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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향기.『佛敎의 香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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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자유ノ소식 스크랩 선종의 본산 장흥 보림사
선묘 추천 1 조회 142 10.09.25 08:0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선종의 본산 장흥 보림사

-삶의 질을 높이는 직원연수 1-


7월 16일 방학식을 마치고 여름방학 직원연수를 떠났다. 연수 여정은 부산-남해안고속도로-섬진강 하동재첩-장흥보림사-강진백련사-영랑생가-월출산 관광온천호텔-도갑사-대흥사-녹우당-낙안읍성-선암사-부산으로 정하였다.


인간은 조직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학교조직에서도 공식적 조직과 비공식적 조직이 적절하게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조직은 발전한다.

건전하고 발전적인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직구성원들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체험의 공유가 필요하다.

 

이번 연수의 주제를 학교 공동체의 효율적인 목표 달성을 위한 좋은 인간관계 형성에 두었다.

나아가 부산에서는 쉽게 찾아가기 어려운 전라도 문화를 체험하게 하여 삶의 질을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전라도의 우수한 문화를 가르쳐 진정한 동서화합의 장을 만드는 데 초석을 다지는 데 있다고 하겠다.


방학의 시작은 늘 장마 끝 기간과 맞물려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마가 중부지방으로 올라간다고 한다. 비가 어제부터 제법 많이 왔는데도 계속 내린다. 그런데 궂은 장마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님들의 표정은 밝다.

이분들의 표정은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가 않다. 여행은 언제나 기대와 설렘이다.

 

모두들 들뜬 기분으로 옆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차가 남강 휴게소를 지나면서부터 미남 스타인 체육과의 장선생의 사회로 연수의 분위기가 서서히 무르익어 갔다. 서로가 소통하는 이러한 모습 또한 직원연수의 꽃이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즐기고 있는 동안 차는 하동 섬진강 재첩마을에 도착했다.

미리 주문을 해 놓은 재첩정식을 맛있게 먹었다. 어떤 분은 재첩국이 이렇게 시원한 줄 몰랐다고 한다.

다시 출발하여 순천을 지나고 벌교를 지나 보성을 지나서 첫 목적지인 장흥보림사에 도착했다.

장흥은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있어 정남진(正南津)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과 일직선상에 놓여 가장 따뜻한 남쪽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또한 장흥은 작가 이청준의 고향이기도 하다.

 

 

일주문

 

보림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름답다. 비와 안개가 어우러진 장흥댐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출하고 있다. 옆자리에 있는 최선생님은 연방 감탄사를 자아낸다. 전라남도의 3대 강은 섬진강, 영산강, 탐진강이다. 장흥댐은 탐진강 상류에 댐을 건설한 것이다. 탐진강은 가지산에서 시작되어 장흥읍을 거쳐 강진으로 흘러 구강포로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댐이 생기면 본래의 경관이 많이 손상이 되어 기분이 영 언짢다. 그런데 장흥댐 주변은 댐이 생기기 전보다 경치가 더욱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보림사가 탐진강의 시원지에 위치해 있어 댐과는 제법 떨어져 보림사의 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림사 전경

 

보림사(寶林寺)는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보림사가 세워진 것은 원표대덕이 당나라와 인도를 두루 순례한 후 신라로 돌아와 759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후 당나라 서당지장(西堂智藏)에게 선종의 법통을 전수받은 도의선사가 821년에 귀국하여 염거(廉居)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수받은 보조선사 체징(804-880)이 헌안왕 4년(860)에 가지산문을 열어 큰 절이 되었다.

 

보림사는 중국 남종선의 초조인 육조 혜능이 살았던 소주 조계산 보림사와 같은 이름이다. 이는 우리나라 선종의 본산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도, 중국의 보림사와 더불어 삼보림이라 일컬어진다고 한다.


