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사체(秋史體)에 대하여
자료제공;교육학박사 임채호
1, 정의(定意)
영조시대(英祖時代)를 절정기(絶頂期)로 난만(爛漫)하게 꽃피웠던 진
경 문화(眞景 文化)는 그 사상적 기반(思想的 基盤)인 조선 성리학(朝
鮮 性理學)이 말폐(末弊)를 노정(露呈)하며 조락(凋落)해가자 그와 함
께 쇠퇴(衰退)해 갔고, 이에 대체(代替)할 신사상(新思想)으로 청조고
증학(淸朝考證學)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집권층(執權層)의 연소신
예(年少新銳)한 자제(子弟)들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함
정조대(正祖代)에 북학(北學)이 서서히 뿌리를 내려가면서 서예(書藝
)도 정조(正祖)의 돈실원후(惇實圓厚)ㆍ졸박무교(拙樸無巧)의 취향(趣
向)에 따라 전ㆍ예서(篆隸書)나 안진경체(顔眞卿體)가 유행(流行)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진경 문화(眞景 文化)를 주도(主導)했던 노론
(
老論) 핵심 가문(核心 家門)의 학예전통(學藝傳統)을 가학(家學)
으로 이어받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는 안진
경체(顔眞卿體)와 한(漢)나라 예서체(隸書體)를 바탕으로 진경시
대(眞景時代)의 여러 서체(書體)를 아우르는 한편, 청(淸)나라
로부터 참신(斬新)한 비학 이론(碑學理論)을 수용(受容)하여 독창
적(獨創的)이고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서체(書體)를 창출하였
는데, 이를 일컬어 ‘추사체(秋史體)’라 하는 것임
2, 추사(秋史)의 서예론(書藝論)
추사(秋史) 서예론(書藝論)의 뿌리는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추사(秋史)는 중국(中國)을 다녀온 후, 당시 청(淸)나라 학예계(學藝
界)를 휩쓸고 있던 운대 완원(芸臺 阮元 : 1764~1849)의 유명(有名)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금과옥조(金科
玉條)로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북파(北派)를 지지(支持)한 추사(秋
)는 고졸(古拙)하고 준경한 멋을 추구(追求)하여 북파(北派)의 전통
(傳統)을 지켜온 구양순(歐陽詢)에 경도(傾倒)되면서 남파(南派)의
조종격(祖宗格)인 왕희지(王羲之)의 법첩(法帖)을 모본(模本)으로
삼던 종래(從來)의 글씨를 배격(排擊)하게 되었는데, 다음은 ‘남북서
파론(南北書派論)’의 내용(內容)임글씨 쓰는 법(法)이 변천(變遷)되어 그 흐름이
마구 변하였으니 그 근원(根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옛날의
올바른 법(法)으
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대개 예서(隸書)로부터 시작하여 정서(正
書 : 楷書)와 행서(行書), 그리고 초서(草書)가 되었는데, 글씨가 이렇
게 바뀜은 모두 한말(漢末)과 위(魏)ㆍ진(晋) 사이에 있었음.
그리고 정서(正書 : 楷書)와 행서(行書)ㆍ초서(草書)로 나뉘었던 것이
다시 남북 양파(南北兩派)가 되었으니, 곧 남조(南朝 : 동진(東晋)과
양(梁))의 글씨를 남파(南派)라 하고, 위(魏)ㆍ수(隋)의 글씨를 북파(北
派)라 한다. 남파(南派)는 종요(鍾繇)ㆍ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
之)로부터 우세남(虞世南)에 이르렀고, 북파(北派)는 종요(鍾繇)ㆍ삭
정(索靖) 등으로부터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楮遂良)에 이르렀다.
.……
남파(南派)는 글씨에 강남(江南)의 풍류(風流)가 있어서 소탈(疎脫)ㆍ
분
방(奔放)하며 곱고 미묘(微妙)하여 장계(狀啓)나 서독(書牘)을 쓰
는 데 뛰어났고……북파(北派)는 중원(中原)의 전통(傳統)인 옛 법칙
(法則)을 지켜 내려온 것으로 구속(拘束)하듯 고졸(古拙)하여 비문(碑文)
과
방문(榜文)을 쓰는 데 뛰어났다.……
이와 같이 양파(兩派)가 판연(判然)하게 다른 것은 양자강(揚子江)과
황하(黃河)가 다른 것과 같아서 남북(南北)의 세족(世族)들은 서로 통
하여 익히지 않았다.
