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정섭이의 탐탁치 않은(ㅡㅡ) 귀국소식을 들었고(선물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면 달라지겠지만), 오늘은 대훈이가 뉴질랜드로 날라가는 날이군요..
(있다가 김포로 달려가야 하네요..ㅡㅜ)
여독이 풀리지 않아 낮에 하루종일 자고 밤에 일어나서 음악을 듣고, xx기업들을 분석하구, 까페를 돌아다니다 문득.. 아주 우연히 예전에 김은혜양이 물어봤던 얘기가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김모양이 물어봤던 얘기가 "오빠의 진정한 스승이 누구야?" 였는데.. 그때 대답은 "아직은 없지만, 아마 진정한 스승은-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만이 그를 알고 있는- 도올 김용옥인거 같아.." 라구 대답을 했었습니다.
유쾌한 피서를 다녀와서 왜 갑자기 도올에 대한 생각이 들었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 친척동생(가끔 걍 동생이라구 해서 구분하기 힘들다구 짜증을 내는 모학우들이 있습니다만)이 원래는 도올을 별루 안좋아했었지요.. 근데 올 여름 우리 이모네집에서 본 내 동생은 도올에 관한 책이 거의 나보다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해의 수준도 거의 반 전문가수준.. 기철학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입장이죠.. 한의학계에서는 금오 김홍경과 함께 도올을 많이 쳐주고 있었습니다. 대훈이에게는 몇번 말했었는데, 도올이 하는 한의학은 8체질 한의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권도원이라는 한의사가 8체질법을 개발했는데, 요즘 kbs에서 방송되는 이제마와 같이 독창적인 한의학체계를 만든 사람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겁니다.
더 이상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열독률의 감소가 뻔하므로 빨리 글을 마쳐야 겠습니다. 왜 '취화선'을 보고 말들이 많은지.. 재미있기만 하더구만.. 도올 비판자들은 트집잡을게 없어서 극중에서 추사의 '세한도'를 비판하며 장승업을 옹호하는 장면까지 붙잡고 늘어지는지.. 예전에 도올이 동양미술에 대한 강의를 할때의 많은 내용들이 극중에 그대로 녹아있었습니다.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따라가며 개인의 인생을 절묘하게 융화시켜놓았고요..
챔피온 재미없었다는 사람 많은데.. 정말 정말 재미있더구만.. '친구'를 보고난 이후의 멍한 상태가 '챔피온'을 본 이후에도 며칠간 지속되었는데.. '집으로'같은 영화나 욕을 먹어야지..
영화 얘기하다가 갑자기 내용이 또 새었네요.. 켁..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이 글은 월간조선 2001년 2월자 글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조선일보는 도올을 탐탁치 않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도올을 비판한 이한우라는 기자는 방송중에 도올한테 많이 욕먹었던 기자이구요.. 그러니 조선일보의 시각도 어느정도 고려해서 읽어주세요.. 그래도 이 글이 도올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겁니다..
부분 발췌독 할께요.. 이해부탁..
다음에 시간되면 동해 여행기를 올리도록 하죠..
정섭아.. 유럽여행기 올려라.. 그리고 전화 빨리 개통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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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도올 김용옥을 모르고서는 21세기 한 국의 사회문화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 을 정도다. 웬만한 드라마나 쇼보다 더 재 미있는 지적인 쇼(Intellectual Show)로 사 람들을 열광케 하는 김용옥은 누구인가. 그의 호는 원래 孟子(맹자)에 나오는 역사 책 이름이다. 노나라에 춘추가 있었듯이 초 나라에는 도올이 있었다. 이 낱말은 다듬어 지지 않은, 그래서 모든 가능성이 내포된 통나무를 뜻한다. 또 전설 속에서는 사나운 맹수 이름으로도 쓰이고 옛날 황제의 고집 불통 아들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 용옥은 어려서부터 「돌대가리」 소리를 들 었기 때문에 「도올=돌」의 음을 취하여 호 를 삼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도올의 집안은 충남 천안에서 보기 드문 명 문 수재집안으로 통한다. 도올은 故 金致洙 (김치수)씨와 洪喜男(홍희남·91) 씨 사이 에 막내로 태어났다. 천안에서 개업의로 활 동하던 아버지 덕택에 도올의 어린 시절은 유복한 편이었다. 도올 위로 형 세 명, 누 나 두 명이 있다. 장형 金容駿(김용준·74 )씨를 비롯, 용균씨, 용환씨 누나 숙희씨, 용주씨 등이다. 6남매 중 박사학위 소지자 는 도올을 포함해 4명이다.
도올 자신은 형제와 조카들로 인해 KS(경기 고·서울대)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소연하곤 했다.