보림사에는 국보가 2점, 보물이 8점, 전라남도 문화재가 15점이나 된다. 아마 우리나라 절집 중 문화재가 많기로는 불국사, 화엄사, 부석사 다음으로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보림사 국가 지정문화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국보 2점

1. 보림사 3층석탑 및 석등(국보 제44호),

2.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117호)

보물 8점

1.동부도(보물 제155호)

2.서부도(보물 제156호)

3.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

4.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

5.목조사천왕상(보물 제1254호)

6.월인석보 권25(보물 제745-9호)

7.금강반야바라밀경 권 제1(보물 제1251호)

8.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 제9-10(보물 제1543호) 


보림사는 한국전쟁 때 불이 났다. 이때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일주문과 천왕문이라고 한다. 보림사에 닿으면 일주문이 제일 먼저 반긴다. 앞에는 '가지산 보림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고 안쪽은 '선종대가람'이라 적혀 있다.

이는 구산선문의 으뜸이라는 뜻일 게다. 현판 왼쪽 한 모퉁이에 '옹정 4년'이라 적혀 있어 일주문은 영조 2년(172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온다. 이 천왕문 안에는 보림사 목조사천왕상(보물 제 1254호)이 있다. 사천왕상은 1515년(중종 10)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최고의 사천왕상이라고 한다. 일주문이 사찰로 들어가는 불법세계의 입구라면, 사찰을 수호하는 문지기가 바로 사천왕이다. 이 사천왕상 안에서 유물이 수두룩하게 나왔다.

 

1995년 이 사천왕상의 무릎과 발 등에서 희귀본인 월인석보 제25권을 비롯해 보물급 고서적 250여권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 고서적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인쇄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보림사 삼층석탑

 

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대적광전 앞마당이다.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두 기가 동서로 마주 서 있고 그 사이에 석등이 있다. 국보 제44호인 보림사삼층석탑 및 석등(寶林寺三層石塔 및 石燈)이다.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년)에 선왕인 헌안왕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건조 연대가 확실하다고 한다. 2층으로 쌓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돌로 쌓았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중에서 상륜부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탑은 실상사 삼층석탑과 보림사 삼층석탑뿐이다.

 상륜부의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와 보주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상륜부의 찰주는 주로 쇠로 되어 있는데 이 탑에는 화강암으로 찰주를 삼았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


 삼층석탑 뒤에는 대적광전이 있다. 대적광전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불인 국보 제117호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이 있다.

이십 수 년 전에 보림사에 처음으로 왔을 때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대적광전이 건립되기 전이어서 지금의 대웅전 한쪽 곁에 철불이 있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저녁 무렵이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이었다. 대웅전 안은 어둠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한 쪽 옆에 검은 불상이 있었다. 바로 이 철불이었다. 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놀란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런데 지금은 보수와 수리를 하면서 채색을 하여 그때의 그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국보급 철불은 장곡사 철불, 도피안사 철불, 보림사 철불이 있다. 내게는 이중 보림사 철불이 가장 인상이 깊게 남아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에 대하여 문화재청의 설명을 보면


“철로 만든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달걀형의 얼굴에는 약간 살이 올라 있다. 오똑한 콧날, 굳게 다문 입 등에서 약간의 위엄을 느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 다소 추상화된 모습이다. 팽창된 체구와 가슴의 표현 등은 당당해 보이면서도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몸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손과 넓은 무릎은 불상의 전체적인 균형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 작품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여 당시 유사한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신라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유행한 철로 만든 불상의 첫번째 예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대웅보전

 

보림사의 국보 2점을 다 보고 나면 대웅전으로 가서 이 절의 풍수를 볼 차례다. 보림사는 사신사가 아주 뚜렷하여 거의 완벽한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시 명당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평안하게 한다.

 

보조선사창성탑비 

 

발길은 다시 대웅전 왼쪽 뒤편에 있는 보조선사창성탑비로 향한다. 이 부도비는 보조선사 체징의  부도비로 부도와 함께 헌강왕 10년(884년)에 세워졌다.

