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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만리장성(萬里長城), 우리가 몰랐던 기록(記錄)들 [4-1편]
胡人 漫散이 동(東) 混同江에도 있고 서(西) 萬里長城에도 있다
2023년 10월 02일
○ 우선(于先),
《[제4-1편]은, 전회(前回)의 [제3편] 내용(內容)과 중복(重複)된 것들이 많습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별도(別途)로 묶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진실(眞實) 곧 실체(實體)를 파악(把握)해 보고자 한 의도(意圖)에서 한 것이니, 조금 식상(食傷)하더라도 오해(誤解) 없으시길 부탁드립니다.》
[4-1편과 4-2편]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엣 기록(記錄)과 그 해설(解說)을 보면 :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략적(大略的)인 진실(眞實)에 궁금한 것들을 조금이나마 해소(解消)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시황(始皇)과 감독관(監督官) 부소(扶蘇), 대장군(大將軍) 몽념(蒙恬)과 30만 대군(大軍)”이 쌓았다는 본래(本來)의 장성(長城)에 대한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찾아보기로 하자. ‘과연(果然) 본시(本是)의 진(秦) 장성(長城)은 어디에 있었을까?’
➨ ‘AD 1,974년, 장안(長安) 근교(近郊)에서 농부(農夫)가 우물을 파다 발견(發見)했다’라는 ‘병마용갱(兵馬俑坑)’[병마용갱(兵馬俑坑)은 조선(朝鮮)의 것이다.]은, 시황(始皇)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며, 또 ‘시황제(始皇帝) 릉(陵)’이라는 “진시황릉(秦始皇陵)” 역시 결코 진시황(秦始皇)의 것이 아닌 “한(韓)”의 것이어야 맞는 말이다.
만약(萬若) 이것이 진실(眞實)로 ‘진시황(秦始皇) 릉(陵)’이라고 했다면 중국(中國) 당국(當局)은 가장 먼저 이곳을 발굴(發掘)하고 전세계(全世界)에 공개(公開)했을 것이다.
만약(萬若) 그곳에서 병마용갱(兵馬俑坑)처럼 전혀 생각지 못했던 유물(遺物) 유적(遺跡)들이 발굴(發掘)된다면 : ‘한족(漢族) 중심(中心)의 중국(中國)’이라는 그동안의 주장(主張)은 모두 물거품과 헛소리가 되고, ‘한족(漢族)의 중국(中國)’이란 자체(自體)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勿論) ‘한족(漢族) 중심(中心)의 중국(中國)’이라는 말은 사실(史實)과는 관계(關係)없는,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정치적(政治的) 구호(口號)’였을 뿐이다.
‘병마용갱(兵馬俑坑)’ 속의 “수많은 용(俑)의 머리 부분(部分)”을 보면 : 모조리 상투[추계(推髻), 수계(竪髻)라고 한다]를 튼 모습이다. 이건 두 가지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➊ 진시황(秦始皇)의 “진(秦)”나라는 “조선(朝鮮)”의 다른 이름(異名), 별호(別號)였다.
➋ 진시황(秦始皇)의 것이 아닌 “옛 조선(朝鮮)” 곧 “한(韓)=(韓國)”의 것이었다.
두 가지 가능성(可能性) 외(外)에 다른 가능성(可能性)은 존재(存在)할 수 없다. 또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에 올 때 ‘추결(魋結)’을 하고 왔다던가 또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東夷) 한(韓)에서 : 괴두노계【魁頭露紒 : 관모를 쓰지 않은 날 상투】를 하였고, 삼국사기(三國史記), 당서(唐書) 등 많은 사서(史書)에서도 상투에 대하여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는 ‘AD 1,895년’의 단발령(斷髮令)으로 금지(禁止)될 때까지 반만년(半萬年) 이상(以上) 한민족(韓民族)의 풍속(風俗)이었다.
➨ 결국(結局) ‘장안(長安)’ 근교(近郊)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이나 “진시황릉(秦始皇陵)일 것이다”라고 추측(推測)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한민족(韓民族)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중원대륙(中原大陸)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터전이었다」라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가 될 수 있다. 오늘의 주제(主題)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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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하여 기존(旣存)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서 말해주지 않은 여러 기록(記錄)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겹치는 내용(內容)이 있지만, 식상(食傷)하더라도, “진(秦)의 장성(長城)이 아닌 조선(朝鮮)의 장성(長城)”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에 목적(目的)이 있다. 또 원문(原文) 내용(內容) 그대로를 설명(說明)하고자 하는 것이다.
(1) 진서(晉書 卷一百一) 재기(載記 第一 ) 서문(序文) 曰 : 【진서(晉書)의 장성(長城) 기록(記錄)에 대해서는 필자(筆者)가 오래전부터 인용(引用), 설명(說明)한 것이다】
晉書 : 【晉書於唐朝貞觀二十二年(AD648年)寫成,中國的二十四史之一,唐房玄齡等人合著,作者共二十一人[1]。記載的歷史上起三國時期司馬懿早年,下至東晉恭帝元熙二年(420年)劉裕廢晉帝自立,以宋代晉。該書同時還以「載記」形式,記述了十六國政權的狀況。原有敘例、目錄各一卷、帝紀十卷、志二十卷、列傳七十卷、載記三十卷,共一百三十二卷。後來敘例、目錄失傳,今存一百三十卷】 는 “AD 648”년에 완성(完成)된 것이다.
이 시기(時期)가 매우 중요(重要)한 것이다. 즉 고구려(高駒驪)가 한참 흥성(興盛)했을 무렵이며, 이때의 고구려(高駒驪) 땅은, “동서(東西) 6 천리(千里)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설사(設使),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에 고구려(高駒驪) 황도(皇都)를 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의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알타이산맥[Altai, 山脈]”에 이르는 땅에는 “수(隋), 당(唐)”나라가 없었다는 뜻이자. 그 이전(以前)의 “진(秦) 나라” 또한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이 아닌 대륙(大陸) “장안(長安)”에 황도(皇都)를 두고 있었다고 하면 : 그 땅은 타클라마칸 사막(Taklamakan Desert) 서(西)쪽에 이르게 된다.
“진(秦)”은 곧 “삼한(三韓)의 하나이다”라고 한다면 : 가능성(可能性)은 열려있다. 그렇지 않다면 :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에 진(秦)나라가 존재(存在)할 수 없는 일이다.
《晉書 卷 101 : 然則燕築造陽之郊,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所以防夷狄之亂中華,其備豫如此 : 연(燕)에서 조양(造陽)의 밖으로 성(城)을 쌓은 것은, 진(秦)이 임조(臨洮)의 험한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支脈)을 단절(斷絶)하여, 현토(玄菟)를 싸고돌아 황하(黃河)에 이르게 한 것은, 이적(夷狄)의 난동(亂動)으로부터 중화(中華)를 막아주는 것이며, 이는 미리 방비(防備)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라는 기록(記錄)을 보자.