도올은 천안 제 3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상경한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서다. 배재중학교, 서울사대 부중 입학시험에 연 달아 낙방하고 보성 중학교에 진학하게 된 다. 당시 서울 돈암동에 살던 형 金容駿 교 수 집에서 살면서 보성 중·고등학교를 다 녔다. 도올과 맏형 金容駿 교수와의 나이 차는 무려 21년. 오히려 도올은 자기의 조 카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실제로 장조카인 金哲載(김철재·53)씨는 도올과 동갑이다. 도올의 조카(김용준 교수 자녀에 국한) 중 金哲載씨와 金隣中(김인 중·49·숭실대 사학과 교수) 가 경기고 서 울대 출신인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도올 을 그토록 주눅들게 만든 빛나는 KS 소유자 는 조카까지 포함해 3명인 셈이다. 金容駿 교수는 어린 시절 도올이 여느 아이 들과 같이 평범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 결국 해내고 마는 강한 집착력을 보였다고 한다. 다소 반항기 도 있었고 엉뚱한 짓도 곧잘 했다고 한다.
『어려서도 그렇게 고분고분하진 않았어요 . 자기 고집도 있는 편이었죠. 청소년 시절 부터 괴짜기질이 엿보이기 시작했죠. 대학 다닐 때 어느 날 홀연히 며칠 동안 잠적하 더니 갑자기 가사를 입고 나타나 온 가족을 놀라게 한 적도 있습니다』 도올 자신이 말하는 어린 시절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는 좋지 않았으나 탐구력이 강했다. 그리고 매우 섬세한 감성 과 탁월한 손재주의 소유자였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했으며 작은 일에 아픔을 감지 하는 일이 많아 눈물이 특히 많았다. 지나 가다가도 풀 한 포기가 이상하게 눈에 띄면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쭈그리 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혼자 어두운 골방에 하루 종일 앉아 생각하면서 배고픈 줄을 몰랐다』
도올의 중·고교 시절은 결코 모범생의 세 월이 아니었다. 말이 고교생이지 노는 것은 성인 뺨치는 수준이었다. 술, 담배, 여자 , 당구 등 그(도올)의 표현대로 타락된 유 희란 유희는 다 하면서 보냈다. 싸움도 곧 잘 했다(도올은 태권도 공인 3단이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부모 는 매우 엄격한 가정교육을 시켰다. 특히 도올의 어머니는 자녀교육에 대단히 엄격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화고녀 출신의 개화여 성인 洪여사는 자녀들이 잘못하면 가차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막내 도올도 예외일 수 없었다. 김용준 교수는 『가족 중 도올에 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다면 바 로 어머니 홍희남 여사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홍희남 여사에 대한 김용옥의 생각은 애틋하다. 도올은 대입 면접 때 면접관이 감명깊게 읽은 위인전이 무엇인가 묻자 서 슴지 않고 『내가 읽은 가장 위대한 위인전 은 엄마의 삶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 는 위인도 나의 엄마』라고 말했다. 도올은 또 저서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한없이 온 유하고 순종하면서도 李朝(이조) 여인이 가 졌던 특유의 강인함과 적극성, 그리고 원대 한 사고의 스케일을 가졌던 여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고려대 교수시절 대 학특강 「여자란 무엇인가」에 어머니 홍희 남 여사를 직접 초빙강사로 모셨고 교육방송 「노자와 21세기」에도 洪여사를 등장시켰다.
도올 김용옥과 동양철학과의 조우는 전적으 로 우리나라의 대학입시 제도 덕분에 가능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도올은 1965년 서울 대 농대 농생물학과에 지원하지만 결국 취 약과목인 수학에서 빵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아 낙방한다. 대신 고려대 생물학과에 2 차로 합격하게 된다. 그 자신도 『서울대 농대에 합격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그것은 인류를 위하여 불행한 합격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려대 생물과 진학 후 관절염을 심하게 앓 게 되면서 학업을 포기하게 된다. 1년 반 병원 입원실 신세를 지는 동안 도올에게 커 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세계를 바라보는 가 치관의 변화가 일어난 것. 그는 『온몸의 관절이 띵띵 부어올라 一村(일촌)의 기동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순간도 잊어버릴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의 煉獄(연옥) 속에서 이 우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세상 보는 눈이 좀 더 성숙해진 그는 신학 을 공부하기로 결심, 1967년 한국신학대학 에 들어간다. 그 곳에서 소홍렬 교수, 안병 무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신학과 철학에 대 한 학문적 맛을 보게 된다. 1967년 2학기 소홍렬 교수로부터 철학개론을 들으면서 다 시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신학대학을 박차고 나와 고대 철학과에 편입한다. 이러한 학문적 구도 과정 중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氣哲學(기철학)에 대한 관심도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일어나게 된다. 1967년 한의사 권도 원(80·제선한의원 원장)씨와의 만남이 그 것이다. 권씨의 침치료를 받으면서 그를 지 겹게 괴롭히던 관절염이 호전되기 시작한다 . 그는 권도원 박사가 개발한 침의 원리적 체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의학을 통 해 새로운 학문적 패러다임을 구성할 수 있 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고대 철학과 입학 후 도올은 金忠烈(70·중 국철학)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동양학 연구 를 필생의 업으로 삼게 된다. 바로 金忠烈 교수의 老子 강의 덕분이었다. 김충렬 교 수의 老子강의 세 번째 시간에 도올은 동양 철학의 사유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는 예지라고 믿게 되면서 자신의 일생 을 이 학문을 연구하는데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의 맹렬한 공부는 이때부터 불붙었다. 그 러면서 김충렬 교수의 연구실을 찾는 횟수 가 잦아졌다. 어느 날 도올이 김교수에게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김교수는 中庸(중용)을 권했다. 김용옥은 中庸을 철 저히 독파한 뒤 읽은 소감을 보고서로 작성 해 왔다. 이때 김교수가 물었다.
