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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들어서는 가요계의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더욱 고착화되었으며, 젊은층이 주도하는 신세대 가요 부문은 다시 대중과 매니아로 양극화 되는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여전히 댄스와 발라드가 대중가요계를 주도하는 가운데 “인디 ROCK 밴드”와 “언더 힙합씬”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매니아층을 형성했습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은 1990년대에 비해서도 더욱 가요계에서 소외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은 여전히 “트로트 양대산맥”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가운데 박상철, 장윤정, 박현빈 등의 “신세대 트로트가수”의 등장은 새로운 활력이 되었습니다. 한편 1990년대 가요계의 “빅3”로 불렸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며 20~30대 청년층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조성모는 20~30대 청년층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으며 음반시장을 석권했습니다.
[ 부연설명 - 송대관 vs 태진아 ]
오늘날 트로트의 대표주자로 양대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송대관 vs 태진아"의 라이벌 구도는 종종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송대관, 태진아"를 "트로트 황제"로 거론하면서 남진,나훈아"의 비교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를 언짢아 하는 분위기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남진, 나훈아를 "트로트 황제"로 지칭하는 것과 송대관, 태진아를 "트로트 황제"로 지칭하는 것은 그 스케일 자체가 차원이 다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합니다. 또한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 자체도 한국 가요계 100년 역사를 통틀어서 "불멸의 라이벌"로 통하고 있기 때문에 "송대관 vs 태진아"의 라이벌 구도와는 그 스케일에서 차원이 다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 이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원로가수들 중에서는 "이미자 vs 패티김", "남인수 vs 백년설", "남인수 vs 현인", "고복수 vs 채규엽 vs 강홍식", "이난영 vs 장세정"과 같은 세기의 라이벌이 존재했고, 그중에서도 1940년대의 "남인수 vs 백년설"의 라이벌 시대 이후로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가 가장 치열했던 라이벌 시대로 기록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가요팬들은 지금 현재 시점의 상황을 기준으로 해서 각자 나름대로의 눈높이를 통해서 오늘날의 가요계 판도를 해석하고, 과거의 상황과 대입해서 서로 비교하거나 대입해보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1990년대의 신세대였던 "X세대"의 가요팬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눈높이에 의해서 "서태지-조용필, 신승훈-나훈아, 김건모-남진"으로 대입하는 구도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X세대"의 가요팬들은 서태지를 "조용필 이후의 최고의 슈퍼스타"로서 인식하고, "신승훈 vs 김건모"의 라이벌 구도를 "남진 vs 나훈아"에 비견되는 라이벌 구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구세대" 또는 "기성세대"라 불리는 중장년층에서는 "송대관 vs 태진아"의 라이벌 구도를 "남진 vs 나훈아"에 비견되는 라이벌 구도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들 나름대로의 눈높이에 의해서 "송대관-남진, 태진아-나훈아"로 대입하는 구도를 설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좀더 나이가 어린 신세대 가요팬들도 자신들 나름대로의 눈높이에 의해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N세대"의 가요팬들은 주로 "HOT vs 젝스키스"의 라이벌 구도를 과거의 라이벌 구도에 비견되는 "세기의 라이벌"로서 인식하는 경향도 존재하고 있으며, 현시대의 스타를 이전 시대의 스타와 서로 비교하는 구도를 만들어서 "조용필-서태지-HOT"의 계보도를 설정하는 식의 해석도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보다도 더 나이가 어린 세대의 팬들 중에서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눈높이에 의해서 "동방신기 vs 빅뱅", "원더걸스 vs 소녀시대"의 라이벌 구도를 "세기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서태지-HOT-동방신기"의 계보도를 설정하는 식의 해석도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심지어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 초반에는 이승철, 임재범 등이 주가를 올리게 되는 현상으로 인해서, "조용필 vs 이승철", "조용필 vs 임재범"과 같은 비교구도를 설정하고 해석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주원인이라면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는 가요계의 절대강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계층의 팬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눈높이에만 치우친 작위적인 해석으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대입하려 하는 현상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남진, 나훈아, 조용필"과 같은 절대강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통해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가수를 과거의 "남진, 나훈아, 조용필" 또는 그 이전에 등장했던 전설적인 원로가수들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1990년대 이후에는 가요계 판도 자체가 "기성세대 vs 신세대"로 대립하는 양극화 현상이 고착화되었고, 그중에서도 "신세대"에게 좀더 주도권이 있었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지지를 받는 트로트는 "비주류 장르"로 밀려난 현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남진 vs 나훈아 라이벌 시대"처럼 트로트가 가요계의 주류였고 모든 세대의 보편적인 지지를 받는 절대강자가 존재했던 시절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스케일 자체가 차원이 다름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가요계 상황만을 놓고 굳이 순위를 매기려 한다면 "서태지-신승훈-김건모-태진아-송대관-조성모"의 순서로 순위가 설정되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은 어찌됐든간에 "트로트"라는 한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고, 2000년대 이후로 "신세대"쪽의 대표주자가 완전히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상황에서도 "기성세대"쪽에서는 여전히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이 대표주자로서 장기집권 체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트로트라는 장르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자리매김한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에게는 "트로트 황제"라는 수식어가 별칭으로 붙게 되면서 과거의 "트로트 황제"였던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와도 비교하는 구도가 종종 설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송대관, 태진아"를 과거의 "남진, 나훈아"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에는 스케일상의 커다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지금 현재 시점의 가요계 상황"에만 포커스를 맞췄을 경우에는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에게 "트로트 황제"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큰 무리가 없는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가요계 판도 자체가 일반 대중들의 정서와 괴리된 채, 아이돌 그룹들과 그 팬덤이 주도하는 "그들만의 리그"로 치닫는 현실 속에서, "트로트"라는 한 분야의 대표주자로 장기집권하면서 어르신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송대관, 태진아 두 사람의 가요계 전설로서의 존재감은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튼 "송대관 vs 태진아"의 라이벌 구도에서 그들이 최정점에 올랐던 시기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송대관이 좀더 우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송대관의 가수인생에서 최고의 정점이라면 1976년(해뜰날)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고, 태진아의 가수인생에서 최고의 정점이라면 1989년(옥경이)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단일 히트곡으로서도 송대관의 "해뜰날"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1976년을 최고의 정점으로 꼽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최고의 정점을 지난 이후의 경쟁구도에서는 우열관계가 역전되면서 태진아가 좀더 앞서가기 시작했습니다. 본래 가요계에 먼저 데뷔한 송대관이 이름도 먼저 알려졌고, 1976년에 MBC의 "가수왕"도 먼저 거머쥔 상태였습니다. 1990년대 이후로는 트로트라는 장르 자체가 과거에 비해서 침체되기는 했지만, 신세대 가수들의 틈바구니에서 태진아가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트로트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에 송대관이 "네박자"의 빅히트에 힘입어서 다시한번 MBC의 "가수왕"을 차지하면서 앞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1년 뒤인 2000년에는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대박을 치면서 MBC의 "가수왕"을 차지했습니다. 이후로 대세는 완전히 태진아에게 넘어가면서, 태진아는 2000년대 이후로 트로트 부문의 거의 모든 상을 독식하기 시작했고, 2009년에는 일본에까지 진출해서 "엔카 한류"의 선두주자의 지위까지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비교적 나이가 어린 신세대의 가요팬들에게도 가장 유명한 트로트 가수와 히트곡으로서는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가 확고하게 각인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구도는 마치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에서도 남진이 먼저 이름이 알려졌고, 그들이 최정점에 올랐던 시절의 경쟁구도에서도 남진이 우위를 보였으며, 단일 히트곡으로서도 남진의 "님과함께"가 최고의 히트곡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성기가 지난 1980년대 이후부터 역전이 이뤄지면서 나훈아가 모든 면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나훈아가 한국 대중가요계의 "트로트 황제"라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라이벌 구도였던 "남진 vs 나훈아"의 경쟁구도와 오늘날의 라이벌 구도인 "송대관 vs 태진아"의 라이벌 구도가 비슷한 흐름으로 전개되고,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 역전이 이뤄진 것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성세대"라 불리는 어르신 세대에서 "송대관-남진, 태진아-나훈아"의 구도로 대입해서 해석을 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음반시장 자체도 유례가 없을 만큼 침체기였고, 이전 시대와는 달리 특정인의 1인독주 체제가 거의 불가능한 시스템이 정착되다시피 했습니다. CD 판매는 10만~20만장만 팔려도 대박이라고 할 만큼 음반시장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했지만, 그 대신 온라인 음원시장이 새롭게 대두되었습니다. 국내 음반시장은 침체됐지만, “한류열풍”에 힘입어서 해외 진출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해졌습니다. 또한 200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스타를 어느 한 명, 또는 한 팀으로 명확하게 규정짓기에는 애매한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활약이 돋보였던 스타를 꼽아본다면 조성모, 보아(BOA), 비(Rain)가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국내 가요계에서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2000년대 가요계에서 가장 눈부신 성적을 올린 톱스타는 단연 조성모였습니다. 조성모는 2000년대 초반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이문세, 변진섭, 신승훈의 계보를 잇는 “새로운 발라드의 황제”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최전성기였던 2000년에는 두 장의 앨범을 모두 20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혼자서 음반판매 1, 2위를 독식하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통산 음반 판매량에서도 조성모는 조용필, 신승훈, 김건모에 이어서 통산 1000만장을 돌파하며 역대 4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단일음반 판매 기록에서는 김건모에 이어서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조성모가 전성기를 누렸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시기에도 “아이돌 전성시대”였고,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였던 HOT와 god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성모는 아이돌 그룹들을 압도하는 전성기를 누리며 1999년과 2000년의 2년에 걸쳐서 연말 가요대상을 싹쓸이하는 등, 2000년대 이후의 국내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구축했습니다.