위의 ‘진(秦)의 장성(長城)’을 설명(說明)하기를 : 『“현토(玄菟)를 싸고돌아 또는 감싸 안고 하(河)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는데,
이곳에 등장(登場)하는 『현토(玄菟)』라는 지명(地名)은 ‘고구려(高駒驪)의 핵심(核心) 요충지(要衝地)’로 소위(所謂) 『고구려(高駒驪) 사군(四郡) 중의 하나다』 ’현토(玄菟)’라는 지명(地名)은 고구려(高駒驪)의 것이며, 이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 다른 나라의 ‘현토(玄菟)’라는 지명(地名)은 없다는 뜻이다.
➊ 진(秦) 나라 바로 이후(以後)의 전한(前漢) 때의 ”현토군(玄菟郡)“은 :
《玄菟郡,武帝元封四年開.高句驪,莽曰下句驪.屬幽州[1].戶四萬五千六,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縣三:高句驪[2],上殷台,西蓋馬. : 현토군(玄菟郡)은, 무제(武帝) 원봉(元封)4년【BC 109年】에 개설되었는데, 고구려(高駒驪)는 왕망(王莽)이 하구려(下句麗)라고 불렀다. 유주(幽州)에 속했다. 호(戶)는 45,006, 구(口)는 221,845, 현(縣) 3 : 고구려(高句麗)·상은태(上殷台)·서개마(西蓋馬)이다.》라고 하였다. 또 그 주석(註釋)에서 이르기를 :
【應劭曰:故真番,朝鮮胡國 :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 옛 진번(眞蕃)은 조선(朝鮮) 호국(胡國)이다. [二] 應劭曰:故句驪胡 :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 옛 구려(句驪)는 호국(胡國)이다】라고 하였으니, 즉(卽),
『옛 진번(眞番) 곧 조선(朝鮮)은 호국(胡國)』이었고, 『구려(句麗)=구려(句驪)=구려(駒驪)또한 호국(胡國)이었다』라는 뜻이다.
➋ “현토군(玄菟郡)”이 “현토(玄菟)”이며, “현토(玄菟)”는 “고구려(高駒驪) 사군(四郡)”에 속해있었다는 것이 확실(確實)하다 : 고구려(高駒驪)의 현토군(玄菟郡)은,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으로부터 직선거리(直線距離)로 약 1 만리(萬里) 곧 3,500-4,000km 떨어진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6,995m : Khan Tengri(한텡그리산) : 기련(祁連) : 天山】주변 일대(周邊一帶)에 있었다는 것이다.
곧 “천산(天山) ➨ 현토(玄菟) ➨ 하(河)”의 순서(順序)로 : 『가장 서(西)쪽에 천산(天山)이 있으니, 그 산(山) 또는 산맥(山脈)을 끊어 지맥(地脈)을 단절(斷絶)시키고, 현토(玄菟)를 감싸고 돌아, ‘하(河)=하새(河塞)’에 닿도록 장성(長城)을 쌓았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➌ 고대(古代)의 천산(天山)은,
오늘날의 『한텡그리산[Khan Tengri Mt. 6,995m]=한등격리산[汗騰格里山]』이다. : 이시크쿨호(湖) 동(東)쪽 160km, 아극소[阿克蘇] 북(北)쪽 130km, 천산산맥[天山山脈] 중앙(中央)에 있는 산으로,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이라고도 한다.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6,995m)과 위만(衛滿)이 패수(浿水)를 건너 자리를 잡았다는 낙랑군(樂浪郡)의 운장(雲鄣)【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 정서(定西)의 장수(漳水) 일대(一帶) :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에서도 : “현토군(玄菟郡) 조를 보면 : ‘사기(史記)’를 인용(引用)하여 《亡命東走渡浿水居秦故空地上下”라고 하였다.】까지 5 천리(千里)가 된다.
➍ 그렇다면 “시황제(始皇帝)”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중원대륙(中原大陸) 어디에 있었다는 것일까? 《秦 塹 臨 洮 之 險, 登 天 山, 絕 地 脈, 苞 玄 菟, 款 黃 河 : 진(秦)이 임조(臨洮)의 험한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支脈)을 단절(斷絶)하여, 현토(玄菟)를 싸고돌아 황하(黃河)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한 것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실체(實體)라면 :
‘진서(晉書) 재기(載記) 서문(序文)’에서 밝히고 있는 진(秦)의 장성(長城)은 :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설명(說明)과는 전혀 다른 천지차이[天地差異]를 보여주고 있다. 즉(卽)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진서(晉書)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진(秦) 나라의 장성(長城) 설명(說明)은 뭔가?” 하는 의문(疑問)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곧 『임조(臨洮) 동(東)쪽에 ‘천산(天山)’은 없다. 반대(反對)로 ‘천산(天山)’은 임조(臨洮) 서(西)쪽 수천리(數千里) 먼 곳에 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理解)하고 받아들여야 하나?
➨➨➨ “진서(晉書) 재기(載記)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 시황(始皇)의 명(命)으로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접경지대(接境地帶)로부터 동(東)쪽으로 황하(黃河)에 이르도록 쌓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진(秦) 시황(始皇)은 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도록 했을까? 바로 북(北)쪽의 호맥(胡貉)에 의해 나라가 망(亡)할 수 있다는 예언서(豫言書) 때문이었다. ”호맥(胡貉)“이 누군가?
➨ 호맥(胡貉) : ‘호맥(胡貉)’이라고 하면 ‘오랑캐 구려(駒麗)’를 말하는 것이고, ‘호(胡)와 맥(貉)’을 분리하면 : ➀ 되놈 오랑캐와 ➁ ‘맥(貉)=맥(貊)=구려(駒麗)’를 뜻하는 말이 된다.
