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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23편 1절-3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기도: 추운 이 한 밤에 우리를 기억하여 주셔서 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굽어보시고 저희들 속에 아버지 하나님의 것과 같지 않은 것을 낱낱이 고쳐주시고 고침을 받고 돌아갈 수 있는 복된 저희들로 만들어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맞느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 자기 목자가 맞느냐?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마귀를 자기의 목자로 삼는 기독교인은 없다.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부족한 게 많다. 왜 부족한 게 많으냐? 부족한 게 많다면 하나님이 자기의 목자가 아니라는 말밖에 더 되느냐? 하나님은 인간 자기의 목자가 되어주려고 하시는데 인간 자기가 하나님을 내버린 건지, 하나님이 인간 자기를 보고 못 생겼다고 내버린 건지?
본문이 다윗의 시인데,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한 것이 다윗이 어느 면에 부족이 없다는 말인가? 육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영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인가? 진리성도 다윗이 어느 면을 채우기 위해서 어느 면에 자기의 만족도를 두고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았을까? 다윗이 어느 면에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은 것일까?
다윗이 다른 사람들처럼 인간 자기의 육신의 만족, 즉 세상 사람들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만족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다윗의 신앙이 육신적으로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는 건지, 아니면 영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삼는 건지? 어느 마음이냐? 영이냐, 육이냐? 영이다.
그러면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한 것이 하나님을 자기의 영적인 만족도로 삼으면 육적인 면에서도 부족이 없다는 말이냐? 육적인 면을 만족을 시켜주던 아니던 그것은 하나님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영적인 만족도로만 나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거짓된 교회는 육신의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 믿는 쪽으로 자꾸 몰고 간다.
그러면 세상으로 속화된 채 예수를 믿는다면 이 사람이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게 뭐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육신의 만족도를 찾아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이름으로 자기 육신의 만족도를 찾는다면 누가 더 저질적인 사람이 되는 거냐? 반대로 누가 더 솔직한 사람이냐? 육신의 만족도를 목적으로 하고 예수를 믿을 바에야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자기 노력 것 해서 육신의 만족도를 채우려는 하니 이것이 더 솔직하고 깨끗하다.
이걸 또 다른 면으로 돌려서 말을 하면 두 종류의 사람 중에 게으름뱅이가 누구냐? 안 믿는 사람은 자기 노력 것 해서 세상을 가지려고 하고, 세상 속화된 교인은 자기가 노력하는 것은 없고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으로 세상 것을 갖다달라는 것이니 누구의 마음이 더 시커먼 거냐? 믿는 사람이다. 이건 신앙양심이 틀려먹은 거다.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아라’ 라고 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치를 어기고 믿으니까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는 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은 영적인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인데, 이 말을 영적인 면에 만족함과 같이 육적인 면도 똑같이 만족하게 된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으로 살면 육적으로도 부자가 된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육신적으로 살면 영적인 면도 부자가 된다’ 하는 것과, ‘영적인 면으로 살면 육신적으로도 부자가 된다’ 하는 이 둘 중에 어느 게 맞느냐? ‘영적인 면으로 살면 육신도 부자가 된다’ 하는 이게 믿음으로 들리느냐, ‘육신 만족도로 살면 영적인 만족도도 이뤄진다’ 하는 이게 믿음으로 들리느냐? 앞의 것은 육 주격이고, 뒤에 말한 거는 영 주격이냐? ‘영적인 만족도를 위해 살면 육적인 만족도도 100% 이뤄진다’ 하는 것이 영의 생각이냐, 육의 생각이냐?
‘육신적으로 살면 영적인 면도 부자가 된다’ 하는 것과, ‘영적인 면으로 살면 육신적으로도 부자가 된다’ 하는 것과, 또 하나는 ‘영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육적인 만족도는 하나님이 알아서 덤으로 주시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게 맞느냐? 맨 나중의 말이 맞는다.
육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영적인 만족도에는 완전히 망한 거다. 한 마디로 말을 해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육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사는데, 그런다고 해서 영적인 면에서 채워지느냐? 전혀 없는 거다. 그리고 영적인 만족도를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 육적인 면에 만족도가 오기도 하고 안 오기도 하는 건데, 안 왔다고 해서 이 사람이 영적인 만족도가 불편스러우냐? 아니다. 정말 옳은 진리신앙의 노선에서 예수님을 바로 믿어나간다면 이 사람은 은혜를 받는 대로 세상의 근심 걱정은 다 물러가고 영적인 만족도로만 자꾸 채워진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는 거다.