조성모는 200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가수임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가요계의 대표주자인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와 자주 비교대상에 오르내리며 레전드(전설)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조성모에게는 “더블 밀리언셀러”, “마지막 국민가수”라는 수식어가 함께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조성모는 “골든디스크 대상”을 3차례나 수상하고 “서울가요대상”, “KBS 가요대상”, “MBC 10대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가수” 등을 휩쓸면서 2000년대 초반 가요계를 압도적으로 석권했습니다. 10대~30대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던 조성모는 한때 신승훈과 김건모를 능가하는 전성기를 누렸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상승세가 한풀 꺾이면서 후배 가수들과의 경쟁에서도 다소 고전중입니다.
조성모는 1999년에 “새로운 발라드의 황제”로 떠오르면서 기존의 “발라드 황제”였던 신승훈의 비교대상으로 떠올랐습니다. 2000년 가을에는 조성모의 대표곡인 “아시나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비슷한 시기에 서태지가 “울트라맨이야”로 컴백하면서 조성모와 서태지의 대결구도가 가요계의 핫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이후 2년간 상승세가 주춤해졌던 조성모는 2003년에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는데, 이때는 김건모와 조성모의 대결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1999년과 2000년에 걸친 2년간은 조성모의 전성기가 최대의 절정을 이뤘던 시기였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조성모가 독주체제를 형성하는 가운데 1990년대의 톱스타 출신인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송대관, 태진아 등의 선배가수들이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2000년대 이후의 국내 가요계의 판도가 “아이돌 전성시대”라 불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가요계의 최강자로 등극한 이들은 아이돌 그룹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솔로가수였습니다. 여자 솔로가수 보아(BOA)는 이미 2000년대 초~중반부터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대표 한류스타”로서의 위상을 구축하며 국내 가요계에서도 특별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소속사의 후배 아이돌 그룹인 동방신기가 일본에서 보아(BOA)의 발자취를 따라갔을 때 즈음에는 이미 보아(BOA)는 미국으로 활동영역을 업그레이드 하면서 “월드스타”로 지위가 격상되었습니다.
“보아(BOA)”는 2000년대 초반 일본 무대에서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서 연말 “홍백가합전”에 여러 해 동안 출연하면서 최정상급 스타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런 가운데 국내에서도 많은 남성팬들의 지지를 받는 동시에 여성팬들에게도 가장 닮고 싶은 스타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보아(BOA)는 2000년대 중반까지 일본활동에 주력하며 “오리콘 차트”에서 수많은 기록을 세운 데 이어서 2008년에는 미국진출을 시도하며 “빌보드 메인차트”에서 국내 가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200위권에 진입하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보아(BOA)는 국내 아이돌 가수들의 해외진출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오늘날의 “한류열풍”과 “K-POP 전성시대”의 초석을 다졌습니다. 보아(BOA)는 국내 활동보다는 해외 활동이 더 두드러졌지만, “아시아의 별”이라는 수식어를 통해서 언론매체의 이슈를 선점하며, 국내 가요계에서도 “사실상의 레전드 아이돌”의 이미지로 부각되었습니다. 보아(BOA)는 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인 “SM 엔터테인먼트” 출신 가수 중에서도 역대 최고의 에이스로 꼽히고 있습니다.
한편 남자 솔로가수인 비(RAIN)는 2000년대 초~중반에 국내 가요계에서 가수 겸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린 뒤, 2007년 이후부터는 미국 무대에 도전하면서 “월드스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비(Rain)”는 가수와 탤런트, 영화배우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아시아권 전체에서 높은 인기를 얻었고, 이에 힘입어서 미국 진출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하며 “월드스타”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비(Rain)는 미국 진출에서는 영화배우로서의 활동에 주력하는 가운데, 국내와 아시아권에서는 가수활동을 병행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국내 가요계 선배들 중 “만능 엔터테이너”로서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은 1970년대에 가수 겸 영화배우로 왕성한 활약을 펼쳤던 남진, 나훈아와 1980년대에 “한국의 성룡”으로 명성을 떨쳤던 전영록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에는 “월드스타”로 떠오른 비(Rain)가 그러한 “만능 엔터테이너”의 계보를 잇고 있습니다. 가수 비(Rain)를 과거의 전설적인 대선배들의 비교대상으로 삼을 경우에는 일부 가요팬들이나 매니아층의 거부감을 자극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곤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면모에 초점을 맞췄을 때, 비(Rain)는 가수로서의 활동과 배우로서의 활동을 포함한 다방면에서 유감없는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비(Rain)는 순수하게 가수로서의 활동만을 놓고 봤을 때는 과거의 대선배들에 비해서 활동실적이 다소 미약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배우로서의 활동은 가수 활동보다도 훨씬 더 성공적이었습니다.
비(Rain)의 별명인 “월드스타”라는 타이틀 역시 사실상 배우로서의 활동으로 이룬 성과에 더 가깝지만, 그의 본업인 가수로서의 활동에도 막대한 홍보효과와 상징성을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월드스타”라는 수식어와 스포트라이트에는 다소 거품이 있다는 비판도 있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보아(BOA)와 비(RAIN)는 오늘날 아이돌 그룹 위주로 재편된 국내 가요계의 풍토에서 여타 아이돌 그룹들의 롤모델이자 “레전드 아이돌”의 이미지를 얻고 있습니다. 순수한 가수로서의 활동 실적에서는 보아(BOA)가 해외진출 성적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고, 비(RAIN)는 가수로서의 활동 실적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경향이 있지만, 영화배우 활동에 힙입은 “만능 엔터테이너”의 면모로서는 가장 주목받는 한류스타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한편, 20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god는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20~30대까지 폭넓은 팬층을 형성하며 “국민그룹”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god는 2000~2001년 사이에 “god 열풍”을 일으키며 한때 조성모의 상승세까지 잠재우고 가요대상을 휩쓸었습니다. god와 라이벌 관계였던 신화는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약 10년 가까이 롱런하면서 오랜 생명력을 자랑했습니다. god와 신화는 “10년 단위의 연대 구분”에 의할 때는 20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실질적으로는 199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HOT, 젝스키스와 함께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1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2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개막되기 이전까지, 과도기를 형성했던 2000년대 초~중반 무렵에 남녀 솔로가수 부문에서는 비, 휘성, 세븐, 김종국, 보아, 이효리, 장나라, 이수영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2000년대 중반과 후반 들어서는 “제2차 아이돌 전성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처음에는 동방신기가 유일한 아이돌 그룹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가 점차적으로 SS501, 슈퍼주니어, 빅뱅 등의 라이벌 그룹들이 연이어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의 “제1차 아이돌 시대”에는 HOT, god, 젝스키스, 신화, 핑클, SES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2000년대 중반 이후의 “제2차 아이돌 시대”에는 동방신기, 빅뱅, SS501,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가요계 팬덤문화의 주도권을 장악한 10대 청소년 팬덤은 “1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HOT, god, 핑클, 젝스키스 등의 그룹에게 높은 지지를 보냈고 “2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의 그룹에게 높은 지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 아이돌 그룹들은 특정 연령층에만 그 지지층이 편중돼 있고, 주요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10대 청소년들 중에서도 팬덤을 제외한 일반 대중에게까지 지지층을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는 뚜렷한 한계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제1차 아이돌” 시대가 개막된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제2차 아이돌 시대”가 개막된 2000년대 중반 이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들은 가요계의 전설로 꼽히는 대선배급 가수들에 비해서 평가절하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애초에 아이돌 그룹들은 수명 자체가 짧고 지지층이 특정 세대와 특정 계층에 편중된 “그들만의 리그”로서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나마도 “1세대 아이돌”에 비해서 “2세대 아이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동방신기는 경쟁그룹들을 압도하는 팬덤의 영향력에 힘입어서 국내 가요계를 휩쓸고 일본과 그 외의 아시아 권역에서까지도 그 위력을 떨침으로서, 최소한 아이돌 그룹끼리의 경쟁구도인 “그들만의 리그”에서만큼은 독보적인 선두주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동방신기는 음반판매 실적이나 연말 가요대상 수상 실적과 같은 통계수치상으로만 보면 동시대의 경쟁그룹인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을 월등히 앞서는 실적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1세대 아이돌” 시절의 HOT와 god마저도 능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동방신기는 2000년대 중~후반에 국내 최정상의 아이돌 그룹으로 등극하며 국내 가요계를 석권한 데 이어서, 일본 무대까지 진출해서 오리콘 차트에서 실적을 올리고, 연말 “홍백가합전”에 출연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동방신기는 “제2차 아이돌 전성시대”를 이끄는 주역으로 떠오르며 아시아를 대표하는 “한류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동방신기는 국내 가요계에서도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HOT, god의 계보를 잇는 “2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로 꼽히고 있으며, 특히 소속사의 직속 선배이기도 한 HOT의 비교대상에 올랐습니다. 일본 진출 이후로는 보아(BOA)의 비교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방신기는 압도적인 팬덤의 영향력과는 대조적으로 대중들의 정서나 트렌드와는 다소 괴리감이 있는 상태였으며, “팬덤의 위력 vs 대중성”, “극성팬 vs 안티”의 불균형 현상이 유독 극심하게 나타났습니다. “80만 카시오페아”라는 표현이 설명하듯이, 동방신기는 팬덤의 응집력에 있어서만큼은 선배그룹인 HOT마저도 능가할 만큼 엄청났지만, 대중적인 트렌드나 체감인기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유행을 선도하는 구도가 형성되며, 동방신기는 대중적인 트렌드와는 다소 괴리되어 있는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동방신기는 통계수치상으로 나타난 기록만을 놓고 볼 때는 동시대 경쟁그룹인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를 압도하고, 심지어는 “1세대 선배그룹”인 HOT와 god마저도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실질적인 체감인기나 대중적인 파급력, 영향력의 측면에서는 동시대 경쟁그룹인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를 월등히 앞선다고 말하기가 애매한 상황이었고, “1세대 아이돌 선배그룹”인 HOT나 god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는 현상이 불가피했습니다.
