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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2일, 대구박약회 청장년부 정기답사가 있었다. 올해 入會를 하고 답사를 여러 번 따라 다녔지만, 이번 답사는 기다려졌다. 소규모 답사가 아니기에 많은 분들을 뵙고, 많은 것을 배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리고 맹씨행단과 추사고택도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7시 40분이 조금 못되어 대구 홈플러스 앞에서 출발했다. 예산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조웅희 총무님의 사회로 이동익 회장님의 인사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이한방 교수님께서는 답사지에 대해 전반적인 설명을 해 주셨다.
맹씨행단
10시을 넘어 맹씨 행단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거대한 시비가 눈에 들어온다. ‘古佛孟思誠時調碑’와 ‘新昌孟氏世居碑’가 서 있었고, 그 옆에는 귀부와 이수를 제대로 갖춘 비석이 서 있었으나 살펴보지는 못하였다. 맹씨행단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맹씨행단은 고불 맹사성이 살던 집이다. 집 앞에 있는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 집은 최영 장군의 부친인 최원직(崔元直)이 건립하였다고 적혀있다. 최영이 죽은 후에 이 집은 잠시 비어있었는데, 고불 맹사성의 아버지인 맹희도가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전한다. 최영 장군의 부친이 세운 집이기에 이 맹씨행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 주택이 된다. 지금 남아있는 맹씨행단은 맞배지붕 셋이 결합되어 ‘工’字 모습이다.
맹씨행단 처마 밑에 서서 기둥 위에 공포를 살펴보았다. 매우 간단한 공포구조를 하고 있어 화려한 절집의 공포와 비교된다. 맹씨행단에서 눈에 띈 것은 기둥과 창호의 모습이었다. 전면에 노출된 기둥은 사모인데, 뒤쪽의 벽면에 세워진 고주는 원기둥이었다. 우리나라의 목조건축물을 보면, 뒤 벽면의 기둥은 사모기둥을 쓰더라도 눈에 잘 띄는 전면(前面)에는 원기둥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맹씨행단은 반대로 되어있다. ‘工’字형인 맹씨행단의 툇마루의 좌우 벽에는 크기가 다른 창호가 나란히 있다. 특이한 크기의 창호가 설치되어 있다. 툇마루로 연결되는 창호는 사람이 허리를 많이 굽혀야 출입할 수 있는 작은 크기인데, 그 옆에 있는 더 작은 창호가 있다.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한 크기이니 환기를 하거나 바깥의 동정(動靜)을 살피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 생각된다. 대청에 들어가 보니, 대청 좌우측에도 크기가 다른 창호가 설치되어 있다. 천정을 올려다 보니 오량가(五樑架)의 모습인데, 종도리를 받치는 대공의 모습이 특이하다. ‘人’字 모양의 대공이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데, ‘人’字 대공 안쪽에 또 다른 형태의 대공이 있다.
맹사성 고택
고불이 받은 시호의 의미 고불이 받은 왕지
맹씨행단 동쪽 뒤에는 세덕사(世德祠)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세덕사에는 맹유(孟裕), 맹희도(孟希道), 孟思誠을 모시고 있다. 고불 맹사성이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이 모셔진 사당인 것이다. 맹유(孟裕), 맹희도(孟希道)는 두문동 72현으로 알려져 있다. 맹희도(孟希道)는 고려 조정에서 修文殿提學을 지냈던 분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자신은 出仕를 포기하고 은거하였지만, 자신의 장남인 고불 맹사성에게는 출사하여 새 왕조를 도우라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를 비롯한 많은 고려 遺臣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유학을 공부하고,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했던 당시의 지식인들은, 고려에 대한 의리와 바뀐 현실을 모두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날, 세덕사는 대대적인 보수공사 중이었다. 덕분에 건물의 기본 뼈대를 구경할 수 있었다. 기둥은 오랜 세월동안 충해(蟲害)를 입어 작은 구멍이 나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사당은 규모는 작았지만 오량가의 구조를 갖춘 집이었다. 가장 위계가 높은 사당이란 상징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 위치한 기념관에는 맹사성과 관련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귀중한 자료는 액자에 넣어져 전시되고 있었는데, 눈에 띄는 것은 고불 맹사성이 받은 시호 ‘文貞’을 풀이한 글과 ‘王旨’였다. ‘王旨’는 보기 힘든데 관련 기록을 찾아보니, 조선 초에는 ‘王旨’와 ‘敎旨’가 같이 쓰이다가 세종 때에 ‘敎旨’로 통일되었다.
