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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정님
1119(일) 불법사드철회 김천시민촛불집회 🤗제 914회🤗
늘 소성리 할머니들의 투쟁만 눈에 담겼었는데 김상태 감독님의 ⌜양지뜸⌟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봉정할아버지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소성리라는 아름다운 산하에 사드라는 어마무시한 물건이 들어와서 그네들의 삶을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시키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소주한잔에 그 억울함을 삼키십니다. 어느 시골이 되고 어느 지역이 되고 어느 나라가 되든 일상은 쉬이 파괴되어질 수 있다는 공포를 덤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감독님께⌜야무지게 살아⌟ 라 하십니다.
대한민국의 일련의 역사를 겪어내신 할아버지께서 건네신 그 말씀이 영화가 끝난 후, 엔딩크레딧 속에서 계속 맴돌았습니다. ⌜나는 야무지게 살고 있는가? 그래 앞으로라도 야무지게 살아야지! 이거는 나와의 약속이다. 그 누구가 안 알아줘도 된다. 나는 그렇게 야무지게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서로 동아줄처럼 얽혀 야무지게 사드 뽑는 그 날까지 쭈우욱~~ 집회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한 이삼십년 걸리겠지만...^^
- 곽은석님 발언 中에서
● 이끄미 : 김종희 기획팀장
2017년 광화문 영상입니다.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공연전에 하율이가 잠이 들었습니다. 지켜보기 안스러운 맘도 잠시. 무대 오르기 전 언제 잤느냐는 듯 벌떡 일어나더니 그 많은 전국촛불시민들 앞에서 떨지 않고 '사드반대가'율동을 멋지게 하더라구요.
율동천사 '라희'가 김천촛불집회 계속할 수 있도록 사드가 빨리 안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말이 씨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우린 정체되지 않고 계속 평화의 함성을 지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도 추운 날씨에 이 자리에 함께 모여서 우리는 평화를 외칠 것입니다.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에 살자
사드뽑고 평화심자
●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 여는 발언 : 박병주 영상제작감독
⌜조국이 잊은 죽음⌟에 대하여... 2016년 8월 첫집회 이후, 오늘이 7년 3개월째의 집회입니다. 그 동안 대통령이 3번 바뀌었지요. 박근혜는 탄핵되고, 문재인은 사드알박고, 윤석열은 총선에서 표 얻겠다고 박근혜를 찾아 다니고 있다더군요. 일본한테 퍼줄 것 다 퍼주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바이든한테 발목잡혀서 그런지는 몰라도 폭탄 다 대주고... 우린 얻는 게 없습니다. 김정은이도 푸틴한테 핵폭탄을 주죠. 로켓 성능 개량을 약속받은 모양인데, 김정은이가 실속이 있는지 윤석열이가 무능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APEC회의하는데 일본 기시다 총리하고는 두 번씩이나 만나죠. 윤석열이 대통령 되고 나서 기시다하고 제일 친한 지 7번씩이나 만났습니다. 만날 때마다 뭐 퍼주죠. 그리고 시진핑은 만나지도 못했습니다. 시진핑이가 팽~시켰는 모양입니다. 어떻게든지 만나려고 했던 모양인데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지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 중이죠. 하긴 전쟁이라고 말씀드리기도 뭐합니다. 처음에 하마스 측에서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사살하고 한 300명 가량을 인질로 잡은 댓가로 지금 가자지구가 맹폭 당하면서 팔레스타인들이 거의 학살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병원은 일반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애와 여자, 또 거기에 구호하는 유엔 산하 난민기구 사람들, 국경없는 의사회 사람들, 기자들...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고 있습니다. 이런데 미국은 이스라엘 편만 들고 있습니다. 유엔 난민 사무관의 고위 관계자가 그런 행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가 강대국들의 눈치를 봐서 얼마 전에 사임했다고 합니다. 이게 지금 국제 현실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언제 누구한테 당할지 모르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잊고 있는 게 너무나 많죠. 기억해야 될 것을 기억 안 하고 기억 안 해도 될 것을 기억하면서... 여러분 ‘학생의 날’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옛날에 학생의 날이 있었는데 학생의 날이 1929년도에 광주에서 광주고녀의 여학생이 일본인 학생한테 머리채를 쥐어 당기는 등 곤욕을 치르니까 광주고 남학생이 달려들었던 것을 시발로 해서, 일제교육에 대해 반대를 주창했던 시위입니다. 11월 3일날 시작해가지고 다음해 3월 말까지 150여 곳에서 만세 시위를 했습니다. 3.1운동 이후에는 그게 가장 큰 시위였죠. 그 학생의 날이 1953년도에 제정이 돼서 기념을 해오고 있었는데 20년 만인 73년도에 박정희가 72년도 유신독재를 선언하면서 학생의 날을 폐지시켰습니다. 학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세월이 지났습니다. 82년도 전두환 시대에 학생의 날의 부활을 시켰고, 98년도에 뭐 이러저러한 이유로 또 기념일 제정에서 취소되고 2006년에 와서 서울시의 곽노현 교육감이 ‘학생인권기념일’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요즘 뭐 기억해야 할 거 많고 무슨 사고가 다발로 터지니까 자연스럽게 학생의 날은 묻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묻혀도 좋은 날은 아닙니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꼭 기억해야 할 날입니다.
