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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6·25전쟁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우방국으로서
1957. 3. 8일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후 긴밀한 우호관계
1977년 12월 이스탄불에 한국 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1972년 5월에 맺은 사증면제협정을 비롯하여
문화협정(1974. 5), 항공협정(1976. 6), 통상진흥
및 경제기술협력협정(1977. 12) 등을 체결했다.
1996년 대한수입액은 7억 4,594만 달러,
대한수출액은 1억 5,716만 달러를 기록했다.
잎담배와 제강용 선철들을 수출하며,
한국으로부터 전자제품·철강 등을 수입.
1996년 현재 교민 194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유학생·주재상사원 등 185명이 체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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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이슬람교도' 투르크 제족이 세운 나라.
이슬람국가’라고 불리는 나라 만 43개 국에 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교 또는 회교(回敎)로 불린다.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
‘절대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닌 무슬림.
전지전능한 유일신., 알라(Allah)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어
나타나서 유대교·기독교 등 셈족계 제종교를 완성.
무슬림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사도로 존경하나,
예수신성,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은 인정 않는다
.............투르크 제족(Turkic peoples)...........
역사적· 언어학적으로 '돌궐'과 밀접한 여러 민족.
고조선 이웃이던 은나라, '고구려 형제국' 돌궐 등.
돌궐은 6세기 '몽골~ 중국 북쪽~흑해' 북방 유목민.
특히, 터키의 유럽 지역과 볼가 강 유역을 비롯하여
예외는 있지만, 아시아에 사는 일부 투르크계 종족 등.
역사와 언어 외 가장 중요한 문화적 유대는 이슬람교도.
시베리아 동부에 사는 야쿠트족
볼가 강 유역 추바슈족을 제외하고
모두 이슬람교도라는 점이 특징이다.
.
이들의 문화는 인접한 시베리아 민족들과 비슷하다.
추바슈족은 볼가강 지역 비(非)슬라브 공동체 중 No 1.
러시아 정교를 믿고 있는데, 이들의 언어 만 투르크계 혈통.
위구르족은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인구 대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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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소피아 대성당.
소피아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말이며
이스탄불 동방 정교회 대성당, 현재 박물관.
537년에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이었다.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라틴 제국에 의해 점령된
1204년~ 1261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됐다.
1453. 5. 29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 비잔티움 건축 대표작.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 문화유산으로 여길 수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 탑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아야 소피아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다."(Νενίκηκά σε Σολομών)라는
유명한 말로 '아야 소피아' 비잔틴 건축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Byzantine Empire 혹은 Eastern Roman Empire)은
중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의 로마 제국 명칭으로,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 로마 황제가 다스렸다.
‘로마 제국’으로 불리웠으며
제국 주민과 주변 나라 사람들은
‘로마니아’(Ῥωμανία)라고도 불렀다.
로마 제국과 달리 인구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썼다.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그저 긴
로마 제국의 역사를 편의 상으로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오스만을 비롯한 주변 나라들도 비잔틴을 엄연히
'로마 제국'으로 인식했다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동로마와 로마 제국을 별개의 나라로 인식하는 것은
서유럽 중심의 역사 사관에서 비롯된 오해로 이해된다.
<'로마와 그리스'.,신화.>
이는 곧.,서로마와 동로마.
동로마가 곧.,<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이 성립한 시점을 정확히 잡을 수는 없으나
보통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나톨리아의 니코메데이아에서
보스포로스 해협의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새 로마’)
즉, '새로운 로마'로 천도한 시기는.,서기 324년이 분수령.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망 395년 이후부터 1453년까지 존속.
동로마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로마제국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심지어 중동 지역으로 진출해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 잡고 있어
수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전세계 부의 2/3).
게다가 동로마 제국은 외적인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아랍에
영토를 잃기도 했으나 10세기 말 마케도니아 황조 시대에는
국력을 회복하여 동지중해 패권국이 되어 파티마 왕조와 대결.
그러나 1071년 동로마 제국의 심장부인 소아시아
대부분을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잃으며.,쇠퇴기.
12세기 콤네노스 황조가 영토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 몰후 제국은 다시 쇠퇴기 돌입.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동로마 제국 영토가
로마인과 라틴인(서유럽인) 각축장이 되며 확실한 타격을 입었다.