이런 신앙은 점차적으로 희망이 있다. 이런 사람은 믿어갈수록 알고 깨닫는 면에서도 그 만족도가 자꾸 커진다. 그런데 예수님을 오랫동안 믿었다고 해도 사람인지라 세상염려 걱정 근심이 있을 수도 있는 건데, 그것도 잠깐이지 늘 그렇게 있으면 영적 만족도에 문제가 있는 거다. 이걸 스스로 진단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의 부자로 살아도, 아무리 잘 먹어도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마음이 만족하지 못하면 이 사람은 병이 들고 만다. 이렇게 되면 육적인 모든 것도 시루에 구멍이 난 것처럼 대 새버린다. 설령 몸에 병이 안 들었다고 할지라도 육적인 만족도의 갈급증을 자꾸 취하려고 하게 되니 그 마음속에는 이미 병이 커지고 있는 거다. 첫째는 정신적 병이 자꾸 커지고 있는 거고, 두 번째는 육신적인 병도 자꾸 물고 들어오게 되어있다. 그러니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으냐?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보면 다 자기가 어리석어서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스스로 병을 만들고,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가 자기 운명을 끝내는 거다. 세상 모든 인간이 그렇다. 그러니 남 탓할 게 없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사람이 짐승들보다도 더 미련하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영적인 면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육적인 면을 방편으로 쓰고 있다. 예수 믿는 자기를 영능의 실력자로 만들어 주려고 육신의 모든 보이는 것을 잡고 쓰고 계신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께서 왜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자기 몸 안팎으로 날마다 분초찰나마다 교체시키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육 주격으로 살면, 육의 만족도를 위해서 살면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저질이 돼버리기 때문에 왜 사건 환경을 교체시키는지를 못 깨닫는다.
사람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루 온 종일 테레비만 보고 있으면 볼 때는 깔깔거리며 재미가 있을 런지 모르겠지만 그 머리는 점점 저질이 돼버린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러나 틈나는 대로 성경을 보는 성도라면 그 머리는 자꾸 회전이 되어서 생각하는 모든 사고방식이 테레비만 보고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고상해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가 신앙하는 사고방식이 육이 잘 되는 목적이라면 이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거다. 그리고 자기의 육이 잘 되니까 ‘내가 믿음이 좋아서 육적으로 축복을 받는구나’ 이렇게 되어있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육이 잘 된 것이 곧 영이 잘 된 것으로 착각을 하는 거다. 큰 잘못이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물질적으로 부자인데 주님이 오셔서 성령의 일곱 눈을 가지고 볼 때는 헐벗고 눈이 멀었다고 했듯이 영적인 면에서 그런 상태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세상에서 부귀영광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세상 속화된 정신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이 사람은 성령의 일곱 눈을 가지고 볼 때 영적인 면에서 꽤꽤 마른 거다. 이런 사람은 첫째는 성경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게 영적인 면에서 마른 증거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이 영특하고 지혜롭고 총명해져야 하는데 이게 안 된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푸른 초장이 뭐냐? 풀이 자라는 넓은 들판이다. 정말 보기가 좋다. 양떼들이 푸른 초장을 만나면 원대로 만족하게 실컷 먹을 수 있다. 없어서 모자라서 못 먹는 일은 없다. 그러니까 양떼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행복할 것이다.
참 목자는 푸른 초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참 목자는 양떼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를 한다. 이게 참 목자다. 푸른 초장은 모자람이 없고 다함이 없는 곳이니 배가 큰 자나 작은 자나 자기 원대로 먹고 자기 배의 크기대로 먹을 수 있다. ‘왜 너만 많이 먹느냐?’ 하는 게 없다. 누가 말리지도 않고 누가 빼앗지도 않는다.
푸른 초장이란 진리와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참 인도자는 성도들의 마음을 진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고, 깨달음이 진리이치 쪽으로 깨닫게 한다. 그래서 성도들은 듣고 생각하는 것이 만족이다.