3, 추사체(秋史體)에 대한 일반인(一般人)들의 인식수준(認識水
準) 추사체(秋史體)는 대단히 개성적(個性的)인 글씨로 일반적(一般
的)인 아름다움, 평범(平凡)하고 교과서적(敎科書的)인 미감(美感)에
익숙 사람이라면 추사(秋史)의 글씨에서 차라리 괴이(怪異)함과 당혹
감(當惑感)을 느끼는 것이 정상(正常)인데, 그런데 바로 그 괴이(怪異)
함이 추사(秋史)의 예술적(藝術的) 개성(個性)이자 높은 경지(境地)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며, 또한 우리는 흔히 한마디로 ‘추사체(秋史
體)’라고 쉽게 말하지만, 추사체(秋史體)의 실체(實體)는 매우 다양(多
樣)하여 과연 어떤 글씨를 ‘추사체(秋史體)’라고 할 수 있는지 한 마디
로 정의(定意)내리기는 무척 힘들다
추사(秋史)는 정통적(正統的)인 순미(純美)ㆍ우미(優美)가 아니라 반
대(反對)로 추(醜), 미학 용어(美學 用語)로 말해서 미적 범주(美的 範
疇)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追求)했는데, 즉 파격(破格)의 아름다움,
개성(個性)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秋史體)의 본질(本質)
이자 매력(魅力)이라 할 수 있음
4, 추사체(秋史體)의 미적 특질(美的 特質)
제주(濟州)로 간 이후(以後)의 글씨는 추사(秋史)가 평소에 주장(主張)
하던 청고고아(淸古高雅)한 서풍(書風)이 일변(一變)하여 기굴분방(奇
崛奔放)한 자태(姿態)를 보이기 시작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는
데, 전통적(傳統的)인 글씨가 의관(衣冠)을 단정(端整)히 차린 도학군
자道學君子)같다면 추사(秋史)의 글씨는 예절(禮節)과 형식(形式)을
무시(無視)한 장난꾼처럼 보였을 것이지만, 이것이 곧 추사(秋史)의 희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感情)이 그대로 붓을 통해 표현(表現)된
것이자 붓을 잡았을 때의 추사(秋史)의 개성(個性)이 그대로 살아 있
었던 것임
추사(秋史)의 작품(作品)은 점(點)과 획(劃)의 운용(運用)이 강철(鋼
鐵) 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空間 布置)에 대한 구상(構想)은 모
두
다 평범(平凡)을 초월(超越)한 창의력(創意力)이 넘쳐 그대로 현대
회화(現代 繪畫)와 공통(共通)되는 조형미(造形美)를 갖추었으니 이
는 과거(過去)의 어느 작가(作家)도 시도(試圖)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
지(境地)임
5, 동양 서예사(東洋 書藝史)에서의 추사체(秋史體)의 위치(位置)
‘
조선시대(朝鮮時代)의 4대 명필(四大 名筆)’로는 안평대군 <安平大
君 李瑢 :1418(태종 18)∼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왕족·서예가. 전
주이씨(全州李氏). 이름은 용(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
堂)·낭간거사(琅玕居士)·매죽헌(梅竹軒). 세종의 셋째아들이다>
,
봉래 양사언(蓬萊楊士彦 : 1517~1584), 석봉 한호(石峰 韓濩 : 1543~
1605),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를 꼽고 있고,또 ‘우리
나라 4대 명필(四大 名筆)’로는 신라(新羅)의 김생(金生 : 711~791?))
