교단에 선 새내기이셨습니다.
지난 봄, 학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을 오셨을 때 이미 만났던 터라 정효자 선생님과는 스스럼이 없는 사제지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경기도 용인에서 멀리 제주에 까지 혼자 내려와 고생한다며 일부러 찾아주신 멋진 선생님이시기도 합니다.
일부러 저를 찾아 주시고 저를 불러주심이 너무 고마워서 전 선뜻 선생님 두 분을 모시고 한라산에 올랐습니다. 한라산은 여러 코스가 있습니다만 백록담을 가신 분이라면 가장 경치가 좋은 영실코스를 저는 추천하는 편입니다.
몇 해 전, 비가 오는 날 혼자 영실을 올랐을 때의 그 감회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비구름에 가린 영실 기암과 오백나한의 비경은 구름의 이동 방향에 따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서는 나의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저는 그 잊지 못함을 잊지 못해 잊을 수 없는 그 길을 다시 재촉합니다.
대정에서 출발할 때 열기는 28도를 오르내렸는데 영실 입구의 온도는 시원하다 못해 서늘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퍼지는 숲 바람이 생경스럽습니다.
환하게 웃으시는 선생님의 얼굴에서 해맑은 중학교 때의 나의 모습을 생각했고 젊은 두 선생님의 예쁘신 30년 전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한라산을 올랐습니다.
선생님은 나의 진취적인 기상을 물었고 저는 그 바탕의 저변에는 잘 가르쳐주신 선생님의 배려가 아니었겠느냐고 대답하고선 너무 뻔한 말을 한 것 같아 웃어버렸습니다.
김영순 체육 선생님의 일화가 즐겁습니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이랍니다.
김영순 체육 선생님과 정호원 체육 선생님은 아침 일찍 운동장에 나와 라인을 그리고 계셨는데 학부형이 막걸리를 한통 가져오셨다는군요.
아침도 굶고 시장하셨겠지요.
“저기 김 선생님 우리 아침도 굶었는데 이거 딱 한잔씩만 할래요?”
“호호 좋지요. 정 선생님.”
두 분은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아침 막걸리에 취해버리신 거예요.
아침 체조를 할 때 체육선생님이니 두 분이 앞에 나와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체조를 시작하셨는데 술이 취하신 정 선생님이 자꾸 비틀비틀 거리며 체조를 하자 학생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선생님이 체조를 하다가 춤을 춘다고요. 선생님은 그 후 다시는 학교에서 막걸리를 드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도 라인을 그리시던 두 선생님 모습이 기억이 나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세 사람은 영실기암을 올라가서 잠시 쉬었습니다.
저는 미리 막걸리를 얼려서 가지고 올라갔지요.
“선생님! 딱 한잔씩만 하고 가요.”
선생님은 막 웃으십니다.
“아니 자네 취하면 선생이 여자로 보인다고 했다면서”
“에이 선생님도 그거야 웃자고 하는 말이었지요. 하하하.”
살얼음이 끼인 막걸리의 맛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30년 만에 만난 사제지간의 대화 때문에 우리는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윗세오름으로 해서 한라산 백록담 남벽분기점까지 올라갔습니다. 남벽 분기점의 기암절벽은 정말 압권입니다. 10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하면서 흘러내린 용암의 골짜기가 되었을 저 백록담의 남벽은 산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괴물의 껍데기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백만년 전의 제주를 생각했고 그 아스라한 과거 속에서 30년 전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습니다.
제주는 34도인데 윗세오름의 온도는 27도입니다.
너무 더워 제주 여행을 못하겠다는 분이 많은데 한라산은 절대 덥지 않습니다. 한라산 영실코스의 산행을 적극 추천합니다.
하산해서 우린 산방산 근처 화덕피자집으로 갔습니다.
화덕에 구운 피자는 젊은 사장님의 열정으로 더욱 맛이 있었습니다.
우린 그곳에서 원불교 교무님과 선생님 두 분과 같이 연고 있음으로 해서 마시는 술은 괜찮다는 원불교의 계명을 받들어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원불교 교무님은 생전 처음 막걸리를 사러 가게에 가신 것이었습니다.
막걸리 세병을 사는데 이만 원을 내 보이자 가게 주인이 저 분이 혹시 간첩이 아닌가 의심을 하시더라는 말씀을 듣고 우린 박장대소했습니다.
저녁에는 산방산 탄산온천에서 지친 피로를 씻었습니다.
우린 다시 차를 몰아 모슬포로 향했습니다.
거대한 돌하르방이 있는 곳 의자에 앉았는데 어라? 의자가 노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수 이미자 씨의 노래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는 곳에서 우린 교무님이 준비하신 한치 회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우린 그동안 밀리고 쌓였던 이야기를 풀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는 누구의 험담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이야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의 제자 사랑이 눈물겹습니다. 자정이 되어 우린 헤어졌습니다.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느끼는 진한 정이었습니다. 두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남은 시간도 즐거운 여행 하시고 올라가시거든 다시 제자들에게 멋진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 계시기를 빌겠습니다.
제자 김덕길 올림.
첫댓글 약 35년전에 한라산 백록담 에서 1박을 하고 영실기암 으로 하산을 했던 기억이 -
그때는 한창 팔팔했던 총각이 이제는 60을 눈앞에 바라보는 노년이 되었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