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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아(왼쪽)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 대표가 지난달 17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 일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무료 식사를 나눠주고 있다. 권현구 기자
지난달 17일 낮 12시 서울 관악구 대학동의 한 골목길. 이케아 로고가 새겨진 파란색 장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작은 가게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퍼가 반쯤 열린 가방을 멘 남성부터 파란색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까지 삼삼오오 줄을 섰다.
파란색 장바구니는 사단법인 길벗사랑공동체가 운영하는 식사 나눔 모임 ‘해피인’이 지역 저소득층에게 나눠준 것이다. 장바구니를 가져오면 일주일에 두 번 무료 도시락을 받을 수 있다. 이날 메뉴는 콩나물 비빔밥. 흰 쌀밥에 채 썬 당근과 호박·콩나물·간장 양념을 넣은 단출한 구성이지만, 150여명이 몰려들어 1시간 만에 동이 났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독거 중장년 남성이 대다수다. 월세 15만~20만원 고시원·원룸에 살며 하루에도 여러 번 허기를 느끼는 이들이다. 해피인은 식사를 통해 이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떡볶이 가게로 쓰였던 19㎡(6평) 남짓한 상가를 임차한 뒤 혼자 사는 저소득 중장년에게 밥을 줬다. 그러다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도시락을 나눠주게 됐다.
최근에는 여성과 젊은 층까지 줄을 선다. 코로나 이후 갈수록 팍팍해지는 형편에 한 끼 식사조차 어려워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애초 20~30명 수준이던 식사 인원은 50명, 70명, 100명, 160명으로 점점 늘었다. 박보아 해피인 대표는 “밥 먹고 도란도란 얘기하던 공간에 사람들이 밀려왔다”며 “코로나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거나 당뇨 등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취약계층에 무료 식사를 나눠주는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의 한 관계자가 지난달 17일 주방을 청소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해피인은 천주교를 기반으로 한 비영리 민간단체다. 정부 예산 지원은 전혀 없다. 지난해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도시빈민사목회가 지원한 1500만원으로 겨우 버텼다. 올해는 이마저도 끊겼다. 도시락 하나에 드는 돈은 2000~3000원. 자원봉사자 5~7명이 가정용 2구짜리 가스레인지 하나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든다. 성인 2명 서 있기도 힘든 주방은 여름이면 가스레인지 열기와 압력밥솥에서 나온 김으로 찜통이 된다.
박 대표는 “20~30명 밥 짓던 주방에서 160명분을 하려니 힘에 부친다”며 “여태까진 후원을 받아 어찌어찌 기적적으로 운영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식사 사각지대'의 사람들
정부는 수십년간 저소득층 식생활 지원에 복지 예산을 투입했다. 1990년대 저소득층 어린이·노인을 위한 무료 급식을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 식사 배달, 식품 구매권 등으로 지원 형태를 확대했다. 보건복지부와 지방자치단체는 기초생활보장수급자·한부모가족·노인 등 취약계층에 한해 희망 급식 바우처(식품 구매권)와 무료 급식, 양곡(나라미), 도시락 배달 등의 식사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실직·질병으로 갑작스럽게 위기에 처한 경우 긴급 생활 자금을 지원한다.
하지만 해피인을 찾는 대다수는 이런 식사 지원 정책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월 50만원 안팎의 수급비를 받는다 해도 월세·의료비 등으로 돈이 줄줄 새어나간다. 조리 시설이 없는 고시원·원룸에서 영양을 고려한 ‘집밥’을 차려 먹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인근 ‘고시 식당’에서 파는 3000원 안팎의 식사로 배를 채우는 것이 최선이다.
90대 독거노인이 살던 경기도 한 아파트 내부를 촬영한 사진. 정부 양곡(나라미)과 진료비 영수증 등이 놓여있다. 아시아문화원·박민구 작가 제공
무료급식 현장에서 만난 20대 여성 A씨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데 코로나 4단계로 아르바이트가 취소돼 일시적으로 도시락을 받고 있다”며 “주방이 없는 원룸에 살아서 요리를 못하고 전자레인지에 즉석식품이나 햇반을 데워 먹는다”고 말했다.
‘식사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고 있다. 지난달 8일엔 집이 경매로 넘어간 뒤 차 안에서 먹고 자던 56세 남성이 서울 노원구 외딴 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9일 뒤 서울 양천구에선 당뇨와 알코올 중독을 앓는 50대 남성이 열흘 넘게 식사를 하지 못하고 신음하다 지역 복지 공무원에 의해 구조됐다.
전용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코로나 사태로 자영업자 폐업과 실직이 늘어나고, 가족 해체로 인해 독거 가구와 고독사가 늘고 있다”며 “이런 사람들을 ‘개인의 일이니 알아서 해결하라’고 방치할 경우 더 큰 사회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3500원에 묶인 밥값
제도권의 ‘식사 지원’ 대상에 포함됐다고 해서 형편이 크게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느껴지는 밥상의 온도는 여전히 차갑다. 정부는 지자체에, 지자체는 종교단체·사회복지관 등 비영리 민간단체에 실질적 운영을 떠넘기는 구조다. 지자체별 재정 형편에 따라 한 끼에 책정되는 예산도 제각각이다.