그리고 또 기억해야지 되어야 할 날이 있는데요. 1923년, 지금부터 딱 100년 전입니다. 9월 1일 11시 58분에 진도 7.9 강진이 있었습니다. 무려 13만 명이 죽었습니다. 도심 도처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고 화재나 지진으로 죽은 이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전쟁 중 흉흉해진 민심을 조선인을 미워하게끔 화살을 돌려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죽인 이유는 지진이 일어났던 당일부터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탄다’, ‘조선인이 여성을 습격한다’ 등과 같은 유언비어가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일본 민간인들이 거기에 놀아나고 속아서 우리 한국 조선인을 6600 명 이상을 살해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지금 100년이 됐는데 아직도 우리가 이렇게 짐작이라든지 그 당시에 언론을 통해서만 알 뿐이지 명확하게 진상조사가 되는 것도 없고 처벌받은 사람도 없고 보상이라든지 배상해주는 전례도 없습니다. 19대 국회에는 그런 법안이 발효됐다가 회기 만료로 종료가 되었고요. 이번 23년도 9월에 임시회의에서 그 법안이 상정이 돼가지고 있는데 아직 의안이 채택이 안 되어 지금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우리 국민이 깨어있어야, 사람이 사람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그 당연함을 위하여 대한민국 국민은 계속 나아가야 할 것이며, 우리가 그 기준이 될 것입니다.
● 두 번째 발언 : 곽은석 기록팀
조금 전의 광화문 집회현장에서 아이들의 무대를 보고 있노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면 그 아이들이 이 자리에 서서 옛날의 기억을 가다듬으며 여러 제반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며 그들이 우리를 지키고 또 대한민국을 지켜나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를 위해 그들 뒤에서 우리가 지도 편달을 계속 해야겠습니다^^
전 이 집회가 끝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기록을 멈출 생각이 없으니깐요. 라희가 이 집회 안 끝났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라희가 안 나오는 것 보니까 이제 곧 사드가 나가려나 봅니다^^ 만약에 사드가 나간다고 해서 이 집회가 계속 안 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사드가 나가더라도 대한민국의 문제는 항상 있을 거거든요. 사드라는 이슈가 큰 구심점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제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제가 고시 공부를 한 7~8년 했는데요. 보통 한 4~5년까지 막 헤매다가 그때 막 이제 사시 1차를 붙게 되고 7~8년에 마지막 승부수가 있는 게 평균입니다. 보통 3~4년 안에 붙은 애들은 정말 똑똑한 애들이고 걔네들은 아주 예외적이고 일반적으로 한 7~8년 정도 이제 공부를 하다가 그 시점에 붙는데, 중요한 건 그때 다 제 나름의 사정들이 생겨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자금이 끊기거나 아니면 자기가 사고를 당하거나 자기 몸이 망가져서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거나... 이때 선택을 해야 됩니다. 내가 이 공부를 계속해야 되는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되는가? 저는 그때 그게 다 왔어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몸도 안 좋아지고 그다음에 자금도 끊겼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오니까 이거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나의 목적이 사법시험이 아니었다면 내 선택은 뭐였을까?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겠다~ 라는 게 제 목표였는데 김천에 와서 그것이 실현되고 있습니다.