즉(卽) ‘호맥(胡貉)’ 곧 ‘구려(駒麗)의 침공(侵攻)에 대비(對備)키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은 것이다’라는 사실(史實)이 전개(展開)되는 것이다. 【‘4-2’편에서 원문(原文)을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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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 儒者可與守成 : 欽定四庫全書 / 唐宋八大家文鈔 巻一百三十三 [明, 茅坤 撰] / 東坡文鈔十七 ○ 試論 / 儒者可與守成
聖人之於天下也無意於取之也譬之江海百谷赴焉譬之麟鳯鳥獸萃焉雖欲辭之豈可得哉禹治洪水排萬世之患使溝壑之地疏為桑麻魚鼈之民化為衣冠契為司徒而五教行棄為后稷而烝民粒世濟其徳至於湯武拯塗炭之民而置之於仁夀之域故天下相率而朝之此三聖人者皆推之而不能去逃而不能免者者也於是益修其政明其教因其民不易其俗以是得之以是守之傳世數十而民不叛豈有他道哉周室旣衰諸侯並起力征爭奪者天下皆是也徳旣無以相過則智勝而已智既無以相傾則力爭而已至秦之亂天下蕩然無復知有仁義矣漢髙祖以三尺劒起布衣五年而并天下雖稍輔以仁義然所用之人常先於智勇所行之䇿常主於權謀是以戰必勝攻必取天下旣平思所以享其成功而安於無事以為子孫無窮之計而武夫謀臣舉非其人莫與為之者故陸賈譏之曰陛下以馬上得之豈可以馬上治之乎而叔孫通亦曰儒者難於進取可與守成於是酌古今之宜興禮樂之中取其簡而易知近而易行者以為朝覲㑹同冠昏䘮祭之法雖足以傳數百年上下相安然終莫若三代聖人取守一道源深而流長也夫武夫謀臣譬如藥石可以伐病而不可以養生儒者譬之五穀可以養生而不可以伐病宋襄公争諸侯不禽二毛不鼓不成列以敗於泓身夷而國蹙此以五穀伐病也 ➨➨➨秦始皇燔詩書殺豪傑東城臨洮北築遼水民不得休息傳之二世宗廟蕪滅此以藥石養生也善夫賈生之論曰仁義不施而攻守之勢異也夫世俗之不察直以攻守為二道故悉論三代以来所以取守之術使知禹湯文武之盛徳亦儒者之極功而陸賈叔孫通之流盖儒術之粗也.
《秦始皇燔詩書殺豪傑東城臨洮北築遼水民不得休息傳之二世宗廟蕪滅此以藥石養生也 : 秦始皇은 燔詩書하고 殺豪傑하며 東城臨洮하고 北築遼水하야 民不得休息하야 傳之二世에 宗廟蕪滅하니 此는 以藥石養生也라【秦 始皇帝는 詩經과 書經을 불태우고 호걸들을 죽였으며, 萬里長城을 쌓을 적에 동(東)쪽으로는 臨洮에서부터 축성하고, 북쪽으로는 遼水에까지 축성하여 백성들이 휴식하지 못해서 帝位를 전한 지 2世 만에 宗廟가 황폐하여 멸망하였으니, 이것은 藥石을 가지고 養生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➊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적에 동(東)쪽으로는 임조(臨洮)에서부터 축성(築城)하고, 북(北)쪽으로는 요수(遼水)에까지 성(城)을 쌓았다》라고 하였으니,
위의 글 (1)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내용(內容)이다. 〈‘동(東)쪽 임조(臨洮)’에서 시작(始作)하여 ‘북(北)쪽으로 요수(遼水)’까지 성(城)을 쌓았다〉는 것이다.
동(東)쪽 ‘임조(臨洮)’라는 말이 시사(示唆)하는 바가 큰 것이다.
이런 기록(記錄)에 따르면 “임조(臨洮)”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황하(黃河)가 있는데【시황(始皇) 때의 덕수(德水)다】바로 “요수(遼水)”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오늘의 역사해설(歷史解說)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소식(蘇軾) 3의 05 儒者可與守成”편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이다】
➋ 옛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위치(位置)’에 대해서는,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現在)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절대로 신뢰(信賴)할 수 없다.〉
〈진(秦)나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內容)대로라면 “동(東)쪽에 있는 임조(臨洮)에서 시작(始作)해서 북(北)쪽으로 요수(遼水)까지 쌓았다”라는 것이므로, 「요수(遼水)는 임조(臨洮)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➌ 이런 예(例)로 보면 : ‘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 등지에서 말하는 도요장군(度遼將軍)과 도요영(渡遼營)과는 한 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곧 『요수(遼水)는 오늘날의 요수(遼水)가 아니었다는 것이고, 임조(臨洮) 또한 오늘날의 임조(臨洮)가 아니었다는 증거(證據)다』
(3) 燕途紀行, 中, 日錄 / 병신년 [순치(順治) 13년, 1656, 효종 7)] 9월 3일(무신)
《豆乙非在瀋西百里外。遼河北岸。亦是淸人與明師對壘處。: 두을비(豆乙非)는 심양 서쪽 백 리 밖 요하(遼河) 북쪽 언덕에 있으니, 역시 청나라 사람이 명(明) 군사와 대진(對陣)했던 곳이다. ➊ 山海關頭萬里長城外大漠中。又有二條長城舊墟。五里置一墩。是分限華夷界。: 산해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 一條自建州界起。從淸河撫順等堡。歷開元鐵嶺等衛。由遼河南抵于三河堡。: 한 줄기는 건주(建州)의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청하보(淸河堡)ㆍ무순보(撫順堡) 등지로 해서 개원위(開元衛)ㆍ철령위(鐵嶺衛) 등을 지나 요하(遼河)를 거쳐 남쪽으로 삼하보(三河堡)에 이르렀다. ➋ 一條自陝西界起。從太原大洞等府。歷大漠逶迤醫巫閭後。過林寧鎭遠鎭寧等堡。抵高平驛。: 한 가닥은 섬서(陝西)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太原府)ㆍ대동부(大洞府) 등지로 해서 큰 사막(沙漠)을 거쳐 의무려(醫巫閭) 뒤로 꾸불거리다가 임녕보(林寧堡)ㆍ진원보(鎭遠堡)ㆍ진녕보(鎭寧堡) 등을 지나 고평역(高平驛)에 이르렀다. 極目只有其基。而林寧近處則草莽間。間有粉堞。: 눈에 보이는 것이 오직 그 터뿐이요, 임녕(林寧) 근처에는 풀숲 사이에 분첩(粉堞)이 간간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➊ 〈山海關頭萬里長城外大漠中.又有二條長城舊墟.五里置一墩.是分限華夷界 : 산해관(山海關) 머리 만리장성(萬里長城) 밖에 있는 큰 사막(沙漠) 가운데 또 두 줄기 장성(長城)의 옛터가 있고, 5리마다 돈대(墩臺) 하나씩을 두었으니, 이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를 나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산해관(山海關)=진황도(秦皇島)‘의 동서남북(東西南北) 어느 땅에도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없다. ’대막(大漠)‘이라고 표현(表現)하고 있는 ’큰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산해관(山海關)=진황도(秦皇島)‘에서 “서(西)”쪽으로 3 천리(千里) 이상(以上) 떨어져 있다.