[부연설명: 5인체제의 동방신기의 전성기가 정점을 이뤘던 2008~2009년까지만 하더라도, 동방신기가 "2세대 아이돌"의 절대강자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시절의 동방신기는 국내 가요계에서는 HOT의 비교대상으로서, 그리고 일본에 진출한 한류스타로서는 보아(BOA)의 비교대상에 오르며 상승세가 지속되던 상황이었습니다. 동방신기가 HOT를 능가하는 역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의 지위에 등극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5인체제의 동방신기가 붕괴되면서 이들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의 에이스 지위도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쪽으로 이동했습니다. 2011년 이후로 2인체제로 재편된 동방신기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다소 역부족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사실상의 해체위기까지 겪은 그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는 그래도 상당한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동방신기의 활동실적을 동시대의 경쟁자들과 비교해봤을 때, "압도적 우위를 점유한 절대강자"라고까지 정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2세대 아이돌의 선두주자"라는 사실 자체만큼은 보편적인 인식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한편 SG 워너비, SS501, 빅뱅은 동방신기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서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아이돌 그룹”의 대표주자인 동방신기와 “소몰이 창법”(미디엄템포 발라드)의 대표주자인 SG워너비가 가요계를 양분하는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200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는 아이돌 그룹이 완전히 주도권을 잡으면서 약 10년 만에 아이돌 전성시대가 부활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 가요계의 전반적인 판도가 아이돌 그룹들 위주로 흘러가기는 했지만, “2세대 아이돌”의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2004~2006년만 해도 아이돌 그룹들 중에서는 동방신기 이외에는 활동실적이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1세대 아이돌” 중 마지막까지 생존한 신화가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2세대 아이돌”의 선두주자인 동방신기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면서 세대교체가 서서히 진행되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동방신기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발라드 그룹 SG워너비는 “아이돌”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데뷔 초창기에 동방신기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가요계를 양분했고, 가요팬들 사이에서도 SG워너비는 동방신기와는 조금 다른 색깔을 지닌 “변종 아이돌”의 이미지로 인식되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과 후반 이후에 등장한 버즈, FT아일랜드 등의 “보이 ROCK밴드”들도 일종의 “변종 아이돌”로 인식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라이벌 구도 자체는 “동방신기 vs SS501”, “SG워너비 vs 버즈”의 구도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가요계 전체적으로 볼 때는 동방신기와 SG워너비가 2005~2006년에 걸쳐서 가요계를 양분하며 경쟁구도를 이루고, 솔로가수인 비, 이효리, 이수영, 김종국 등과 주도권을 다투는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동방신기는 2006년에 연말 가요대상을 석권하며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HOT의 후계자로 떠올랐습니다. 동방신기는 2007년 이후부터 해외활동에 좀더 주력하기 시작했고, 동방신기의 거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혔던 SG워너비는 2007년 이후부터는 아이돌 그룹들에게 가요계 판도의 주도권을 내줬습니다. 동방신기가 국내 무대에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빅뱅, 원더걸스는 아이돌 부문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고, 동방신기가 국내 무대에 컴백한 2008년에는 “동방신기 vs 빅뱅”의 라이벌 구도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남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는 데뷔 초창기에 동방신기의 라이벌로 주목받았던 아이돌 그룹은 SS501이었지만, 2007년 이후부터 동방신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르며 가요계를 양분한 그룹은 빅뱅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녀 아이돌 그룹을 통틀어서는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2세대 아이돌”에 해당하는 그룹들 중에서 최고의 활동실적을 올렸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이후의 “제1차 아이돌 시대”와 “제2차 아이돌 시대”의 주역이 되는 그룹들은 각각 비교대상으로 “H.O.T-동방신기”, “god-빅뱅”, “젝스키스-SS501”, “신화-슈퍼주니어”, “핑클-원더걸스”, “SES-소녀시대”, “베이비복스-카라”의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과거와 같은 “국민가수”들이 자취를 감춘 대신에 아이돌 그룹들의 활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두드러졌습니다. “제2차 아이돌 전성시대”의 최정점을 이뤘던 2008년까지는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가 남녀 아이돌 그룹을 통틀어서 최고의 아이돌 그룹으로서 빅3를 형성했습니다. 2009년 이후에는 “걸그룹 전성시대”의 선봉장으로 떠오른 소녀시대의 상승세가 두드러졌습니다.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H.O.T, god, 핑클, 젝스키스, 신화, SES, 베이비복스 등의 그룹들이 국내 가요계에서의 대중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2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SS501, 슈퍼주니어, 카라 등의 그룹들은 해외진출 실적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남자 아이돌 그룹인 동방신기와 빅뱅은 2008년까지 국내 가요계를 석권한 뒤 2009년 이후에는 일본 활동에 주력했습니다. SS501은 국내 가요계와 일본활동 실적에서 모두 동방신기, 빅뱅에 비해서 현격한 격차의 열세를 보이며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SS501의 간판스타인 “꽃남”(F4) 김현중은 남녀 아이돌 그룹을 통틀어서 개인 멤버로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 부연설명: “제2차 아이돌 전성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동방신기와 SS501은 2009년과 2010년에 차례로 사실상의 해체 수순을 밟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제1차 아이돌 전성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젝스키스와 HOT가 2000년과 2001년에 차례로 해체된 것과 비슷한 수순을 밟았습니다. 특히 동방신기가 해체되고 소속사를 탈퇴한 멤버 3인이 “JYJ”를 결성하는 과정은 HOT가 해체되고 소속사를 탈퇴한 멤버 3인이 “JTL”을 결성하는 과정과 여러 모로 닮은꼴로서 비교대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동방신기의 경우에는 소속사에 남은 2명이 그룹의 이름을 존속시키면서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갔기 때문에, 완전해체의 길을 걸었던 HOT와는 달리 동방신기의 경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최초로 그룹이 양분되던 당시의 분위기는 탈퇴한 JYJ쪽으로 기존 동방신기 팬들의 대다수가 옮겨가는 추세였습니다. 하지만 JYJ가 “SM 엔터테인먼트”와의 분쟁으로 인해 방송활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2011년에 컴백한 동방신기(2인체제)는 소속사인 SM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음반시장의 강자로서의 지위를 되찾았습니다.
HOT가 해체될 당시에는 주로 국내 가요계에서의 이슈에 집중되었고, “한류열풍”이 막 싹트고 있던 중국 등의 일부 아시아 국가들에서 이슈가 되었습니다. 약 10년의 세월이 흘러서 동방신기가 사실상 해체될 때는 국내 가요계에서만 이슈가 된 것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한류열풍”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며 절정에 이르렀던 상황에서 일본과 기타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아시아 대표 한류스타” 동방신기의 불협화음과 사실상의 해체는 커다란 이슈가 되었습니다.
