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대에서 30년대 초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베를린은 술과 향락, 각종 퇴폐적 오락으로 넘쳐나는 도시였다(이 시기는 전 세계가 그랬다..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도 모던보이와 신여성들이 유행을 선도하던 시기였으니..) - 제 1 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고 메마른 베를린과 유럽 각지에서는 매춘이 융성했고 절망에 빠진 여성, 그리고 때로는 남성들마저 생존의 수단으로 매춘을 선택하는 것은 1920년대에는 일반적이 될 만큼 무수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녀를 불문하고 젊은 층에 확산되었다. - 1차 대전 중에는 매독이나 임질 등 각종 성병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만큼 만연되었고 전선의 병사들이 주로 매춘을 통해 성병에 걸렸기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특정한 매춘구역에 군의관을 파견해 검사를 실시하고, 깨끗하다고 확인된 구역에 한해서만 병사들에게 서비스 쿠폰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 어쨌든 1차 대전이 패전으로 종결되고 난 이후 매춘은 베를린의 지하경제와 문화에서 지위를 확고하게 구축하게 되었다. - 그러나 매춘과 병행하여 범죄도 급증하기 시작했고 베를린은 유럽에서 코카인과 헤로인, 진정제 등 각종 마약 거래와 암시장의 중심으로 악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베를린 거리에서 코카인을 구입하는 매춘여성..캡슐 당 5마르크였다고..
- 오죽하면 베를린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위해 서점에는 소위 "밤의 사교장“을 소개하는 가이드북들로 매장을 가득 메웠으며 이런 업소들 중,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업소만 500여 곳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 베를린의 예술가들은 합법적 극장에서 공연 할 수 없어 카바레에서 공연되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매료되었고 대표적인 카바레 댄서이자 여배우 아니타 베르베르(Anita Berber)는 코카인 중독과 각종 기행에 더해 에로틱한 연기로 충격을 주었다.
- 이런 향락적인 문화는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며 싸그리 쓸어버렸지만 그 직전에 베를린 서쪽, 부유층이 주로 거주하는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지역 기제브레히트스트라쎄(Giesebrechtstrasse) 11번지에 한 고급 매춘업소가 문을 열었다. - 주요 고객이 독일 각계의 고위 인사와 각국의 외교관들이었던 살롱 키티(Salon Kitty)의 여주인(마담)은 50대의 키티 슈미트(Kitty Schmidt)라는 여인이었다. - 1882년생이며 본명이 카타리나 자미트(Katharina Zammit)였던 마담 키티의 이 업소는 당시 독일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계층들 사이에서 도시에서 가장 고급에 비밀이 유지되며 만족한 서비스를 보장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었고 비록 요금이 고가였으나 이곳의 고객들은 이를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살롱 키티가 위치했던 곳의 현재 모습..
- 하지만 나치당의 권력 장악은 마담 키티에겐 재앙과도 같았고 쌩양아치 무리 나치 돌격대는 그녀가 그 세계에서 명성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준 수많은 유대인 은행가와 기업인들을 탄압하였고 경찰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 마침내 히틀러와 나치가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는 조짐이 보이자 신중한 마담 키티는 런던으로 사업을 이동시키기로 결심하였고 타국으로 망명하려는 사람들을 몰래 도와주면서 스스로도 영국 은행에 송금을 계속했다.
- 이후 영국 은행에 수천 파운드를 축적한 그녀는 베를린을 떠났지만 1939년 6월 28일,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통칭 SD) 요원에 의해 네덜란드와 독일 국경에서 체포되어 베를린의 게슈타포(Gestapo) 본부로 보내졌다. - 사실 이미 그녀는 이전부터 SD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있었으며 SD의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와 그의 딱까리 발터 셀렌베르그(Walter Schellenberg)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와 그녀의 업소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백정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딱까리 발터 셀렌베르그..
