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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감춘 땅" 오도암(悟道庵)
오도암과의 인연
2003년 9월12일 경상도지방을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던 태풍"매미"가 상륙했다.
그때 대한민국 공군의 레이더 전초기지이며 각 방송국의 송신소가 있는 팔공산산악도로 일부가 유실되었다.
다음해 2004년 초, 중요한 군사도로이며 주요 통신시설로 통하는 이 도로를 복구하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어느날,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이 깊은 산길에 홀연히 스님 한 분이 길을 따라 내려 오고 있었다.
"스님!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이곳 어디에 절이 있습니까?"
"저~ 큰 봉우리 밑에 있는 『오도암』이란 암자에서 오는 길입니다"
"저 밑에 절이 있다구요? 여태껏 절을 안내하는 간판 하나 못 봤는데요?"
"절이 있으니 중이 내려오지요..."
다음해 2005년 부처님 오신 날...
부모님의 49재를 올렸던 절에 등을 밝힌 후, 불현듯 생각난 이곳을 찾기로 하고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정작 오도암을 오르기는 초행길이었다.안내표시 하나없는 산길을 탐험하듯 더듬거리며 힘겹게 올라 들어서니
숨어있어 알려지지 않을 것 같았던 이곳에 20여명의 신도들이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 있었다.
세상의 눈에서 비켜있는 깊은 산속 작은 오두막에 모인 그들은 마치 순교를 결심한 순례자들의 성스러운
모습으로 내게 비쳐졌다.
그 분들과 함께 둘러앉아 손바닥만한 이곳 텃밭에서 자란 몇 가지 채소와 나물로 만든 비빔밥을 땅바닥에
펴놓고 공양한 늦은 점심의 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그 다음해 어느날, 이곳에서 필요로하는 공양물을 등에 지고 올랐다.
삽작문을 열고 들어선 암자는 인적이 끊겨 적막에 갇혀있었다. 인적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삼라만상이
그 자리에 정지된 듯 바람조차 숨죽이고 있었다. 내가 나무고 돌탑이고 산이 되어 눈 부시게 떨어지는 햇살에
녹아든 그 적막을 한껏 즐겼다.
오도암은 이번이 세번째 방문인 셈이다.
오도암에 대한 안내지도를 개략적으로 그려본 것이다.
경북 군위 제2석굴암에서 부계방향으로 내려가다가 동산계곡입구에 있는 황청리마을 안내간판을 보고 우회전
하여 곧장 오른다. 길은 외길이다.
오도암을 오르는 공식적인 등산로는 없다. 군사보안지역이므로 제한은 더 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디에도 안내간판 하나없는 오도암을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동산계곡을 2 km정도 오르면 (오은사 500m전방) 오른쪽 작은 나무판에 "○○농장"이란 간판을 따라가는 ①번
길과, 오은사를 1km정도 지난 좌측 산사면에 개비온(Gabion)이라 칭하는 돌망태로 만든 길이 30m정도의 2단
석축이 있다. 그 석축 맞은 편 도로반사경 옆을 유심히 보면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②번길이다.
군부대로 오르는 산악도로는 경사가 심하고 급커브가 많아 도로반사경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①번 길이다.예전에 있던 오도암으로 가는 우편물을 넣어두는 작은 나무우체통은 보이질 않고 없었던 철제문이
굳게 닫힌 채 버티고 서있다.개인농장이라 농장주도 그 나름의 애로가 있어 저리 하였을 것이다.
농장 안길을 들어서면 멀리 팔공산중계소의 철탑이 하늘을 찌를 듯 서있고 비로봉 청운대가 그를 매섭게 노려
보고있다.
어디에나 길은 있다. 다만 찾지 못하고 보지 못할 뿐이다.....
두껍게 쌓인 낙엽을 밟는 발밑 감촉이 부드러워 좋다.
이 길이 절로 가는 길임을 알게 해주는 것은 땅바닥에 혹은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색바랜
연등이다.
늘어진 칡넝쿨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잎 속살을 뚫고 햇살이 쏟아진다. 봄날에 조는 게으른 햇빛이 아니다.
만산홍엽(萬山紅葉)의 계절에 걸맞게 골골이 투명한 붉음이다.