“1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남자 아이돌 그룹인 HOT, god, 젝스키스의 활약이 두드러진 가운데 여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 핑클이 선전하는 구도였던 데 비해서, “2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걸그룹 전성시대”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여자 아이돌 그룹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가요계 전체적으로는 남자 아이돌 그룹인 동방신기와 빅뱅이 양대산맥을 형성하기는 했지만, 걸그룹인 원더걸스와 소녀시대의 상승세가 두드러지며 사회적인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한편 남녀 아이돌 그룹 부문의 후발주자였던 2PM과 2NE1은 2009년 이후로 상승세를 견인하면서 기존의 아이돌 강자들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비스트가 새로운 인기그룹으로 떠올랐습니다. 2세대 남자 아이돌의 최강자로 꼽혔던 동방신기, 빅뱅 등의 전성기가 한풀 꺾인 상황에서도 이들과 동시대의 경쟁자였던 슈퍼주니어는 꾸준한 인기를 누리며 롱런하고 있습니다. 슈퍼주니어의 이러한 행보는 그들과 종종 비교대상으로 거론됐던 선배 아이돌 그룹 신화의 행보와 닮은꼴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1세대 아이돌” 시절인 HOT와 god의 경쟁구도에서 HOT는 팬덤의 위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god는 대중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것처럼, “2세대 아이돌” 시절인 동방신기와 빅뱅의 경쟁구도에서 동방신기는 팬덤의 위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빅뱅은 대중성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1세대와 2세대 시절의 아이돌 그룹들의 라이벌 경쟁구도는 조금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1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HOT가 완전해체에 이른 뒤 god는 경쟁그룹의 해체로 인한 혜택을 톡톡히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돌의 양대산맥은 HOT와 god로 인정받는 가운데서도 라이벌 구도 자체만큼은 여전히 "HOT vs 젝스키스"의 구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2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동방신기가 공백기를 겪으면서도 완전해체에 이르지 않고 그룹을 존속시키면서 동방신기와 빅뱅은 직접적인 맞대결을 통한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 정면으로 격돌했던 라이벌 대결 1라운드에서는 동방신기가 완승을 거뒀습니다.
한편 SS501은 비록 동방신기의 라이벌로서의 존재감이 부각되기는 했지만, 소속사 선배그룹인 젝스키스에 비해서도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2세대 시절에는 아이돌 그룹의 양대산맥 구도가 동방신기와 빅뱅으로 인식된 것에 그치지 않고, 라이벌 구도 자체도 "동방신기 vs SS501"의 구도에서 "동방신기 vs 빅뱅"의 구도로 아예 포커스가 이동했습니다. SS501은 그룹으로서의 활동실적은 다소 부진한 편이었지만, "꽃남(F4)" 김현중의 멤버 개인의 인기가 오히려 그룹 전체의 인기를 능가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돌 1세대 시절과 2세대 시절을 비교했을 때 동방신기는 팬덤의 결집력에서만큼은 선배그룹인 HOT마저도 능가하는 위력을 과시했지만, 대중성에서는 극도의 부진을 보이며 불균형 현상이 다소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빅뱅은 대중성에서 준수한 경쟁력을 나타냈지만 선배그룹인 god와 비견될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국민 아이돌"로 불렸던 god에 필적하는 대중성의 측면에서는 원더걸스, 소녀시대로 대표되는 걸그룹들이 좀더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소녀시대는 "국민 걸그룹"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동방신기와 빅뱅은 모두 2008년 이후로 국내 가요계에서 약 3년 가량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11년에 나란히 컴백해서 라이벌 대결 2라운드를 펼쳤습니다. 동방신기는 5인체제에서 2인체제로 그룹이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음반판매 부문에서만큼은 여전히 강세를 보이며 건재한 팬덤의 위력을 과시했습니다. 빅뱅은 음반과 음원 등의 차트에서 고르게 선전하면서 팬덤과 대중성에서 균형감 있는 활약을 보였습니다.
동방신기와 빅뱅은 여전히 국내 아이돌의 최강자로서 건재함을 과시했다는 데서 컴백활동 실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3년 전인 2008년에 인기의 최정점을 찍었던 것과 비교되면서 “예전만큼은 못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함께 듣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동방신기 vs 빅뱅"의 라이벌 구도를 1라운드(2008년)와 2라운드(2011년)로 설정했을 때, 일반적으로 1라운드는 동방신기의 승리, 2라운드는 빅뱅의 승리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음반판매 부문에서는 동방신기가 확고한 우위를 보이고, 빅뱅은 음반과 음원 모든 면에서 고르게 강세를 보였다는 측면에서는 2008년과 2011년이 모두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2008년에는 동방신기가 "5인체제"로서 아이돌 최강자로 확고하게 군림하던 시절이었던 반면에 2011년에는 동방신기가 "2인체제"로 사실상의 해체에 가까운 상태가 되면서, 소속사인 "SM 엔터테인먼트"의 에이스 지위마저도 소녀시대와 슈퍼주니어에게 내줬습니다.
동방신기가 "5인체제"로 정점을 이뤘던 2008~2009년 무렵에는 HOT, 보아(BOA)와도 비교대상에 올랐고, 역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상의 해체 수순을 밟으며 상승세가 한풀 꺾이면서 동방신기는 더 이상 "아이돌 최강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5인조 동방신기"가 "2인조 동방신기"와 "3인조 JYJ"로 분열된 상태에서도 국내 음반시장에서 선전했고, 특히 일본에서는 "2인조 동방신기"가 "5인조 동방신기" 시절의 음반판매력을 거의 온전하게 유지하면서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빅뱅은 2011년에 국내에 컴백한 뒤,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서 슈퍼주니어, 비스트 등의 경쟁그룹들에게 대상을 내주는 등, 신진세력들에 의해서 정상의 지위에서 밀려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빅뱅은 전성기 시절의 팬덤과 대중성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며, 한국갤럽의 10대가수 설문조사에서도 2007년~2011년에 이르기까지 5년 연속으로 3위권을 유지하며 4차례나 2위에 오르는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빅뱅은 2012년에 들어서도 주요 음반과 음원차트를 석권하는 등,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1세대와 2세대의 아이돌 그룹들을 통틀어서 HOT, god, 동방신기, 빅뱅으로 대표되는 남자 아이돌 그룹들의 팬덤이 여자 아이돌 그룹들의 팬덤에 비해서 압도적인 결집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는 “걸그룹 전성시대”라는 수식어가 표현해 주는 것처럼 가요계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트렌드에서는 여자 아이돌 그룹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여자 아이돌 그룹인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걸그룹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원더걸스는 2007년과 2008년에 “텔미”와 “노바디”로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핑클 이후로 최고의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 떠올랐습니다. 원더걸스는 2008년에 “서울가요대상”의 대상을 수상하면서, 핑클 이후로 9년 만에 여자 아이돌 그룹으로서 가요대상 수상의 영예까지 누렸습니다. 원더걸스는 데뷔 3년차를 맞이한 2009년에는 미국에 진출한 아시아 가수 중에서 최초로 빌보드 메인차트 100위권에 진입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원더걸스가 국내 최고의 여자 아이돌 그룹에서 월드스타로 거듭난 가운데, 라이벌 그룹인 소녀시대는 2009년 가요계의 핫이슈였던 “걸그룹 전성시대”의 선봉장으로 떠올랐습니다. 소녀시대는 2009년과 2010년에 “Gee”, “Oh”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연말 가요대상을 휩쓸었습니다. 소녀시대는 여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 핑클, 원더걸스에 이어서 통산 3번째로 “서울가요대상”의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두 걸그룹인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연달아서 가요대상을 수상한 것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한편 핑클 출신의 이효리는 2000년대 들어서 솔로가수로 전향하면서 그룹 시절을 뛰어넘는 전성기를 누렸고, 심지어는 후배 걸그룹인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과도 경쟁구도를 형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역대 여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던 핑클, 원더걸스, 소녀시대의 성적을 비교할 때, 그룹으로서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모두 핑클을 능가하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핑클 출신의 이효리는 역대 여자 아이돌 그룹 멤버 출신으로 가장 성공한 솔로가수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여자 댄스가수에게 붙는 “섹시퀸”이라는 별명의 계보는 “김완선-엄정화-이효리”의 순서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핑클 이후로 최고의 걸그룹으로 떠오른 원더걸스는 국내 가요계를 석권한 데 이어서 2009년에는 미국에 진출해서 국내 대중가수 역사상 최초로 “빌보드 메인차트” 100위권에 진입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오늘날(2012년)에 와서는 싸이가 영국의 UK차트와 미국의 빌보드차트 동시석권을 노리는 세상이 도래하다 보니, 이전에 미국진출을 시도했던 보아, 비, 세븐,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에게 “월드스타”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다소 민망한 상황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2009년 당시의 상황에서만큼은 원더걸스의 “빌보드 메인차트 76위”가 국내 가요계에서 전무후무했던 성과로 소개되며 연예 관련 매체의 이슈를 선점했습니다.
