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갈릴리에서의 설교와 치병 기적을 통한 예수의 분주했던 활동 제 2차 갈릴리 사역, 마 8:5-13:58은 갈릴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유는 선교 사역의 연장 선상에서 또는 휴식 시간을 갖고자 하는 의도에서라는 등의 여러 주장들이 있다. 어쨌든 예수의 활동에 변화가 온 것은 사실이다.
예수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받고 있는 장면은 평행구인 마 13:53-58에 잘 나타나 있다. 이로써 예수는 가버나움 중심의 갈릴리 사역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이방인의 거주지를 위시한 각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선교하시는 제 3차 갈릴리 전도 사역의 계기를 마련하신다.
거기를 떠나서. - "거기"라는 말은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이야기를 옮겨갈 때 사용하는 장소적 부사로서 7:24 ;9:30 ; 10:1에서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가리키는 "거기"는 가버나움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5장의 이야기와 전혀 무리없이 본 사건이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가시니. - 예수의 고향은 나사렛이다( 이곳은 가버나움의 남서쪽에 있는 한적한 지방이다. 한편 "고향"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트리스"는 원래 "조상으로부터 살아온 곳", "자기의 원(原) 출생지"등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나사렛이란 장소가 예수의 출생지는 아니라 해도 이곳 나사렛에서 30여년 간 자라났으며
또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예수가 자라난 곳은 나사렛이라고 장소명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고향을 방문하는 것이 처음인가 아니면 두 번째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예수의 계속되는 박해 장면이 공생애 기간 내내 있었던 관계로 각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의 편집의도에 따라 적절히 배치하였기 때문에
본 사건은 눅 4:16 이하 기사는 분명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사역 중에 발생했던 것이며 그 방문 내용도 본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본문의 예수는 공생애 후기에 제 2차 고향 방문을 하고 계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문맥상으로 보나 전체적인 예수의 활동상으로 보아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마태의 기록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인다.
제자들도 좇으니라. - 예수의 고향 방문이 단순한 휴가나 가족 상봉만을 목적한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즉 예수는 일종의 랍비 로서 당신의 제자들을 대동하고 고향 방문길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마태는 이 사실을 다루지 않고 있는데 비해 마가는 제자들의 수행 장면을 분명히 기록함으로써 제자들이 예수를 좇으면서 계속 제자로서 필요한 훈련을 받고 있었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막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 예수는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회당을 방문한 선생에게 회당장이 성경을 강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한편 예수는 이 회당을 통한 선교 사역에 매우 익숙했었다. 따라서 누가는 "규례대로"라는 말로 예수의 가르침이 지극히 상례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
리고 누가는 예수가 읽은 성경의 내용까지 밝히고 있다. 그 성경은 사 61:1, 2이었다. 그런데 본문의 회당 설교 이후 예수의 회당을 통한 선교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어찌됨이뇨. -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이다. 우선 청중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매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의 받은 지혜....어찌됨이뇨"하며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의 30여 년 성장 과정을 줄곧 지켜보아왔던 터라 예수의 탁월한 성경 교수를 경악스러움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천박한 시기심과 질투심의 노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분의 탁월한 지혜와 권능을 직접 목격하고서도 오히려 "그의 가르침과 그의 권능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로서냐 사단에게로서냐?"하는 의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이다. 즉 예수의 초월적 권능에 대해 신앙인은 "무릎"으로, 비신앙인은 "놀람과 의심"으로 맞아들인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 청중들의 입을 통해 예수의 신원이 밝혀지고 있다. 물론 이 말의 저의는 "이 사람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일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천한 신분이 아니냐?" 또는 "이 자가 랍비라 칭하면서 이적을 행하고 돌아다니는데 이 어찌된 일인가?"라는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다.
이쨌든 마가복음에는 예수의 출생이나 성장에 대한 언급이 없고 족보에 대한 언급도 없다. 여기서 비로소 예수의 신변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진다. 즉 예수에게 어머니와 형제. 자매가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예수 자신이 목수였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목수의 아들"로 언급되고
누가복음에서는 단순히 요셉의 아들로 묘사되고 있다즉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쨌든 마가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소시민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마리아의 아들임을 밝힌 것은 예수 탄생 설화, 즉 처녀 탄생과 간접적으로 연결지으려는 마가의 의도에서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의견은 다음과 같다.
즉 유대인의 전통적 관습에 의하면 비록 아버지가 생존하지 않은 때에라 하더라도 그 자녀를 그의 어머니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이 용인(容認)되지 않았다. 따라서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에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어머니의 아들로 호칭하는 것으로써 사생아를 지칭하는 경멸적 표현이라는 점을 들어 예수를 경멸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dl 주장은 당시 나사렛 사람들이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하여 예수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잔제한다면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다. 따라서 나사렛 사람들은 이와 같이 존경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때 비록 예수의 설교와 능력이 놀랄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막 6: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선지자가...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 이 구절은 고향 사람들의 배척에 대한 예수의 반응으로서 당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격언구를 인용한 것이다. 속담형의 이 인용구는 유대, 헬라 문헌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그중 "철학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어렵게 산다" 또는 "침밀함은 오히려 경멸을 낳는다"는 등의 격언구들이 있다.
그러나 유대 및 헬라 문헌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가 ""선자자" 영감받은 선생 정도로 이해됨 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선지자"라는 말은 유대 및 이교도들의 속담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전정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실존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 자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예수 의 평범한 모습, 곧 자신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본문에서 마가는 "친척"과 "자기 집"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가족까지 예수를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자로 묘사한다.
당시 예수 추종자들도 많았지만 반대자들도 많았음을 상기한다면,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까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의 활동에 대한 중대하고도 근본적인 위협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마가는 이와 같이 고조된 긴장을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고독성과 당시 사람들의 불신앙을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막 6: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예수를 용납하지 못했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특별히 그들의 말투("아니냐.....아니냐...아니하냐")로 볼 때 그들은 고의적이고도 맹목적으로 그리고 천박한 시기심에 따라 예수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몸부림을 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와 요셉과...그누이들. - 이들은 예수의 사촌이나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에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낳았던 자녀들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예수의 친 형제요 자매들이다. 사실 제롬과 에피파니우스의 견해는 모두 마리아가 죽기까지 순결을 지켰다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더욱이 제롬의 견해는 심지어 요셉의 동정성까지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위의 두 견해는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한 그릇된 가설에 불과하다. 실로 여기 언급된 형제. 자매들은 예수의 동정녀 잉태와 출산 후,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자연스런 성관계로 인해 출생한 예수의 친동생들인 것이다.여기서 "야고보"는 예수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여겨지며, 초대교회에 지대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이름으로 된 서신서 야고보서 의 저자이기도 하다그는 유대사가 요세푸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변사한 것으로 나온다. 한편 "유다"는 공동 서신 가운데 유다서의 저자로 여겨진다. 그리고 요셉과 시몬 및 기타 자매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회심하여 초대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배척한지라. - 먼저 여기서 "배척하다"는 뜻은 "넘어지다"는 의미의 헬라어 "스칸달리조마이"에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이 뿐 아니라 "배척당하다", "....와 말다툼하다", "...을 공격하다" 등 다양하다.
어쨌든 본문을 직역하면 "그에게 걸려 넘어지다"는 뜻이다. 즉 마치 그들이 덫에 걸리듯 ㅇ례수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는 의미이다. 실로 그들은 예수를 현상적, 육신적, 신적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함으로써(불신앙함으로써) 결국 그분을 통해 실족하고 또한 그분을 배척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