외암민속마을
맹씨행단을 답사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외암마을로 이동했다. 외암마을은 湖洛論爭을 이끌었던 외암(巍巖) 李柬(이간, 1677~1727)이 살았던 마을로, 예안이씨의 집성촌이다. 전통 마을의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민속마을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외암 마을은 돌담이 아름다웠다. 돌담길을 따라 우리 일행이 가장 먼저 간 곳은 외암 선생의 종택과 사당이었다.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살펴보았다. 영남지방의 사당은 삼문(三門)의 형식을 취한다. 사당을 출입하는 사람은 ‘東入西出’이라 하여 동쪽 문으로 들어갔다가 서쪽 문으로 나온다. 가운데 문은 신주가 출입하는 문이기에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외암 사당은 하나의 출입문을 갖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살펴보니, 살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영남지방의 사당 안은 판문을 달아 어두운 편이다. 그것은 사당 안이 ‘死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당에 모셔진 외암(巍巖) 이간(李柬)은 어떤 분일까? 외암 이간은 수암 권상하(遂庵 權尙夏)의 문인으로, 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호락논쟁은 18세기에 노론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인데, 논쟁의 시작은 외암(巍巖) 이간(李柬)과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이다. 외암 이간은 人物性同論을 주장하고, 남당 한원진은 人物性異論을 주장하면서 논쟁이 전개되는데, 이 두 사람의 스승이었던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는 남당 한원진의 손을 들어준다. 이에 따라 충청도에 살던 윤봉구, 최징후 등은 남당 한원진의 인물성이론을 지지하게 되지만, 서울과 경기지역에 살던 김창흡, 이재 등은 외암 이간의 人物性同論에 동조하면서 100여 년 동안 호락논쟁은 지속된다.
호락논쟁에서 핵심 개념이 ‘인(人)’과 ‘물(物)’인데,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인(人)’과 ‘물(物)’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한 글을 아직 보지 못했는데, 답사 당일 아침에 받았던 자료집에 의미 있는 내용이 있었다. 자료집 7쪽에는
‘호락논쟁은 권상하 문하의 강문8학사들 간에 일어났는데,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문제 등으로 토론이 전개되어 시비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인(人)’은 사람을 뜻하고, 물(物)은 금수(禽獸)를 뜻한다고 볼 수 있겠다.
뒤이어 간 곳은 외암리 참판댁이었다. 이 집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때 참판을 지냈던 이정렬에게 하사한 주택이다.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현판은 영왕이 9세때 쓴 글씨라고 알려져 있다. ‘退湖居士’의 ‘士’字현가 우리 흔히 쓰는 글씨가 아니라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류인승 선생님께서 설명을 해 주신다. 나는 류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붓글씨를 쓸 때에는 필요에 따라 이렇게 획을 더하거나 빼기도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곧 이어 들렀던 곳이 교수댁이었다. 이 집에 사시던 이용구란 분이 성균관 교수를 지냈기에 붙여진 택호이다. 처마 밑에는 ‘제월루(霽月樓)’라고 행서로 쓰여진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단체 사진을 찍었고, 이쁜 아가씨가 파는 따끈한 연잎차를 한잔씩 마셨다.
차 한잔을 마신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으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보리밥에 나물을 넣은 비빔밥은 맛이 있었다. 거기다가 이동균 선생님이 사 오신 연엽주, 그리고 막걸리를 간단히 마셨다. 점심 식사 후에 조웅희 총무는 오늘 답사에 참가한 분들을 한분씩 소개하는 시간도 가졌다.