ㆍ
고려(高麗)의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70~1159)
ㆍ
조선(朝鮮) 전기(前期)의 안평대군(安平大君)ㆍ조선(朝鮮) 후기(後期)
의 김정희(金正喜)를 꼽고 있으며,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
생(金生)’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만 남고, 그러면 한 명만 꼽으
라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라 할 수 있음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서 추사(秋史)의 업적(業績)은 낡은 법첩
(法帖)을 따르는 매너리즘(Mannerism)과 향토색(鄕土色)에 젖어있던
어딘지 촌티나는 조선(朝鮮)의 글씨를 비문(碑文) 글씨의 고졸(古拙)
하고 준경한 기품(氣品)을 간직한 개성적(個性的)인 서체(書體)로 구
현(具顯)하여 국제적 감각(國際的 感覺)의 신풍(新風)을 일으켰다는
점임
중국(中國)의 서예(書藝)가 ‘진상운 당상법 송상의 원명상태(晋尙韻
唐尙法 宋尙意 元明尙態)’라는 논리(論理)를 인정(認定)할 때, 이를
청(淸)나라에 적용(適用)해보면 청(淸)나라 사람은 학(學)을 숭상(崇
尙)했고, 그들이 지향(志向)한 글씨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이며 개성
(個性)으로서의 괴(怪), 즉 고전(古典)에 입각(立脚)한 근대정신(近代
精神)의 감성적 표현(感性的 表現)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청
대(淸代)의 서예(書藝)를 대표(代表)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中
國)에서 입고(入古)가 강한 이는 출신(出新)이 약했고, 출신(出新)이
강한 이는입고(入古)가 약해 진정(眞正)한 입고출신(入古出新)의 개
성적(個性的)인 글씨,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서예가(書藝家)가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조선(朝鮮)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만이 완벽
(完璧)한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서예가(書藝家)였음
따라서 동양 서예사(東洋 書藝史)의 대맥(大脈)에서 말한다면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에는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가 있고, 당
(唐)나라에는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楮遂良)이 있고, 송(宋)나라에
는 소동파(蘇東坡 : 1036~1101)ㆍ미불(米芾)이 있고, 원(元)나라에
조맹부(趙孟頫)가 있고 명(明)나라에 동기창(董其昌)이 있다면 청(淸)
나라에는 완당 김정희(阮堂 金正喜)가 있는 것임
6. 추사(秋史)의 생애(生涯)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예당, 시암, 과파,
노과이며,1786년(정조 10) 충남 예산에서 이조판서 김노경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필로 알려져 두각을 나타냄.1809년(순조 9)생원시에 합격
1819년(순조 19)문과에 급제한 후, 충청암행어사, 예조참의,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837년(헌종 3)에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반대파의 중상모략에
의해 1840년(헌종 6)부터 1852년(철종 3)까지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 등으로
귀양살이를 전전하다 풀려났으며 1856년(철종 7) 과천에서 생을 마감함.
☀추사의 작품문집 -- 완당집저서 -- 금석과안록, 완당척독, 실사구시설 등,
그림 -- 묵죽도, 묵란도, 세한도, 영영백운도 등.글씨 -- 침계, 유애도서대련
도사무백발서면, 화법서세대련 등이 있음☀추사의 평추사는 여러 분야의
학문을 두루 섭렵함으로서 그의 학문의 경지는 넓고, 깊고, 높았음.그는 시와
그림, 글씨 등의 예술세계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특히 서예는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를 대성시킴으로서 서예 사상 최고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음.
7.조선시대(朝鮮時代)의 3대 서가(書家)
1.석봉(石峰) 한호(韓濩),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일컫는다. 한석봉은 개성 출생으로, 왕희지(王羲之)·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익혀 해(楷)·행(行)·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가평군수를 거쳐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洹谷縣令)·존숭도감서사관(尊崇都監書寫官)을 지냈다. 그 동안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사신을 맞을 때 연회석에 나가 정묘한 필치로 명성을 떨쳤다. 그의 필적으로 《석봉서법》《석봉천자문》 등이 모간(模刊)되었다. 작품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비문(碑文)은 많이 남아 있다. 글씨로 《허엽신도비(許曄神道碑)》(용인) 《서경덕신도비(徐敬德神道碑)》(개성) 《기자묘비(箕子廟碑)》(평양)《김광계비(金光啓碑)》(양주) 《행주승전비(幸州勝戰碑)》《선죽교비(善竹橋碑)》 《좌상유홍묘표(左相兪弘墓表)》 등이 있다.