2009년 이후에는 기존의 “남녀 아이돌 빅3”를 형성했던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가 모두 해외활동에 주력하며 국내 무대에서 자리를 비웠습니다. 국내 가요계에서는 걸그룹의 선두주자인 소녀시대가 독주체제를 형성하는 가운데, 소녀시대와 카라가 라이벌 구도를 이루며 “걸그룹 열풍”을 주도하는 투톱체제를 형성했습니다. 남자 아이돌 그룹 중에서는 슈퍼주니어, 2PM, 2AM 등이 연말 가요 시상식에서 소녀시대의 독주를 견제하는 판도를 형성했습니다. 소녀시대는 2009년과 2010년에 연이어서 국내 가요계를 석권한 데 이어서, 일본 진출에서도 오리콘 차트에서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등, 무서운 상승세로 원더걸스의 아성을 위협하며 최고의 걸그룹으로 떠올랐습니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국내 가요계에서 “걸그룹 전성시대”의 선두주자로 떠오른 데 이어서 각각 미국과 일본 진출에서도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며 “월드스타”(원더걸스)와 “아시아 대표 한류스타”(소녀시대)로 지위가 격상되었습니다. 원더걸스는 2007년의 “텔미 신드롬”과 2008년의 “노바디 신드롬”으로 전성기를 누린 뒤, 2009년 이후에는 대표곡 “노바디”를 앞세운 미국진출을 통해서 언론매체의 이슈를 선점했습니다. 소녀시대는 2009년의 “GEE 신드롬”으로 전성기를 누린 뒤 국내 가요계와 아시아권 활동에서 좀더 탄탄한 내실을 다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모두 해외진출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내 무대에 이어서 해외 무대에서의 경쟁구도 또한 본격적으로 가열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소녀시대는 2011년 이후로 “K-POP 열풍”의 선두주자로 부각되기 시작하며,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 한류를 이끄는 최고의 걸그룹으로 떠올랐습니다. 2012년에는 소녀시대가 미국진출을 선언했고, 원더걸스는 일본진출을 선언하는 등, 새로운 무대에서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한편 카라는 국내 가요계에서는 양대 걸그룹인 원더걸스, 소녀시대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2010년 이후의 일본진출 실적에서는 소녀시대를 능가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국내 가요계와 아시아권 전체를 통틀어서는 소녀시대가 좀더 탄탄한 내실을 다지고 있지만, 일본이라는 특정지역에서의 활동실적에 있어서만큼은 카라가 선두주자로 떠오르면서 보아(BOA), 동방신기의 뒤를 이어서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그룹으로 떠올랐습니다.
[ 부연설명: “1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핑클과 SES가 여자 아이돌 부문의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고, “2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여자 아이돌 부문의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습니다. 특히 2000년대 후반에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나란히 가요대상을 수상하고 최고의 걸그룹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이들은 차례로 이전 시대 최고의 걸그룹이었던 핑클의 비교대상으로 거론됐습니다.
“1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남자 아이돌 그룹인 HOT, god가 절대적인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걸그룹 중에서는 핑클이 거의 유일하게 남자 아이돌 그룹과 경합을 벌이며 선전하는 구도였지만, “2세대 아이돌” 시절에는 “걸그룹 전성시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여자 아이돌 그룹들의 강세가 두드러졌습니다.
음반판매 실적이나 히트곡 수, 팬덤의 결집력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남자 아이돌 그룹인 동방신기, 빅뱅이 "2세대 아이돌 최강자"로서 부각되며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HOT, god의 비교대상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지지도에서는 걸그룹들이 오히려 남자 아이돌 그룹들을 앞서가는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지지도에서도 2007~2008년에는 원더걸스가 2년 연속, 2009~2011년에는 소녀시대가 3년 연속으로 가수 인기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원더걸스 vs 소녀시대”의 라이벌 구도에서는 그들의 최정점에 올랐던 시절만을 놓고 봤을 때는 원더걸스가 “텔미 신드롬”(2007년), “노바디 신드롬”(2008년)으로 확고한 우위를 점했습니다. 하지만 가수 자체의 인기에서는 소녀시대가 좀더 탄탄한 팬덤을 유지하고 있었고, 2009년 이후부터는 팬덤과 대중성의 모든 면에서 소녀시대가 월등히 앞서나가면서 최고의 걸그룹으로 등극했습니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2세대 여자 아이돌”의 대표주자로서 “1세대 여자 아이돌”의 대표주자였던 핑클과 종종 비교대상에 올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례가 없는 “걸그룹 열풍”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국내활동과 해외활동의 모든 면에서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핑클을 월등히 능가하는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한때 남녀 아이돌 빅3로 꼽혔던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가 최근 들어서는 예전에 비해서 영향력이 다소 쇠퇴한 반면에, 소녀시대는 201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K-POP 선두주자”로서 그 존재감이 더욱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오늘날의 “걸그룹 열풍”에 힘입어서 과거에 한시대를 풍미했던 “원조 걸그룹”들의 존재도 다시금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김씨스터즈, 은방울자매, 펄씨스터즈, 바니걸스 등의 그룹들이 과거에 한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걸그룹이었고, 오늘날의 "1세대, 2세대 여자 아이돌 그룹"을 대표하는 핑클, SES, 원더걸스, 소녀시대의 전성시대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의 “걸그룹 전성시대”와 과거의 “원조 걸그룹”들 사이에서 구태여 연결고리를 설정하려 한다면, 아마도 김씨스터즈와 펄씨스터즈를 오늘날의 원더걸스, 소녀시대와 비교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듯합니다. 김씨스터즈와 펄씨스터즈는 과거 수십년 세월 동안 가요계 역사에서 최고의 걸그룹으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김씨스터즈는 걸그룹 중에서 최초로 미국에 진출해서 빌보드 차트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미국진출의 선두주자인 원더걸스의 성공은 과거 김씨스터즈가 거둔 성과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성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펄씨스터즈는 1969년에 역대 걸그룹 중 최초로 연말 가요대상을 수상하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이후 30년의 세월이 흐른 1999년에 핑클이 역대 걸그룹 중 통산 두번째로 가요대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펄씨스터즈가 수상한 "MBC 가수왕"의 가치에 비견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10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후에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나란히 가요대상을 수상했고, 특히 최근 몇년간의 "걸그룹 열풍"에 힘입어서 소녀시대는 연말 가요 시상식을 휩쓸며 과거의 펄씨스터즈를 능가하는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한국 가요계 역사상 최고의 걸그룹”으로 표현해도 큰 무리가 없는 상황이지만, 지난 수십년의 세월 동안 김씨스터즈와 펄씨스터즈는 걸그룹 역사상 독보적인 전설로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이들 중에서 김씨스터즈는 “해외진출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오늘날에는 원더걸스가 한층 업그레이드된 “해외진출 실적”을 이뤄냈습니다. 그리고 펄씨스터즈는 국내 가요계를 석권한 최고의 “원조 걸그룹”이었고, 오늘날에는 소녀시대가 “걸그룹 전성시대”의 최선봉에 서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전성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
“1세대 아이돌”의 시대에는 국내 음반시장 전체적으로 호황을 누리던 상황에서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HOT와 god가 모두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솔로가수인 조성모는 “더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습니다. “2세대 아이돌”의 시대에는 음반시장이 전반적으로 불황에 빠진 상태에서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동방신기가 유일하게 50만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경쟁그룹들을 압도했습니다. 하지만 “음반판매 순위” 자체가 이전에 비해서 가치가 크게 하락한 가운데, “디지털 음원 판매 순위”가 인기를 판가름하는 또 하나의 척도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음반판매 순위”는 대체로 막강한 팬덤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을 보였고, “음원판매 순위”는 대체로 대중성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국내 음반시장이 불황에 빠진 반면에 일본과 중국, 대만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 전역에서의 “한류열풍”은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아이돌 그룹들이 주도한 “한류열풍”은 2000년대를 지나서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상승세를 이어갔고, “유튜브”라는 매체의 위력에 힘입어서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 중남미 등지에서도 “한류”가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한류”라는 키워드가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면서 “K-POP”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언더그라운드에서는 ROCK 음악과 힙합 음악이 독자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ROCK 음악의 경우는 전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대표적인 음악장르로 각광받고 있지만, 국내 가요계에서만큼은 비주류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국내 가요계에서는 트로트, 발라드, 댄스의 3대 장르가 주류를 이룬 가운데, ROCK은 1970년대 이후 주류 가요계와 언더그라운드를 통틀어서 꾸준히 발전해오다가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인디 ROCK밴드”라는 새로운 형태의 그룹들이 탄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니네 이발관, 델리스파이스, 크라잉넛, 노브레인은 대표적인 인디 ROCK밴드로 각광받아왔고, 2009년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이 높은 인기를 얻으면서, 대중적으로도 친숙하게 접근했습니다.
힙합은 국내 가요계에서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고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댄스음악의 하위장르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다가 드렁큰타이거(타이거 JK)가 등장하면서부터 국내 가요계에서도 “힙합”이라는 장르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부터 힙합은 ROCK과 함께 언더그라운드의 양대세력을 형성하는 한 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드렁큰타이거가 이끄는 힙합 패밀리 “더 무브먼트”는 두터운 매니아층을 형성하는 동시에 소속 그룹인 에픽하이 등의 활약에 힘입어서 대중적으로도 좀더 친숙하게 다가섰습니다. 아직까지 국내가요계에서 “힙합”이라는 장르 자체는 비주류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지만, 주류 가요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댄스음악은 과거에 비해서 힙합적인 색채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전세계적으로도 2000년대 이후부터는 힙합, R&B로 대표되는 흑인음악이 상승세를 타면서 전통적 장르였던 ROCK을 제치고 주류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서 국내에서도 힙합과 R&B로 대표되는 흑인음악이 2000년대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언더그라운드뿐만 아니라 기존 댄스가수들과 아이돌 그룹들도 “댄스 + 힙합”, “발라드 + R&B”를 접목한 퓨전 장르를 선보이면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특히 “YG 엔터테인먼트”는 대표적인 힙합 기획사로 꼽히는 동시에 아이돌 기획사이기도 한데, 소속 그룹인 빅뱅, 2NE1 등을 통해서 좀더 힙합의 색깔이 강하게 묻어나는 댄스음악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한편 2000년대 들어서는 가요대상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선 공중파 방송 3사인 MBC, KBS, SBS는 모두 가요대상을 폐지했습니다. 그 대신에 케이블 TV인 엠넷에서는 “MKMF”(나중에 MAMA로 재출범)라는 시상식을 신설했고, 온라인 음원 사이트 멜론에서는 “멜론뮤직어워드”(MMA)를 신설했습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과 평론가 집단에서는 주류 가요계와의 차별화를 위해 “한국대중음악상”이라는 시상식을 신설했습니다.