수당 고택
답사 전에 이한방 교수님이 카페에 올려준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가문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4대가 연이어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었다. 특히 일본 경찰이 수당 이남규 선생을 끌고 가려고 할 때, ‘士可殺 不可辱(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스스로 가마에 올랐다고 전하는데, 이 모습을 상상하면서 조선의 선비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했다. 수당이 일경에 끌려갈 때, 장남인 유재(唯齋) 이충구(李忠求) 선생도 부친을 지키기 위해 따라가다가 父子는 모두 일본 경찰에 의해 살해된다. 수당 선생의 손자인 평주(平洲) 이승복(李昇馥)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20년대 초반에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등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다. 수당의 증손자인 이장원(李章遠) 소위도 6·25전쟁 당시 해병대 장교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수당 선생부터 증손자인 이장원 소위까지, 4대가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11월 22일, 우리가 답사하였던 수당고택(修堂古宅)은 1637년에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손자인 이구(李久)의 부인이 지었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수당고택은 1846년에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원래 모습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안채를 먼저 답사하였다. 인방(引防)이 위아래로 휘어져 흡사 달덩이를 연상케 하는 대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예천 반송재 고택 안채처럼 ‘ㄷ’자를 우로 90도 회전시킨 ‘트인 ㅁ’자 주택이다. 고택을 구경하고 있을 때 해설사님이 늦게 오셔서 설명을 해 주셨다. 대청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하면서 대청으로 안내한다. 해설사님은 수당고택에는 별도의 사당 건물을 두지 않고, 안채 방 한 칸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고 설명한다. 신주를 모신 방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영남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라 기억에 남는다. 안채 대청에는 미닫이문이 달려있었는데, 이것은 일제 식민지시기에 유행하던 모습이라고 답사를 같이 한 어떤 분이 설명하신다. 그런데 네이버에서 수당고택 이미지 검색을 하니, 옛날 사진에는 미닫이문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근에 설치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당 고택 안채
안채 서쪽에는 수당고택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정면 6칸, 측면 3칸이다. 측면을 자세히 보면, 전퇴와 후퇴가 좁아 어떤 이들은 측면 2칸으로 보기도 한다. 자연석을 세벌로 쌓아 기단이 조금 높다는 느낌을 준다. 특이하게도 기둥머리에는 철로 된 테를 둘렀다. 용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 기둥머리가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다른 건축물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라 단언할 수는 없겠다. 처마 밑에는 ‘평원정(平遠亭)’이란 현판이 있고, 툇마루에서 좌우 방으로 들어가는 여닫이 문 위에는 ‘청좌산거(靑左山居)’,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대청 안에 들어가니, 대들보와 중보, 그리고 종도리를 받쳐주는 대공의 모습이 간결하다.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일체의 장식이 없다. 또한 ‘가목제(稼牧齋)’, ‘문수(文藪)’ 홍문관 부응교 시절에 아계(鵝溪)가 쓴 기문 등이 걸려 있어 이집의 내력을 알려주고 있었다. 대청은 2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를 해설사님께 물어보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알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의도로 만든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임 때 어른들이 앉으시거나, 글을 가르칠 때 스승이 앉지 않았을까? 사랑채의 품격을 높이기 위함인지, 난방을 위한 아궁이는 감추어져 있었다. 이렇게 감추어진 아궁이는 도동서원에서도 볼 수 있다. 수당고택은 안채와 사랑채가 떨어져 있어 있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하는 것은 좁은 협문인데, 사랑채에 손님이 왔을 경우에 다과상을 내오는 과정이 많이 불편할 것 같다. 어떤 이는 사랑채 뒤편에 조그마한 부엌이 있어 기본적인 역할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불편하지 않았을까?
수당고택 사랑채
2단으로 구성된 수당고택 사랑채 대청
수당 고택 사랑채에서 우리 일행은 백송현, 성복규 두분 선생님의 시조창을 들었다. 박약회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가졌다. 창을 들은 후 수당기념관으로 갔다. 전통건축의 형식을 갖춘 현대식 건물이었는데, 각종 자료가 잘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수당 선생 부자가 日警에 피살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념관에 전시된 學脈圖를 보니, 수당 선생의 학문 淵源은 성호 이익과 미수 허목을 매개로 한강 정구로 이어지고 있었다.
