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을 끝까지 올려 켰는데도 땀이 줄줄 흐를 만큼 찜통 더위 속에 50k를 달려 나 홀로 '파주 삼릉'을 찾아갔어요. 파주는 20대 때 금촌으로 파마 액을 팔러 갔을 것이고 셋째 여동생이 고양에서 삽니다. 5년 전에 서울대 시험을 치려고 예주를 킨텍스까지 픽업해 줬고요. 중남미 문화원, 에스라 성경 대학교 대학원이 있는 고양엔 10년 이상 들락거렸습니다. 징역에서 만난 갑장 친구 박 0찬이 방장을 기억할 지 모르겠고요. 스포츠 형님들이 지들 나와바리라고 핏대를 세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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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은 공릉, 순릉, 영릉 세 개의 능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으로 사적 제205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유적지가 그렇듯이 릉도 피라미드나 진시황제 능을 제외 하고는 그 릉이 그 릉입니다. 그러니 역사성을 알고 보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어요. 필자가 역사 교사인 제수씨로부터 역사 탐방하는 방법을 귀동냥한 후(20대) 조국의 거의 모든 유적지를 방문하기 시작했고 후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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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광릉이나 장경왕후의 공릉이나 그냥 뫼 동입니다. 특이 점은 모두 요절한 어린아이들 묘라는 것입니다. 일반인은 아이가 죽으면 장례 절차 없이 옹기에 넣고 땅에 묻었는데 공릉은 조선 8대 왕인 예종의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 한 씨의 능입니다. 한 씨가 세자빈 신분으로 죽자 세조는 이듬해 ‘장순'이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성종 1년(1470년) 능호를 공릉이라 하고 1472년 한 씨를 장순왕후로 추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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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씨가 세자빈인 상태로 세상을 떠났기에 세자빈 묘로 간략히 조영하여 봉분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으며, 일반적으로 왕릉에 세워지는 망주석도 생략된 상태입니다. 추존 이후에도 조영한 능에 더 이상의 상설을 하지 않았어요. 순릉은 조선 9대 왕인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의 단릉입니다. 전체적인 모습은 공릉과 같지만 왕비의 능이기에 공릉에 비해 석물이 많아요. 장순왕후와 공혜왕후 둘 다 한명회의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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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것은 조선왕조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로 당시 한명회의 권세가 얼마나 높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릉은 추존왕 진종과 왕비인 효순 왕후 조 씨의 합장릉입니다. 진종은 영조의 맏아들로 태어나 7세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영조 4년(1728년) 요절합니다. 영조는 그해 효장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효장세자 요절 후 영조는 40세가 넘어 얻은 둘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그가 사도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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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도세자가 폐세자가 되자 그의 맏아들인 왕세손을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 합니다. 그가 정조입니다.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영조의 유지를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능을 영릉이라 했습니다. 영릉은 진종이 세자의 신분으로 요절하고 훗날 추존되었기 때문에 능 또한 세자 묘의 형태로 조영되었다가 훗날 왕릉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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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 아버지의 언어(한명회/김효석)에 익숙해지는 것은 속는 것이다. 물론 속지 않는 자들은 방황한다. 그러나 비록 방황할지라도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라. 타자들의 언어로만 이루어진 나는 타자일 뿐이다.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자를 지워야 한다. 타자의 언어를 지워낸 공백에서 나만의 것을 세워라(라깡)" 멋지지 않습니까?
2024.6.11.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