- 사악한 쪽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하이드리히는 이미 예전부터 독일 각계의 주요 인사들과 각국 외교관들을 술과 여자로 접대하고 침대에서 상대 여성에게 나치당과 정부에 대한 솔직한 의견이나 불만, 자국의 기밀 정보 등을 털어 놓는 것을 도청하여 불만분자를 적발하거나 기밀 정보를 얻거나하는 데 유용하게 쓰자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 따라서 이런 고위 계층이 주로 이용하는 고급 매춘업소를 첩보 활동에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친위대 간부들 중에서 정보 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하이드리히가 내놓자 그의 딱까리 셀렌베르그가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 업소에 SD 여성요원을 침투시키자는 하이드리히의 최초 방안에 대해 셀렌베르그는 한술 더 떠 아예 업소 자체를 SD가 흡수하여 정보를 처리하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한 세부계획으로 마담 키티와 그녀의 업소가 선택되었으며 내내 이곳을 주시하던 이 사악한 것들은 마침내 그 기회를 잡았다.
- 베를린으로 압송된 마담 키티를 셀렌베르그는 범죄 목록으로 빼곡히 채워진 서류 뭉치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불법으로 탈출한 유대인을 돕고, 허가 없이 해외 탈출을 시도했으며, 해외로 돈을 전송한 것은 물론, 위조 여권 사용, 마르크화의 불법 환전 등등 각종 죄목을 그녀에게 줄줄이 읊은 다음 - 이 정도 범죄면 노동수용소에서의 종신형이나 사형에 해당하지만 “당신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다면, 나도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끝을 맺었다. - 나치의 첩보 활동에 협력하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강제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마담 키티는 당연히 협력을 선택했고 살롱 키티가 "개조 공사"의 명목으로 일시 폐점한 사이에 이곳에는 대량의 도청용 마이크가 설치되었으며 케이블은 건물 지하실에서 위치한, 고객들의 이야기를 도청, 감시하는 각종 장비들이 구비된 방으로 이어졌다.
- 한편, 이렇게 살롱 키티가 개조 공사에 들어간 사이 베를린에서는 SD 소위 칼 슈바르츠(Karl Schwarz)의 팀이 이곳에서 근무할(?) 여성들을 찾아 밤거리 구석구석을 헤맸다. - 이들은 베를린 풍기 단속 경찰(Sittenpolizei)의 협조 하에 매춘업소, 나이트클럽, 길거리 등을 샅샅이 흩어 전례 없는 숫자의 매춘 여성들을 체포했고 이들 중에서 머리가 좋고 다국어를 이해할 수 있으며, 사상적으로 나치 성향이며 정보 수집에 소질이 있는 여성 20명을 추려내었다.
- 매춘여성에서 졸지에 스파이가 된 이들은 7주간에 걸쳐 엄격한 사상 교육과 훈련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외국어, 비무장 전투, 사격, 외국의 문화, 정치, 경제, 암호 사용은 물론, 각국의 군복 구별법과 일상적인 대화에서 기밀을 수집하는 방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윽고 1940년 3월, 키티 살롱의 재개장 준비가 끝났고 키티 작전(Operation Kitty)이라 명명된 이 작전은 휴가 나온 젊은 SS 장교들을 상대로 시스템의 유용성을 테스트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운용에 들어갔다. - 마담 키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영업을 계속하도록 명령받았고 다만 SD가 주의 깊게 관찰 중이거나 그들이 선택해 보낸 특정 인물에 대해서만 일반 고객은 보여주지 않는 20명의 여성 정보가 실린 팜플렛을 보여 주도록 지시했다. - 만약 가게에 온 손님이 마담 키티에게 "로텐부르크에서 왔는데..“ 라는 암호를 말하면, 그녀는 20명의 여성 정보가 실린 팜플렛을 보여주고 손님은 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 밤을 함께 보내게 되어 있었다.
졸지에 매춘여성에서 스파이로..1960년대 독일에서 영화화된 살롱 키티의 한장면..