추사 고택
수당 기념관에서 버스를 타고 추사 고택으로 이동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넓은 추사 선생의 묘소가 보인다. 묘소 앞이 아주 넓은데, 잔디로 잘 가꾸어져 있었다. 우리는 묘소 동편에 있는 추사고택으로 들어갔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이다. 영남 양반가의 가옥과는 다른 느낌이 다가온다.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과 초석, 그리고 디딤돌이 눈에 들어온다. 영남에서는 사랑채 건물이라도 장대석이 아니라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는다.
그런데 추사고택은 장대석 말고는 따로 치장한 것이 없다. 부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들보를 받쳐주는 보아지도 없다. 양반가의 많은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원기둥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특별히 내세우지 않아도 추사고택은 뭔가 범접하지 못할 기품이 느껴진다. 추사고택에는 ‘竹爐之室’, ‘無量壽’ 등 추사의 글씨가 많이 걸려있었다. 물론 진품은 아니겠지만, 추사의 걸작들이 너무 많다 보니, 답사객은 눈길 한번 주고 지나갈 뿐이다.
추사고택
고택답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옆에 있는 추사 묘소로 발길을 옮겼다. 묘소 앞은 잘 정돈된 잔디밭이었다. 소나무가 두 그루 정도 서 있을 뿐이어서 허허로운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 추사를 높이기 위한 정성이겠지만, 과유불급이 아닐까 싶었다. 답사를 같이 한 일행 중에 풍수(風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분이 계셔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묘소의 좌우에 서 있는 망두석(望頭石)에 새겨진 세호(細虎)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말씀도 있었다. 특히 망두석 옆에는 천막을 칠 때 끈을 묶기 위한 돌이 땅 속에 박혀 있었다. 영남지방의 묘소에서도 보이는 모습이라고 하였지만, 처음 보았기에 기억에 남는다.
추사 묘소
추사 묘소에서 내려와 추사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많은 자료가 잘 전시되어 있었는데, 추사의 깊은 학문 내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추사의 첫 스승은 <北學議>를 지은 중상학파 실학자 楚亭 朴齊家이다. 당시 당당한 양반이었던 추사의 가문이 서자인 박제가에게 어린 추사의 교육을 맡겼다는 것은 당시 서울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지방에 비해 자유롭고 개방적인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낙론(洛論)이 전개되고 청의 문물 수용을 주장하는 북학사상이 나오고 추사 김정희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楚亭을 통해 청의 문물을 접한 추사는 24세 때, 동지부사로 임명된 생부 김노경을 따라 연경에 가게 된다. 청나라 학계에서도 楚亭의 제자인 추사 김정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추사는 연경에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이라는 두 분의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楚亭을 통해 추사의 존재가 청의 학자들에게 알려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옹방강은 추사와 필담을 한 후 ‘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고 칭찬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추사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완원이라 생각된다. 유홍준이 쓴 <완당평전>을 보면, 추사는 중년에 들어서면서 추사라는 낙관은 거의 쓰지 않고 주로 완당이라 하였다. 당시 사람들도 완당이라 주로 불렀으며, 문집제목도 완당집이고, 묘비에도 완당선생이라 적혀있다. ‘완당(阮堂)’이란 완원의 제자라는 뜻이니, 추사가 완원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추사보다 완당이라 불러주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싶다.