『가장 감명깊은 대목이 어디였느냐』
『제26장이었습니다』
중용 제26장은 하늘과 땅의 위대함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담긴 부분이었다.
『어땠느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동양철학 할 자격이 있다』
1972년 도올은 기나긴 유학 대장정에 오른 다. 그 당시 고대 철학과 석사과정에 있던 도올은 김충렬 교수의 소개장을 들고 국립 대만대 方東美(방동미·1977년 작고)교수 를 찾아간다. 동양철학의 대가 方東美 교수 는 김충렬 교수의 은사이기도 하다. 74년 6월 도올은 대만대 철학연구소 석사과정을 1등으로 졸업, 석사학위를 받는다. 논문제 목은 「老子 自然哲學 중 無爲之功能」. 그는 대만대 재학 시절 인생의 또다른 전환 점을 맞게 된다. 부인 崔玲愛(최영애·55· 연세대 중어중문학) 교수를 만난 것이다. 도올은 崔교수를 처음 본 순간 바로 이 여 자가 나의 평생 반려자가 되리라는 느낌이 왔다고 한다. 당시 중국어 음성학 박사과 정에 있던 崔교수는 대만에 도올보다 4년 먼저 와 있었기에 모든 게 낯선 도올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될 수 있었다. 도올은 당 시 崔교수는 너무도 발랄한, 하얗고 아름다 운 선배였다고 회상한다. 둘은 처음 만난 후 3개월 만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고 대만 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崔교수는 1946년 生으로 도올보다 2년 연상이다. 이들은 중국이라는 공통화제를 놓고 평생 같은 길을 가는 同志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지적 결합은 CK(최영애-김용옥) system이 라는 독창적인 중국어일본어 한글표기법 을 만들어 내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또 崔 교수는 EBS 「노자와 21세기」에 초청강사 로 출연, 중국 갑골문자를 강의해 내조를 과시하기도 했다.
崔교수는 자기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국형 賢母良妻(현모양처)라는 게 주위 사람들의 일관된 평이다. 이들 부 부를 잘 아는 사람들은 崔교수 같은 여성이 야말로 김용옥씨에게 적격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영애 교수의 이런 면이 잘 나타난 일화 하나. 원광대 한의대 재학시절 도올은 금요 일 오후 전북 이리(현재 익산)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와 가족들과 재회의 시간 을 가지곤 했다. 금요일마다 崔교수는 빠짐 없이 서울역에 나와 부군인 도올을 마중했 다고 한다. 『서울역에 도착해 최영애 교수 가 마중 나와 있는 모습을 보면 도올 선생 은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무척이나 행복해 했습니다』<김두환(38·당시 원광 대 한의대 재학생)씨>
도올 또한 애처가이자 경처가다. 부인에 대 한 도올의 애틋한 정은 그의 저서 곳곳에서 드러나 있다. 『나의 한복이나 일상용구를 손수 다루는 아내는 바느질 솜씨가 천하 일품이다. 그녀의 손끝엔 神氣가 서려 있다 』고 극찬하는가 하면 잠을 한번 실컷 자고 싶은 게 평생 소원이라는 부인을 측은해 하기도 한다.
최영애 교수도 도올 못지않은 수재집안 출 신이다. 崔교수는 최성재(81)씨와 박찬애( 79)씨 사이의 2남 5녀 중 둘째 딸이다. 큰 언니 최영자씨는 미국에서 공인회계사로 일 하고 있고 둘째 여동생 최영인씨는 미국 대 학병원 의사이고 셋째 여동생 최영씨는 한 동대 교수, 남동생인 崔起榮(최기영·46), 崔茂榮(최무영·44)씨는 서울대 교수로 기 영씨는 공대 전기공학부 교수, 무영씨는 물 리학과 교수다. 이 집안 또한 독실한 기독 교 집안으로 박찬애 여사는 서강감리교회 장로직을 맡고 있다.
1974년 대만대 졸업 후 도올은 일본 東京大 문을 두드린다. 1975년 동경대 중국철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 도올은 新儒學(신유학 )을 연구하며 후쿠나가 미쯔지(福永光司), 야마노이 유우(山井湧) 교수 등에게서 학 문적 엄밀성을 배우게 된다. 일본 동경대에 서 따낸 석사학위 논문 제목은 「王船山(王夫之의 호)의 動論」. 그후 김용옥은 한동 안 부인 崔교수와 함께 세계 각지를 유람하 다가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들어간다. 하버 드 대학에 6년간 머물면서 벤자민 슈왈츠( Benjamin Schwar-tz)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 며 중국철학을 연구한다. 1982년 6월 박사 학위를 받는데 그때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王夫之의 철학(The Philosophy of Wang Fu-chih)」. 1972년부터 1982년까지 11년 간의 학문 대 장정을 마치고 귀국한 도올의 마스터플랜은 무엇이었을까. 대학교수나 연구원이 아닌 한의대 진학이었다. 하버드 박사과정에 있 을 때에도 그의 머리 속에는 한의학 공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장형 김용준 교수의 말.
