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 글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어 이곳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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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눈치 보는 대한민국이 불쌍하다”
추방 위기 중국 반체제인사 쉬보의 3년 체한기
[출처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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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한 시인은 대한민국을 ‘겨울공화국’이라 읊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민주화의 봄이 시작됐다. 평화적
정권교체도 이뤄졌다. 그러나 ‘우리만의’ 민주화였다.
우리 사회엔 한국이 민주화됐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있다. 한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세계 각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이다.
중국 민주화운동가 쉬보도 그 중 한 사람.
그는 ‘PRIDE OF ASIA’를 전세계에 자랑스럽게 펼쳐보인 대한민국을 ‘거절(refusal)공화국’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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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엔 ‘아홉수’가 있다고들 한다. ‘9’로 끝나는 해마다 큰 일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우선 1949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을 선포한
해로, 현 중국정부로선 기억하고 싶은 추억의 해다. 반면 그 이후 아홉으로 끝나는 해는 잊고 싶은 악몽의 날들일 것이다.
1959년은 ‘대약진운동’이 절정에 달한 해다.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주장에 따라 농촌을 인
민공사로 재편한 이 운동이 실패로 귀결되고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최소한 20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은, 중국 현대사의 비극적 장면 중
하나다.
1969년은 홍위병을 앞세워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문화대혁명’이 절정에 달한 해다. 1979년은 당시 29세
의 공원(工員)이던 웨이징성(魏京生)의 반(反)공산당 격문으로 유명한 ‘베이징(北京)의 봄’ 민주화운동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1989년엔 중국 공산당을 집권 이래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있었다.
이와 같은 ‘아홉수’의 싹을 잘라내고 싶었던 것일까. 1999년을 한 달 앞둔 1998년 11월30일 중국정부는 쉬원리(徐文立), 왕유차이(王有才),
천융민(秦永敏) 등 민주화운동가 10여 명을 일시에 체포구금했다. 쉬, 왕, 천은 이른바 ‘조당(組黨) 인사’로 1998년 6월 중국 최초의 야당인
‘중국민주당’을 결성,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인물들이다.
이들에겐 구금 이후 가족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고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재판을 치러 11∼13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국가전복
기도 및 국가기밀누설죄.’ 재판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으며 시종 삼엄한 경비속에서 취재진의 접근도 허용되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 중 쉬원리는 ‘체제전복세력’ 중국민주당의 주석(主席)으로 발표됐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수괴(首魁)’인 셈이다. 그
래서 쉬원리의 집은 체포 열흘 전 특별히 압수수색을 당했다. 중국민주당 관련문서는 물론 다수의 공산주의 비판 서적이 발각됐다. 구속
을 각오한 쉬원리는 압수된 문건에 적힌 사람들에 대한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전화와 인편을 통해 “빨리 몸을 피하라”는 메시지를 전달
했다.
‘홍색 파쇼’의 저자, 쉬보
쉬원리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사람 가운데 당시 37세의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쉬보(徐波). 그는 가택수색이 있기 며칠 전 쉬원리에게 자신
이 쓴 책의 원고를 맡겼다. 책 제목은 ‘홍색 파쇼(紅色法書斯).’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중국 공산당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쉬원리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책에 이름이 쓰여 있지만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동안 중국을 떠나라”고 했다. 책 내용으로
볼 때 10년형은 족히 받을 것이라며 “당신은 젊으니 해외로 나가 중국의 인권상황을 세계에 알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1998년 11월20일경
이었다.
쉬보는 곧장 여권 발급신청을 했다. 중국에서 여권이 나오는 시간은 신청 후 대략 한 달 정도. 그동안 공안당국의 수사망은 좁혀질 것이다.
하루 빨리 여권이 나와야 할 텐데…. 40일이 지나도 여권이 나오지 않자 혹시 당국에서 자신을 이미 파악한 게 아닌가 걱정됐지만, 해를
넘겨 1999년 1월10일 기다리던 여권이 나왔다. 여권을 받자마자 급하게 짐을 챙긴 쉬보는 홍콩(香港)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에겐 잠깐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홍콩행 비행기 안에서 쉬보는 생각했다. 어느 나라로 갈까?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게 중국의 인권상황을 알리면서 해외에서 중국 민주
화운동을 전개하기에 유리하다. 더구나 미국엔 중국 민주화운동의 대부(代父) 웨이징성 선생이 있다.