1261년에 팔라이올로고스 황조가 정권을 탈취한 뒤,
수도를 수복하면서 제국을 재건했으나 14세기 후반에
내전으로 인해 동로마(비잔틴)제국은 사실 상 멸망했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이 침공,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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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외곽
밸리 댄스
로마 제국은 5세기 말에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동로마(비잔틴) 제국이 로마의 명맥을 지키고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 황제가 흑해에서 마르모라 해(海)에 이르는
56km'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건설했을 만큼 북방 국경에는
게르만족, 슬라브족, 훈족들이 나타나 괴롭혔고 시리아 지방의
페르시아와의 국경선도 항상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동로마 제국은 내부적으로도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발칸 반도, 소아시아 반도, 시리아, 이집트 4개 지역.,동로마.
이 중 시리아와 이집트는 동로마 제국을 해체 위기로 몰아갔다.
그 지역의 교회에서는 단성론파(單性論派)
민족주의 운동의 교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예수에게 신과 인간의 두 가지 성질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정통파의 주장을 부정하고 단지 신으로서의 성질만 인정하는
교파로서 오리엔트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단성론파 교파는
451년 칼케돈 공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와 함께 이단으로 처분
아나스타시우스 황제는 단성론파에 동조하는 교회정책.
시리아와 이집트의 불만을 무마하면서 제국을 유지해 갔다.
그러다가 민족 이동의 혼란이 어느 정도 안정된 6세기에 이르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주도하에 과거 로마 제국의 재건과 전통 계승.
유스타니아누스 황제는 옛 로마 제국 영토에 나라를 세운
반달족과 동·서고트족들을 무려 12년이나 걸려서 몰아내고
지중해를 다시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고 로마법을 모아서
<로마법 대전>을 편찬해 로마 법률 문화가 후세에 전해졌다.
또한 비잔틴 건축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을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
세웠고 콘스탄티노플이 곧 '이스탄불'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반도, 사르데냐,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연안에서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지중해 연안을 정복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으나그 영광은 짧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지 불과 3년 후인
568년에 롬바르드족이 북이탈리아에 침입.
끊임없이 계속되던 전쟁과 전쟁 후 복구를 위한 무거운 세금.
피폐해진 이탈리아는 침입자들에게 저항할 힘이 전혀 없었다.
롬바르드족 알보인은 아펜니노 산맥 이북 파이아 중심으로 정착
롬바르드족은 이전에 이탈리아에 들어왔던 동고트 등의
게르만족과는 달리 로마인을 우대하지 않고 지배자로 행세.
이들은 로마인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로마인을 농노로 부렸다.
이들의 왕은 이미 동로마 황제 하수인이 아니었으며 독자적인 세력
그러나 알보인도 얼마 후 왕비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초기에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 침공때 게피다에족이 방해하자
롬바르드족은 아시아 유목민 아바르족과 손잡고 게피다에족을 격파
이때 알보인은 그의 손에 쓰러진 게피다에족의 왕
쿠니문트의 딸 로자문트를 왕비로 삼았으며 장인인
쿠니문트의 두개골에 술을 따라 마시고, 그 술을 왕비
로자문트에게도 먹이는 등 횡포가 유별나 살해당한 것.
로자문트는 복수의 칼을 들어 남편을 살해했던 것이다.
알보인 사후 약 10여 년간은 왕이 없는 공백기간.
이에 롬바르드족 씨족들은 각기 수장의 영도하에
이탈리아로 들어와 반도 각지에 살 곳을 마련했고
그후 롬바르드족은 북부 이탈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그무렵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에
이탈리아 총독부를 두고 있었는데
롬바르드족과 협정을 맺어 라벤나,
베네치아, 로마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지역과 나폴리와 제노바 부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지만 이탈리아를 상실.
동로마 제국은 심장부인 시리아와 이집트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에 비틀거리고 있었고,
북방 아바르족, 슬라브족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더구나 페르시아 위협을 겨우 벗어나자 이번에는
이슬람교도가 동부 지중해로 손길을 뻗어오기 시작
이제 노쇠한 동로마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 급급.
.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난 후 황제의 권위는 쇠약해졌다.
결국 7세기 초 반란군이 옹립한 황제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총독의 아들 헤라클레이오스가 쿠데타로 황제 즉위.
이후부터 헤라클레이오스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었다(610~717년).