『1978년 보스턴에 있는 용옥이를 방문했을 때 「형님, 저 귀국하면 한의학 공부를 시 작해 보렵니다」 하는 겁니다. 저는 하버드 에서 공부한 네가 한의대생이 되면 신문 가 십란에 장식이 되겠지, 그냥 교수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그 아이의 결심은 단호해 보였습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경희대, 원광대 등에 편 입학 여부를 타진해 보지만 여의치 않아 결 국 한의대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어찌 보면 차선의 선택으로 교수직을 택하 게 됐는지 모른다. 1982년 고려대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된 그는 교수 재직 3년 반 동안 거침없는 언변과 파격적인 강의방식 으로 학내외에 화제를 몰고 다녔다.
돌머리의 천재성
당시 도올 강의를 들었던 고려대 졸업생의 술회다. 『제가 입학한 1986년에 이미 金 교수는 고려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그분 강의는 교양강 의 중 최고 인기였죠. 첫날 강의시간이 아 직도 안 잊혀집니다. 강의시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엔 포마드를 바르고, 007 가방을 든, 검은 두루마기 한복차림의 기괴한 신사가 나타나더라구요. 그러더니 연이어 육두문자를 쏟아내기 시작하는데… 정말 이런 분도 교수를 하는구나라는 생각 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칭 宇宙寶(우주보)다. 작고한 梁柱東(양주동) 박사의 자칭 국보론에 대비하여 자신을 우주의 보물이라 칭한 것이다. 무 엇이 그로 하여금 우주보라 할만큼 자신감 을 갖게 하는가.
그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고 자신이 천재라고 느꼈다고 한다. 김용옥과 모차르 트가 공유하는 천재성이란 무엇인가. 도올 은 자기의 살아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 출할 수 있는 용기라고 말한다. 기존의 전 통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느낀 그 대로를 표출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모차르트가 모든 악보를 단 한번에 써내려간 것과 같이 자신도 모든 원고를 일필휘지로 써내려 간다고 말한다. 그는 대 만대 석사논문을 20일, 동경대 석사논문도 20일, 하바드대 박사논문은 40일 만에 써 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대만에서 유학생활을 한 고려대 朴 모 교수의 회고담이다. 대만 유학시절 어느 날 김용옥 교수와 대만 서점에서 중 국철학사 전집을 구입했다. 朴교수는 스무 권이라는 양에 질려 읽을 엄두도 못내고 있는데 일주일 쯤 지난 후 도올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형, 나 그 전집 다 읽었는데 4권 마지막 부분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는 비상한 암기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곳곳에는 그가 知人들과 나눈 대화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대화의 상대자 였던 사람들은 이러한 인용문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칠 정도의 두려움을 느낀다고 한 다. 원광대 한의대 韓宗鉉(한종현) 교수는 『그와 아무런 격의 없이 나눈 대화가 몇 개월 후 토시 하나 안 틀리고 활자화 되어 나에게 나타났다. 이게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 』이라고 말했다. 놀라운 것은 대화 당시 도올은 아무런 메모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1986년 4월8일 그는 돌연 양심선언문을 발 표하며 홀연히 고대 강단을 떠난다. 그 날 그는 레포트 용지 4장 분량의 장문의 글 「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 언」을 학생들에게 나눠주며 지식인으로 자 처하는 교수가 강단을 물러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학교를 떠났다.
그는 양심선언문에서 『보통사람이 보통사 람이 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그들의 평 범성을 극단으로 휘몰아 가는 현실을 참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그가 양심선언을 하 게 된 데에는 당시 고대 교수 28명이 서명 한 시국선언문에 동참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라는 분석이 있다. 양심선언의 배경에 대한 결정적 단서가 되는 문구. 『서명교 수와 비서명교수를 이원적 논리로 바라보게 만드는 이 상황이 나는 단순한 한 인간으 로서 원망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비서명 교 수도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비겁하고 나약 하기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는 또 선 언문에서 『나는 정치적 해결이 해결할 수 없는 복잡다기한 문제에 대해 큰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러한 열정이 순수할 수 있게 되기조차를 현 정치질서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교수 사퇴 후 그는 그동안 잠재워져 있던 藝人(예인) 기질을 마음껏 발휘한다. 타고 난 감수성과 괴짜기질, 그리고 청소년 시절 섭렵한 다방면(?)의 경험 등이 그로 하여 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시, 시나리 오, 희곡, 서예집 등을 내놓는가 하면 오페 라 대본, 연극 연출에도 손을 뻗쳤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예술론이다. 너무 간단 하다. 재미가 없으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1987년과 1988년 사이 자신의 기철학세계가 담겨 있는 사극 시나리오 「새춘향뎐」을 처음 내놓았고 연달아 정치사극 「깜동」 , 李箱(이상)을 모델로 한 초현실 기법의 「날개」, 80년대 학생들의 의식화과정을 정리한 「도바리」 등 3편의 시나리오를 잇 달아 탈고한다.