체징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헌강왕은 스님의 시호를 보조(普照)라 하고 탑의 이름은 창성(彰聖)이라 했다.

보조(普照)는 두루 비춘다는 뜻이고, 창성(彰聖)은 성스러움을 드러내었다는 뜻이다.

보조선사창성탑비(보물 제158호)의 비문 글씨는 7행 중간의 선(禪)까지는 김원이 해서체로 쓰고, 그 뒤로는 김언경이 행서체로 이어 썼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김원이 중도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김언경이 이어 쓴 것으로 추측된다.

청말의 금석연구가 섭창치(葉昌熾)는 이 비에 대하여 그의 저서 어석(語石)에서 “일비양인서일칙(一碑兩人書一則)”이라고 평한 바 있다고 한다. 

 

보조선서창성탑 

 

부도비 조금 위에는 보조선사창성탑(보물 제157호)이라고 불리는 체징 스님의 부도가 있다. 이 부도는 9세기 팔각원당형의 전형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사리구(舍利具)를 절취당하면서 도괴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보조선사창성탑은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여 있다. 탑의 손상이 심하다. 탑신에는 문비와 사천왕(四天王)이 각 면에 조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기와지붕을 그대로 모각하고 상륜부에는 복발, 보륜, 보주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반갑게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규모와 조각면에서 아주 우수한 부도다.

 

 

 

보림약수

 

보림사에서 자랑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보림약수다. 절 마당 한가운데 동백나무 그늘 아래 보림약수가 있다. 우리나라 100대 명수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눈으로 보기에는 도랑물 그 자체이다. 물맛도 조금 이상하고 탁도가 심하다. 그런데도 100대 명수에 들어가는 것은 대웅보전 뒤편에 있는 울창한 비자나무숲과 대나무숲, 그리고 야생차밭의 영향이라고 한다. 따라서 뒷맛은 약간 쌉쌀하다.


다시 일주문을 나오면 동부도가 있는 부도밭과 보림사 뒤쪽의 가지산 등산로가 있다. 가지산의 비자나무숲은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절집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비자림 삼림욕 산책로가 가지산 등산로와 연결돼 있다.

보림사에 올적마다 다음번에 올 때는 가지산 등산을 꼭 한번 하기로 결심을 하지만 늘 실패를 했다. 언젠가 여유를 가지고 가지산 정상에서 보림사의 풍수를 감상해야겠다고 결심을 해본다.

우리 선생님들은 고즈넉한 보림사의 정경에 취해 해맑은 얼굴로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다시 차는 강진으로 향한다.


참고로 통일신라 구산선문의 전래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구산선문이란 선종의 9산을 말한다. 선종의 선의 출발은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라 할 수 있는 마하가섭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면서 연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 혼자 빙그레 웃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이다. 그래서 염화시중의 미소를 선의 시작으로 본다. 스승인 석가모니와 제자인 가섭 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전한 것이 선이다.

인도의 스물여덟 번째 존자인 보리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그는 중국선의 첫 번째 조사가 된다. 달마에서 혜가(慧可)-승찬(僧璨)-도신(道信)-홍인(弘忍)-혜능(慧能)으로 계승된다. 이를 일러 ‘33 조사’라 한다.

6조 혜능부터 본격적인 중국선종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강조한다. 불립문자란 문자에 입각하지 않고,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주장한다.


육조 혜능(638-713)은 선종의 법통을 단순히 이어받는 데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의 혁신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중국 선종의 진정한 창립자로 불린다. 그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서야 중국불교는 인도적인 것에서 벗어나 중국의 성격에 맞게 독자적인 영역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7조가 회양(懷讓, 677-744), 8조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마조의 뒤를 이은 9대조사가 서당 지장이다. 이 지장의 제자가 통일신라에서는 도의선사-홍척국사-적인선사이다.