- 이후 나치당과 정재계 인사, 군부의 고관, 독일 주재 외교관들 사이에 살롱 키티는 주요 인사만의 특별한 표어를 말하면 일반인에게 소개하지 않는 특별한 여성들을 소개하여 주는 것 같다 라는 이야기가 퍼져, 살롱 키티는 일시 폐점하기 전 보다 훨씬 인기 있는 업소가 되었다. - 고객 중에는 이탈리아 외무 장관 갈레아쪼 치아노(Galeazzo Ciano)도 있었으며, 그가 침대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고 장황하게 늘어놓은 얘기들이 힛총통에게 전달된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두 번 다시 예전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다. - 1940년 9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그와 적대적이었던 스페인 외무장관 라몬 세라노 수녜르(Ram?n Serrano Su?er)와 함께 살롱 키티에 도착했을 때, 영국령 지브롤터를 점령하겠다는 스페인의 계획을 들을 수 있었고 이들은 즉시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이를 경고할 수 있었다.
매춘업소가서 쓸데없는 소리하고 자빠진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쪼 치아노..
- 제일 골 때리는 인간은 바로 친위대 장성 제프 디트리히(Sepp Dietrich)였는데 이 소쉑기는 하룻밤에 20명 전원을 상대하고 싶다고 살롱 키티의 SD 책임자 칼 슈바르츠에게 요구했고 이 양아치 쉑기의 성질머리를 진즉에 알고 있던 슈바르츠는 할 수 없이 최선을 다해 그의 요구조건을 맞춰주었으며 디트리히는 그 체력으로 도청하던 SD요원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확실히 사람쉑기가 아닌 게야..) - 또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도 "사찰"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살롱 키티를 방문했고 그가 방문했을 때에는 살롱 키티의 녹음기 전원이 일제히 내려졌다(이 세끼는 디트리히 급이 못되었나 보네..)
20명 다 내놔~~ 사람세끼가 아니다..제프 디트리히..
- 하지만 살롱 키티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정보(?)들을 듣고 있었던 것은 하이드리히와 SD 쓰레기들 뿐만이 아니어서 영국의 정보요원 로저 윌슨(Roger Wilson)은 루마니아 대사관 대변인 류보 콜체프(Ljubo Kolchev)라는 위장 신분으로 업소를 방문, 거기에 설치되어있던 도청기를 발견했다. - 이후 그는 살롱의 단골 손님이 되었고, 나중에 세 개의 케이블에 연결되는 다른 케이블을 설치, 이제 영국의 정보기관은 SD가 도청하는 것과 똑같이 대화의 일부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담 키티(왼쪽)와 그녀의 딸..
-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격화되면서 살롱 키티의 고객은 점점 감소하였고 1942년 7월, 연합군의 공습으로 건물에 폭탄이 떨어져 파괴되자 SD는 같은 건물의 지하실로 이전을 강요했다. - 하지만 더 이상 고객이 찾지 않는 살롱 키티는 고급 정보의 원천에서 멀어져갔고 마침내 1942년 말, SD는 살롱 키티에서의 첩보 활동을 종료하면서 만약 비밀을 누설하면 보복하겠다고 협박한 뒤 경영을 마담 키티에게 반환했으며 20명의 스파이 여성들도 살롱 키티에 그대로 남았다.
당시 친위대 장교가 몰래 찍은 살롱 키티 내부의 사진이라는데..확실친 않다..
- 살롱 키티는 종전 후에 영업을 재개하여 독일의 경제 부흥과 함께 다시 인기많은 업소가 되었으며 1954년, 71세로 마담 키티가 사망하자 딸이 뒤를 이었지만 마담 키티는 사망할 때까지 전쟁 중의 활동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 1945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된 발터 셀렌베르그에 의해 작전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연합군 정보부는 작전 중에 기록된 25,000여 장의 녹음 레코드를 입수할 수는 없었다. - 러시아 정부는 관련 기록들이 베를린 전투 중에 게슈타포 본부에서 파괴되었다고 발뺌했지만 1963년, 동 베를린의 동독 국가 보안국 본부의 최고 기밀 창고에서 이 자료들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다.