헤라클레이오스가 즉위한 첫 해에 북방의 아바르족이
'아나스타시우스의 벽'을 넘어 콘스탄티노플로 육박했고
페르시아군도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원정군을
이집트로 파병하여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고 계속해 소아시아
반도에 침입한 페르시아군은 콘스탄티노플의 코앞에 진을 치고
아바르족과 합세하여 동로마 제국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에 헤라클레이오스는 먼저 아바르족을 매수하여
화평을 맺고 전력을 다해 페르시아군에 대항하였다.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동로마군은
소아시아 반도의 남단 이수스를 돌아
622년 페르시아군 격파, 아르메니아 진출.
그곳을 기지로 한 헤라클레이오스는 627년 니네베에서
페르시아의 왕과 일대 격전을 벌여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페르시아의 수도까지 공략하여 화해를 맺었다.
이수스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622년은
바로 마호메트의 헤지라가 이루어진 해.
헤라클레이오스의 승리가 당시 안중에 없던
이슬람교도의 활약에 의해 장차 물거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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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는 피부색 다른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인류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지역이다.
얽히고 설킨 역사, 풍성한 예술과 신화가 가득 담겨 있는 곳.
지중해는 유럽과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끼고
세 대륙이 둘러싸고 있는.,고대문명의 발상지 호수.
이런 지중해 문명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천 년 세월이 흘러 그 흔적들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것.
그 오랜 시간 속에 미노아와 히타이트 같은 인류 초기의 문명은
물론이고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처럼 찬란한 고대문명이 생겨났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킨
셀주크 투르크 후예로 1453년 비잔틴 제국을 완전히 함락.
동유럽과 오리엔트 지역에 걸쳐 500년 동안 세력을 떨친 터키.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이룬 오스만 투르크.
비잔틴 문화를 보존하여 이슬람과 조화를 이루는 정책.
그로부터 17세기 후, 세력이 약화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왕정이 무너졌고 1924년 터키공화국으로 거듭나 현재에 이른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어
'아시아와 유럽' 즉, 동서양이 만나는 나라.,터키
터키 어디를 가나 화려한 인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루었던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이 터키에서 시작
전설의 트로이, 노아의 방주가 걸린 아라라트산 등
고대 문명과 현대의 문화가 살아 숨쉬듯 꿈틀거리는 터키.
서남아시아의 아나톨리아
유럽 남동부 발칸 반도의 동부.
트라키아에 걸쳐있는 나라이다.
수도는 앙카라, 공용어는 터키어,
국교를 명시하지는 않고 있으나
국민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 신봉.
터키는 여덟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북서쪽으로는 불가리아, 서쪽으로는 그리스,
북동쪽으로는 조지아,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월경지인 나히체반 자치 공화국), 이란,
남동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 북쪽에는 흑해가 있다.
아나톨리아와 동트라키아 사이로는
마르마라 해 다르다넬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
이 바다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인식되어 터키는
두 대륙에 걸친 나라이므로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지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토인비는
터키의 역사 도시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박물관’
인류가 이룩한 5000년 역사의 문화유산들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히타이트, 아시리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와 비잔틴, 그리고 이슬람 문명이 만나는 도시.
유럽과 아시아가 1킬로미터의 다리 하나로 연결되는 항구도시.
이런 지리인 여건 때문에 이스탄불은
옛날부터 여러 대륙의 상인들이 모여든 곳.
해상실크로드가 이곳에서 끝나고 시작되어
자신의 나라에서 나는 특산품을 여기서 팔고,
자기 나라에 없는 물건을 여기서 사가지고 갔다.
북아프리카나 로마에서 실려 온 물품이
이스탄불에서 동방의 상인들에게 건네졌고,
그러는 사이 동서양 문화가 만나 섞이게 된 곳.
그래서 이스탄불을
서양 속의 동양, 또한
동양 속의 서양이라 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 소피아 성당
1500년 역사를 지닌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스탄불의 상징.
그리스 정교를 대표하는 대성당으로 비잔틴 양식 중앙 돔.
성 소피아 성당(현재,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이스탄불의 상징' 고고학 박물관........................
세계 5대 고고학 박물관 중 하나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1881년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가 관장이 되면서
알렉산더 석관 등 수납을 위한 건물을 건축 후 박물관으로 발전시켰다.
고고학 박물관,
고대 아시아 박물관,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백만 점이 넘는
예술품들이 소장
......................
