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생활하는 동포의 삶을 찾아서
색소폰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박영식씨
문화대혁명으로 좌절되었던 음악가의 꿈
40년 만에 다시 불게 된 색소폰 … 재한 중국동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색소폰으로 재한동포들의 마음을 한방에 녹여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흑룡강성 해림 출신의 박영식(66)씨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었지만,
1964년 해림중학교 악단에서 섹스폰 연주를 하게 되었지만, 다음해에 문화대학명이 일어나
학교도 못다니고 줄곧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그러다 1991년 12월
한국의 친척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되어 건설노동자로 한국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가 색소폰을 다시 잡게 된 것은 40년만이다. 1997년 연변에 있는 둘째 아들이
결혼을 하면서 아들로부터 섹스폰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중국돈 2천4백위안
정도 되는 색소폰을 아들로부터 선물로 받게 된 박영식 씨는 연길공원에서 취미삼아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에 다시 나와서는 색소폰 교습소를 2달 동안 다녔다.
한국에 와서는 색소폰을 불만한 장소를 찾다못해 마포대교, 서강대교 아래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색소폰을 불었다고 한다.
박영식씨의 색소폰 실력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9년 경 동포단체가 남한산성으로 야유회를 갔을 때이다. 섹스폰을 들고간 그는 동포들을 맘껏 즐겁게 해주었다.
낭낭18세, 개나리 처녀, 울고넘는 박달재, 유정천리 등 제목만 들어도 귀에 익은 노래들은 악보없이 불어제끼는 그의 색소폰 실력에 감탄이 나온다.
박영식씨는 말한다.
“중학교때 문화대혁명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음악가로 컸을텐데 …”
어릴 적 꿈을 나이 60이 넘어서 이루어간다.
이루지 못한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같아 기자에게도 기쁜 마음을 갖는다.
그에게 음악가로서 잠재적인 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아들에게 찾을 수 있는 것같다. 그의 둘째 아들은 연변대학교 예술대학을 나온 유명한 음악가라는 사실을 이번에 인터뷰를 하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한국에 재외동포(F-4)체류자격으로 있으면서 서울역 근처에 방을 마련하고 아내와 큰 아들, 며느리, 손자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어 힘든 일은 하기 힘들다. 그의 즐거움은 색소폰을 부는 것이고,
그런 그를 불러 색소폰 연주를 청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박영식씨는 음악을 하고, 악단을 조직해 활동을 하고 싶어도 연습실을 찾지 못해
애를 먹는다고 한다. 현재 박영식 씨와 같이 음악을 취미로 하는 동포들이 모여서
<아리랑예술단>을 조직해 각종 동포 단체 행사나, 생일잔치 등에 가서
음악 연주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김경록 기자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02호 2013년 10월 10일 발행 동포세계신문 제302호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