엠넷에서 주관하고 있는 가요 시상식 “MAMA”(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는 국내 가요계에서의 권위 자체는 다소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규모와 인지도 측면에서는 아시아 전역에 방영되면서 가장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시상식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기존 가요대상 중에서는 “골든디스크”가 최고 권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디스크 대상”과 “디지털 음원대상”을 나누기 시작하고, 공정성 여부에서도 잡음에 시달리면서, 1990년대에 비해서는 권위가 크게 추락했습니다.
한편 “서울가요대상”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다지 높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200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유일하게 남은 “남녀통합 단독 가요대상”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희소가치를 얻게 됐습니다. 이는 “서울가요대상”의 권위가 상승했다기보다는 “골든디스크”와 “MAMA”라는 국내 최대 규모의 두 시상식이 “반쪽 시상식”으로 전락한 데 따른 반사이익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특히 2009년 이후로는 특정 기획사가 특정 시상식을 보이콧하거나, 특정 시상식에서 특정 소속사의 가수들을 모두 제외하는 현상이 노골화되면서 연말 가요 시상식 자체의 의미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 퇴색된 상태입니다.
2000년대 후반에는 “MAMA”에서는 SM 소속 가수들이 대거 불참하고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되는 한편, “골든디스크”에서는 YG 소속 가수들이 대거 불참하고 수상자 명단에서도 제외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서울가요대상”은 역사와 전통에서는 과거의 공중파 방송사(MBC, KBS)에 비해서 한참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최근에는 특별한 잡음이 없는 거의 유일한 시상식이라는 자체만으로도 그나마 간신히 제구실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2009년 이후부터는 “가온차트”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디스크 부문”과 “디지털 음원 부문”의 음반, 음원 판매량을 체계적으로 집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소속사의 “자진신고”에 의존하는 기존 관행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에서의 음반관련 통계자료는 여전히 100% 신뢰감을 주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아직까지는 기존의 “음협”(음반협회)의 음반판매량 집계와 “가온차트”의 통계자료에서 뚜렷한 차별화가 이뤄지지 못한 상태입니다. 당초 미국의 “빌보드 차트” 또는 일본의 “오리콘 차트”와 같은 권위의 차트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가온차트”이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권위와 공신력에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거대 기획사의 영향력도 2000년대 들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과거에도 “박춘석 사단”, “신중현 사단”이 존재했고, 길옥윤, 이봉조, 김희갑 등의 작곡가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체계적인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갖춰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김창환 사단”이 한동안 가요계를 주름잡고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아이돌 기획사의 전성시대가 도래했습니다. “SM 엔터테인먼트”(이수만)가 굴지의 연예 기획사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DSP 엔터테인먼트”(이호연)가 라이벌 기획사로 떠올랐고, “GM기획(김광수)”이 그 틈새를 비집고 경쟁체제에 합류했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는 SM의 일방적인 독주체제가 이어지다가 “JYP 엔터테인먼트”(박진영), “YG 엔터테인먼트”(양현석)가 급성장하면서 SM(이수만)과 함께 3대 기획사로 등극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한때 DSP(이호연)가 SM(이수만)과의 라이벌 체제를 복원시키고, 엠넷미디어(김광수, 구 GM기획)이 중흥을 이루는 듯했지만, 200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다시 SM(이수만), JYP(박진영), YG(양현석)로 대표되는 “빅3” 기획사의 가요계 장악력은 더욱 공고해졌고, 엠넷미디어(김광수)도 사업을 확장하면서 거대 기획사로 성장한 가운데, DSP(이호연)은 이들 대형 기획사와의 경쟁에서 다소 힘에 부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2000년대 가요계에는 과거와 같은 “국민가수” 또는 “황제”라는 칭호를 들을 만한 가수를 한 명, 또는 한 팀으로 압축해서 말하기에는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 음반시장의 불황과 해외진출 러시의 상황을 감안해서, 해외진출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한 보아(BOA), 비(Rain)가 대표적인 한류스타로서 언론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선점하고 있습니다. 보아(BOA), 비(Rain)는 각각 “아시아의 별”, “월드스타”라는 별명을 얻으며 톱스타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보아(BOA), 비(Rain)는 2000년대 중반에 국내 가요계에서도 전성기를 누린 뒤 아시아권과 미국으로 활동영역을 넓히며 “월드스타”로 부각되면서 사회, 문화적 이슈를 선점하고 있습니다. 기획사 사장으로서 이들을 스타로 키워낸 이수만(보아, 동방신기)과 박진영(비)도 최고의 제작자로 명성을 누렸습니다. 비(Rain)는 가수보다도 영화배우로서 좀더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면서 “월드스타”로 가장 홍보효과가 부각되었고, 순수하게 가수활동 부문에서의 활약만으로는 보아(BOA)가 가장 뛰어난 해외진출 실적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국내 가요계에서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2000년대 가수 중에서는 조성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음반판매 실적을 올렸고, 가요차트와 가요대상을 석권하면서 유일하게 “국민가수”라는 별칭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조성모는 2000년대 초반까지 절정의 인기를 누린 뒤 몇 년간 공백기를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 군 제대 이후로 스스로 컴백음반의 제목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가수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면서 어느덧 가요계 대선배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2000년대 가수 중에서 1990년대의 전설이었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송대관, 태진아와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가수는 사실상 조성모가 거의 유일하다는 평이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조성모가 전성기를 누린 시점이 2000년대 초반이기는 하지만 상당수의 가요팬들은 조성모를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등의 1990년대 가수들과 거의 같은 세대의 스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가요계 판도에서는 과거와 달리 특정한 노래의 히트에 포커스가 맞춰지기보다는 아이돌 가수들의 퍼포먼스에 좀더 포커스가 맞춰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로 과거에 비해서 “국민가요” 내지는 “대박 히트곡”의 부재가 다소 아쉬운 상황입니다.
그래도 2000년대의 대표적인 히트곡이라 할 만한 노래들을
한번 살펴본다면
“조성모 - 아시나요”, “GOD - 거짓말”, “태진아 - 사랑은 아무나 하나”, “장윤정 - 어머나”, “박상철 - 무조건”, “박현빈 - 샤방샤방”, “부활 - 네버엔딩 스토리”, “성시경 - 내게 오는 길”, “장나라 - Sweet dream”, “홍경민 - 흔들린 우정”, “김현정 - 멍”, “백지영 - Dash”, “윤도현밴드 - 오 필승 코리아”, “신화 - Brand New”, “휘성 - 안 되나요”, “세븐 - 열정”, “싸이 - 챔피언”, “김장훈 - 난 남자다”, “김범수 - 보고 싶다”, “유리상자 - 사랑해도 될까요”, “이효리 - 10 Minutes”, “이수영 - 휠릴리”, “김종국 - 한남자”, “보아(BOA) - 넘버원”, “비(Rain) - 레이니즘”, “동방신기 - Hug”, “빅뱅 - 거짓말”, “SG워너비 - 내 사람”, “원더걸스 - Tell me”, “소녀시대 - Gee”, “SS501 - 내 머리가 나빠서”, “슈퍼주니어 - 쏘리쏘리”, “2PM - Again & Again”, “카라 - 미스터”, “드렁큰타이거 - Good life” 정도의 노래들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 부연설명: 비록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2000년대와 2010년대에 걸쳐서 “아이돌 전성시대”가 도래했고, “1세대”와 “2세대”의 아이돌 그룹을 통틀어서 HOT, god, 동방신기,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핑클, 젝스키스, 신화, SES, 슈퍼주니어, SS501, 2PM, 카라, 베이비복스, 2NE1 등등... 으로 대표되는 그룹들이 최고의 인기를 얻기는 했지만, 이들 아이돌 그룹들은 “10대 청소년” 중에서도 특정 팬덤에게 지지가 편중된 경향을 보여왔습니다.
