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돈의 역사
HISTORY OF KOREAN MONEY
돈을 벌기 위해서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필자 홍춘욱은 주식전문가로 ‘경제 강의 노트’ 등과 그의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증권사 출신의 박사로 이번 그의 책은 표지가 아주 그럴싸하고, 가격도 비싼 책이지만 골라 들었다. 투자를 잘하려면 어떤 공부가 필요할까? 그의 주장은 거시경제 이론을 이해하고, 투자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총독부가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조선 사람의 땅을 마음대로 빼앗았다고 필자가 학교에서 배웠으나, 최근 경제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토지 분쟁의 대상 토지는 조선 땅의 0.05% 안팎에 불과하여 토지에 대한 분쟁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조선 후기부터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었음을 뜻하며, 이는 투자의 관점에서 압도적인 매력을 지닌 자산이라 볼 수 있다. 1950년 농지개혁으로 대지주의 땅이 몰수되었지만, 대한민국은 북한과 달리 매해 수확량의 15%를 10년 동안 대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개혁이 이뤄져 토지 소유권을 인정했다. 주식의 급등락은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다. 주식이 대중적인 투자 대상으로 부각한 것은 민주화가 주식시장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것으로, 이유는 ‘불확실성의 해소’ 때문이다.
1985년 국제그룹의 해체는 채권자와 주주들이 해결한 문제이지, 정부가 이를 해체하고 다른 재벌기업에 분할하는 것은 시장 경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었다. 거대한 기업 총수도 자신의 기업 소유권을 지키지 못하는데, 개미 투자자의 보유 지분 따위는 휴지 조각처럼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2월 총선에서 신민당 등 야당이 과반수의 지지를 받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주식 가격도 상승했다. 필자의 ‘유튜브 강의 노트’에서는 중국 주식에서 손을 떼라고 권고했고, 그리 판단하는 이유는 중국의 재산권 보호 수준이 한국의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과 비슷한 면이 많기 때문이란다. 예로 중국에서 주택을 사면 한국의 ‘등기권리증’에 해당하는 ‘부동산 권리증’이 발급되지만, 사용기한이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70년 사용기간이 지나면 연장해 줄 것이라 믿지만 그때 지도자가 누군지 가봐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 주식시장의 큰 문제는 ‘공동부유’ 정책으로 당국과 친소관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및 개인 재산권이 자리 잡지 못한 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정책 당국이 한번, 실수하는 순간 바로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로 코로나에 ‘제로코르나’ 정책이다. 막무가내식 정책은 국민의 고통을 요구한다. 2022년 반대 시위에 갑자기 방역 규정을 완화한 것이 사례다.
필자의 한국 경제의 흐름을 바꾼 19대 사건을 나열한다. 그중에서 관심 가는 것을 몇 가지 요약한다. 조선 후기에 토지 소유권이 상당 수준 확보되었고, 이를 총독부가 토지조사 사업으로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인당 국민 소득이 제대로 측정되지 않았던 사회에서 소득의 변화를 확인하는 방법은 전체 사망자에서 50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는 것이다. 노환으로 인한 사망인지, 사고나 영양실조의 사망인지 구별하기 위함이다. 1910~1937년 조선인 사망자의 50세 이상은 26~29%, 일본인은 33~38%였다. 조선인과 일본인 생활의 격차를 보여준다. 광복 이후 남한의 광공업 생산량은 1/3로 내려갔고, 수많은 사람이 실업 상태에 빠져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가 급격히 높아졌다.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으로 3만 제곱미터(9,180평)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는 재분배 대상으로 규정했다. 그러자 상위 3%의 토지가 64%에서 18%로 줄어들었다. 소작농은 49%에서 7%로 줄어들었다. 북한의 남침 이후 북한의 기대와 달리 남한의 대대적인 반란이 벌어지지 않은 데는, 농지개혁이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4·19 혁명 당시, 주도 세력은 고등학생이었다. 이른바 해방둥이 들인데 민주화 세력으로 길러진 세대는 이승만의 독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정부수립 후, 10년간 대학생은 3.5만 명에서 14만 명으로 늘었지만, 일자리는 한정적이라 불만이 높아졌다.
1950년 달러 환율은 1대 500으로 책정했는데, 미국 고문단은 1대 1000으로 하라, 조언하지만 이를 수정하지 않 았다. 이는 수출은 손해라며 물가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해외에서 값싸게 수입한 상품을 국내에서 판매하여 차액을 얻기 위함이다. 미국은 10년 넘게 한국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했음에도 북한과의 경쟁에서 뒤지는 것에 실망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비타협적인 태도,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 적정환율을 구하는 방법은 물가를 비교하는 것으로 맥도날드 햄버거 가격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빅맥지수’라 한다. 5·16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자 환율 인상을 단행했다. 다음 조치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64년부터 월남에 파병을 시작하여 32만 명이 파병됐다. 미국 정부는 두 차례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고, 한국 정부 자체로 국방예산을 동원하여 물품을 구입하라는 압력이 참전으로 완화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매년 월남전 특수를 1~2억 달러 누린 것으로 추정된다. 혁신을 가로막는 장벽을 깨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가장 쉬운 것이 전쟁이다. 미군의 전쟁물자를 항구에서 하역하는 데 수심이 충분한 곳은 단 한 곳에, 철도는 단선으로 남북으로 운행됐다. 바지선으로 받아 화물선으로 이동한 탄약이 전쟁에 투입되려면 10~30일이 걸렸다. 이때 등장한 것이 콘테이나선 전용 항구였다. 그리고 화물을 베트남에 내리고 빈 배로 돌아오다, 부산이나 고배에서 미국에 팔 상품을 싣고 가는 게 이익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컨테이너가 생기고 교역량 증가율은 7.8%가 되었다.