1979년 베이징의 봄 사건 이후 18년간 복역한 웨이징성은 현재 미국에 망명해 ‘해외중국민주연합(Overseas Chi nese Democracy
Coalition, OCDC)’을 이끌고 있다. 유럽에도 민주화운동을 하다 망명한 사람이 많고, OCDC 지부도 몇 곳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은 비자를 얻기 어렵다. 일단 제3국으로 가 망명을 신청한 다음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
럽으로 갈 발판이 될 제3국으로 어디가 좋을까? 망명신청을 잘 받아들이는 나라여야 한다. 문득 호주가 난민 인정에 관대하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호주로 가자.
홍콩에 도착한 후 호주로 가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중국은 여행 법규상 개인의 독자적인 해외여행이 까다롭다. 집단으로 여행하는 팀에
끼어 해외로 나가는 게 수월하다. 10명이 채워져야 1개 팀이 된다. 그런데 이틀을 기다려도 호주 여행단은 10명이 채워지지 않았다. 거리
에서 공안원을 보면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잡혀갈 판에 인원이 채워지길 기다린다는 게 무모
해 보였다. 더구나 계절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중국을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로 갈 것인가?’
그때 쉬보의 눈에 띈 것이 한국으로 떠나는 여행단이었다. 여행사 깃발을 앞세우고 노란색 모자를 똑같이 쓴 모습이 활기차 보였다.
한국! 쉬보의 머릿속에 한국에 대한 영상이 흘러갔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박해받고 쫓기듯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민주화운동을 계
속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 위에 반세기 만에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까지 이뤄낸 나라! 반세기
동안 공산주의 국가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이 투철한 나라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한국이다!
공항 내 여행사에 한국 여행 신청을 했다. 한국 여행단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인원이 채워졌다. 쉬보는 망설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
다.
1999년 1월27일 쉬보의 중국 집은 가택수색을 당했다. 쉬원리의 집에서 발견된 불온서적 ‘홍색 파쇼’의 저자를 드디어 찾아낸 것. 그러나
쉬보는 이미 한국에 있었다. 며칠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잡혀갈 뻔했다.
1월13일 쉬보는 김포공항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여행단에 끼어 서울 시내를 관광했다. 한국의 발전상은 역시 놀라웠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한밤중에도 환히 밝혀진 도시의 모습에서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기회를 봐서 대열을 빠져나와 망명 신청만 하면 된다
고 생각했다.
어렵게 택한 한국行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쉬보 1월15일 여행단은 88올림픽이 열렸던 잠실종합운동장을 찾았다. 사람들이 각자 사진
을 찍는 자유시간을 이용해 운동장 밖으로 나왔다. 미국대사관을 찾아가야겠는데 한국말을 한마디도 모르니 택시를 탄다 해도 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행인을 붙잡고 중국말을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았는지 화교(華僑)를 만날 수 있었고, 그가 택
시운전사에게 말해주어 미국대사관까지 갈 수 있었다. 이제 바라던 바의 90%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가 절망의 시작이었다.
“미국대사관에 가서도 한참 만에야 통역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과장급 정도로 보이는 사람에게 ‘나는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체포될
위험에 처해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 소개하며 미국으로 망명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망명은 대사관에서 하는 게 아니라
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로 가라고 했습니다. 좀 허탈했지만 ‘그것이 절차인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서울시 중구 정동의 UNHCR 한국사무소를 찾았다. 다짜고짜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담당직원은 “
UNHCR은 세계 난민을 보호·지원하는 기구이긴 하지만 특정 국가로 망명을 보내줄 수는 없다”며 “한국정부에 먼저 망명신청을 하라”고
했다. 여기저기 떠넘겨지는 기분이었지만 담당직원이 한국정부에 망명신청하는 절차를 자세히 가르쳐 줘 며칠 후 서류를 준비해 출입국
관리소를 찾아갔다.
거부된 난민인정신청
출입국관리소 담당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먼저 한국에 어떻게 왔는지부터 물어봤다. 여행단에 끼어서 왔다고 하니 살짝 웃
으며 중국에선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사실대로 자동차부품판매상을 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혹시 생계가 어려웠느냐, 불법취업을
하면 실정법에 어긋난다는 등 엉뚱한 말을 했다. 장사하는 사람이 무슨 민주화운동이냐고 무시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일단 서류는 접수하겠지만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한번도 난민을 인정해본 적이 없다”며 담당직원은 돌아섰다. ‘지금까지 한번도’란 말에
앞이 캄캄해졌다. 혹시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민주화운동을 했고 망명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 난민
을 인정한 적이 없다니….