이중 실제 영화화되기도 한 「깜동」은 조 선 건국 초기 윤리의 모순 속에 몸부림 친 한 여인의 섹스스캔들을 그렸다. 기존 성 인영화와 달리 사회성을 강조한 것이 이 영 화의 특징이다. 또 1991년에는 東學 2대 교 주 海月(해월) 崔時亨(최시형)의 생애를 다 룬 영화 「개벽」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 다. 이 영화는 1991년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5개부문을 수상했다. 연극에도 관심이 많아 극단 「美醜(미추)」 의 단원으로 활동하며 제작비를 대기도 했 다. 「美醜」라는 이름도 도올이 지은 것. 1991년에는 독일의 연극 연출가 마누엘 루 트겐홀스트와 함께 「시간의 그림자」를 공 동 연출한 적도 있다.
동양학에 눈뜨면서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대학생 시절 국립국악원에 가서 단소 와 단가를 배우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단 소 솜씨는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KBS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 애창곡 마이웨이를 가수 뺨치게 불러 청중 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의 집 「무정재」도 그의 예술사랑이 구 석구석에 배어 있는 곳이다. 통나무로 실내 를 장식한 무정재를 방문한 사람들은 집 자 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밖에서 보면 3층 정도의 높이인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6층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중에서 5, 6층이 도올 의 서재다. 예술의 전당을 설계한 金錫澈( 김석철)씨가 설계했지만 상당 부분 도올의 아이디어가 첨가되었다고 한다. 도올의 예인기질은 그가 얼마나 판 벌이기 를 좋아하는 것에서도 느껴진다. 그의 강의 에는 온갖 이벤트가 다 벌어진다. 그 스스 로가 연예인 못지않다. 어떨 때에는 코미디 언 뺨치도록 기괴한 몸짓과 표정으로 관중 들을 포복절도케 하는가 하면 심금을 울리 는 이야기로 방청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도 한다. 보통 출판기념회가 참석자들과 저자 가 인사를 나누고 책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간단한 다과회로 끝을 맺는 것과는 달리 도 올의 출판기념회장은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 .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춤사위가 곁들여지 는가 하면 대중가수들의 공연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는 강의도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스스로 두 시간 이상 청중을 웃기고 울리고 생각하게 하는 엔터테인먼 트를 충분히 행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외 부 강연시 그가 주최측에 요구하는 조건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강연시간이 최소한 두 시간 이상일 것, 청중이 최소 1000명 이상일 것, 1회 강연비가 100만원 이상일 것(이 조건은 도올이 1980년대 중반부터 내 세운 것이다).
그는 이러한 자신을 돈벌레라고 비난하더라 도 상관 않는다고 한다. 그는 받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을 해내기 때문이다. 그는 자 본주의 사회에서 학자가 청빈해지기는 쉽지 만 진정 어려운 일은 자기 값을 받을 줄 알 고 그것으로 올바른 사회적 행위를 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EBS 「노자와 21세기」 프로그램 金裕烈 P D는 『자신의 생산물에 최종책임을 지려는 도올의 성실성에는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자와 2 1세기」 한 회 40분 강의를 위해 그가 읽는 책은 평균 10권 안팎. 그는 녹화 후 편집 과정에도 참여, 모든 방송분의 자막을 직접 집어넣었다. 새벽 2∼3시는 기본이고 밤을 꼬박 새는 것도 다반사였다. 金PD는 『4개 월 동안 일주일에 4일을 이렇게 보낸 것에 대해서 그가 프로다운 프로라는 말 이외에 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저술활동에서도 그의 프로근성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통나무 출판사 남호섭 사장은
『다른 작가들은 탈고하면 교정 등 뒷작업 은 나 몰라라 하는 식이 대부분인데 도올 선생은 二校(이교) 이상의 교정작업을 손수 한다. 집필시간과 교정시간이 거의 같을 정 도로 교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고 말했다. 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첫째 승 중(여), 둘째 일중(남), 셋째 미루(여)다. 승중은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프린스턴大에서 박사과정에 있다고 한다. 일중은 미국에서 대학생활을 하다가 얼마 전에 귀국, 군복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일중은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시민 권이 있어서 군복무를 하지 않아도 되는데 자원 입대한 것이라고 김용준 교수가 전했 다. 막내 미루양은 현재 컬럼비아大에 재학 중이다. 도올은 공부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 라 바로 자기수련이며 이는 인사 등 기본예 절과 자기 방은 자기 스스로 청소하는 부지 런함을 배우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대학교 수 시절 그는 강의시간에 학생이 삐딱하게 앉아 있거나 기본적인 예절을 갖추지 못하 고 있다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매를 때렸다 . 때림으로써 그들에게 더 많은 교육적 메 시지를 전할 수 있다 면 소신껏 때릴 수 있 는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 다. 「百言이 不如一打」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그의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 된다. 아이들에게 잘못이 있으면 회초리를 드는 嚴父(엄부) 도올이지만 아이들을 때 리고 난 후 더욱 가슴 아파하는 평범한 아 버지이기도 하다. 원광대 한의대 시절 같이 공부한 김두환 삼화한의원 원장이 전해준 아버지 도올의 모습.