귀국한 후에도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 그리고 수많은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를 계속하면서 학문의 폭과 깊이를 더한다. 추사가 생존했을 당시에 추사만큼 폭넓은 시야를 갖고, 다방면의 분야에서 깊이 연구한 학자가 있었을까? 성리학에 매몰되었던 영남의 학계를 추사는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추사기념관을 보기 전까지 나는 추사에 대해 피상적인 느낌밖에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런데 추사기념관에 있는 글을 보는 순간, 나는 추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추사를 소개하는 어떤 글보다 아래의 몇 개 문장이 추사를 더 잘 알게 한다고 생각한다.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팔뚝 밑에 309개의 옛 비문 글씨가 들어있지 않으면 또한 하루아침 사이에 아주 쉽게 나오기는 어려운 것이다.”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비록 9999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나머지 1분을 원만하게 성취하기가 가장 어렵다. 9999분은 거의가 가능하겠지만, 이 1분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며, 또 사람의 힘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대구에서 충청도 예산은 가까운 곳이 아니었다. 11월 하순은 낮이 짧았다. 따라서 당초 계획하였던 남연군 묘를 가지 못하고, 인근에 있는 화암사로 이동했다. 화암사는 추사 가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화암사에서 ‘圓通寶殿’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은 양반가의 사랑채 모습이었다. 절 뒤편에는 ‘天竺古先生宅’, ‘詩境’이란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석벽이 있었다. 추사는 초의스님과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으니, 불교에도 상당히 해박하였으리라 짐작되는데, ‘天竺古先生宅’이라는 각자는 이것을 뒷받침한다고 생각된다.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석벽
화암사를 본 우리 일행은 대구로 오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가볍게 맥주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박약회의 돈독한 정을 느낀다. 답사에 지친 사람들은 잠에 빠져들고, 깨어있는 분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답사를 위해 애를 쓰신 회장님과 총무님, 그리고 이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첫댓글 ※ ‘호(湖)’는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던 큰 호수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벽골제가 기준이 되어 남쪽을 호남이라 하고, 벽골제의 서쪽을 호서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1736~1806)이 남긴 야사집(野史集) 『연려실기술』에 있다고 합니다. ‘낙(洛)’은 서울을 가리키는데, 어원은 ‘낙양(洛陽)’입니다. 낙양은 오랜 기간 중국의 수도였습니다. 그래서 ‘낙(洛)’은 서울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호좌의진은 의암 류인석 선생이 영월에서 의병장에 취임한 이후로 한양에서 봤을 때 의림지의 좌측에 있다고 '호좌의진'이란 뜻이고...호서의병이란 운강 이강년이 1907년 정미의병기때 의병을 일으켜 주로 단양과 제천쪽에서 많이 싸웠는데...제천 의림지의 서쪽의 의병진이란 뜻이라고도 합니다.
자세한 답사기를 잘 읽었습니다. 늘 답사기를 남겨 주시니 새로운 배움을 얻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벽골제 서쪽은 부안 바다여서 호서의 호를 의림지로 보기도 합니다.
호남의 호는 금강을 호강이라고도 해서 금강 이남이란 뜻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이 더 믿음이 갑니다. 같이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번남댁 주손인 이동익님이 청장년부 회장님이신가 보군요...답사기 잘봤습니다.
지명의 역사적 유래와 관련 『연려실기술』은 중요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호남·호서뿐만 아니라 ‘영남(嶺南)’‘영동(嶺東)’‘관동(關東)’ 등에 대한 설명도 해놓았다. 고려 성종 때 전국을 10개 도로 나누면서 상주 일대를 ‘영남도’라 했지만, 현재의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아우르는 ‘영남(嶺南)’이란 지명은 호남과 마찬가지로 ‘세종실록’(세종 12년 1월 22일)에 처음 나온다.
『연려실기술』에서 ‘영남’은 조령(새재)과 죽령의 남쪽을 가리킨다고 했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경북 문경시와 충북 충주시 사이에 있는 조령과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의 사이에 있는 죽령이라는 두 고개의 이남 지역을 영남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고성훈(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전에 우연히 발췌해 놓았던 자료입니다. 지명에 대한 다양한 설을 알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지명에 얽힌 댓글~ 잘 봤읍니다.
이날 단체 사진도 올려주셨으면 좋겠읍니다.
제게는 단체사진이 없어서 올리기가 어렵습니다. 이장희 원장님께 좋은 사진을 많이 받았는데, 답사지 사진도 용량이 커서 올리지를 못했습니다. 이원장님이 이 글 보신다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