로마제국 시대 성 소피아 성당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통치 아래 있던
500년간 이슬람 사원이었다가 현재 박물관.
이슬람 경전인 코란 장식
장엄한 기독교 성화 등이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는 성 소피아 성당 맞은편에는
이슬람 건축을 대표하는 술탄 아흐메트 사원이 있다.
성 소피아 성당보다 약 1000년 늦게 세워진 사원이다.
6개의 아름다운 뾰족탑에서는 코란이 낭송되고 있어
이스탄불이 이슬람의 나라 터키 땅임을 알게 해 준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남긴 이슬람 문화유산은
이슬람 문명 박물관과 토프카프 왕궁 박물관에 전시.
한때 유럽과 아시아를 호령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 유물.
토프카프 왕궁 박물관에는 유명한 전시관들이 많다.
보석관에는 세계 최대 에메랄드와 84캐럿 다이아몬드.
복식관에는 이슬람왕 술탄과 왕족들이 입었던 옷이 전시.
종교관에는 이슬람교와 관련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 주방과 화장실 등이 옛날 궁에서
사용한 장소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이스탄불에는 이 밖에도 배가 떠다닐 만큼
물이 차있는 로마시대 지하 저수 궁전이 있고,
당시 '마차 경기장'이었던 <히포드롬>이 있고
'실크로드 시장' <그랜드 바자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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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어귀 구릉성 3각형 반도 요충지.,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에 걸쳐있다.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을 세운 곳.
324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로 채택했고,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개칭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수도.
1923년 터키공화국 수립, 수도가 앙카라로 이전,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터키의 역사·문화 중심지라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유명한 곳으로는 예레브스탄 궁전·
콘스탄티누스 궁전·하기아 소피아 등.
유럽~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 현수교 중 하나다.
이스탄불의 기후는 아열대 및 지중해성 기후
연평균기온은 14℃, 연강수량은 760~900㎜이다.
터키의 제조업 공장들 가운데 약 1/3을 수용하며,
주요공업으로 섬유·시멘트·유리·가죽제품 제조업과
담배 가공업, 자동차 및 트럭 조립업, 인쇄업, 조선 및
선박수리업 등과 많은 대규모 터키은행과 외국 보험회사.
터키 파목칼레
이스탄불은 관광업이 중요한 수입원이다.
커다란 역사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로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많은 유물들이 있다.
고대 주택.
1969년 예술 센터로 개관된 아타튀르크 문화궁전,
여러 학술단체와 연구소·박물관·도서관 등도 있다.
터키 최대·최고 교육기관인 이스탄불대학교가 있다.
그밖에도 이스탄불공과대학교·마르마라대학교·
보스포루스대학교·미마르시난대학교·일디즈대학교
철도를 통해 동서 유럽 및 중동의 시리아·이라크와 연결된다.
이스탄불시의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
길이 1,073m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 현수교들 중의 하나이다.
서쪽으로 27㎞ 지점에는 예실쾨이 국제공항이 있다.
이스탄불 항구는 터키의 수출입품목의 대부분을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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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은, 330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고대 그리스 식민도시였던 비잔티온 땅에 세운 도시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교역 요충지로
'천연 항만' 금각만을 낀.,콘스탄티노폴리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의미한다.
395년에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고,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써
"새로운 로마" "제2의 로마" 로 뿌리내렸다.
동로마 제국 융성과 함께 인구 30만~40만 도시
동방정교회 세계 최대의 도시로써 번영을 누렸고,
'동서교역 중심지'(세계의 부(富)의 2/3이 모인 곳)
고대 건축물이 보존된 대도시로써 위용을 떨쳤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위치한 정교회 중심지
비잔틴 문화의 중심. 도시수호 성인(聖人)은 성모 마리아.
콘스탄티노플은 강고한 성벽으로도 유명했다.
동로마 제국 외부의 적들의 공격은 번번이 실패.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 이후 오스만 제국 수도가 되었다.
다만 공식 명칭은 '이스탄불'로 바뀌는 1930년대까지
줄곧 "콘스탄티노플"(오스만 술탄 또한 로마 황제라 칭) .
현재에도 동방정교회 및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를 이스탄불에 두고 있다.
동방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정식 칭호는
"새로운 로마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 온 땅의 총주교"
이 도시에 붙인 '새로운 로마' 이름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
그리스의 메가라 출신이었던 비자스(Byzas)가 창건.