사람은 한 이치라도 깨닫는다면 그 마음에 기쁨이 있는 거다. ‘아, 예수는 이렇게 믿는 것이로구나’ 하고 기쁨이 충만한 거다. 그런데 ‘예수 믿어 부자된다’ 라고 설교를 한다면 이미 부자가 된 사람은 그 말을 먹을 필요가 없다. 가난한 사람만 먹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것을 먹으면 영혼이 만족인가? 아니다. 세상욕심만 자꾸 커진다.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부흥강사가 설교를 하면서 어느 분이 장사를 하는데 처음에는 자전거를 가지고 했는데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잘 내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셔서 자전거가 오토바이로 바뀌었고, 그래서 감사해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십의 2조를 내니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용달차를 사게 해 주셨고, 여기에서 또 십의 3조를 내니까 더 복을 많이 주셔서 큰 트럭을 한 대 샀고, 계속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십의 9조까지 냈다고 한다.
이렇게 하는 간증설교가 어디에 목적을 놓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거냐? 간단히 말해서 그런 간증설교를 하는 것은 육에 속한 말이냐, 영에 속한 말이냐? 육에 속한 말이다. 그런데 영에 속한 말인지, 육에 속한 말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그런 말이 듣기 좋다고 그저 ‘아멘’ 하고 있다. 이건 영인성장이 되는 면을 다 죽이는 거다. 거짓 목자는 양떼들을 어디로 인도를 하느냐? 우리가 참 목자만 알면 거짓 목자가 교인들을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빤히 알 수 있다.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잔뜩 먹여놓고 물가로 인도한다고 한다. 생명의 말씀, 살아있는 신실한 푸른 꼴을 먹고 나서 그 다음에 진리의 생수를 먹으니 갈증이 해소가 된다. 영혼의 배부름이 되었다면 ‘좀 더 먹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양떼들에게는 어디까지나 푸른 초장이다. 그런데 아무리 푸른 초장이라고 해도, 아무리 물이 맑은 시냇가라고 해도 그것을 안 먹겠다고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양이 있다면 그걸 못 먹는 거다. 성도가 애굽 건설, 세상 건설, 바벨론 건설, 종교적 건설이 목적이 돼버리면 굶어죽고 말라죽는 거다. 참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을 만나게 해주고, 쉴 수 있는 물가으로 인도해 준다.
이방세상과 종교적인 세상은 영혼의 안식처가 없다. 종교적인 세상, 종교적 사업을 크게 이루고자 하는 목적으로 나가면 영혼의 안식이 없다. 마음의 평안이 없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사망권 아래 놓여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의 안식처가 있을 수가 없는 거다.
성경에 주님 앞으로 오는 자는 짐이 풀려지고 가벼워진다고 했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이게 틀림이 없다. 짐을 많이 메고 있다는 게 뭐냐? 간단히 말해서 세상 것을 많이 메고 있다는 것인데, 세상 것을 많이 메고 있다는 것은 무엇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거냐? 세상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왜 세상에 속한 것을 짐처럼 둘러메고서 그것을 벗을 줄을 모를까? 뭐가 없어서 그럴까? 왜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느냐? 첫째는 그 소원 목적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물질이요, 그 이치가 자기 머리 위에 세상이라는 짐이 올라가서는 안 되는 거다. 세상물질은 자기 발밑에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발등상이다.’ 세상물질은 자기의 발밑에 있어야 사람이 뛰기도 하고 마음대로 활동을 하는 거지 머리에 짐을 이고 있으면 뭘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 짐을 내려놓는 거다. 이러면 가벼운 거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지혜지식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영특해서 세상을 다스려 나가게 된다. 환경을 다스려 나가고 세상을 다스려 나간다. 이러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이게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지혜가 없으면 짐을 지고서 무겁다고 하며 원망불평을 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짐을 지고 있다. 세상 속화된 교인들도 세상목적으로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자기 머리에 세상이라는 짐이 있다 이건 참으로 고달픈 거다. 예수를 믿는다면 이걸 내려놓아야 한다. 이 짐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못 먹고 사는 거냐? 아니다. 세상이라는 짐을 내려놓게 되면 사람이 더 활발하고 더 지혜롭고 바로 살아갈 수 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첫째는 기본은혜, 기본구원 면에서의 소생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으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의 영혼을 대형과 대행으로,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살렸다.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양성 결합으로 이루어진 십자가의 중보의 역사라야 만이 영혼을 소생시키는 거다. 영혼을 소생을 시킨 이것은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 속의 영혼을 우리 주님이 일차적으로 살린 거다. 다른 방법은 없다. 이렇게 죽었던 영을 살리는 것은 인간이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언제 살리던 살리는 거다.