월남에 파병하자, 미국 정부의 태도가 달라진다. 참전 전에는 미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경제 지원과 원조 부담을 떠맡기를 기대했다. 한국의 대일 청구권 및 독도 문제가 부각되면서 정체 상태에 빠졌다.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일 협정 반대 시위를 진압하고 ‘한일 협정’이 체결된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가장 민감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한국 정부의 입장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해달라.” 요청했다. 당시 한국이 생산한 가치는 총 30억 달러였다. 일본은 한국에 3억 달러의 생산물 및 서비스를 10년에 걸쳐 무상으로 제공하며, 3억 달러의 장기 저리 차관도 10년 동안 제공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엄청난 돈을 박정희 정부는 포항에 일관 제철소 건설을 결정했다. 일관 제철소는 철광석과 코코스를 녹여 쇳물을 만들고, 이를 부어 철강 제품을 생산하는 제철소다, 반면 고철 등을 녹여 철강 제품을 만드는 것을 제강소라 불린다. 일본이 제철소 건설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이유는 일본에 줄 이익 때문이었다. 제철소 1기 사업에 든 설비 가격만 해도 일본이 수출한 해외 플랜트의의 1/5이었다. 월남전이 종결되면 전쟁 경기가 식어 포항제철만이 플랜트 수출의 길이기에 다른 플랜트 기업들이 수주 경쟁을 벌리던 시기라 일본은 적극적이었다.
1972년 사채동결 조치가 단행된다. 연이율 40% 이상의 사채를 은행 금리 16.2%로 인하하고 3년 동안 갚지 않아도 되며, 이후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는 것은 특혜였다. 이 조치로 기업 경영 실적은 개선되고 금융비용은 5% 아래로 떨어졌다. 1979년 한국은 충격에 빠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와 이란의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것이다. 1배럴에 14달러이던 원유가 39달러로 상승한다. 대책은 새로운 원유 공급처를 만드는 것이다. 미국의 볼커 의장은 10%의 정책 금리를 18.9%로 올린다. 금리가 인상되거나 경비가 나쁠 때는, 가계소비는 줄고 저축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기업은 새로운 투자를 줄이고 근로자를 해고할 가능성이 커진다. 신흥공업국은 차관이 많아서 금리가 인상되면 자동으로 이자가 올라간다. 당시 한국이 지고 있는 외채는 200억 달러로 큰 부담이었다. 다행히도 한국의 외채는 일본과 미국에 지고 있는데 이 두 나라와 관계가 좋았다. 한국개발연구원의 대책은 1달러에 484원인 환율을 600원대로 올리는 것이었다. 수입업체는 타격이지만 수출업체는 가격경쟁력이 강화되어 무역적자 해소에 큰 도움이 된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유가가 떨어지고 40달러에서, 1986년에는 16달러까지 떨어졌다. 물가가 안정되자 한국 정부도 태도를 바꿔 1982년 ‘6.28 조치’를 단행한다. 은행과 제2금융권 금리를 낮추고 법인세를 33~38%에서 20%로 인하하며, 은행 민영화를 추진하는 한편, 주거래 은행의 기업 대출 심사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라는 말과 같이 한국은 긴축정책으로 무역수지가 개선된다. 1982년 낮아진 은행 금리는 예금 금리를 인하할 여력이 생긴 덕분이다. 경기가 좋으면 의류, 자동차, 가전제품이 잘 팔리는 특성이 있다. 여기에 1984년 ‘유가’마저 급락하면서 ‘3저 호황’의 시대가 열린다. 무역수지가 82년 24억 불 흑자를 시작으로 86년에 31억 달러로 늘었다. 빛을 내어 쌓아 놓았던, 외환보유 고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여 중부고속도로를 새로 건설한다. 그리고 1984년 코리아펀드가 설립된다. 6,000만 달러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했는데 1년 만에 주가가 10배 이상 상승하여 신흥공업국 펀드 중에 스타로 군림하게 된다. 이때 호황을 부추기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1985년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선진 5개국 재무부 장관 회담 ‘플라자합의’이다. 요지는 미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해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의 평가 절상을 유도한 것이다, 엔화는 242엔에서 202엔으로 절상되었다. 한국이 고통을 받을 당시는 이는 복권에 당첨된 사건과 비유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4.08.21.
대한민국 돈의 역사-1st
홍춘욱 지음
상장스퀘어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