때문에, 위의 기록(記錄)대로 “대막(大漠)의 한 가운데(中)”라면 5 천리(千里) 이상(以上) 서(西)쪽으로 이동(移動)되어야 마땅한 것이고, 이곳에서 5리마다 돈대(墩臺)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경계(境界)를 나눴다고 하면 : 중화(中華)는 서역(西域) 땅에 있었다는 것이고, 그 동(東)쪽에는 조선(朝鮮)이 있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조차 ’중화(中華)‘는 ’총령(葱嶺)의 동(東)쪽에 있다‘러고 하였으니, 중화(中華)란 곧 조선(朝鮮)의 대명사(代名詞)라고 할 수 있다.
➨ 〈一條自陝西界起.從太原大洞等府.歷大漠逶迤醫巫閭後 : 한 가닥은 섬서(陝西) 경계로부터 시작하여 태원부(太原府)ㆍ대동부(大洞府) 등지로 해서 큰 사막(沙漠)을 거쳐 의무려(醫巫閭) 뒤로 꾸불거리다가〉라고 하였는데,
위의 기록(記錄)은 오늘날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거꾸로, 정반대(正反對)로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는 존재(存在)할 수 없는, 불가능(不可能)한 지형지세(地形地勢)다.
중요(重要)한 것은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임의(任意)로 바꿀 수도, 이동(移動)시킬 수도 없다는 점이다. 즉(卽),
“사막지대(沙漠地帶) 또는 대막【大漠 : 大 沙漠】”은, 영하성(寧夏省)의 황하(黃河) 서(西)쪽 즉(卽) 하란산맥(賀蘭山脈)의 서(西)쪽 지대(地帶)인 하서(河西) 땅에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태원부(太原府)니, 대동부(大洞府)니,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니 하는 곳은, 사막지대(沙漠地帶)와는 전혀 관계없는 “초원지대(草原地帶)와 산악지대(山岳地帶)”로 형성(形成)되어 있는 곳이다.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땅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산(山)의 뒤[北]에는, “달단(韃靼)[韃子=㺚子)]”이 있었다고 했기 때문이니, 『태원(太原), 대동(大同), 의무려산(醫巫閭山) 등의 지명(地名)과 산 이름은 일만(一萬) 리 서(西)쪽 땅에서 차용(借用)해 온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卽) “신강성(新疆省)의 의무려산(醫巫閭山) 서(西)쪽에 태원(太原)이 있고, 그 서(西)쪽에 대동(大同)이 있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 또한 “의무려산(醫巫閭山) 뒤【북(北)쪽】에 달단(韃靼)이 있다”라는 말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곧 천산산맥(天山山脈)이다.”라는 말과 같다.
(4) 연원직지(燕轅直指) 6권 留館別錄 / 19성(省)의 도리(道里)와 재부(財賦)
《直隷在保定府.如我國京畿.東西一千二百二十八里.南北一千六百二十八里.東界盛京.西界山海關.南界河.北界邊墻 : 직례(直隷) 보정부(保定府)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기(京畿)와 같다. 동서(東西) 1228리, 남북(南北) 1628리며, 동계(東界)는 성경(盛京), 서계(西界)는 산해관이며, 남계(南界)는 황하(黃河), 북계는 변장(邊墻)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계(東界)는 성경(盛京) 즉 심양(瀋陽)이고, 서계(西界)는 산해관(山海關), 남계(南界)는 하(河) 즉 황하(黃河)요, 북계(北界)는 변장(邊墻)이 있다〉라고 한 것은, 오늘날의 대륙(大陸) 하서(河西) 땅에서나 가능한 지세(地勢)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기록(記錄)했다‘는 것으로 보아 신뢰(信賴)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연경(燕京)=북경(北京)’은 예부터 전해오는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발원(發源)한다는 “하(河)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라는 것을 증명(證明)해 주는 기록(記錄)이다.
➨ “남(南)쪽에 하(河)가 있다”라는 말은 : 최소한(最小限) 『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북방지대(北方地帶)로부터 서역(西域)의 총령(葱嶺)에 이르는 곳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직례(直隷)와 보정부(保定府)’는, 동방(東方)이 아닌 ‘서방(西方) 땅의 직례(直隷)와 보정부(保定府)’를 말하는 것이 된다.
(5)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5권 / 벽려신지(薜荔新志) [벽려신지(薜茘新志)]
《東國則東西北三面。皆高寒。九月已穫稻。而獨兩南地暖。必至十月而穫。風土各殊。未可同而言也。: 우리나라는 동쪽, 서쪽, 북쪽이 모두 지대가 높고 차가우므로 9월에 수확하는데, 호남과 영남만은 지대가 따스하므로 반드시 10월에 수확을 한다. 풍토가 각각 다르므로 동일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동국(東國)은 어떤 나라를 지칭(指稱)하는 말일까? 대륙(大陸)의 동국(東國)인가? 반도(半島)의 동국(東國)인가? 그렇다면 반도(半島)의 지세(地勢)는 어떨까?
반도(半島) 땅은 북(北)과 동(東)쪽은 높고, 서(西)쪽은 낮아서 대부분(大部分) 하천(下川)이 동(東)쪽에서 서(西)쪽으로 흐른다. 헌데 위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저자(著者)는 말하기를 : “우리나라는 동(東)쪽, 서(西)쪽, 북(北)쪽이 모두 지대가 높고 차갑고, 호남(湖南)과 영남(嶺南)만은 지대가 따스하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반도(半島) 땅의 지세(地勢)도 틀린 말이고, 기후(氣候) 또는 틀린 말이다. 그런데 왜 임하필기(林下筆記)의 저자는 이런 설명(說明)을 하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한반도(韓半島)에 없었고,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 또한 중원(中原) 대륙(大陸) 땅에 없었다는 뜻이다.
《爲官避瘴氣。不知仕亦有瘴也。急催暴斂。剝下奉上。租賦之瘴。深文以逞。良惡不白。刑獄之瘴。侵牟民利。以實私儲。貨財之瘴。攻金攻木。崇餙車服。工役之瘴。盛揀妾姬。以娛聲色。帷薄之瘴。: 수령으로 나갈 때 장기(瘴氣)가 있는 지역을 피하는데, 수령 자체에도 장기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금을 난폭하게 거두고 아랫사람을 박해하여 윗사람을 받드는 것은 조부(租賦)의 장기요, 법조문을 엄격히 적용하여 이욕을 챙기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명백하게 가리지 않는 것은 형옥(刑獄)의 장기요, 백성들의 이익을 침범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것은 화재(貨財)의 장기요, 쇠와 나무를 다루어 거복(車服)을 호화롭게 꾸미는 것은 공역(工役)의 장기요, 첩희(妾姬)를 많이 가려서 성색(聲色)을 즐기는 것은 유박(帷薄)의 장기다.》
➨ “장기(瘴氣)”란 “장독(瘴毒)”을 말하는 것으로, 《瘴氣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亦稱瘴毒、瘴癘,中文中瘴氣為中醫名詞,疾病地理學之概念,是指中國南方山林間濕熱環境下因某種原因(如動植物腐敗等)而產生的一種能致病的有毒氣體。由瘴氣引起的疾病被稱為瘴氣病或瘴病。瘴病是多種疾病(流行病或部分熱帶病)的總稱,多數情況下指瘧疾,故又稱其為瘴瘧》라고 하였다.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대륙(大陸)의 장강(長江) 이남(以南) 땅』의 이야기다.