중간 쯤 되는 지점의 쉼터에는 누군가 그네를 매어 놓았다.
그네에 앉아 흔들어 본다. 흔들리는 것은 육신 뿐이다.....
두 갈래의 길이 만나는 곳에는 나무둥치 위에 비닐장판을 깐 의자와 원효대사의 법어를 걸어놓아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가눌 수 있게 한다. 오도암은 신라의 원효대사가 6년간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悟道)곳이다.
그래서 절 이름을 오도암(悟道庵)이라 하였다.
1시간정도의 가쁜 숨을 몰아쉬다 보면 오도암에 다다른다. 오도암의 정문인 삽작문은 닫기
위함이 아니라 열기 위한 문이다. 굽은 나무가지로 만든 손잡이는 바깥을 향하도록 해
놓았음 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양대선맥(禪脈)을 일컬어 ‘남진제 북송담(南眞際 北松潭)’이라는 말이 회자
되고 있다.
남쪽의 대구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金堂禪院)과 부산 장수산 해운정사 금모선원(金毛禪院)
의 조실인 "진제(眞際)"스님,북쪽의 인천 용화선원장이신"송담(松潭)"스님을 중국 당(唐)나라
때의 ‘남설봉 북조주(南雪峰 北趙州)’에 빗댄 드날린 선풍(禪風)에 대한 찬사의 말이다.
이렇게 일컬어 지는 것에 대해 진제스님은 “그건 형상과 말에 떨어진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내 살림살이는 아무도 모른다. 성철 스님이나 향곡 스님이라면 알까. 과연 누가 알겠는가.”
현존 선승(禪僧)들 중에 우리나라에서 간화선(看話禪)으로 확철대오(廓徹大悟)하신 대표적인
두 분으로 꼽힌다.
송담스님은 경허(75대)-만공(76대)-전강(77대)-송담(78대)의 계보이고,
진제스님은 경허(75대)-혜월(76대)-운봉(77대)-향곡(78대)-진제(79대)의 계보이다.
이 "진제" 스님으로 부터 법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영천 은해사 운부암의 선원장이신 금모
(金毛)스님이다. 법호(法號)는 스승이 깨달음을 인가하면서 제자에게 내리는 것이다.
삽작문을 열면 당간지주마냥 서있는 작은 바위 틈이 이 곳의 출입구다.
금모 스님은 30대 후반에 이미 팔공산 동화사 금당선원의 선원장을 지낼 만큼 일찍부터 선지를 드러낸 수좌다.
그가 수도암에서 수도할 때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참선하면서 코피가 터지고 항문에서 끝없이 피가 흘러 죽음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그렇게 목숨을 건 정진으로 그는 식(識)이 맑아져 수십리 밖에서 누가 절에 오는 것이
보이는 신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경계가 열심히 공부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 신통에
빠지면 공부를 망치게 된다는 게 선가(禪家)의 정설이다.
그래서 그는 고요함에 빠지지 않고, 좀더 시끄러운 곳에서 부딪치며 공부를 하기 위해 대찰인 해인사로 가서
두 철을 지내면서 정진을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정진할 때였다.
그런 그가 30대 후반에 동화사 선원장을 맡았다.
금모 스님이10여년 전 동화사 결제를 마치고 선승들과 함께 팔공산 등산에 나섰다가 멀리서 팔공산의 기운이
한데 모인 곳을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온 곳이 바로 오도암이었다. 오도암은 소수의 옛 선승들 사이에서만
알려졌던 터였다.
오도암과 청운대
이곳은 1963년 이래 아무도 살지 않아 폐사가 되어 유허만 남아있었다. 더구나 공군부대 아래 미사일보호구역
이어서 풀 한 포기 쉽게 손댈 수 없는 곳이었지만 금모 스님의 원력으로 토담집 하나를 세워 원효의 천년 고찰을
되살려 내었다.
천막 법당
절터에는 기왓장과 주초와 맷돌 바위만이 널려있고, 빼어난 상호의 불상과 고탱화가 전해 내려왔으나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다.
내가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세 번의 오도암 방문에 두 번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게 됨을 두고 하는 말이다.이곳의 신도회에서 오신 듯,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암자의 겨울채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산속의 매서운 바람막이로 토담집 사방을 비닐로 둘러치는 작업광경을 보고 급히 달려갔다. 이미 쳐진 비닐을
들어올려 간신히 찍은 이곳의 유일한 편액사진이다.