초기 비잔티움이란 이름도 비자스의 이름에서 따왔다.
최소한 기원전 600년경에는 작은 촌락들이 발달했으며,
고대로부터 아시아와 유럽 사이를 잇는 동서교역 요충지.
비잔티움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 폴리(i Poli, "도시")라 불렀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 최대 도시였고 세계 중심이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동방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
로마 제국을 놓고 내전을 벌였을 때
니게르 편에 서서 세베루스군에 저항.
당시 비잔티움은 천험의 지형과 다수의 함대,
'프리스쿠스' 기술자가 고안한 각종 기계 장치,
군사와 백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무려 3년간 농성.
도시가 함락되고 세베루스 황제의 보복 조치로
페린투스(Perinthus)시의 일부로 격하된 후
세베루스 황제에 의해 메세 가도가 놓였다.
비잔티움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퇴임 후 내전에서
처음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 황제에게 지배를 받았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리키니우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만나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는 사이에 리키니우스 영역으로 쳐들어갔으나
신속하게 돌아온 리키니우스에게 반격당해 죽었다. 이때 리키니우스는
11일간 포위 공격해 비잔티움을 점령했고 내전이 종결되어가는 가운데
로마제국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리키니우스만 남게 되었다.
로마 제국을 완벽히 통일하려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의 내전이 한창이던 324년 비잔티움을 공략,
처음에는 리키니우스군이 잘 버텼으나 콘스탄티누스의 장남
크리스푸스가 수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으로 돌진하여
2일간 전투 끝에 배 130척과 병사 5천을 수장시킨 탓에 전세가 반전.
바다의 장악으로 보급을 원활히 받은
콘스탄티누스는 결국 비잔티움을 장악.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요새
치세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보낸
최초의 로마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로마의 수도가 되었다.
410년에 로마가 서고트족에 의해 약탈당할 때,
동방의 훈족이 도나우 강 북쪽까지 와 있었다.
방위 체제를 강화하고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건설하여 413년에 완성.
이후 로마가 급속히 쇠퇴한 것과 달리,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계속 불어났고,
시내에는 황제의 궁전이나 하기아 소피아 등
교회, 공중 목욕탕 극장 공공시설이 건설되었고,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네포스가 사망한 480년에
동로마 사람들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은 제2의 로마'
또는 「제2의 수도」라는 의식이 싹터 있었다.
6세기에는 매년 5월 11일 개도(開都) 기념 축제가
로마 제국의 중요한 기념일로서 성대하게 치러졌고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로마 건설.' 의식이 정착했다.
이때의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서 동로마 제국은 첫 융성기
콘스탄티노플은 크리스트교 세계 최대의 대도시이자
전세계적으로도 최대급의 대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시민들에게는 빵이 무료로 지급되었고,
경마장에서는 전차 경주가 연일 열렸으며
시민들은 그것에 열광하였으며 고대 로마에서
'빵과 서커스' 단어가 이 시대에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동로마 제국은 급속히 쇠퇴하였고,
영토도 줄어 7세기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이슬람 제국에 시리아, 이집트 곡창지대를 뺏기고
황제 헤라클레이오스는 콘스탄티노플 시민에게 지급하던
빵을 폐지 674~678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해군에 의해 해마다 포위
이 무렵에는 비밀병기인 그리스의 불을 이용하여 이슬람 해군을 격퇴하지만,
잇따른 전란으로 시민 수는 줄어들고, 수도나 공중목욕탕 공공시설도 버려졌다.
717년부터 718년 사이에 다시 이슬람 제국의 대규모 원정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황제 레오 3세에 의해 이슬람군이 격퇴되고,
차츰 동로마 제국도 국력을 회복하게 되어,
콘스탄티노플에도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766년에는 인구 증가에 수반해 수도가 다시 복구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전차 경주에 열광하던 고대의 시민 대신
견직 귀금속 공예 동서 교역상인들 상공업 도시로서 소생.
동로마 제국이 지중해 동부의 대제국으로서 부활한 9세기,
궁전 교회, 수도원, 고아원 병원 자선 시설 등이 세워졌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과 비잔틴 문화 진흥도 이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 동부 정치・경제・문화・종교 거점
또한 러시아・불가리아・이슬람 제국・이탈리아・이집트 등
각지로부터 상인들이 방문하는 교역도시로서 번영을 누려
10세기 말~ 11세기 초에 인구 30만~40만 대도시가 되었다.