그런데 구원파 사람들은 구원 얻은 날짜를 자꾸 말하는데 이건 이치적으로도 잘못된 거다. 세례요한이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 그 어머니가 예수님 집에 심방을 가니까 태속에 있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뛰놀았는데 이 때 세례요한이 중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태어난 후에 그 누군가가 막 태어난 세례요한에게 ‘네가 몇 년 몇 월 몇 시에 태어났느냐?’ 하고 묻는다면 어린 세례요한이 말을 해 주겠느냐?
우리의 중생도 마치 어린아이가 막 태어난 것과 같은 건데, 이제 막 중생한 사람에게 ‘네가 언제 중생했느냐?’ 하고 묻는다면 대답을 할 수 있겠느냐? 그럼에도 구원파 사람들은 이치도 안 맞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믿음의 길로 못 나가게 만든다.
‘네가 언제 구원 받았느냐?’ 하고 물어서 대답을 못하면 누가 그 사람을 구원을 시키겠다고 하느냐? 구원파 자기들이 구원을 시키겠다는 거다. 어떻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줘서 구원에 대한 감사로 눈물 콧물을 흘리면 그 때가 구원을 얻은 때라고 한다. 이렇게 돌아가면 이단이 되는 거다. 우리 주님이 하실 일을 인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말이 되느냐?
선악과 따먹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 인간의 영은 우리 주님만이 살리신다. 인간은 못 살린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 우리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더라도 어린 아이가 막 태어난 것과 같은 상태라서 그 당장은 자기의 영이 살아난 것을 모른다. 어린 아이가 얼마정도 자라서 ‘네 생일은 언제다’ 하고 가르쳐 주면 알게 되듯이 중생을 한 후에 말씀을 배우고 깨닫게 되면 자기가 구원 얻은 사실을 알게 되는 거다.
영혼을 소생시킨 기본구원 기본은혜는 누가 하신 거냐? 누가 살린 거냐? 주님이 살렸다. 이건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독권으로 역사한 거다. 오직 하나님의 역사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으면 그 다음에는 육신도 건강하게 자라고 아는 것도 자라듯이 영이 살아났으면 이제는 신앙 성장적인 면에서 이룰구원이 있다. 이걸 다른 말로는 성화구원이라고 한다. 즉 이룰구원 면에서의 소생이 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이란 누구의 이름이냐? 주님이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성도를 어느 길로 인도하느냐? 의의 길, 옳은 길로 인도를 한다. 옳은 교훈을 줘서 옳게 자라게 한다는 거다. 왜냐?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고 예수님이 명예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성도라도 의의 길로 가는 성도가 진짜 교회고,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진짜 주님의 교훈이고, 이렇게 나가는 것이 성령님이 역사를 하는 교회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가르침에는 주님이 얼굴이 있는 거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거다. 교회 인도자는 이걸 알아야 한다. 교인들을 잘못 가르쳐 놓으면 주님의 얼굴이 어떻게 되겠느냐? 마귀의 놀림감이 되는 거다. 그래서 교인들을 인본주의 세상주의로는 못 가르치는 거다.
한 생명이 귀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가 붙어있다. 이 말이 그냥 전도해서 교회에 데리고 온다는 의미만이 아니다. 지옥에 가면 한 생명만 있느냐? 많은 영혼들이 있다. 그러나 이건 귀하지 않다. 아합 왕 때 3년 6개월 동안 흉년이 와서 그 때 남자들이 많이 죽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도 눈도 깜짝 안 하신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려고 이스라엘의 뒤를 쫓아오는 이방군대들을 하나님께서 물속에 쳐박아서 고기밥을 만들어 버린다. 말하자면 그런 자들은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거다. ‘너희들이 짐승으로 살고자 하니 내가 너희들을 짐승취급을 해 주겠다’ 해서 무더기로 죽여 버리는 거다.