젊은 시절 오도암에 와본 적이 있는 현대의 선지식 일타스님(1929~1999)은 이곳에서 일주일만 살아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토담집에 붙여놓은 불인선원(佛印禪院)이란 편액글씨도 일타 스님이 써주신 것이다.
불인선원(佛印禪院)이란 부처로부터 직접 인가를 받은 곳이란 뜻이다.
비닐은 바람에도 견디도록 튼튼하게 둘러 쳐졌고, 비닐을 통해 보이는 불인선원의 글씨도 비교적 선명하다.
이번에 와보니 지붕의 재료가 기와로 바꿔져 있었다.
내가 매주 받아보는 모 신문사의 경제저널지에 종교전문기자 조현씨의"하늘이 감춘 땅"이란 책이 소개되었다.
개략적인 책내용을 소개한 글을 읽고 주저없이 책을 구입했다. 기자 본인이 선수행을 닦고 국내외의 고승대덕
(외국의 경우 달라이라마,틱낫한스님등...)과의 친분이 많은 사람이고 불교이론에 해박하여 글귀 하나하나가 좋
은 법문을 듣는 듯 마음에 와 닿음이 많았다.
조현기자의 오도암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오도암 부처상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
이다. 선본사 갓바위 부처님을 어설프게 모방하여 조악하게 만들어진 못 생긴 부처로만 각인 되어 있을 것이다.
크고 화려한 불상들이 익은 눈에 치열한 구도와 수행을 정진한 선승의 깊은 뜻이 담긴 작고 초라한 못 생긴 불상
이 눈에 들어올리 가 없다. 내 미혹함의 끝은 어디인가......
천막 법당 안 투박한 약사여래불상은 금모 스님이 전국을 돌고 돌아 '가장 못생긴 부처'로 골라 모신 것이다.
아무도 지키는 이
없는 곳에 모셔져 있어도 누가 훔쳐가고 싶지 않은 부처를 모셔둔 것이다.'못난이 부처'가 팔공산 제일 명당의 주인이다.
암자 마당의 지장보살과 돌탑.
세월이 흐르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나머지 돌탑이 쌓여 뾰족하게 마무리 될 것이다.
공양간 위의 2층 다락방이 선실(禪室)이다.
두 평 남짓한 마룻바닥에 유리문으로 되어있어 멀고 가까움을 가릴 것 없이 주변산하를 내다 볼 수 있다.
오도암주 금모 스님이 이곳을 찾아 머무는 수도승이나 객(客)에게 전하는 공고문이 공양간 벽에 붙어있다.
공고
1.모든 물품 아끼기.
1.땔감 때는 만큼 최소한 해놓기.
1.법당, 도량 정리정돈 청소하기.
1.해우소 깔끔하게 청소하기.
1.똥 8할 차면 텃밭에 구덩이 파고 묻거나 적당한 장소에 묻기.
싫으시면 지금 바로 下山하실 것.
청운대 바위틈에서 흘러나온 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해발 1050m 청운대 정상 부근엔 원효가 6년간 수도했던 서당굴(誓幢窟)이 있다. 서당(誓幢)은 원효의 다른
이름이다. 사람은 커녕 다람쥐도 오르기 어려운 곳이다. 원효가 수도할 당시에는 구름사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10여명이 앉을 만한 공간이 있는 굴에는 마실 수 있는 샘물까지 있다고 한다.
이 서당굴에선 2년연상인 김유신 장군도 수도했다고 전한다.
서당굴(원효굴)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산신각(山神閣).
나는 절대 저 문을 열지 않았다.....
금모 스님은 투철한 선승(禪僧)이어서 산신(山神)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깊은 팔공산(八公山)에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오도암 불사가 이루어지기까지 산신의 감응이 없지 않았음을 인정해 산신각을 지었다. 조촐한
산신각엔 스님 나름대로 구상한 탱화를 그리게 해 걸어놓았다.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산신이 있고, 지금은 사라진 호랑이 대신 멧돼지가 등장하며, 찾아보기 어려운 산삼 대신
더덕을 물고 있다. 팔공산의 산신을 인정하면서도, 옛 설화를 그대로 답습하기보다는 현대적이고 구체적이며
창조적으로 바꿀 줄 아는 스님의 안목은 산신각 안에도 그대로 배어있다.