당대 유럽 최고 학문과 청결을 자랑하며
유럽과 아시아의 관문이라 불리는 도시로
전성기 교외까지 약 100만 이상 인구가 거주.
11세기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프랑스의 순례자는,
유럽 최대도시 10개를 합친 인구보다 많았다고 찬사.
11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 공격으로 약화
콘스탄티노플의 번영도 잠시 쇠퇴
11세기 말~12세기 콤네노스 왕조 시대
제국은 다시 강국의 지위를 차지했으며
국제 교역 도시로서의 번영도 되찾았다.
이슬람화 이전까지 기독교(동방정교회)문화가 꽃피었던
이곳에 정교회였던 성 소피아 성당 등 성화들이 남아 있다.
11세기 이후 이탈리아 도시국가가 지중해 동쪽으로 세력 확장.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과 차츰 대립이 깊어져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침공 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비롯한
서유럽의 라틴인들에게 4월 13일 함락되었다.
과거 이슬람과 불가르족 등 여러 이민족에게 침입 받았어도
천혜의 자연조건 덕분에 한 번도 넘어간 적이 없었는데
라틴인들은 성벽이 낮은 바다 방면에서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십자군 병사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온갖 폭행과 학살, 약탈을 저질렀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라틴 제국을 세우지만,
존립 기반이 약했고 베네치아의 해군력과 경제력에 의존했기에,
콘스탄티노플 미술품과 보물은 식량비 등으로 베네치아로 들어갔고,
장려했던 궁전과 교회 등은 폐허로 변해갔으며 57년 만인 1261년 7월,
동로마 망명 정권 니케아 제국을 이끌던 미카엘 8세에 의해
수비병이 부재중이던 틈을 노려 콘스탄티노플은 탈환.
하지만 국력은 이전에 비해 약해져 있었고
수도 대부분 황폐했고 인구도 4만 7천 명 정도.
교역권도 베네치아 제노바 이탈리아 도시가 장악
콘스탄티노플은 예전과 같은 부도 누릴 수 없었다.
다만 문화적인 번영은 계속되어,
고대 그리스 문화 연구가 이뤄졌고
비잔틴 문화의 중심이라는 지위는 유지
비잔틴 문화의 번영은 당시 황실의 성이었던
팔라이올로고스를 따 '팔라이올로고스 르네상스'
로 불렸으며, 서구 르네상스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5월 29일
(현재의 그레고리우스력으로는 6월 7일)
오스만 제국에게 넘어갔으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는 13만 이상의 육해군과 우르반
거포란 신무기를 동원해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했다.
동로마군은 외국 용병과 싸울 수 있는
일반 시민 모두를 합쳐도 고작 7천여 명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지휘 아래
있는 힘을 다해 약 50여 일간 항전했으나 끝내
압도적인 병력과 무기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았다.
오스만 투르크 치하에서 그리스어 콘스탄티노폴리스 &
터키어 이름인 이스탄불이 모두 동시에 사용되었으나
서구에선 여전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이름이 사용되었다.
이스탄불은 1930년에 와서야 도시 공식 명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그리스가 이 도시의 연고권을 주장.
강제 접수하려 했으나 무스타파 케말(케말 아타튀르크,
훗날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이룰 막아냈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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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인이 조상으로 여기는.,돌궐.
돌궐족은 6~8세기경 몽골 고원과
알타이 산맥을 중심으로 유목생활
투르크계 민족이며 이들은 처음에는
소그드 문자를 썼고 후에 돌궐 문자 창제.
족장 토문 때 세력이 강대해져 551년 투르키스탄 경략 후
유연을 멸망시킨 뒤 거란을 정벌하고 키르기스를 장악하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해 에프탈을 정복후 세력을 떨쳤다.
카간 지위 싸움으로 통일기반이 취약
583년 서돌궐과 동돌궐로 나누어졌다.
동돌궐에서는 세 카간이 연이어 옛날의 국력을 회복했고,
서돌궐에서는 두 카간이 서방의 페르시아·쿠샨 등을 정벌하고
투르키스탄에서 패권을 장악했으며 지리적 중요성으로 동서 문화와
경제교류에 영향을 미쳤고 동돌궐은 630년, 서돌궐은 657년 당에 멸망.