하나님은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거, 몇 백 명 몇 천 명이 죽어나가는 거 눈도 깜짝 안 하신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는 것을 그렇게 마음 아파하실까? 의인이 죽는 것, 하나님 앞에 옳게 바르게 사는 성도가 죽는 것을 하나님은 신경을 쓰고 그를 보호하고 인도를 하고 감찰을 하신다. ‘누가 그를 건드리나?’ 하고 천군천사들에게 비상을 걸어서 보호를 하신다.
자기가 아무렇게나 살고 싶으냐? 계:에 2억의 군대가 나오는데, 이 2억의 군대가 왜 있는 거냐? 이걸 시대적으로 푸는 사람은 군대들이 중국 쪽에서 유브라데강을 넘어서 쳐들어 올 것을 말하는 거라고 정치적인 논리로 말을 하겠지만 이걸 우리가 보도록 기록을 해 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도망가는 너 하나 때려잡으려고 2억의 군대를 동원시키는 거다. 이걸 알아야 한다. 바로 믿고 나가는 자에게는 온 만물이 자기의 충복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옆으로 나가는 자에게는 온 만물이 그에게 재앙으로 몰고 온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당신의 이름을 걸어놓고 진리성도를 인도하신다는 거다. 참 목자의 인도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나가게 되면 영혼의 소생이 되고, 이는 곧 성도의 생활에 신앙심으로 반영이 된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꼴로 잘 인도가 되면 그 성도는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에서 성장이 돼나가는 거다. 깨달음도 솟아나고, 영적인 감각 면도 민감해지고, 도덕성도 고상해지고, 성격 성질도 고쳐지고, 가치판단 평가성이 신령계에 내려지게 된다.
믿기 전에는 자기의 모든 가치판단 평가성이 이 세상에 내려졌지만 진리말씀을 바로 깨닫고 나면 죽음의 선 이후의 결과성에 자기의 계산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거다. 이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펀하겠느냐?
그러면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해서 못 사는 거냐? 아니다. 세상욕심을 부리는 사람치고 신경질적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신경질이 있는 사람치고 위장병이 없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러니까 ‘아, 이 사람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 장차 어떤 것이 자꾸 물고 들어오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거다.
진리와 성령의 감화성으로 사는 상태는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에, 즉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사람이라. 이 사람은 나그네 인생살이의 모든 것이 이룰구원으로 되어있으니 매사가 긍정적이고 헛된 삶을 살지 않게 된다. 이게 하나님 앞에 바로 걸어가는 사람이다. 성경으로 볼 때 우리 주님이 이렇게 걸어가셨고, 사도바울의 걸음걸이도 이렇게 걸어갔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기 직전에, 다시 말하면 죽음의 언덕에 서서 뒤를 쳐다보면서, 세상을 쳐다보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노라. 나를 위해서 생명의 면류관을 준비해 놨다’ 라고 한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가 죽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 과거적 자기를 쳐다봐라. 그리고 미래적으로도 쳐다봐라. 그래서 잘못된 것은 돌아보고 고치고, 고친 후에 또 뛰어가라.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거다. 그러지 않고 예수님으로 닮지도 못하고 날마다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는 없는 거다. (계속)
3-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23편 3절-4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이름’이란 누굴 말하는 거냐?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는 건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을 누가 나타내느냐? 예수님이 오셔서 누구를 나타냈느냐?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나타내는데 자기 백성들에게 나타낸다. 왜 나타내는 거냐? ‘너희들은 인간이지? 내가 너희를 만들었으니 꼼짝 말고 내 말만 들어라. 내 말을 안 들으면 번갯불로 태워버릴 테다’ 해서 번개도 치고 지진도 일으키는 거냐? 그러면 인간은 무서워서 ‘아이고, 예 예, 해 드리지요’ 하면서 양 잡아서 소 잡아서 바치는 거냐?
예수님은 가는 곳곳마다 그냥 말만 했느냐, 이적 기사도 일으켰느냐? 이적 기사도 일으켰다. 이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한단다’ 하는 것을 나타낸 거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고 여러 가지 하늘나라의 일을 나타내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본다. 하나님을 알아보는 눈, 하나님을 알아보는 마음 정신. 하나님을 알아본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아는 것이 올라간다는 거다. 누구처럼? 마귀처럼? 하나님처럼 올라가니 하나님을 알아본다 그 말이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 그대로 있으면 자기 부모를 알아보느냐, 점점 자라야 부모를 알아보느냐? 자라야 알아본다. 이치는 이와 같다.