《平安道。保定府安州。○ 眞定府定州。○ 雲中府朔州。○ 天水府寧遠。○ 臨洮府渭原。○ 惠州府龍川 ○ 遼東鎭義州。○ 大同鎭鐵山。○ 潼川府昌城。: 평안도의 행정구역 중 옛날의 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안주(安州)이고, 진정부(眞定府)는 정주(定州)이고, 운중부(雲中府)는 삭주(朔州)이고, 천수부(天水府)는 영원(寧遠)이고, 임조부(臨洮府)는 위원(渭原)이고, 혜주부(惠州府)는 용천(龍川)이고, 요동진(遼東鎭)은 의주(義州)이고, 대동진(大同鎭)은 철산(鐵山)이고, 동천부(潼川府)는 창성(昌城)이다.》
➨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始作)되었다는 “임조(臨洮)는 위원(渭源)”인데, “평안도(平安道)에 속해있다”』 라는 뜻이다. “위원(渭源)”이란 : 위수(渭水)가 발원(發源)하는 그곳 땅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반도(韓半島) 평안도(平安道) 땅에 “위수(渭水)가 흐른다”라는 말은, 대륙(大陸) 서(西)쪽 지명(地名)을 한반도(韓半島) 평안도(平安道)로 옮겨 놓았다[移植]는 것이 된다.
『위수(渭水)는 위하(渭河)』 로, 감숙성(甘肅省) 위원현(渭源縣)의 오서산(鳥鼠山) 동(東)쪽에서 발원(發源)하여 820km를 흘러 하(河)에 유입(流入)되는 하천(河川)이다.
‘위수(渭水)=위하(渭河)’의 상류(上流)에는 바로 ‘정서시(定西市)와 천수시(天水市)’가 있는데, 『“정서(定西)”는, “옛 위만(衛滿)의 상하 장(上下 鄣) 즉(卽) 운장(雲鄣)이 땅이다”』
➨ 위수(渭水)는 위하(渭河)를 말하는 것인데 820km를 흘러 하(河)에 유입(流入)되는 하천(河川)이다. 이 위수(渭水)의 상류(上流) 지류(支流) 하천(河川)의 상류지대(上流地帶)에 “위만(衛滿)의 운장(雲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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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강한집(江漢集) 제1권 / 부(賦) 만리장성을 애도하는 부〔弔長城賦〕
《遵華表而西邁兮,望長城而弔之,睥睨聯亘於萬里兮, 曾不禦夫四夷 : 화표를 따라 서쪽으로 가며, 만리장성을 바라보고 애도하노라. 성가퀴는 만리(萬里)에 이어 뻗어있건만, 저 오랑캐들을 방어하진 못했도다. 何秦皇之狂妄兮,命蒙恬而暴師,自臨洮而列雉兮,橫大幕以委蛇 : 어찌하여 진황(秦皇)은 망령이 나서, 몽염을 시켜 군대를 혹사시켰던가. 임조에서부터 줄지어 선 담이, 대막(大漠)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이어졌도다. 塹其高而湮其深兮,因地形之嶮巇,亭障通於祁連兮, 環瀚海而爲池 : 높은 곳은 깎고 깊은 곳은 메꾸면서, 지형의 험준함을 이용하였다. 정장을 세워 기련산으로 통하게 했고, 한해를 둘러 성지(城池)를 만들었도다. 據北假而達于雲陽兮,壯九服之藩籬,勞赤子之三十萬兮,絶地脉而鬼神咨 : 북가에서 운양까지, 구복의 울타리가 장엄도 하다만, 삼십만 백성들을 고생시키고, 지맥을 끊어버려 귀신이 탄식했다. 중략(中略)》라고 하였으니,
➊ 〈遵華表而西邁兮,望長城而弔之,睥睨聯亘於萬里兮,曾不禦夫四夷 : 화표(華表)를 따라 서(西)쪽으로 가며,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바라보고 애도하노라. 성가퀴는 만리(萬里)에 이어 뻗어있건만, 저 오랑캐들을 방어하진 못했도다.〉라고 하였는데,
화표(華表)는 요동(遼東)에 있으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그곳으로부터 수천(數千) 리 서(西)쪽 땅에 있으니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바라보고 애도(哀悼)할 수도 없고, 필요(必要)도 없다.
➨ 「‘저자(著者)’가 진실(眞實)로 화표(華表)를 따라 서(西)쪽으로 가면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바라보며 애도(哀悼)했다고 한다
면」 : 그 땅은 오늘의 요녕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서(西)쪽으로 7-9 천리(千里) 먼 곳 땅을 말하는 것이다.
➋ 〈自臨洮而列雉兮,橫大幕以委蛇 : 임조(臨洮)에서부터 줄지어 선 담이, 대막(大漠)을 가로질러 구불구불 이어졌도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임조(臨洮)”는 대(大)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동(東)쪽에 있다. 따라서 원문(原文)의 설명(說明)대로라면 : “임조(臨洮)”는 대(大) 사막지대(沙漠地帶)의 서(西)쪽 땅 즉(卽) 당(唐) 때의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서(西)쪽 땅에 있어야 한다”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大) 사막지대(沙漠地帶)’는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경내(境內)로부터 시작(始作)되며, 하서회랑(河西回廊) 북방지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즉(卽), 진(秦) 장성(長城)이 시작되었다는 “임조(臨洮)”는 “대막(大漠)”의 서(西)쪽 땅에 있어야 올바른 것이고,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할 수 있다.
➌ 〈亭障通於祁連兮, 環瀚海而爲池 : 정장(障)을 세워 기련(祁連)으로 통하게 했고, 한해(瀚海)를 둘러 성지(城池)를 만들었도다.〉라고 하였으니,
‘기련(祁連)’이란 「하늘 곧 ‘天’」을 말하는 것이니, “천산(天山) 곧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 : 한텡그리산)”을 뜻하고, 「한해(瀚海)는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경내(境內)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진서(晉書) 재기(載記)’에서 말하는 『진(秦)은 임조(臨洮)의 험한 곳에 해자를 만들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현토(玄菟)를 감싸안고 하(河)에 이르렀다【‘晉書 載記 序頭’에서 이르기를 : 然則燕築造陽之郊,秦塹臨洮之險,登天山,絕地脈,苞玄菟,款黃河,所以防夷狄之亂中華,其備豫如此】』 는 말과 똑같은 내용(內容)으로 이를 고증(考證)하는 기록(記錄)이다.