그나마 비슷한 연령대의 청소년 세대에서조차도 아이돌 그룹들에 대한 적개심이 팽배해지면서 상당한 수준의 안티가 형성되었고, 이들 청소년 세대 사이에서도 아이돌 그룹들은 대체로 평가절하 되는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게다가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가요계에 대한 관심도나 열기가 과거에 비해서 현저하게 떨어지는 현상을 감안한다면 아이돌 그룹들의 경쟁구도 자체가 아무리 양적으로, 상업적으로 부풀려졌다 하더라도 “그들만의 리그”라는 태생적 한계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가요계 역사에서의 “아이돌 시대” 자체를 있는 그대로 실체로 인정하고,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2000년대와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의 대부분을 아이돌 그룹 위주로 서술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선배 레전드”에 해당하는 솔로가수들에 비하면 어느 정도의 평가절하는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1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HOT, god와 “2세대 아이돌”의 대표주자인 동방신기 정도가 그래도 간신히 명함을 내미는 정도라고 불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아이돌 전성시대”라는 특정시기의 경쟁구도에서조차도 결과적으로 국내 가요계에서 아이돌 그룹들을 제치고 최고의 레전드급 스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대표적인 톱스타는 결국 조성모, 보아(BOA), 비(RAIN)로 대표되는 솔로가수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
[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1920~30년대의 윤심덕, 이애리수, 이난영, 고복수”, “1940~50년대의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와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과 나훈아”, “1980년대의 조용필”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굳이 시대별로 한 명씩만 대표적으로 거론할 경우 “남인수(40년대)->현인(50년대)->이미자(60년대)->나훈아(70년대)->조용필(80년대)”로 이어지는 계보가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조용필과 이미자가 한국 대중가요 최고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으며, 광복 이전까지 포함할 경우에는 “광복 이전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이후의 가왕 조용필”이 종종 비교대상에 오르고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사에서 가요 시상식을 정착시킨 1960년대 이후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오늘날의 어르신 세대들에게 있어서는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이 대표적인 국민가수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4인방은 어르신 세대뿐만이 아니라 신세대 가요팬들에게도 가요계의 불멸의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30대 이하의 젊은층과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극명하게 양분되는 현상을 보였는데, 그래도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층에 좀더 주도권이 있었기 때문에 젊은층의 사랑을 받았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를 대표적인 “빅3”로 꼽고 있습니다. 1990년대의 대표적인 5명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태진아, 송대관은 모두 가요계의 대선배이자 전설로서 후배들의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우열을 비교해서 대표주자를 가려내려고 한다면 “빅3”(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압축되고, “빅3” 중에서는 다시 서태지와 신승훈이 1990년대의 대표적인 전설로 압축되며, 그 중에서도 단 한 명만으로 압축할 경우에는 서태지가 그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고, 은퇴 후 또는 사후에도 수십년 동안 꾸준한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와 "국민가요"가 존재했었는데, 그러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계보는 1980년대의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광복 직후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총망라해서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고, 그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던 인물들은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이름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남인수와 백년설이 가요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1940년대와 남진, 나훈아가 가요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1970년대는 가장 뜨거웠던 라이벌 시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0~50년대를 휩쓸었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직후에 “대한민국 1호 가수”로 등극했던 현인, 1960년대를 휩쓸었던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1980년대를 휩쓸었던 "가왕" 조용필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의 전설의 계보에서도 사실상 "왕중왕"에 해당되는 존재로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한국 대중가요의 100년 역사를 무조건 10년 단위로 끊어서 도식화한다는 것에는 그만큼 불합리성이 작용할 수 있고, 또한 1980년대 이전 세대간 단절현상이 없던 시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세대의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과거의 “진정한 국민가수”들을 1990년대 이후의 신세대 가수들과 단순 비교하는 것 역시 어느 정도는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합리성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10년 단위로 단 한명씩의 이름만 순차적으로 나열할 경우”에는 “1980년대 조용필의 시대”를 기준으로 해서 “조용필 이전 - 나훈아, 조용필 이후 - 서태지”의 구도가 설정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10년 단위의 대표주자를 한명씩만 나열하면서 인위적으로 리스트를 작성할 경우에는 "윤심덕(1920년대) -> 고복수(1930년대) -> 남인수(1940년대) -> 현인(1950년대) -> 이미자(1960년대) -> 나훈아(1970년대) -> 조용필(1980년대) -> 서태지(1990년대) -> 조성모(2000년대)"로 이어지는 계보를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성모를 1990년대 가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비(Rain) 또는 보아(BOA)를 200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분류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시대에 전성기를 누렸으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로서 그 자체에 포커스가 맞춰지기도 합니다. 팝음악계에서는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가 동시대의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로서 역사에 회자되는 전설로 군림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역사에서도 그러한 불멸의 라이벌 관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의 남인수 vs 백년설”, 1950년대의 남인수 vs 현인”, “1960년대의 이미자 vs 패티김”, “1970년대의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는 가장 대표적인 라이벌 관계로서의 상징성을 얻고 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남진 vs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는 그야말로 라이벌의 상징 그 자체로 통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가수는 오직 남진과 나훈아뿐이다”는 평론까지 등장했을 정도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관계는 동시대의 라이벌 관계이면서도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불멸의 전설로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부터는 중장년층 이상의 기성세대들이 가요계의 팬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한 가운데, 신세대라 불리는 30대 이하의 젊은층이 가요계의 팬문화의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과거와 같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의 명맥이 끊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세대"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3인방이 오늘날의 신세대들에게는 보편적으로 존중을 받는 전설로 통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부터는 그 신세대 중에서도 10대 청소년과 아이돌 팬덤을 제외한 나머지 대중이나 매니아층이 서서히 가요계의 팬덤문화에서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국내 가요시장 자체도 최악의 침체기를 맞이했고, "전설"이라 불릴만한 톱스타의 부재현상도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전설"의 이미지에 근접한 가요계의 톱스타로서는 "마지막 국민가수" 조성모와 "한류스타, 월드스타"로 부각되는 보아(BOA), 비(Rain)의 이름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가요계의 세대간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고착화되면서 연령대별로 나타나는 “세대차이”도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리고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로 넘어갈수록 특정 세대에 의한 가요시장 편중현상이 더욱 심화되면서, 대중적인 공감대가 점차 약화되어가고 스타급 가수들이나 히트곡의 수명도 점차 짧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10대 청소년들의 관심사는 주로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 2000년대와 201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소위 “1세대, 2세대 아이돌”에 집중되어 있는 경향이 있으며, 그 외에도 “한류스타”, “월드스타” 등의 키워드에 관심사가 집중되는 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청소년 팬층은 특정 스타를 지지하는 “아이돌 팬덤”은 상당한 결집력을 보이는 반면에 나머지 대중들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경향도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는 같은 10대 청소년 팬들 중에서도 이들 아이돌 가수와 팬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드러내는 안티 분위기가 만만치 않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20~30대 청년층에게는 1990년대 당시의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빅3”가 여전히 가요계의 대표적인 전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들 “90년대 빅3”와 함께 20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누렸던 조성모까지 포함한 빅4가 여전히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는 가요계의 최강자로 인식되고 있고,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신세대의 영웅 4인방”도 기존의 “기성세대”에 해당하는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어르신 세대들에게는 외면을 받는 뚜렷한 한계점도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층 어르신 세대들에게는 역시 과거의 “트로트 국민가수”들이 거의 절대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 사람들은 10년만 지나도 엄청난 세대차이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의 “기성세대”에 해당하는 어르신들의 시대에는 세대차이가 오늘날처럼 극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1930~50년대에 사랑받았던 “국민가수”와 “국민가요”들이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르신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꾸준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를 마감하고 201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의 시점에서 40대 이상의 연령대를 차지하는 중장년층의 “기성세대”는 주로 1960~80년대의 가요계의 팬문화를 향유했던 세대의 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을 좀더 세분화해서 나눌 경우에는 “7080 추억세대”와 “어르신 세대”로서 나뉘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 “기성세대”들에게는 여전히 이미자, 패티김, 최희준, 배호, 남진, 나훈아, 하춘화, 조용필 등으로 대표되는 국민가수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들보다 더 이전 시대에 활동했던 “원로급 국민가수”들의 존재감 역시 여전히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 가요계 팬문화의 주도권이 “신세대”에게로 넘어간 이후에도 이들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송대관, 태진아로 대표되는 트로트 가수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신세대”와는 별도의 영역에서 한 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