..................돌궐(突厥,)........................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한 철륵의 하위 부족이다.
당시 강대국인 유목 제국 유연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만주 지방까지 광범위한 세력 확장
그러나 동,서로 분열되어 동돌궐은 당에 복속
서돌궐은 이슬람화 그 중 오구즈 투르크멘 부족이
셀주크 제국의 기원이 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1299년 튀르크 족은 오스만 제국을 건설하였다.
터키인들은 돌궐족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긴다.
고구려와의 대외 관계는 6세기에는 대립 관계였다가
7세기에는 동맹체제., 고구려 성 세개는 돌궐의 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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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나라 양제(煬帝, 569∼618년)는 세차례 고구려 침공
영양왕 23년(612) 2월, 24년 3월, 25년 7월 번번이 실패
그 결과 수십만 대군을 잃고 헤일 수 없는 전쟁물자를 허비
이에 예부상서 양현감(楊玄 感)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대란(大亂)에 접어든다.
그러자, 수 양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돌궐을 찾아간다.
돌궐은 원래 고구려와는 전통적인 우호관계의 나라.
수나라에 속한 돌궐은 고구려를 침공할 뜻이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의 승리를 내심 바라고 있던 형편이었다.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자
돌궐은 오히려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기병 수십만을 대기.
이 사실을의성공주가 알려줘 겨우 화를 모면하게 된 수 양제.
양제는 돌궐에게 포위되어 한달 남짓 공포에 떨어야 했는데,
맹방인 돌궐의 표변으로 권세의 무상함을 통감하게 된 수 양제.
차마,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강도(남경)로 대피한다.
이런 틈에 우문술이 반란을 일으키니, 양제는 잡혀 죽고 만다.
불과 6년전 고구려를 침공했던 그는 50세 나이에 처참한 최후.
장안을 장악한 당나라 이연(566∼635년)은 반란 진압후 수를 계승
당 고조의 제2자 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 도판 1).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인 태자와 아우 원길(元吉)을 살해
부왕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고 626년 8월에 당 태종으로 즉위
홍문관을 설치하여 문치 기틀을 마련한 다음 중앙 집권력 행사
당 태종은 장성 밖 위협세력인 돌궐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앞서 이해 8월 현장(玄, 602∼664년)법사가 서역 여행
이것은 당 태종의 돌궐 정벌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닌듯 하다.
동돌궐 정복에 나선 이정은 630년 2월 힐리 칸 군대를 격파
그에게 의탁하던 수 양제 황후와 양제의 손자를 장안으로 호송
이정은 돌궐군 1만명의 목을 베고, 10만 포로를 잡는 공을 세운다.
이어, 힐리 칸의 모후 수나라 종실 의성공주를 잡아죽이고
힐리 칸마저 사로잡아 돌아와 당 태종의 정통성을 확립한다.
한반도 고대국가 조상과 공통점이 많은 헤라클레스.
사슴, 소 멧돼지 활 곤봉, 그의 성격, 무역업자들의 신.
그가 다녀 왔다는 전설 속의 소아시아는 현재 터키 반도.
헤라클레스는 힘센 대식가, 호주가, 친절한 바람둥이,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문학과 예술에서 묘사되어 있다.
활과 곤봉을 무기로 쓰는 그는., 상인과 무역업자들의 신.
이슬람교 마호메트.
...............이슬람교(아랍어: الإسلام al-islām).............
불교와 그리스도 신앙과 함께 세계 3대 종교의 하나이다
무함마드를 예언자로 하며 '알라'를 단일신으로하는 종교.
알라는 '하나님', '신' 이슬람은 "복종 · 순종"이란 의미이다.
이슬람을 믿는 신자는 남자일 경우에는 무슬림
이라고 하고 여자일 경우에는 무슬리마라고 한다.
이슬람의 경전은 꾸란(코란)이며,
이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 가브리엘
(아랍어: جبريل)로부터 받은 알라의 말을 기록한 것
이슬람의 대표적인 종파로는
전체 무슬림의 80~90%를 차지하는
수니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파가 있다.
시아파는 10-20%를 차지. 발칸 반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무슬림들은 수피 무슬림들이 많다.
수니파 내에서 무슬림 모두는 동질 의식을 가지나,
타종파 간에는 보이지 않는 불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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