- 1920년대에서 30년대 초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베를린은 술과 향락, 각종 퇴폐적 오락으로 넘쳐나는 도시였다(이 시기는 전 세계가 그랬다..식민지였던 우리나라에도 모던보이와 신여성들이 유행을 선도하던 시기였으니..) - 제 1 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되고 메마른 베를린과 유럽 각지에서는 매춘이 융성했고 절망에 빠진 여성, 그리고 때로는 남성들마저 생존의 수단으로 매춘을 선택하는 것은 1920년대에는 일반적이 될 만큼 무수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녀를 불문하고 젊은 층에 확산되었다. - 1차 대전 중에는 매독이나 임질 등 각종 성병이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만큼 만연되었고 전선의 병사들이 주로 매춘을 통해 성병에 걸렸기 때문에 독일군 수뇌부는 특정한 매춘구역에 군의관을 파견해 검사를 실시하고, 깨끗하다고 확인된 구역에 한해서만 병사들에게 서비스 쿠폰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 어쨌든 1차 대전이 패전으로 종결되고 난 이후 매춘은 베를린의 지하경제와 문화에서 지위를 확고하게 구축하게 되었다. - 그러나 매춘과 병행하여 범죄도 급증하기 시작했고 베를린은 유럽에서 코카인과 헤로인, 진정제 등 각종 마약 거래와 암시장의 중심으로 악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베를린 거리에서 코카인을 구입하는 매춘여성..캡슐 당 5마르크였다고..
- 오죽하면 베를린을 찾는 많은 관광객들을 위해 서점에는 소위 "밤의 사교장“을 소개하는 가이드북들로 매장을 가득 메웠으며 이런 업소들 중, 동성연애자들을 위한 업소만 500여 곳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 베를린의 예술가들은 합법적 극장에서 공연 할 수 없어 카바레에서 공연되는 언더그라운드 문화에 매료되었고 대표적인 카바레 댄서이자 여배우 아니타 베르베르(Anita Berber)는 코카인 중독과 각종 기행에 더해 에로틱한 연기로 충격을 주었다.
- 이런 향락적인 문화는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며 싸그리 쓸어버렸지만 그 직전에 베를린 서쪽, 부유층이 주로 거주하는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지역 기제브레히트스트라쎄(Giesebrechtstrasse) 11번지에 한 고급 매춘업소가 문을 열었다. - 주요 고객이 독일 각계의 고위 인사와 각국의 외교관들이었던 살롱 키티(Salon Kitty)의 여주인(마담)은 50대의 키티 슈미트(Kitty Schmidt)라는 여인이었다. - 1882년생이며 본명이 카타리나 자미트(Katharina Zammit)였던 마담 키티의 이 업소는 당시 독일 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계층들 사이에서 도시에서 가장 고급에 비밀이 유지되며 만족한 서비스를 보장하는 장소로 알려져 있었고 비록 요금이 고가였으나 이곳의 고객들은 이를 지불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살롱 키티가 위치했던 곳의 현재 모습..
- 하지만 나치당의 권력 장악은 마담 키티에겐 재앙과도 같았고 쌩양아치 무리 나치 돌격대는 그녀가 그 세계에서 명성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준 수많은 유대인 은행가와 기업인들을 탄압하였고 경찰은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 마침내 히틀러와 나치가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는 조짐이 보이자 신중한 마담 키티는 런던으로 사업을 이동시키기로 결심하였고 타국으로 망명하려는 사람들을 몰래 도와주면서 스스로도 영국 은행에 송금을 계속했다.
- 이후 영국 은행에 수천 파운드를 축적한 그녀는 베를린을 떠났지만 1939년 6월 28일, 친위대 보안국(Sicherheitsdienst 통칭 SD) 요원에 의해 네덜란드와 독일 국경에서 체포되어 베를린의 게슈타포(Gestapo) 본부로 보내졌다. - 사실 이미 그녀는 이전부터 SD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있었으며 SD의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와 그의 딱까리 발터 셀렌베르그(Walter Schellenberg)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녀와 그녀의 업소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백정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딱까리 발터 셀렌베르그..
