說話
“호떡[餬餠)”이라 함은
거친 말과 섬세한 말이
모두 제일의제(第一義諦)로 돌아간다는 뜻인가?
마삼근(麻三斤)이나 해타고(解打鼓)와 같은 경우이다.
설두(雪竇)으 송에서
위 두 구절은 초월한 경계에 눈길을 돌리면
도리어 산만하게 벌어지기[難披] 때문에
운문이 호떡으로 쥐어지른 뒤
지금까지 아무도 어쩌지 못한다는 뜻이다.
또 위 두 구절은 제방(諸方)의 문답이요,
뒤의 두 구절은 말을 따라 갈팡질팡한다는 뜻이다.
투자(投子)의 송은 운문의 대용(大用)을 밝힌 것이다.
천복(薦福)의 송에서
“천황(天皇)이……”라 함은
용담(龍潭)이 본래 호떡집 아들이어서
날마다 다섯 개씩을 가지고 와서 천황에게 공양하니
천황이 받고는 한 개씩을 용담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므로 “용담은 한 개씩을 얻었다[用潭得一箇]”라고 하였다.
“3대(代)에……”라 함은
용담은 호떡을 덕산(德山)에게 주었고,
덕산은 설봉(雪峯)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아무도……한 이는 없다[無人]”라 함은
서로 전하고 서로 주는 불조를 추월한 구절을
아무도 자근자근 씹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始自]……낸 뒤로[來]”라 함은
운문에 이르러 토해낸 것은 대용을 일으킨 것이란 뜻이니,
이것으로 본다면 천황이
처음 법을 전한 것이 곧 재앙을 준 것이요,
복을 준 것이 아니란 말이 된다.
“당시[當時]……재앙의 근본[禍胎]”은
당시의 사람이 운문의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므로
재앙의 씨앗[禍胎]임을 면치 못했다는 내용이다.
또 전부터 서로 전하고 서로 준 경지가
흡사 그의 독약에 맞은 것 같으므로
“그 때의 병의 근본[當時病本]”이라 했다.
자명(慈明)의 송은
공양으로 준비한 호떡을 마음껏 먹는 경지가
문득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뛰어넘는 법을 선양(宣揚)한 것이란 뜻이다.
“호남에서[湖南]……”는
운문이 “발우를 받쳐들고 호남의 성 밑으로 가서…
…”라고 한 것과
장사(長沙)가 “쌀값은 싸고 땔나무는 흔하고
이웃 인심은 풍족하다.……”고 한 경지를 말한 것이며,
“신라(新羅)”는 해동(海東)에 있으니
역시 차별된 경지라는 뜻이다.
“대식(大食)”과 “파사(波斯)”는 서역(西域)에 있는
두 나라의 이름인데 “나룻배를 찾는다[索度船]”고 했으니,
이는 또한 동쪽과 서쪽에 모두 두 곳이 소식을 통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모두 두 곳이 있는 것 또한 뜻이 없지 않다.
정엄(淨嚴)의 송에서
“거칠고 굵다[麤魯]”함은
너절하다[麤魯]“함은 너절하다는 뜻이요,
”찍찍대는[啾啾]……천 균의 쇠뇌[均弩]“라 함은
중(中)ㆍ하(下) 근기의 사람이
운문의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은
귀한 사람의 경우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천동(天童)의 송은
운문이 마음에 사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진정(眞淨)의 송에서
처음부터 “화살이 신라를 지난 줄[箭過新羅]”까지는
이미 위에 나온 취암(翠巖)의 송과 같다.
숭승(崇勝)의 송은 그 뜻을 잘 모르겠다.
자수(慈受)의 송은 앞의 천복과 자맹의 뜻과 같다.
삽계(霅溪)의 송에서
“수미산 꼭대기[妙峯高頂]”는
부처와 조사를 초월한 경지요,
“노공이 갈 길을 일러 주었다[盧公指去程]”함은
운문의 호떡이다.
“호떡을 여태 먹고도[餬餠喫來]……”는
운문의 뜻을 깊이 알지 못했다는 말이요,
“……모르겠네[不知]……”라 함은 입을 댈 곳이 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