이중 가장 먼저 서당지장의 제자가 된 이는 도의(道儀)선사다. 도의선사는 784년(선덕왕 5년)에 당나라에 유학해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 깨침을 받은 승려로 821년에 귀국해 선종을 전파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승려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왕권 불교의 질서에서 그의 교리는 대접받지 못했다. 선종의 특성인 개인주의적이고 개혁적 성향을 지녀 반체제적, 반권위적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도의선사는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함을 깨닫고 서라벌을 떠나 설악산 기슭에 진전사를 짓고 40년 동안 선정을 닦고 제자를 가르치다 열반했다. 그의 의발을 전수 받은 염거화상 역시 설악산 억성사에서 주석하며 선지를 폈으나 선문을 세우지는 못했다.

이후 도의의 사상은 염거(廉居)를 거쳐 염거의 제자인 체징으로 전해지면서 체징이 가지산파를 형성하여 구산선문의 제일 윗자리에 두게 되었다.


이처럼 구산산문은 9개의 선종 사원이다. 이는 당나라 유학파 승려들이 들여온 선종이 호족세력과 결합하여 각 지방에 근거지를 두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9개의 선종사원이 구산산문 또는 구산선문이라고 한다. 최초의 본산은 도의가 개창한 가지산문이고 마지막 본산은 왕건의 스승인 이엄의 수미산문이다. 선종의 개조자들은 대개 지방호족이나 6두품 출신이다. 특히 범일, 무염의 경우는 진골출신이었으나 6두품으로 강등된 경우이다. 구산산문은 다음과 같다.


1. 가지산문: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가 가지산에 머물러 보림사를 개창하면서 도의의 사상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되어 가지산문을 이루었다.

2. 실상산문: 홍척스님이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여 실상산문을 형성했다.

3. 동리산문: 839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혜철 스님이 곡성 태안사를 중심으로 동리산문을 이루었다.

4. 사굴산문: 범일스님이 강릉 굴산사에서 사굴산문을 이루었다. 사굴산문은 강릉의 지방호족으로서 진골이었던 김주원의 후손인 명주도독의 후원을 받았다.

5. 봉림산문: 당나라에서 귀국한 현욱 스님으로부터 선풍을 이어받은 심희 스님은 창원에 봉림사를 창건하고 봉림산문을 이루었다.

6. 사자산문: 중국 보원 스님의 선풍을 이어받고 귀국한 도윤의 제자 절중 스님이 스승을 계승하여 영월에 법흥사를 창건하고 사자산문을 이루었다.

7. 희양산문:  830년에 귀국한 혜소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 스님이 문경에 봉암사를 창건하고 희양산문을 개창했다.

8. 성주산문: 호서지방에서는 보철 스님의 선을 이어받은 무염 스님이 보령의 성주산문을 열었다. 성주산문은 보령지방에 대규모 장원을 가지고 있던 김흔의 후원을 받아 개창되었다.

9. 수미산문: 911년(효공왕15)에 중국에서 귀국한 이엄스님은 해주의 수미산에서 광조사를 지어 수미산문을 열었다.

 

이승철 - 그 사람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그 사람 - 이승철

그 사람 날 웃게 한 사람
그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그 사람 따뜻한 입술로 내게
내 심장을 찾아준 사람

그 사랑 지울 수 없는데
그 사랑 잊을 수 없는데
그 사람 내 숨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떠나가네요.

그 사람아 사랑아 아픈 가슴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사랑했고 또 사랑해서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아.. 내 사랑아

내 가슴 너덜 거린데도
그 추억 날을 세워 찔러도
그 사람 흘릴 눈물이
나를 더욱더 아프게 하네요

그 사람아 사랑아 아픈 가슴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눈물 대신 슬픔 대신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줘...내 사랑아

우리삶이 다해서 우리 두눈 감을때 그때 한번 기억해

그 사람아 사랑아 아픈 가슴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아.
사랑했고 또 사랑해서
보낼 수 밖에 없는 사람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가사 출처 : Daum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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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1.31 17:45

    첫댓글 아름다운 1월 굿입니다.
    줄거운 시간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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