- 사악한 쪽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하이드리히는 이미 예전부터 독일 각계의 주요 인사들과 각국 외교관들을 술과 여자로 접대하고 침대에서 상대 여성에게 나치당과 정부에 대한 솔직한 의견이나 불만, 자국의 기밀 정보 등을 털어 놓는 것을 도청하여 불만분자를 적발하거나 기밀 정보를 얻거나하는 데 유용하게 쓰자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다. - 따라서 이런 고위 계층이 주로 이용하는 고급 매춘업소를 첩보 활동에 사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친위대 간부들 중에서 정보 부문을 장악하고 있던 하이드리히가 내놓자 그의 딱까리 셀렌베르그가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 업소에 SD 여성요원을 침투시키자는 하이드리히의 최초 방안에 대해 셀렌베르그는 한술 더 떠 아예 업소 자체를 SD가 흡수하여 정보를 처리하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한 세부계획으로 마담 키티와 그녀의 업소가 선택되었으며 내내 이곳을 주시하던 이 사악한 것들은 마침내 그 기회를 잡았다.
- 베를린으로 압송된 마담 키티를 셀렌베르그는 범죄 목록으로 빼곡히 채워진 서류 뭉치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불법으로 탈출한 유대인을 돕고, 허가 없이 해외 탈출을 시도했으며, 해외로 돈을 전송한 것은 물론, 위조 여권 사용, 마르크화의 불법 환전 등등 각종 죄목을 그녀에게 줄줄이 읊은 다음 - 이 정도 범죄면 노동수용소에서의 종신형이나 사형에 해당하지만 “당신이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수 있다면, 나도 당신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끝을 맺었다. - 나치의 첩보 활동에 협력하거나 아니면 거부하고 강제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마담 키티는 당연히 협력을 선택했고 살롱 키티가 "개조 공사"의 명목으로 일시 폐점한 사이에 이곳에는 대량의 도청용 마이크가 설치되었으며 케이블은 건물 지하실에서 위치한, 고객들의 이야기를 도청, 감시하는 각종 장비들이 구비된 방으로 이어졌다.
- 한편, 이렇게 살롱 키티가 개조 공사에 들어간 사이 베를린에서는 SD 소위 칼 슈바르츠(Karl Schwarz)의 팀이 이곳에서 근무할(?) 여성들을 찾아 밤거리 구석구석을 헤맸다. - 이들은 베를린 풍기 단속 경찰(Sittenpolizei)의 협조 하에 매춘업소, 나이트클럽, 길거리 등을 샅샅이 흩어 전례 없는 숫자의 매춘 여성들을 체포했고 이들 중에서 머리가 좋고 다국어를 이해할 수 있으며, 사상적으로 나치 성향이며 정보 수집에 소질이 있는 여성 20명을 추려내었다.
- 매춘여성에서 졸지에 스파이가 된 이들은 7주간에 걸쳐 엄격한 사상 교육과 훈련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외국어, 비무장 전투, 사격, 외국의 문화, 정치, 경제, 암호 사용은 물론, 각국의 군복 구별법과 일상적인 대화에서 기밀을 수집하는 방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윽고 1940년 3월, 키티 살롱의 재개장 준비가 끝났고 키티 작전(Operation Kitty)이라 명명된 이 작전은 휴가 나온 젊은 SS 장교들을 상대로 시스템의 유용성을 테스트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운용에 들어갔다. - 마담 키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영업을 계속하도록 명령받았고 다만 SD가 주의 깊게 관찰 중이거나 그들이 선택해 보낸 특정 인물에 대해서만 일반 고객은 보여주지 않는 20명의 여성 정보가 실린 팜플렛을 보여 주도록 지시했다. - 만약 가게에 온 손님이 마담 키티에게 "로텐부르크에서 왔는데..“ 라는 암호를 말하면, 그녀는 20명의 여성 정보가 실린 팜플렛을 보여주고 손님은 그 중에서 한 사람을 선택, 밤을 함께 보내게 되어 있었다.
졸지에 매춘여성에서 스파이로..1960년대 독일에서 영화화된 살롱 키티의 한장면..