한국정부의 난민인정 절차는 길고도 지루했다. 1999년 2월8일자로 제출된 난민인정신청서가 ‘난민인정협의회’를 거쳐 통지가 오기까지 딱
2년이 걸렸다. 2001년 2월17일 대한민국 법무부장관에게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제야 됐구나’하는 부푼 기대에 열어본 서류봉투. 그러나
담겨있는 서류 상단엔 허가(acceptable)란 단어 대신 거절(refusal)이란 단어가 보였다. ‘난민인정불허통지서(Refusal notice on the
recognition of refugee status)’였다.
‘귀하의 난민인정신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사유로 난민인정을 하지 아니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유-신청인이 작성했다고
주장하는 원고(原稿)가 발송되었는지, 서문립(쉬원리)이 그것을 수령했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원고가 정부에 의해 실제로 몰수되었
는지를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청인이 박해받을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신청인의 난민인정신청 사유는 난민협약 제1조에 규정
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히 근거 있는 공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없음.’
이에 대한 쉬보의 반론은 이렇다. 먼저 법무부가 의심하는 것은 책으로 출판하려 한 ‘홍색 파쇼’의 원고가 정말로 쉬원리에게 전달됐는지
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쉬보는 “쉬원리 선생은 감옥에 있으니 확인해줄 수 없어도 쉬원리 선생의 부인은 내가 책을 전달할
때 옆에 있었으니 증언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난민인정 담당직원에게 쉬원리 선생의 집 전화번호도 가르쳐줬다. 한번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홍색 파쇼’가 쉬원리에게 전달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쉬원리 집에 대한 압수수색과정에 몰수됐는지 증명할 방도가 없다는 부분.
쉬보는 “1999년 1월27일 우리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걸 보면 ‘홍색 파쇼’가 중국당국의 손에 들어간 건 확실하지 않으냐”고 말한다.
법무부는 일개 자동차부품판매상이 무슨 민주화운동을 했겠느냐고 하지만, “그렇다면 일개 자동차부품판매상의 집을 무엇 때문에 수색했
겠느냐”고 쉬보는 반문한다. 그는 “중국의 우리 집에 전화를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한국정부의 관리들은 책상에 앉아 서류만 살펴
볼 뿐 전혀 조사나 확인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법무부가 제시한 난민인정 불허사유의 다른 하나는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 이 부분
에서 쉬보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럼 본국으로 돌아가 공안당국에 끌려가야만 한국정부는 그때
좀 긴 글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어 이곳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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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눈치 보는 대한민국이 불쌍하다”
추방 위기 중국 반체제인사 쉬보의 3년 체한기
[출처 :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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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한 시인은 대한민국을 ‘겨울공화국’이라 읊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민주화의 봄이 시작됐다. 평화적
정권교체도 이뤄졌다. 그러나 ‘우리만의’ 민주화였다.
우리 사회엔 한국이 민주화됐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방인들이 있다. 한국으로 망명을 신청한 세계 각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이다.
중국 민주화운동가 쉬보도 그 중 한 사람.
그는 ‘PRIDE OF ASIA’를 전세계에 자랑스럽게 펼쳐보인 대한민국을 ‘거절(refusal)공화국’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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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엔 ‘아홉수’가 있다고들 한다. ‘9’로 끝나는 해마다 큰 일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우선 1949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을 선포한
해로, 현 중국정부로선 기억하고 싶은 추억의 해다. 반면 그 이후 아홉으로 끝나는 해는 잊고 싶은 악몽의 날들일 것이다.
1959년은 ‘대약진운동’이 절정에 달한 해다.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주장에 따라 농촌을 인
민공사로 재편한 이 운동이 실패로 귀결되고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최소한 20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은, 중국 현대사의 비극적 장면 중
하나다.
1969년은 홍위병을 앞세워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문화대혁명’이 절정에 달한 해다. 1979년은 당시 29세
의 공원(工員)이던 웨이징성(魏京生)의 반(反)공산당 격문으로 유명한 ‘베이징(北京)의 봄’ 민주화운동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1989년엔 중국 공산당을 집권 이래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있었다.
이와 같은 ‘아홉수’의 싹을 잘라내고 싶었던 것일까. 1999년을 한 달 앞둔 1998년 11월30일 중국정부는 쉬원리(徐文立), 왕유차이(王有才),
천융민(秦永敏) 등 민주화운동가 10여 명을 일시에 체포구금했다. 쉬, 왕, 천은 이른바 ‘조당(組黨) 인사’로 1998년 6월 중국 최초의 야당인
‘중국민주당’을 결성,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인물들이다.