또한 몽념전(蒙恬傳)에 의하면 : 《於 是 渡 河, 據 陽 山, 逶 蛇 而 北 : 여기에서 이렇게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기대어, 구불구불 뱀처럼 북(北)쪽으로 이어졌다.》 라고 하였다.
➍ 이러한 기록(記錄)에 따르면 : 『“임조(臨洮)는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서(西)쪽 땅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다』라는 결론(決論)에 다다르며, 『이때의 진(秦)나라 역시(亦是) 중원(中原) 요충지(要衝地)가 아닌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와 신강성(新疆省) 서(西)쪽 땅에 있었다』 라는 결론(決論)에 다다른다.
이때 진(秦)의 동(東)쪽 “신강(新疆)으로부터 중원(中原) 땅에는, 조선(朝鮮)의 삼한(三韓)이 자리 잡고 있었다”라는 것이다.
➎ 즉(卽) 당시(當時)의 ‘시황(始皇)과 부소(扶蘇)와 몽념(蒙恬)과 30만 대군(大軍)’이 쌓은 장성(長城)은 :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관외(管外) 서역(西域) 땅에 있었던 “임조(臨洮)”로부터 시작해 천산(天山) 높이 올라, 지맥(地脈)을 끊고 메워, 현토(玄菟)를 감싸고 하(河)에 다다르고, 북(北)쪽으로 한해(瀚海)에 다다라 성지(城池)를 만들고, 양산(陽山)에 기대어 구불구불 뱀처럼 북(北)쪽으로 이어졌다〉라고 한 것이다.
또한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 관내(管內)에 “흑수(黑水)”가 있어 연안(沿岸)에 “흑수수착(黑水水捉)”도 있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아래의 파라문(婆羅門) 6수의 내용(內容)과 정확(正確)하게 일치(一致)한다. 즉(卽),
➏ 또한 파라문(婆羅門) 六首[耶律鑄 元] 가운데, 4.5.6 수(首)를 보면 :
4. 《黄草泊圍青草甸,白楊河繞緑楊堤. 依然名是叅天道,誰使唯聞戰馬嘶. 【註釋 : 北庭都䕶境内有白楊及黄草泊唐新史同國朝所設驛傳東臨三韓西抵濛汜黄草泊白楊河皆正驛路也】》: 〈東臨三韓西抵濛汜黄草泊白楊河 : 북정도호(北庭都護) 경내(境內)를 벗어나면 즉 경외(境外)는 “삼한(三韓)에 임한다”라는 뜻이다.
5. 《弓月山風長似箭,燭龍軍火亂如星. 秪除盡挽天河水,可洗兵塵戰地腥.【註釋 : 北庭都䕶府有瀚海軍本燭龍軍也.府境有弓月城弓月山是謂弓月道出兵路也.唐梁建方嘗為弓月道總管】》
6. 《黒水且誰為翠水,白山原自是氷山. 得非煙客乘龍火,為煽洪爐到世間. 【註釋 : 天山軍在西州交河郡夏絶無雨其熱甚于炎方唐舊史北庭都䕶府自永嶶至天寳管瀚海天山伊吾三軍天山一名白山以其四時氷雪不消因以名之唐新史北庭都䕶府境内有黒水及黒水守捉】》라고 하였으니,
조선사(朝鮮史) 또는 대륙사(大陸史)에서 놀라운 기록(記錄)임에 틀림이 없다. 필자(筆者)가 그동안 주장(主張)했던 것과 단 한치도 틀리지 않는 내용(內容)들이다.
이때의 ‘한해(瀚海)’는 :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를 말하는 것이고, 준갈이분지(準噶爾盆地) 안에는, 오륜고호(烏倫古湖), 마납사호(瑪納斯湖), 애비호(艾比湖) 등의 호수(湖水)와 액이제사하(額爾齊斯河), 포이진하(布爾津河), 오륜고하(烏倫古河), 규둔하(奎屯河) 등의 하천(河川)이 흐르고 있어 “한해(瀚海)”로 써의 충분한 가치(價値)를 하고 있던 곳이라고 보는 것이다.
당 잠삼(岑參)의 “한해(瀚海)”를 읊은 시(詩) 구절(句節)에 의하면 : 이때 한해(瀚海)는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별노합산(別盧哈山)=벨루하산(Belukha,Mt)’의 빙하(氷下)와 빙벽(氷壁)을 포함(包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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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靑莊館全書 아정유고(雅亭遺稿) / 아정유고 서(雅亭遺稿序)[윤행임(尹行恁)]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소년 시절에, 서쪽으로 중국의 계주(薊州)에 들어가 만리장성(萬里長城)에 서서 창해(滄海)가 동(東)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으며, 요동(遼東) 들에 수레를 멈추어 오랑캐와의 싸움터를 물었다.》라고 하였다.
※ [출처 : 고전번역원 DB 아정유고 서(雅亭遺稿序)[윤행임(尹行恁)] :『倚 長 城, 見 滄 海 東 流 : 장성(長城)에 기대어 서서 창해(滄海)를 바라보니 동쪽으로 흐른다(東流)』라고 하였다. 바닷물이 어떻게 동(東)쪽으로 흐를 수가 있겠는가! 곧 ‘창해(滄海)’는 바다가 아닌 넓고 넓은 당시(當時)의 하(河)를 칭(稱)하는 말이다.
➨➨ 『倚 長 城, 見 滄 東 流 : 만리장성(萬里長城)에 기대어 서서 창해(滄海) 곧 황하(黃河)를 바라보니 물은 동(東)쪽으로 흘러간다. 또는 만리장성(萬里長城)에 기대어 동(東)쪽으로 흘러가는 창해(滄海)를 바라본다』 라는 뜻이다.