『하루는 도올 선생님이 매우 울적해 보였 습니다. 이유는 전날 딸 승중에게 회초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승중이 다리에 피멍이 든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며 저에게 피멍 이 빨리 낫게 하는 약을 구할 수 없겠느냐 며 애원하는 모습이 참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세간에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러 하듯 도올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도 극과 극 을 달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이는 부분은 그의 인간적인 면이다. 바 로 겸손함에 관해서다.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알려진 것처럼 실제로 거만한 사람은 아니 라고 말한다. 대신 내성적인 면이 있어 낯 을 가리는 편이라고 말한다. 도올의 제자 金炫(42·한국과학기술정보연 구원 책임연구원)씨는 그가 낯을 가리는 것 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그가 거만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오라고 했다. 그는 『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남을 우습게 알 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 다. 그러나 도올 선생은 남의 말을 놀랍도 록 주의 깊게 경청한다』고 했다. 이는 상 대방의 지식과 경험에 대한 존중 없이는 이 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EBS 김유열 PD는 도올 선생이 사람을 가리 고 까탈스러운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金PD의 말.
『도올 선생님은 자기가 생각했을 때 대화 상대가 안 되겠다 싶으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 나 그러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하는 學人(학인)이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김용옥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 열심히 배우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규정지 었다. 그는 자기가 배워야겠다고 결심하면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 나선다. 물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명실상부한 대가 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뷰 대 상으로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도올이 白南準(백남준)이라는 천재를 인터뷰하기 위 해 찾아 다닌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도올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장점 중 하나로 순수함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다. 그가 항상 호기심이 많고 뭔가를 자꾸 배우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그가 때가 묻 지 않았다는 것. 순수함에서 그의 학구열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도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 다고 했다. 순수함도 지나치면 유치함으로 흐를 수 있다. 도올에게도 이 속담이 적용 될 소지는 충분히 있다. 어린아이들이 싫은 것 좋은 것에 대한 구별이 확실하듯, 도올 도 好不好가 너무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자신을 실망시키고 분노케 하 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다. 이는 그의 저 서들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도올은 자신 이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상대를 가 리지 않고 공격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인신공격성도 상당수다.
1988년 고대 교수 복직이 좌절된 후 그는 자신의 은사들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자신을 배반한 제자에게도 분노의 붓을 휘 둘렀다. 「노자 철학 이것이다」서문에 해 당하는 求原諒(구원량)에서 수 페이지에 걸 쳐 자신의 은사인 김 모 교수와 신 모 교수 등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 도올은 또 그의 저서 「노자와 21세기」 에 대해 호의적인 서평을 하지 않은 모일보 기자를 방송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하 기도 했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의 특징 중 하나가 자기 감정을 억제치 못할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 바로 이 부분 때문에 도올 김용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거부감을 산다. 그는 자기의 이러한 감정적, 다혈질적 언사에 대해 사 과, 해명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는 198 9년 한 일간지와 가진 대담식 인터뷰에서 자신은 「분노를 잘 절제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자인하기도 했다.
원광대 한의대 재학시절 도올은 김우중씨와 의 대담을 글로 정리한 「대화」에서 원광 대생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 원광대생들의 집단 반발을 산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 KBS 「도올 논어 이야기」 녹화시 일 어난 기독교 비하 발언, 70대 방청객 퇴장 사건 등으로 계속 구설수에 올랐다. 기독교 비하 발언 사건의 발단은 2000년 1 0월27일 방송에서 그가 예수는 사생아일 가 능성이 있다는 발언을 하면서부터다. 그는 또한 당시 로마에는 호적령이 없었고 마리 아가 만삭인 몸으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 지 가 예수를 낳았다는 것은 코미디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를 비롯 각종 기독교 단체에서 공개적으로 KBS에 방송 중단을 요구했고 KBS는 이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유 감표명을 했다. 도올 자신도 그 다음 방송 에서 자신이 특정 종교를 비하하려는 의도 는 없었다고 해명해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계속해서 이를 문제 삼고 있다.
방청객 퇴장 파문은 작년 10월17일 녹화 직 전에 일어났다. 몸이 다소 불편하지만 잘 듣고 보기 위해 앞자리에 앉아 있던 노 모 (76·전직 정신과 의사)씨에게 도올은 『지 난번에 앞에 앉지 말라고 했는데 왜 계속 그 자리에 앉냐』며 『잘 보이지 않는 쪽으 로 자리를 옮기라』고 명령했다. 이에 노씨 가 반발하자 김용옥은 이런 상태에서 방송 을 못하겠다고 선언했고 급기야 노씨가 격 분해 녹화현장을 퇴장하게 된 것. 도올은 문제를 일으키고 난 후 잘못을 시인 해야겠다고 판단되면 신속하게 후속조치를 취하는 처세술을 보이기도 한다. 원광대 폄하 사건의 경우 그는 병가 휴학원 을 내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문제가 되었던 부분도 삭제해 일단락됐다. 최근의 노씨 퇴장사건은 문제 발생 후 도올 이 노씨 댁을 수차례 방문, 사과를 시도했 다. 노씨측이 도올의 화해 제스처에 계속 불응, 소송할 뜻을 굽히지 않다가 작년 말 시내 음식점에서 두 사람이 만나 화해를 했다고 한다. 1월8일 「도올의 논어 이야기 」 녹화현장을 다시 찾은 노씨는 『그는 우 리나라의 국보급 존재다. 내 자신의 감정 때문에 그에게 일말의 위축을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 화해하게 됐다』며 『오랜 만에 녹화현장에 오니 금의환향한 듯한 기 분』이라며 기뻐했다.