이들에겐 구금 이후 가족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고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재판을 치러 11∼13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국가전복
기도 및 국가기밀누설죄.’ 재판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으며 시종 삼엄한 경비속에서 취재진의 접근도 허용되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 중 쉬원리는 ‘체제전복세력’ 중국민주당의 주석(主席)으로 발표됐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수괴(首魁)’인 셈이다. 그
래서 쉬원리의 집은 체포 열흘 전 특별히 압수수색을 당했다. 중국민주당 관련문서는 물론 다수의 공산주의 비판 서적이 발각됐다. 구속
을 각오한 쉬원리는 압수된 문건에 적힌 사람들에 대한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전화와 인편을 통해 “빨리 몸을 피하라”는 메시지를 전달
했다.
‘홍색 파쇼’의 저자, 쉬보
쉬원리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사람 가운데 당시 37세의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쉬보(徐波). 그는 가택수색이 있기 며칠 전 쉬원리에게 자신
이 쓴 책의 원고를 맡겼다. 책 제목은 ‘홍색 파쇼(紅色法書斯).’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중국 공산당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쉬원리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책에 이름이 쓰여 있지만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동안 중국을 떠나라”고 했다. 책 내용으로
볼 때 10년형은 족히 받을 것이라며 “당신은 젊으니 해외로 나가 중국의 인권상황을 세계에 알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1998년 11월20일경
이었다.
쉬보는 곧장 여권 발급신청을 했다. 중국에서 여권이 나오는 시간은 신청 후 대략 한 달 정도. 그동안 공안당국의 수사망은 좁혀질 것이다.
하루 빨리 여권이 나와야 할 텐데…. 40일이 지나도 여권이 나오지 않자 혹시 당국에서 자신을 이미 파악한 게 아닌가 걱정됐지만, 해를
넘겨 1999년 1월10일 기다리던 여권이 나왔다. 여권을 받자마자 급하게 짐을 챙긴 쉬보는 홍콩(香港)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에겐 잠깐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홍콩행 비행기 안에서 쉬보는 생각했다. 어느 나라로 갈까?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게 중국의 인권상황을 알리면서 해외에서 중국 민주
화운동을 전개하기에 유리하다. 더구나 미국엔 중국 민주화운동의 대부(代父) 웨이징성 선생이 있다.
1979년 베이징의 봄 사건 이후 18년간 복역한 웨이징성은 현재 미국에 망명해 ‘해외중국민주연합(Overseas Chi nese Democracy
Coalition, OCDC)’을 이끌고 있다. 유럽에도 민주화운동을 하다 망명한 사람이 많고, OCDC 지부도 몇 곳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은 비자를 얻기 어렵다. 일단 제3국으로 가 망명을 신청한 다음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
럽으로 갈 발판이 될 제3국으로 어디가 좋을까? 망명신청을 잘 받아들이는 나라여야 한다. 문득 호주가 난민 인정에 관대하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호주로 가자.
홍콩에 도착한 후 호주로 가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중국은 여행 법규상 개인의 독자적인 해외여행이 까다롭다. 집단으로 여행하는 팀에
끼어 해외로 나가는 게 수월하다. 10명이 채워져야 1개 팀이 된다. 그런데 이틀을 기다려도 호주 여행단은 10명이 채워지지 않았다. 거리
에서 공안원을 보면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잡혀갈 판에 인원이 채워지길 기다린다는 게 무모
해 보였다. 더구나 계절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중국을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로 갈 것인가?’
그때 쉬보의 눈에 띈 것이 한국으로 떠나는 여행단이었다. 여행사 깃발을 앞세우고 노란색 모자를 똑같이 쓴 모습이 활기차 보였다.
한국! 쉬보의 머릿속에 한국에 대한 영상이 흘러갔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박해받고 쫓기듯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민주화운동을 계
속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 위에 반세기 만에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까지 이뤄낸 나라! 반세기
동안 공산주의 국가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이 투철한 나라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한국이다!
공항 내 여행사에 한국 여행 신청을 했다. 한국 여행단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인원이 채워졌다. 쉬보는 망설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
다.
1999년 1월27일 쉬보의 중국 집은 가택수색을 당했다. 쉬원리의 집에서 발견된 불온서적 ‘홍색 파쇼’의 저자를 드디어 찾아낸 것. 그러나
쉬보는 이미 한국에 있었다. 며칠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잡혀갈 뻔했다.
1월13일 쉬보는 김포공항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여행단에 끼어 서울 시내를 관광했다. 한국의 발전상은 역시 놀라웠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한밤중에도 환히 밝혀진 도시의 모습에서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기회를 봐서 대열을 빠져나와 망명 신청만 하면 된다
고 생각했다.