2.양사언은 1546년(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평창군수(平昌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함흥부사 ·철원군수·회양(淮陽)군수를 지내는 등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 때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 8자를 새겼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3.김정희는 1819년(순조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24세 때 연경(燕京)에 가서 당대의 거유(巨儒)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유, 경학(經學)·금석학(金石學)·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서 ·화를 일치시킨 고답적인 이념 미를 고도로 구현한 청(淸)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하였다.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등이 있다.
8. 추사체의 이론적 체계완성을 기대
19세기 초 추사체(秋史體)의 등장은 한국 서예사 2000년에 있어 일대
사건이었다.추사체는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인 김정희(金正喜·1786
~1856)가 창안한 서체다. 선의 굵고 가늠, 묵(墨)의 연함과 진함,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모양 등이 조화롭게 엮여 글자 하
나하나에 구성미와 생동감을 주고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회화적 완성
감을 이룬다. 이것은 획과 선으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성에 의해 추상
화의 경지에까지 도달한 예술이었다.
그러나 이런 예술적 완성에만 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 명필
들의 서체를 추종해온 우리 2000년 서예사에 마침내 한국적 서체가
등장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겸재 정선(謙齋 鄭
敾)의 진경산수와 함께 중국 미술에 대한 우리 미술의 당당한 독자성
선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김정희는 소년 시절부터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박제가(朴齊家)에게 학문을 배우며 성장했고, 24세 때에는 사
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청국에 건너가 청의 문물을 접했다. 특히
당대의 석학으로 알려진 완원(阮元)·옹방강(翁方綱)·조강(曹江) 등과
교류하며 금석학(金石學)과 서화(書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내
는 등 금석학에서도 독보적인 존재였지만 역시 그의 가장 눈부신 업적
은 추사체의 완성이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고조선시대이므로 우리나라의 서예도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셈이다. 서예가 본격적으로 하나의 예술
분야로 등장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서성(書聖)으로까지 불리는 동진
의 왕희지(王羲之) 서체가 당시 문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이 시대 김
생(金生)의 글씨는 중국 송나라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고려시대를 거
쳐 조선시대 초엽까지는 원나라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가 유행했으
며 구양순(歐陽詢)체와 안진경(顔眞卿)체도 널리 쓰였다. 조선시대에
는 많은 명필이 나왔지만 그 중에서도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석봉 한
호(石峰 韓濩)가 이름을 떨쳤다. 이 중에서도 선조 때의 석봉체는 왕희
지체를 이어받아 궁궐 서식의 공식필체가 되면서 일세를 풍미했지만
외형미에 치우쳐 서법의 쇠퇴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조선
후기 영조 정조 대에 이르러 우리 것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진경 문화
의 영향에 따라 정선의 진경산수와 함께 서예에서도 우리 고유의 필체
가 시도됐다. 이광사(李匡師) 등이 시도한 동국진체(東國眞體)가 그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서체는
한마디로 모두 일방적인 중국 서법의 숭상 및 추종이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추사도 조선의 서예가들을 평해 ‘但以筆法 擧擬良可槪耳
(필법만 가지고 좋은 점을 모방할 뿐이니 개탄할 일)’라고 말하기도 했
다
.
결국 우리나라 글씨의 자주적 가능성과 의지가 확연히 싹트는 것은 19
세기 중엽 추사체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추사체는 실학의
정신에 청나라 선진문물을 결합한 데다, 끝없는 수련과 오랜 귀양살이
가 남긴 인간적 감정을 응집시켜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추
사체는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혼연일체의 빛을 발하며 그의 글씨가 단
순한 필법에 그치지 않고 지고한 예술경지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말대로 ‘가슴 속에 만 권의 서권기(書卷氣; 책을 읽은 기운)
를 담고 팔뚝아래 309비(碑)’를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추사의 영향
을 받은 권돈인(權敦仁)의 행서, 조광진(曺匡振)의 예서 등도 모두 우
수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제자로 허유(許維)·조희룡(趙熙龍) 등이 있었
으나 추사체의 정신을 체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해 결국 그를 능가하는
서예가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추사체의 깊은 연구를 통하여 이론적 체계완성을 추
구하여야 할 과제가 남아있는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 송정선생님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