그는 종종 大人(대인), 선비임을 자처한다 . 선비는 바른 말을 해야 하며 끊임없이 학 문에 정진해야 한다고 믿는 그다. 그는 왜 곡되고 실추된 조선의 선비상을 제대로 구 현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시국선언문에 서명을 하지 않아 곤경에 빠졌던 그는 1987년 4·13 호 헌 조치가 내려지자 이번 기회를 통해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었다는 이미지를 벗어나 보 려는 듯 홀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간다. 도올은 깐깐한 선비답게 공중도덕 등 기본 예절을 굉장히 중요시 한다. 예를 들어 목 욕탕에서 수건 함부로 던지거나 물을 함부 로 쓸 때 직접 그 상대방에게 가서 타이른 다.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꼭 지적 한다. 공중장소에서 어린애들이 마구 떠들 면 그 자리에서 부모와 아이를 한꺼번에 호 통친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놀라울 정도로 공 부를 열심히 하는 공부벌레라고 한다. 그의 자택 무정재로 이사 간 이유도 어느 글에 서 밝혔듯이 너무 많은 책 때문이었다. 19 93년 도올과 인터뷰를 한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당시에도 그의 집에는 온통 책뿐 이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도 1만5000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의대 재학시절 다른 학생들은 모두 스터 디를 한다, 족보(기출문제)를 구한다 소란 을 떨며 공부했지만 그는 정말 미련할 정도 로 각종 의학사전을 펴가며 정석대로 공부 했다고 한다. 당시 도올과 같이 공부한 김 두환 삼화한의원 원장은 『도올 선생을 만 나기 전까지는 공부와 생활이 유리된 것인 줄 알았는데 도올 선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서 공부가 곧 삶이요, 삶이 곧 공부라 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의대 시절 항상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의 강의를 경청했다고 한다. 한의대 졸 업 때 4.5점 만점에 총평점 3.35를 얻었고 1993년 1학기, 2학기, 1995년 1학기 등 3 학기에는 평점이 3.75이상인 자에게 주어지 는 우등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의 답안을 채점한 원광대 한의대 韓宗鉉 교수의 말이다. 『시험이 서술식인 경우 그는 정말 탁월하게 풀어나갔다. 다른 학생 들이 시험지 반 장도 못채웠을 때 앞뒤로 꽉꽉 채웠을 정도니까. 그러나 단답형에는 약했다. 정답 대신 정답이 요구되는 맥락 을 파악, 그 전후과정을 써 놓거나 그 당시 교수가 강의했던 내용을 써 놓는 등 매우 성실한 자세를 보여줬다』
그에게 언론계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다. 그 러면서도 그는 이 세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그런 의미로 언론과 김용옥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그는 TV에 대해 이중적 자세를 갖는다. 자신은 미국 유학시절부터 일체 TV 시청을 하지 않았고 TV 때문에 20세기 인류가 망 했다고 개탄하면서 결국 그는 TV 덕분에 화 려한 스타가 되었다. TV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언론에게 있어 도올은 충분한 상품가치가 있었고 그는 이러한 언론 상업주의를 적절 히 이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는 인터뷰 조건이 매우 까다롭기로도 유 명하다. 따라서 기자들이 그와 한 번 인터 뷰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은 물론 약간의 굴 욕감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는 특히 신변잡 기성 인터뷰는 절대 사양이다. 인터뷰 방향 도 자기식대로 끌고 간다. 항상 그는 기자 에게 지식인 사회에 의미있는 차원 높은 질 문을 할 것을 요구한다. 그와 인터뷰를 한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는 그에게 신변 잡기 성 질문을 던졌다가 『한 학인이 고민해 온 의식세계를 조명하기는 커녕 그런 피상적 인 질문밖에 할 줄 모르냐』며 면박을 당했 다고 한다.
김용옥의 슬럼프와 재기
요즘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하지만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1980년 대 중반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저서가 물경 30만 부나 팔리는 등 한해에 무려 6권 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염을 토한 적 도 있는 그이지만 1990년대 초반 들어 그의 시세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 당시 낸 「너와 나의 한의학」 등 일련의 저서들은 1만 부를 넘지 못했다.