- 이후 나치당과 정재계 인사, 군부의 고관, 독일 주재 외교관들 사이에 살롱 키티는 주요 인사만의 특별한 표어를 말하면 일반인에게 소개하지 않는 특별한 여성들을 소개하여 주는 것 같다 라는 이야기가 퍼져, 살롱 키티는 일시 폐점하기 전 보다 훨씬 인기 있는 업소가 되었다. - 고객 중에는 이탈리아 외무 장관 갈레아쪼 치아노(Galeazzo Ciano)도 있었으며, 그가 침대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어둡다고 장황하게 늘어놓은 얘기들이 힛총통에게 전달된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두 번 다시 예전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었다. - 1940년 9월,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그와 적대적이었던 스페인 외무장관 라몬 세라노 수녜르(Ram?n Serrano Su?er)와 함께 살롱 키티에 도착했을 때, 영국령 지브롤터를 점령하겠다는 스페인의 계획을 들을 수 있었고 이들은 즉시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에게 이를 경고할 수 있었다.
매춘업소가서 쓸데없는 소리하고 자빠진 이탈리아 외무장관 갈레아쪼 치아노..
- 제일 골 때리는 인간은 바로 친위대 장성 제프 디트리히(Sepp Dietrich)였는데 이 소쉑기는 하룻밤에 20명 전원을 상대하고 싶다고 살롱 키티의 SD 책임자 칼 슈바르츠에게 요구했고 이 양아치 쉑기의 성질머리를 진즉에 알고 있던 슈바르츠는 할 수 없이 최선을 다해 그의 요구조건을 맞춰주었으며 디트리히는 그 체력으로 도청하던 SD요원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확실히 사람쉑기가 아닌 게야..) - 또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도 "사찰"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살롱 키티를 방문했고 그가 방문했을 때에는 살롱 키티의 녹음기 전원이 일제히 내려졌다(이 세끼는 디트리히 급이 못되었나 보네..)
20명 다 내놔~~ 사람세끼가 아니다..제프 디트리히..
- 하지만 살롱 키티에서 흘러나오는 각종 정보(?)들을 듣고 있었던 것은 하이드리히와 SD 쓰레기들 뿐만이 아니어서 영국의 정보요원 로저 윌슨(Roger Wilson)은 루마니아 대사관 대변인 류보 콜체프(Ljubo Kolchev)라는 위장 신분으로 업소를 방문, 거기에 설치되어있던 도청기를 발견했다. - 이후 그는 살롱의 단골 손님이 되었고, 나중에 세 개의 케이블에 연결되는 다른 케이블을 설치, 이제 영국의 정보기관은 SD가 도청하는 것과 똑같이 대화의 일부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마담 키티(왼쪽)와 그녀의 딸..
-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격화되면서 살롱 키티의 고객은 점점 감소하였고 1942년 7월, 연합군의 공습으로 건물에 폭탄이 떨어져 파괴되자 SD는 같은 건물의 지하실로 이전을 강요했다. - 하지만 더 이상 고객이 찾지 않는 살롱 키티는 고급 정보의 원천에서 멀어져갔고 마침내 1942년 말, SD는 살롱 키티에서의 첩보 활동을 종료하면서 만약 비밀을 누설하면 보복하겠다고 협박한 뒤 경영을 마담 키티에게 반환했으며 20명의 스파이 여성들도 살롱 키티에 그대로 남았다.
당시 친위대 장교가 몰래 찍은 살롱 키티 내부의 사진이라는데..확실친 않다..
- 살롱 키티는 종전 후에 영업을 재개하여 독일의 경제 부흥과 함께 다시 인기많은 업소가 되었으며 1954년, 71세로 마담 키티가 사망하자 딸이 뒤를 이었지만 마담 키티는 사망할 때까지 전쟁 중의 활동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 1945년, 연합군에 의해 체포된 발터 셀렌베르그에 의해 작전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연합군 정보부는 작전 중에 기록된 25,000여 장의 녹음 레코드를 입수할 수는 없었다. - 러시아 정부는 관련 기록들이 베를린 전투 중에 게슈타포 본부에서 파괴되었다고 발뺌했지만 1963년, 동 베를린의 동독 국가 보안국 본부의 최고 기밀 창고에서 이 자료들을 보았다는 증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