서당굴 오르는 길에서 돌아본 오도암
오도암(悟道庵)에 딸린 수도석굴인 서당굴(誓幢窟)의 규모는 길이 280cm, 굴입구 높이 80cm의 둥근 원통형의
굴엔 쌍봉 낙타모양의 두 돌기가 파여 올라가 있다. 이 굴은 청운대 천인 절벽의 정남면에 남향하여 인공으로
굴착한 횡혈(橫穴)석굴이다. 겨울에는 햇볕이 굴 안에까지 들어가고, 여름에는 굴 안에 햇볕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 굴은 천고의 신비에 가려 운무속에 감춰져 내려왔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공양을 들고 가라는 신도 보살님의 말씀을 정중히 사양하고 하산 길에 올랐다
처음 가보는 ②번길로 접어들며 저린 가슴에, 떨어진 마음을 줍고 붉은 가을을 주워 담는다....
오은사를 지나 동산계곡이 한 눈에 보이는 다리 위에서 돌아온 곳을 바라보며 가을의 정취에
빠져든다.
벗으려해도 벗지 못하고 놓으려해도 놓지 못하며 숨기면 숨길수록 눈에 띄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청운대 밑 오도암이 하늘이 감춘 땅이라면 저 곳 어디에 내 마음 한 자락 숨겨놓고
가끔씩 들여다 볼, 원효의 그림자가 묻힌 장소는 없을까......
다음 주말에는 은해사 운부암을 가 볼 생각이다.오도암주 선승(禪僧) 금모(金毛)스님을
뵐 수 있을 지는 모를 일이다........................................................................._()_
聖人求心不求佛(성인구심불구불) 성인은 마음을 찾지 부처를 구하지 않는다.
愚人求佛不求心(우인구불불구심)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만 구할 뿐 마음을 찾지 않는다
智人調心不調身(지인조심불조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리지 몸을 다스리려 하지 않는다
愚人調身不調心(우인조신불조신) 어리석은 사람은 몸만 다스릴 뿐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 않는다
- 대혜 종고 선사 -
※ 참고자료:조 현 著 "하늘이 감춘 땅"
♬ 탁발승의 새벽노래 (산사의 아침) / 정태춘
승냥이 울음따라 따라간다 별빛 차가운 저 숲길을
시냇가 물소리도 가까이 들린다 어서 어서 가자
길섶의 풀벌레도 저리 우니 석가세존이 다녀가셨나
본당의 목탁소리 귀에 익으니 어서 어서 가자
이 발길 따라오던 속세 물결도 억겁 속으로 사라지고
멀고 먼 뒤를 보면 부르지도 못할 이름없는 수많은 중생들
추녀 끝에 떨어지는 풍경소리만 극락왕생하고
어머님 생전에 출가한 이 몸 돌계단에 발길도 무거운데
한수야! 부르는 쉰 목소리에 멈춰서서 돌아보니
따라온 승냥이 울음소리만 되돌아서 멀어지네
주지스님의 마른 기침 소리에 새벽 옅은 잠 깨어나니
만리길 넘어 파도 소리처럼 꿈은 밀려가고
속세로 달아났던 쇠북소리도 여기 산사에 울려 퍼지니
생로병사의 깊은 번뇌가 다시 찾아온다
잠을 씻으려 약수를 뜨니 그릇 속에는 아이 얼굴
아저씨하고 부를 듯 하여 얼른 마시고 돌아서면
뒷전에 있던 동자승이 눈 부비며 인사하고
합장해주는 내 손끝 멀리 햇살 떠올라 오는데
한수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해탈스님의 은은한 미소가 법당 마루에 빛나네
한수야! 부르는 맑은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해탈스님의 은은한 미소가 법당 마루에 빛나네
첫댓글 오도암자료 정말 잘보았습니다.쉽게 갈수없는 현실이 너무아쉽네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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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암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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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료 감사 합니다 언제 한번 찾아가 볼려고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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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가보고 싶은 암자네요 물어물어 가볼랍니다 오도암 기행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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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암 마음이 떨림니다()()(). 나무서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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