곧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곧 하새(河塞)라고 하였으니 옳은 말이다. 옛 기록(記錄)에서 “창해(滄海)”에 대한 해석(解釋)은, 재고(再考)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사기(史記), 전한서(前漢書) 등에서는 발해(渤海)가 아닌 ‘발해(勃海)’라고 하였으나, 『‘자치통감(資治通鑑) 서한기(西漢紀)’는, ‘발해(勃海)’라는 글자 자체(自體)가 없다.』
곧 〈한(漢)나라 병사(兵士)가 조선(朝鮮) 영토에 들어가니, 조선왕(朝鮮王) 우거(右渠)가 발병(發兵)하여 험한 곳에서 막았다.【漢兵入朝鮮境, 朝鮮王右渠發兵距險】〉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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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➊ 〈가욕관(嘉峪關)〉 :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 중국어 위키백과인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 “天下第一關”을 검색(檢索)하면 첫 번째로 검색(檢索)되는 것이 “가욕관(嘉峪關)”이다. 가욕관(嘉峪關)을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또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했다고 한다.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하서회랑(河西回廊) 가욕산(嘉峪山)의 가욕관(嘉峪關)에 있는 현판(懸板)에 쓰여 있다고 하였다. 【가욕관(嘉峪關) : 감숙성(甘肅省) 주천현(酒泉縣) 가욕산(嘉峪山)의 서쪽에 있던 관명(關名)으로 명(明)나라 초기에 설치한 것인데, 서역(西域)에서 입공(入貢)할 때는 반드시 이 관을 통해서 왔다고 한다.】
➋ 〈산해관(山海關)〉 : 산해관(山海關)의 현판(懸板)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속세(俗世)에서는 진(秦)의 이사(李斯)가 쓴 글자라고도 한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 전해진 것이다’라고 말한다.
➨ 도곡집 제2권 / 시(詩) 산해관에서 이십 운[山海關 二十韻] :
《주(注) : 산해관(山海關)의 현판에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말한 것이다. 도곡의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 “내루(內樓) 서쪽 가장 높은 층에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는 편액(扁額)을 걸었는데, 글자 모양이 상당히 크다. 이사(李斯)의 글씨라고 전해지나 옳지 않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산해관(山海關)의 현판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되어 있고,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은 감숙성(甘肅省)의 가욕관(嘉峪关)을 이르며 현판 또한 그러하니, 도중에 바뀐 듯하다. ➊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에는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으로 되어 있고, ➋ 홍대용(洪大容)은 ‘연기(燕記), 연로기략(沿路記略)’ 등 후대(後代)의 연행기(燕行記)에는 대부분(大部分)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되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 즉(卽) 연행기(燕行記)에서 : 전대(前代) 사신(使臣)들은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기록(記錄)해 놓은 것을 보았는데, 후대(後代)의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懸板)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중간(中間)에 누군가에 의해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으로 바꿔치기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 : 숙종 38년(1,712) ∼ 홍대용(洪大容)의 연기(燕記) : 영조(英祖) 42년(1,766) 사이의 일이라고 판단(判斷)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중요(重要)치 않다.
➤ 『산해관(山海關)은,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아니었다』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 가욕관(嘉峪關)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嘉峪關位於甘肅省嘉峪關市向西5公里處,是明長城西端的第一重關,也是古代「絲綢之路」的交通要衝. 嘉峪關關城,位於嘉峪關最狹窄的山谷中部,地勢最高的嘉峪山上,城關兩翼的城牆橫穿沙漠戈壁。嘉峪關以地勢險要,巍峨壯觀著稱於世,被稱為 「天下第一雄關」。與千里之外的 「天下第一關」——山海關遙相呼應,聞名天下。:
嘉峪關建於明太祖洪武五年(1372年),距今已有651年的歷史。…明孝宗弘治八年(1495年),修建嘉峪關關樓。明武宗正德元年(1506年),…修建了內城光化樓和柔遠樓,同時,還修建了官廳、倉庫等附屬建築物。明世宗嘉靖十八年(1539年),…在關城上增修敵樓、角樓等,並在關南關北修築兩翼長城和烽火台等。
※ 가욕관(嘉峪關) [출처 : 위키백과] : ‘만리장성(萬里長城) 가욕관(嘉峪關)’ :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 산해관(山海關)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즉(卽),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한다.
〈명(明) 홍무(洪武) 五年【1,372年】에 처음 축성(築城)되었다고 설명(說明)하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 100%다” 이때 ‘주원장(朱元璋)’은 제 앞가림하기에도 정신(精神)이 없었을 때였으니 말이다.〉
※ 가욕관(嘉峪關) [출처 : 위키백과] : 산해관(山海關)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즉(卽),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이라고 한다.
또 ‘만리장성(萬里長城)’이란 ‘진(秦)나라 때의 장성(長城)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했지, 명(明)나라에서 쌓은 것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하지 않았다. 웃기는 이야기다.
결국(結局) 명(明)나라 초에 서달(徐達)【개국공신(開國功臣), 위국공(魏國公)】이 축성(築城)했다는 산해관(山海關)은, 곧 ‘가욕관(嘉峪關)’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었다는 말과 같다.
또 「당시(當時)의 진(秦)나라 동(東)쪽 끝이 가욕관(嘉峪關)이다」 라는 말과 같고, 이는 「명(明)나라 동(東)쪽 끝이 가욕관(嘉峪關)이다」 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 어떻게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 “한 개가 아니고 두 개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천하제일(天下第一)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고, 하나는 짝퉁이라는 말이다. “즉(卽)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이 바로 ‘짝퉁’이다”
※ 산해관(山海關)[출처 : 위키백과] :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 ➨ 가욕관(嘉峪關)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즉(卽),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한다.
둘 중의 하나는 짝퉁인데, 기록(記錄)으로 보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이 바로 ‘짝퉁’이다.
왜냐하면 진(秦)나라의 몽념(蒙恬)이 쌓은 것이 아니라, 1600년(年)이 지난 뒤의 명(明)나라 장수(將帥) 서달(徐達)이 쌓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實際)는 명(明)의 것이 아닌 “조선(朝鮮)”의 것이어야 맞는 말이다.
太康地理志…通典…資治通鑑에 의한 萬里長城
(9)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 : 【太康 (西晉)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太康 AD 280年 4月∼ 289年 : 西晉開國皇帝晉武帝司馬炎的第三個年號,共計10年,接在太熙之前。咸寧六年四月(280年),消滅孫吳政權,統一中國,改元太康元年】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
➊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봐도 : 「낙랑(樂浪)은. 한반도(韓半島) 평양(平壤) 땅이 아니었다」라는 것을 확인(確認)해준다.
여러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이를 토대(土臺)로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통전(通典)·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등의 많은 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하면서 “갈석산(碣石山)과 장성(長城)이 나왔다는 수성현(遂城縣)”을 찾고 있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하북성(河北省) 땅”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다. 왜, 무엇 때문에 오늘의 하북성(河北省) 땅에서 찾으려 하는 것인지 필자(筆者)는 이해불가(理解不可)한 것이다.
『누가 “오늘의 하북성(河北省) 땅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라고 했으며, “누가 오늘의 하북성(河北省) 땅에 수성현(遂城縣)이 있다”라고 하였는가?』 참 답답한 이야기다. 발상전환(發想轉換)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➋ ‘진(秦) 본기(本紀)·몽념전(蒙恬傳)·조고전(趙高傳)’ 등에서는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라고 만 했을 뿐이고,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라고 했을 뿐이다.