이런 현실에 대해 도올 자신이 누구보다 비 참하게 느꼈다. 그는 「기옹은 이렇게 말했 다」에서 『사실 나는 요즈음 용돈이 궁하 다. 나는 수입이 없다. 요즈음 내 책은 팔 리질 않는다. 그래서 인세도 얼마 들어오는 것이 없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도올은 이런 침체기를 거쳐 1996년 원광대 졸업 후 도올 한의원을 개업했다. 개업 당 시 그는 임상과 연구를 병행하면서 불치병 치료에 도전하고 필생의 업으로 삼는 氣哲學(기철학)을 완성해 보겠노라고 야심찬 목 표를 피력했다. 1997년에는 SBS 「名醫 특 강-건강하십니까」에 출연해 특유의 걸쭉한 입담으로 다시 한번 안방극장을 강타한다 . 『먹는 것보다 싸는 것에 신경써야 한다 』 『섹스는 한 달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 그만의 독특한 건강철학을 선보여 1980년대 못지않은 인기를 회복한 그였지만 1998년 8월 연구에 전념하겠다며 모든 활동을 중 단하고 미국으로 홀연히 사라진다. 그후 1 년도 채 안 되어 한국에 돌아와 「노자와 21세기」로 화려하게 컴백한다. 이런 그의 행적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일관성 이 없는 좌충우돌 스타일이라고 꼬집기도 한다. 반면 도올처럼 대중이 가려워하는 곳을 정확하게 파악, 시원하게 긁어주는 이 도 드물다는 분석도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저서와 TV강의가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 게다가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정 확하게 파악하는 사람이라는 분석도 있다. 온갖 구설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랫동안 대중적 지지를 잃지 않는 것은 일반 대중 의 관심사를 동물적으로 파악하는 능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이라는 것이다.
도올과 같은 비제도권의 재야 학자 입장에 서 후학을 양성하는 길은 사설학원에서의 교육 뿐이다. 1994년부터 그는 동숭동에 위 치한 도올서원에서 후학양성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매 여름, 겨울방학을 이용해 대학 및 대학원 재학생을 상대로 한 달 동안 동 양고전 한 권과 서양 고전 한 권을 집중적 으로 가르친다.
지금까지 교재로 선택된 고전들도 다양하다 . 지난 14번의 방학을 걸쳐 孟子, 論語, 大學, 中庸, 道德經, 莊子, 周易, 詩經, 般若心經(반야심경), 金剛經(금강경), 大乘起信論(대승기신론) 등의 동양고전을 강론하였 고, 서양고전으로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르크스의 자본론, 플라톤전집, 아리스토텔레스선집 등을 강독했다. 수업방식은 조선조 서원의 전통을 이어 학 생(이곳에서는 齋生이라 불린다)들이 무릎 을 꿇은 채로 수업을 듣는다. 또 도올의 강 의 외에도 초청 강사로 유명인사들이 많이 초대 되었다. 김우중, 국악인 황병기, 만 화가 이두호, 가수 조영남, 이장희, 이문세 , 김한길 문화관광부 장관, 탤런트 최명길 , 시인 박노해 등등.
강의마다 약 100∼150여 명의 齋生들이 모 여들었고 지금까지 14林(학기에 해당)의 재 생들이 배출되었다. 2001년 1월에는 15림이 시작되었으며 이번에는 「맹자」와 「순수 이성비판」이 강독된다.
도올서원에 오는 학생들의 전공도 다양하다 . 인문학도나 사회과학도는 물론이고 의대 생, 공대생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세 번 에 걸쳐 도올서원 강의를 들었다는 빈동철 (고려대 석사과정)씨는 『대학에서 배우기 힘든 것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도올 서원은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라며 『지나 치게 기능주의적으로 흐르는 대학교육을 보 충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하는데 도올 서원은 큰 힘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학자인가 엔터테이너인가
그에 대한 평가 중 제일 엇갈리는 부분은 그의 학자적 자질에 대한 평가다. 소장학자 들이나 학술전문기자들은 도올이 한국사회 에 동양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은 크나 독창적 학설은 거의 없고 철학적 성취도 높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일보 문화부 이한우 기자는 『그가 철 학의 대중화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대중의 철학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저서들만 해도 연극, 무용, 미술, 음 악, 태권도, 시나리오 등 자신의 전공과 상 관없어 보이는 분야에까지 관여함으로써 박 학하나 깊이가 없다는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언론사와의 인터뷰 때마다 자신의 학 문세계를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는 기자들의 수준을 사정없이 질타하면서 자신의 학문 적 포부를 역설해 왔다. 한의학을 통한 난 치병 치료, 새로운 한의학적 체계설립과 인 류의 보편사적 인간학(기철학) 건설, 과학 , 예술사를 다 포함하는 한국사상사 저술, 중국의 기초 경전 완역 등이다. 그러나 그 의 이러한 작업의 성과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공자는 스스로를 述而不作 (술이부작·옛 것을 설명하나 새로운 것을 만들지는 않는 다:논어)하는 사람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김용옥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척박한 우리나라의 학문적 토양에서 도올에게 述 과 作을 모두 바라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 예인과 학인의 기질을 골고루 갖춘 도올 은 누가 뭐래도 이 시대 최고의 에듀테이너 (edutainer:education(교육)과 entertaine r(연예인)의 복합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도올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그는 앞으로 TV 강연이 끝나면 그가 평생의 업으로 삼 고 있는 일들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 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뤄 진 것이라고 했던가. 엉덩이에 굳은살이 배 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우직하리만큼 성실한 도올을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지켜 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