[ 물론 가요팬들 중에서 “기성세대”에 속하는 연령대의 팬들은 “조용필”과 함께 그 이전에 전설적인 국민가수로 군림했던 나훈아, 남진, 이미자, 패티김, 현인, 남인수, 백년설 등의 선배가수들을 최고로 인정하고 “조용필 이후”에 등장한 가수들은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신세대”에 속하는 연령대의 팬들은 “조용필”까지는 비교적 잘 알고 있지만 그 이전의 전설적인 선배가수들에 대해서는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상 “조용필”이라는 공통분모를 경계선으로 해서 “기성세대”와 “신세대”가 확연하게 양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날의 “신세대” 가요팬에게 옛날 트로트 가수들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현상 자체는 불가피한 현상이고,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 조용필이라는 최고의 전설이 있었다”는 사실과 “조용필 이전에도 전설적인 국민가수들의 존재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듯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세대” 가요팬에게는 당연히 “조용필” 이후에 해당하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가수들에 대해서 관심도가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용필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후배가수들 중에서 최고의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 있는 가수들을 꼽는다면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태진아, 송대관, 조성모... 정도의 가수들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한편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불리는 세대의 가요 팬들의 정서가 이질적인 현상을 보이는 요인으로서는 대중가요 시장이 지나치게 10대 청소년 위주로 편중되고 연령층이 높을수록 대중가요 팬덤문화에서 소외되는 현상을 보이며 대중가요의 판도 자체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1990년대->2000년대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1960년대~1980년대까지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세대인 어르신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5인방의 존재가 대한민국 가요계의 상징 그 자체로서 보편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4인방은 나이가 좀더 어린 신세대 팬들에게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존경의 대상이 될 만큼 가요계의 전설 중의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로는 가요계의 팬문화가 주로 10대~30대의 젊은층에게만 편중된 “그들만의 리그”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을 아우르지 못한 채, 중장년층에서는 별도로 “성인가요”라는 문화를 향유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르신 세대의 대부분이 조용필 이후로 등장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의 가수들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1990년대~2000년대의 대중가요에 익숙한 세대인 소위 “신세대”에게 있어서도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90년대 빅3”의 존재는 젊은층에게 있어서는 가요계의 중심인물이라는 공감대가 보편적으로 형성돼 있지만, 오늘날의 아이돌 가수들에 대한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신세대”라 불리는 젊은층 중에서도 10대 청소년 세대에게만 지나치게 편중된 “아이돌 팬덤”이 가요계 팬문화를 주도적으로 향유하고, 20~30대의 청년층마저도 가요시장에서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그들만의 리그”로서의 성격이 더욱 극단적으로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성세대에게 있어서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로 대표되는 5인방이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로서 남녀노소,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폭넓은 지지와 공감대를 얻었고,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그러한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의 맥은 완전히 끊겼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에 활동한 가수들이 “선배 레전드”에 해당하는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조용필의 아성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기성세대”라 불리는 어르신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세대에게 있어서는 비록 “전국민의 사랑을 받는 국민가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로 대표되는 3인방이 “확실한 빅3이자 젊은이들의 영웅”이라는 인식 자체는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반면에 2000년대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아이돌 가수들은 “90년대 전설”에 해당하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의 아성을 결코 넘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인식이 “신세대”라 불리는 세대의 가요팬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신세대 내부에서조차 10대 위주로 지나치게 편중된 팬덤문화가 향유되고 있고, 심지어는 10대 청소년 내부에서조차 “아이돌에 대한 안티” 분위기가 만만치 않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수의 대중들에게는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가요계를 주름잡고 있는 아이돌 가수들에 대한 인식은 “남녀노소를 총망라한 전국민의 영웅”은 커녕, “젊은이들의 영웅”으로서도 한참 부족하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
{{ 연재를 마무리하며 }}
지난 20세기의 한국 대중가요사를 편의상 몇 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경우, 대략 3~4개 정도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은 "광복 이전"과 "광복 이후"로 나누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고, "광복 이후"의 가요계는 다시 1960~80년대를 풍미했던 세대를 "기성세대"로 분류하기도 하고, 또는 좀더 세분화해서 "7080"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추억세대의 문화를 공통적으로 향유하기도 합니다.
1990년대 가요계의 팬문화를 향유했던 팬들은 본래 "신세대" 또는 "X세대"라는 키워드로 상징되며, "기성세대"와는 대척점에 있는 세대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 와서는 기존의 "7080세대"와 함께 "X세대"(90년대)까지 "추억세대"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7080"이라는 키워드 역시 좀더 포괄적인 개념을 함축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 20세기의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설로 추앙받는 인물로서는 역시 "가왕" 조용필의 이름이 첫손에 꼽히고 있습니다. 물론 조용필 이전에도 윤심덕, 이애리수, 고복수, 채규엽, 강홍식, 왕수복, 선우일선, 이난영, 장세정,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현인, 이미자, 패티김, 최희준, 배호, 윤복희, 남진, 나훈아, 하춘화, 김추자, 신중현, 송창식, 양희은 등의 수많은 전설들이 존재해왔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시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조용필 이전"의 가요계는 주로 "흑백 자료화면"의 이미지가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경향이 있는 데 비해서, "컬러TV 시대"가 도래한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조용필 시대"는 "컬러 자료화면"이 주로 사용됨으로 인해서,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그렇게까지 까마득한 옛날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고 좀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조용필 시대"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은 남녀노소 모든 세대의 대중의 정서를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국민가수"의 명맥은 끊겼다는 것이 대다수의 가요팬들의 공통적인 인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국민가수의 명맥이 끊기고, 가요계의 판도 자체도 더 이상 절대강자의 1인독주 시대 자체가 불가능한 시스템으로 변모하기는 했지만, 특정 세대를 대표하는 영웅들은 나름대로 존재해 왔습니다.
"조용필 시대"를 기준점으로 삼았을 때, 조용필과 동시대인 1980년대를 풍미했던 인물로서는 전영록, 이용, 김수철, 이문세 등이 있었고, "조용필 이후"라 할 수 있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서는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조성모, 보아(BOA), 비(RAIN)등이 "신세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군림해왔습니다. 한편 트로트의 명맥을 꾸준히 지켜왔던 주현미, 현철, 송대관, 태진아 등은 여전히 "기성세대"의 정서를 대변하는 인물로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일단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서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포괄적으로 통틀었을 때,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모두 아우르는 절대강자의 계보는 조용필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다는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공통적인 인식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의 시점에서 "신세대", 즉 젊은 세대의 가요팬들만으로 범위를 한정했을 때는 그래도 서태지를 필두로 해서 신승훈, 김건모 등으로 대표되는 "X세대"의 대표주자들이 존재해왔습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아이돌 그룹들의 군웅할거 체제가 이어지면서, 10대와 20대의 청소년, 청년층으로 범위를 한정시켰을 때마저도 서태지 이후의 계보를 이을 "신세대 대표주자"의 존재감이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 대다수 가요팬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2012년 10월 현재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믿을 수 없는 일대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싸이(PSY)라는 새로운 슈퍼스타가 등장하면서, 한국 대중가요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기록들을 수립하고 있습니다. 싸이(PSY)는 "강남스타일"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서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는 "월드스타"의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싸이(PSY)의 "강남스타일"은 2012년 10월 1일에 아시아 가수로서는 최초로 영국의 "UK 음악차트" 1위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이어서 전세계 음악팬들이 주목하는 차트인 미국의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도 7주 연속 2위를 기록하는 등 정상 등극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시아 가수가 빌보드 차트 1위에 등극한 것은 1963년 일본의 "사카모토 큐 - 스키야키" 이후로 "싸이(PSY) - 강남스타일" 역대 두번째로 1위 등극을 노리고 있습니다. 한편 2012년의 "강남스타일 열풍"은 1996년의 "마카레나 열풍"과 종종 비교대상으로 거론되고 있기도 합니다.
2012년 10월 4일에는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싸이의 무료콘서트가 개최되었고, 수만명의 인파가 몰리며 지하철의 막차시간마저 연장시킬 정도의 성황을 이뤘습니다. 특히 싸이(PSY)가 빌보드 차트에서 거둔 성과는 올림픽 금메달 20개의 가치와 맞먹는다는 찬사가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싸이(PSY)는 신세대에게만 인기 있는 가수에 머무르지 않고, 기성세대에게도 주목과 호응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조용필 이후로는 두번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남녀노소를 모두 아우른 국민가수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서 일부 가요팬들 사이에서는 "조용필 vs 싸이"의 비교구도를 설정하는 글들이 온라인상에 종종 올라오면서 갑론을박의 설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마치 야구팬들이 "선동열 vs 박찬호"의 비교구도를 설정해서 설전을 벌이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국보 vs 월드스타"의 비교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물론 벌써부터 싸이(PSY)를 조용필과 비교하거나, 또는 그 이전의 전설들과의 비교구도를 설정하면서 우열을 가리려 하는 움직임은 다소 성급한 측면이 있고, 어느 정도 오버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중가요 팬들이 21세기 들어서는 결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국민가수"가 마침내 등장했고, 그 주인공이 싸이(PSY)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싸이(PSY)는 K-POP을 대표하는 "국민가수"이자 "국제가수"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연재한 "한국 대중가요 역사"는 지난 20세기의 "광복 이전"에서부터 “1960~90년대", 그리고 21세기 초반에 접어든 2000년대까지의 가요계 판도의 흐름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싸이(PSY)라는 가수는 2000년대부터 활동해오기는 했지만, 그의 전성기는 2010년대에 접어든 2012년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 때문에 2000년대를 끝으로 연재가 잠정적으로 마무리된 "한국 대중가요 역사" 시리즈에서는 싸이(PSY)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기존에 작성했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해서 20세기를 위주로 서술했습니다. 싸이(PSY)의 활약상과 그 밖의 K-POP의 새로운 흐름 등에 대해서는 추후에 2010년대 가요계의 역사를 정리할 때 좀더 자세하게 언급할 계획입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 원문 작성자 => JOHN CENA
** 원문 작성 날짜 => 2012년 10월 21일
** 원문 출처 => http://johncena07.blog.me/70149593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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