20세기에 만들어진 중국지도(中國地圖)를 봐도 랑산(狼山)과 양산(陽山)은 하투(河套) 북방지대(北方地帶)에 그려져 있다.
➨ 그러나 “양산(陽山)”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記錄)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는 오늘날의 중국어판 위키백과인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도 하투북방(河套北方)의 “양산(陽山)”에 대한 설명(說明) 자체(自體)가 없다.
그렇다면 진(秦) 나라 당시(當時)에는 황하(黃河)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양산(陽山)”이라는 산(山)이 있었으므로 기록(記錄)해 놓았을 것이다. 그게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이냐? 하는 것이다.
➨➨➨ 20세기(世紀)에 만들어진 중국지도(中國地圖)에서처럼 “양산(陽山)”이 하투(河套) 북방지대(北方地帶)인 내몽고(內蒙古) 또는 몽고(蒙古) 땅에 있었다고 한다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종단(終端)은 이곳에서 찾아야 한다. ◆ 문제(問題)는 “양산(陽山)”이라는 산(山)이 그곳에 없다는 것이다.
(10) 두우(杜佑) 통전(通典) :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 :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장성(長城)이 이 산(山)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장성(長城)의 동(東)쪽은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高駒驪)에 들어갔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按尚書云: 夾右碣石入於河.右碣石即河赴海處,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則高麗中為左碣石. : 살펴보건대,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갈석(碣石)의 오른쪽을 끼고 하(河)로 들어갔다.” 하였는데, 갈석(碣石)의 오른쪽은 바로 하(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지금의 평주(平州)에서 남쪽으로 2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니, 고구려(高駒驪)의 중간은 갈석(碣石) 왼쪽이 된다.》라는 기록(記錄)으로 보면 :
위의 주석(註釋)으로 보면 : 《평주(平州) 남(南) 20 여리(餘里)에 “하(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라는 말은, 당시(當時)에는 하(河)【황하(黃河)】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유주(幽州) 땅으로 흘렀다는 말과 같다. 그곳에도 갈석산(碣石山)이 있었는데, 이것은 ‘우갈석(右碣石)’이고, 고구려(高駒驪) 땅 가운데 있는 것을 ‘좌갈석(左碣石)’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➊ 그렇다면 “하(河)”가 바다로 유입(流入)되는 연안(沿岸)의 서안(西岸)에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이것을 우갈석(右碣石)이라 했고, 동안(東岸)에도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이것을 좌갈석(左碣石)이라고 했다는 말인가? 그럼 “하(河)”가 “요수(遼水)”였다는 말일까? 도대체 뭔 말인가?
➋ 아니면 “하(河)”가 바다로 유입(流入)되는 곳에 갈석산(碣石山)이 있어 이것을 우갈석(右碣石)이라 했고, 그곳으로부터 동(東)쪽에 있는 요수(遼水) 가운데 있는 갈석산(碣石山)을 좌갈석(左碣石)이라고 했다는 말인가?
➌ 위의 글 “(9)+(10)”에서 말하고 있듯이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상서(尙書)를 주석(注釋)”은 뭐냐?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시작(始作)된 곳이고, 이곳에 갈석산(碣石山)도 있으며,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유관(渝關)】도 있어야 함은 위의 사서(史書) 기록(記錄)으로 입증(立證)이 되는 것이다.
➨ 결국(結局) 『갈석산(碣石山)도, 갈석(碣石)도, 하(河)도, 요수(遼水)도, 산해관(山海關)도 모두 조선(朝鮮)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더불어 이곳에 있었다는 『림유관(臨楡關=臨楡山), 림유하(臨楡河) 또한 조선(朝鮮) 영토(領土) 내에 있었다』 라는 것이 옳다. 따라서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는 명백(明白)한 증거(證據)다.
(11) 자치통감(資治通鑑) 수기(隋紀) 양제(煬帝) 상지하(煬帝 上之下)의 주(注) :
《두우(杜佑)가, “갈석산(碣石山)은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으니,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이 산(山)에서 시작되었다[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 秦長城起於此山]”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위의 글 “(9)+(10)+(11)”에서 설명(說明)하는 말에 따르면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통전(通典)+자치통감(資治通鑑)】 : ‘갈석산(碣石山)은 낙랑군(樂浪郡)에 있다’라고 하였으니,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 의하면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 낙랑군(樂浪郡) 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곳 땅에는 요수(遼水)도, 패수(浿水)도, 압록강(鴨綠江)도 없다.〉
「“갈석산(碣石山)”과 “산해관(山海關)=유관(楡關=渝關)=림유관(臨楡關)=림투관(臨渝關)”은 조선(朝鮮) 영토(領土) 안에 있었다」라는 것이고, 옛 장성(長城)의 시초(始初) 또는 시작되었던 곳은 “조선(朝鮮) 영토(領土)”에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다. 이건 사서(史書)에서 설명(說明)해주고 있는 내용(內容)이다.
문제(問題)는 : 『진(秦) 장성(長城)의 동(東)쪽은,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高駒驪)에 들어갔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라고 하였는데,
30만 대군(大軍)을 이끌고 직접(直接) 장성(長城)을 쌓은 당시(當時)의 “몽념(蒙恬) 열전(列傳)”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으라고 지시한 시황(始皇)의 진(秦) 본기(本紀)와 몽념전(蒙恬傳)과 조고전(趙高傳) 등에 의하면 산해관(山海關)이니 갈석산(碣石山)이니 하는 지명(地名)조차 등장(登場)하지 않는다.
오직 〈하(河)를 따라 만든 하새(河塞)와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구불구불 뱀처럼 이어졌다〉고 한 것이다. 후대(後代)의 목적(目的)을 가진 사가(史家)들에 의해 이렇게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기에 이른 것이다.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➊ 그 땅이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까지인가?
➋ 그 땅이 신강성(新疆省)에 있는 천산(天山)과 하(河) 상류(上流)인가?
➌ 그 땅이 동(東)쪽 임조(臨洮)에서 북(北)쪽으로 요수(遼水)까지 쌓았는가? 【이건 오늘의 역사해설(歷史解說)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소식(蘇軾) 3의 05 儒者可與守成”편에 기록(記錄)된 내용(內容)이다】
옛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 위치(位置)’에 대해서는, 21세기(世紀)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주장(主張)은, 전혀 100% 신뢰(信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전(古典) 원전(原典) 기록(記錄) 내용(內容)과 전혀 다른 해설(解說)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4-2편]에서도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놀라운, 새로운 원전원문(原典原文)의 기록(記錄)들을 찾아 해설(解說)하고자 한다.
2023년 10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