저소득 어르신 식사 지원 사업은 2005년 중앙 정부에서 지방 정부로 이양됐다. 서울시의 어르신 한 끼 식사 예산은 3500원. 설·추석 등 연 7회 특식비는 4000원이다. 대구시는 도시락 한 끼에 3000원, 주 1회 밑반찬이 6000원이다. 전 교수는 “그나마 재정자립도가 높은 서울이나 광역시가 이 정도 수준”이라며 “고령 인구는 많고 재정 여건은 안 좋은 지방은 훨씬 더 열악하다”고 말했다.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이 지난달 5일 취약계층 어르신에게 나눠준 대체식 사진. 권현구 기자
한 끼 3500원은 복지시설 형편에 따라 다른 가치를 가진다. 조리 인력 인건비가 별도로 지원되고 조리 설비가 어느 정도 갖춰진 시립노인복지관 등은 이 금액으로 일정 수준의 식사를 제공할 수 있다. 3500원이 대부분 식자재에 투입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복지관·민간단체는 3500원으로 식재료와 인건비, 운영비 등을 모두 충당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일회용 포장 용기 비용마저 3500원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이런 곳은 무료 봉사자와 노인 일자리 근로자 등의 손을 빌려 근근이 사업을 꾸려나간다. 서울 한 복지관의 경우 대면 식사를 하면 발열 체크와 배식, 식사 보조까지 15명 정도가 필요한데 이런 일을 모두 무료 봉사자가 한다.
서울시는 올해 50명 이상 식사를 지원하는 기관에 영양사 1명 인건비(월 176만원)를, 300명 이상은 조리 보조원 1명(월 142만원) 인건비를 지원하고 있지만, 다른 지자체의 경우 이마저도 부족한 곳이 많다. 서울의 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영양사로 근무하는 B씨는 “인건비, 전기요금 등을 감안하면 식자재에 쓸 수 있는 돈은 3500원의 60~65% 수준”이라며 “식사 인원이 적거나 시설이 열악한 곳은 운영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시 복지시설 관계자는 “지금 물가를 고려하면 3500원으로 어르신에게 제대로 된 밥상을 드리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실무진이) 예산을 올려도 자꾸 위에서 잘린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에게 제발 3500원짜리 식사 한번 드셔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자원봉사자나 노인 일자리로 머릿수를 채우는 데 급급한 상황”이라며 “식사 지원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도록 인력·환경 개선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 노인이 지난달 5일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에서 받은 대체식을 보여주고 있다. 권현구 기자
2020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27.8%는 영양 섭취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독거노인(45.3%)과 85세 이상 고령 노인(42.3%), 가구 소득 하위 20% 노인(38.1%)의 영양 상태는 더욱 좋지 않았다. 서울 강북의 한 사회복지관에서 주 2회 식사 지원을 받는 이원이(가명·73) 할머니는 “도시락 받아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조금씩 꺼내 먹는다”며 “배가 고파서 쩔쩔매지는 않지만 (나처럼) 없는 사람들 조금만 더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고 말했다.
식사 지원 대상에 속하지 못해 발을 구르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소득 하위 20% 노인 가운데 경로(무료) 식당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 비율은 15.3%, 밑반찬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은 6.2%였다. 서울의 한 사회복지관 관계자는 “자리가 나려면 기존 등록된 어르신 중 1명이 이사를 가시거나 돌아가셔야 하는 구조”라며 “대기자가 많으면 자리가 안 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식사 수요는 많고 공급은 부족한 상황에서 복지 수요자들은 ‘을’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식사의 질을 따지는 일이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곤 한다. 전 교수는 “저소득 노인에게 무료 식당이나 도시락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며 “식사 서비스의 양과 질에 불만이 있더라도 부정적인 의견을 표현하기 어렵다. 체념하며 적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영양 고민할 여력 없어"
기존의 식사 수요도 충족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사각지대 지원은 언감생심이다. 복지 전문가들은 고령 인구로 분류되지 않는 50, 60대 저소득 독거 가구와 장애인을 식사 지원의 주요 사각지대로 분석한다. 하지만 정부나 지자체의 인식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지난달 17일 서울 관악구 대학동에 위치한 길벗사랑공동체 해피인 앞에 무료 식사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권현구 기자
무료 급식을 제공하는 한 비영리단체 관계자는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 ‘1인 가구 특별 대책 추진단’이 꾸려지며 공무원들이 우르르 찾아왔었다”며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길래 ‘중장년 독거 가구에 대한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그런 소리를 처음 들었다고 하더라. 돌아간 뒤에도 따로 연락은 없었다”고 말했다.
식사 지원 대상자에 대한 맞춤형 관리도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로선 질병이나 체질에 따라 식단 관리가 필요한 고령층에도 천편일률적인 메뉴가 제공될 수밖에 없다. 김정현 서울시복지재단 정책연구실 연구위원은 “어린이는 발달 단계에서 필요한 영양소가 공통적이지만, 어르신들은 질병이 다 다르다”며 “한정된 인원으로 (식사를) 많이 준비하려니 영양 관리가 많이 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고령층 가운데 음식을 씹거나 쉽게 삼키지 못하는 분이 많다”며 “이런 점을 감안한 고령층 친화 식단이 필요하지만, 현장에선 이런 것을 고민할 여력이 없다”고 했다.
지난달 5일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을 찾은 한 취약계층 어르신이 대체식을 받고 귀가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코로나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저소득층 식사 지원은 ‘밥만 주는 수준’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식사를 통해 지역 사회의 취약 계층을 보듬는 연결망이 흔들리는 것이다. 김지연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 과장은 “열악한 식생활에 코로나로 인해 외부 활동까지 제약을 받는 어르신들이 우울감을 더 심하게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영양사 C씨는 “형편이 어려워서 냉장고가 없는 어르신도 많은데, 나눠드린 도시락이나 대체식을 잘 보관하고 계실지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마을 식당’ 모델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윤지현 서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저소득층에게 식사 지원은 단순히 먹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마을 식당이나 공유 부엌 등의 시설을 활용하면 청년층과 어르신의 식사 문제를 개선하고 지역 공동체도 회복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슈&탐사2팀 권기석 양민철 방극렬 권민지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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