김천에 오면 내가 뭘 해야 될까? 이렇게 멍 때리고 있을 그 시점에 사드가 빵 터졌어요. 이 사드의 투쟁을 보면서, 제가 정치적으로 경북을 되게 불편하게 봤는데 근데 실제로는 저를 넘어서는 의식있는 분들이 많이 계셨고 그분들 따라다니면 뭔가 많이 배울 수 있겠구나 해서 열심히 따라다녔고 열심히 동영상 찍고 다녔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도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든자리보다 난자리가 많이 보입니다. 건강이 안 좋아지고 집안의 여러 사정들이 생기면, 흔히 사람들은 자기보호본능이 작동하기 마련입니다. 지난한 시간 속에서 지친 이들이 연어처럼 다시 거슬러 오를 것을 믿습니다. 우린 여기를 계속 지키면서 ⌜우리가 굴복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계속 피력할 것입니다. 우리가 옳으니깐요!
● 급발언 1 : 이근우님
사회자가 요구하신 주제 '나의 전성기'에 급 호명되어 당황한 나머지 이렇다 할 말이 떠오르진 않아 그냥 저의 일상을 잠시 전하자면... 몸이 안 좋아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지금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가벼이 운동으로 전전하다 뭔가 시작이라도 해 봐야겠다는 맘이 일어 909회때 공연했던 '난타'도 배웠고 지금은 '한국무용'을 배우고 있습니다. 최근엔 악기 3가지 자격증도 땄습니다^^
여러분의 큰 힘에 작은 맘이라도 보태고자 담에 평화광장에서 악기공연으로 아름다운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잠시 쉬어갈 시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유진이가 집회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에게 힘이 될텐데 부끄러움이 많아져서 같이 하지 못해, 저라도 작은 힘이 되어보고자 하는 맘에 이것저것 배우고 있습니다. 따뜻한 봄이 되면 소성리에서 한국무용도 공연하여 할머니들에게 기쁨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난타팀이 909회공연 때 생각지도 못했던 앵콜이 나와서 넘 즐거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열기와 저희의 꾸준한 연습으로 다시 한번 멋진 공연 준비해 보겠습니다. 작은 뭔가라도 계속해서 연습하면서 건강을 조금씩 되찾게 되면, 여러분에게 하나씩 하나씩 전해드리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급발언 2 : 이석문님
얼마 전 경산코발트광산을 다녀왔습니다. 광산이란 곳을 처음 경험한 저에게 그 광산에서 느꼈던 가슴 먹먹함이 지금도 나를 먹먹하게 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후 거미줄처럼 뚫린 갱도를 복구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달아나면서 흉물로 전락한 곳을 해방 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폐허가 된 코발트 광산에 경산·청도 지역의 보도연맹원과 대구교도소 수감자들을 끌고 가서 죽인 후, 수직굴과 수평굴 등에 매장하였습니다.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3,500명에 이르렀습니다.
저희가 갔을 땐, 유해가 거둬지고 광산 안에 쓸쓸한 물웅덩이만 남아 있었습니다. 자연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가리켜 ‘산천초목’이라는 말이, 거기에서는 우리같은 평범한 시민의 주검이 지천에 깔려있어 ‘산천학살’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총알을 아끼려고 5명을 한 줄로 세워, 양쪽에 한 사람씩 종을 쏘면 가운데 세 사람은 그냥 묶여 있는 채 죽임을 당하고 웅덩이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설령 목숨이 붙어있더라도 죽은 이들과 같이 웅덩이에 버려지고 또 그 위에 주검이 쌓이고 쌓이고...
광산 해설사 두 분은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미친 듯이 끈을 풀어헤쳐 도망쳐 나왔지만 그분들을 동네에서 받아주지 않아서 피투성인 채로 고향집까지 갔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닌, 살아남은 증인으로 오롯이 기억을 되새기어 역사의 심판을 받게 하시고 계셨습니다. 소성리 진밭교 근처에도 유사한 굴이 있습니다. 지금은 동굴안쪽은 막아놔서 입구터만 있지요. 오늘 그곳을 지나면서 며칠전의 코발트광산의 아픔이 찬바람과 함께 저의 가슴을 관통하는 통에 오늘 급발언에 당황스러웠지만 여러분께 역사의 한페이지를 함께 나눌 수 있었습니다. 다음엔 소성리의 힘찬 몸짓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투쟁!
● 따따시 대덕 어묵탕 : 함수연님께서 수고로우셨습니다
● ‘푸른김천 맑은공기 지키기’ 피켓팅에 함께 해주세요. ‘김천에너지서비스’사에서의 ‘연료변경 주민설명회(29일)’ 이전, 11월 20일~28일(12~13시) 시민홍보피켓팅을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