어렵게 택한 한국行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쉬보 1월15일 여행단은 88올림픽이 열렸던 잠실종합운동장을 찾았다. 사람들이 각자 사진
을 찍는 자유시간을 이용해 운동장 밖으로 나왔다. 미국대사관을 찾아가야겠는데 한국말을 한마디도 모르니 택시를 탄다 해도 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행인을 붙잡고 중국말을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았는지 화교(華僑)를 만날 수 있었고, 그가 택
시운전사에게 말해주어 미국대사관까지 갈 수 있었다. 이제 바라던 바의 90%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가 절망의 시작이었다.
“미국대사관에 가서도 한참 만에야 통역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과장급 정도로 보이는 사람에게 ‘나는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체포될
위험에 처해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 소개하며 미국으로 망명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망명은 대사관에서 하는 게 아니라
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로 가라고 했습니다. 좀 허탈했지만 ‘그것이 절차인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서울시 중구 정동의 UNHCR 한국사무소를 찾았다. 다짜고짜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담당직원은 “
UNHCR은 세계 난민을 보호·지원하는 기구이긴 하지만 특정 국가로 망명을 보내줄 수는 없다”며 “한국정부에 먼저 망명신청을 하라”고
했다. 여기저기 떠넘겨지는 기분이었지만 담당직원이 한국정부에 망명신청하는 절차를 자세히 가르쳐 줘 며칠 후 서류를 준비해 출입국
관리소를 찾아갔다.
거부된 난민인정신청
출입국관리소 담당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먼저 한국에 어떻게 왔는지부터 물어봤다. 여행단에 끼어서 왔다고 하니 살짝 웃
으며 중국에선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사실대로 자동차부품판매상을 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혹시 생계가 어려웠느냐, 불법취업을
하면 실정법에 어긋난다는 등 엉뚱한 말을 했다. 장사하는 사람이 무슨 민주화운동이냐고 무시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일단 서류는 접수하겠지만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한번도 난민을 인정해본 적이 없다”며 담당직원은 돌아섰다. ‘지금까지 한번도’란 말에
앞이 캄캄해졌다. 혹시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민주화운동을 했고 망명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 난민
을 인정한 적이 없다니….
한국정부의 난민인정 절차는 길고도 지루했다. 1999년 2월8일자로 제출된 난민인정신청서가 ‘난민인정협의회’를 거쳐 통지가 오기까지 딱
2년이 걸렸다. 2001년 2월17일 대한민국 법무부장관에게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제야 됐구나’하는 부푼 기대에 열어본 서류봉투. 그러나
담겨있는 서류 상단엔 허가(acceptable)란 단어 대신 거절(refusal)이란 단어가 보였다. ‘난민인정불허통지서(Refusal notice on the
recognition of refugee status)’였다.
‘귀하의 난민인정신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사유로 난민인정을 하지 아니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유-신청인이 작성했다고
주장하는 원고(原稿)가 발송되었는지, 서문립(쉬원리)이 그것을 수령했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원고가 정부에 의해 실제로 몰수되었
는지를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청인이 박해받을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신청인의 난민인정신청 사유는 난민협약 제1조에 규정
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히 근거 있는 공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없음.’
이에 대한 쉬보의 반론은 이렇다. 먼저 법무부가 의심하는 것은 책으로 출판하려 한 ‘홍색 파쇼’의 원고가 정말로 쉬원리에게 전달됐는지
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쉬보는 “쉬원리 선생은 감옥에 있으니 확인해줄 수 없어도 쉬원리 선생의 부인은 내가 책을 전달할
때 옆에 있었으니 증언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난민인정 담당직원에게 쉬원리 선생의 집 전화번호도 가르쳐줬다. 한번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홍색 파쇼’가 쉬원리에게 전달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쉬원리 집에 대한 압수수색과정에 몰수됐는지 증명할 방도가 없다는 부분.
쉬보는 “1999년 1월27일 우리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걸 보면 ‘홍색 파쇼’가 중국당국의 손에 들어간 건 확실하지 않으냐”고 말한다.
법무부는 일개 자동차부품판매상이 무슨 민주화운동을 했겠느냐고 하지만, “그렇다면 일개 자동차부품판매상의 집을 무엇 때문에 수색했
겠느냐”고 쉬보는 반문한다. 그는 “중국의 우리 집에 전화를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한국정부의 관리들은 책상에 앉아 서류만 살펴
볼 뿐 전혀 조사나 확인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법무부가 제시한 난민인정 불허사유의 다른 하나는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 이 부분
에서 쉬보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럼 본국으로 돌아가 공안당국에 끌려가야만 한국정부는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