그러면 이 예수님을 누가 나타낼까? 예수님의 집안 식구들이? 종교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우리교회 교인들은 누굴 나타내느냐? 예수님을 나타낸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생각과 마음과 정신과 도덕성이 올라가면 가는 곳곳마다에서 ‘아, 저 사람에게서 예수향기가 나는구나. 예수냄새가 나는구나’ 하게 된다. ‘사람이 말이 반듯하고 고차원적이고 비범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들어간다. 다른 사람이 믿는 나를 볼 때 ‘저 사람 진짜 예수쟁이다’ 라고 해야지 ‘예수 믿는 사람이 거짓말도 잘 하고 싸우기도 잘 한다’ 라고 한다면 나에게서 예수가 나타나겠느냐?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는 말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의 얼굴이 있다는 거냐? 예수님의 얼굴이 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사는 것이 자기 인생을 사는 게 아니다. 언행심사가 자기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다. 그러니까 ‘자기를 위하여’ 라는 말은 ‘예수님 당신은 올라가고 우리는 아래서 떠받들고’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치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높이 올라가려면 누구를 높이 올려야 하겠느냐? 성도 자기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는 말은 곧 ‘성도를 위하여’ 이게 들어있는 거다. 성도가 올라가야 예수님이 올라가는 거다.
예수 믿는 거는 이치를 보는 거다. ‘믿어라. 충성봉사 하라’가 아니다. 가령 궁극교회 목사가 올라가려면 목사가 교인들에게 고차원적인 교육을 해야 한다. 맨날 유치원 공부만 하면 안 된다.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몇 년이 흘렀는데도 유치원 교육만 하고 있다면 그 교회 교인들의 실력은, 신앙상태는 유치원 실력이 되는 거다. 머리를 쓰는 게, 사고방식이 유치원 수준이 되는 거다.
세상은 실력이다.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자꾸 씨름을 하며 풀다보니 한 문제 올라가고, 또 한 문제 올라가고 하는 거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는 세계도 마찬가지다. 안 믿는 사람들이 실력쟁취를 위해서 얼마나 힘을 쓰느냐? 이게 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다. ‘신앙 면에 앞서 거라’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에서 실력경쟁을 하는 걸 보여주는 거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먹고 입으면서 마음대로 살다가 오너라’ 이게 아니다.
우리로 영적인 면에서 실력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지? 이게 사람이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애당초 그렇게 되어있는 삶이다. 그래서 세상에 전쟁도 있고, 군인들이 훈련하는 장소도 있는 거다. 훈련을 하는데 먹고 입고 잠만 잔다면 적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이기고, 어떻게 부모형제를 지키고 자기 목숨도 살겠느냐?
성도가 주님처럼 만들어져서 존귀 영광스럽게 영광을 받을 때 주님의 마음도 기쁠까? 학생이 실력을 잘 닦아서 졸업식 날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을 때 그 학생은 물론이고 담임선생의 마음도 기쁜 거다. 그런 것처럼 성도의 실력이 올라가면 우리의 마음도 기쁘고 주님의 마음도 기쁜 거다. 이게 주님의 이름이 너에게 있는 거다. 너에게 주님의 얼굴이 있는 거다. 그러니 네가 예수 믿으면서 어떻게 자라야 되겠느냐? 아들이 존귀해지면, 아들이 영광자리에 오르면 아버지의 마음도 기쁜 이것이 인격적 연관관계성이다.
우리 학생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공부를 잘 해야 한다. 왜 잘 해야 하느냐? 자기 이름에 누구의 얼굴이 있느냐? 부모의 얼굴이 있고, 더 나아가서 주님이 얼굴이 있다. 그래서 공부하기 전에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공부 잘 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왜냐? 공부를 잘 해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는 주님의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공부를 하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냐?
‘자기 이름을 위하여’ 라는 말은 ‘성도들이야 죽건 말건 주님 당신만을 위하여’ 그런 뜻이 아니다. 이방 세상 사람들은 자기만을 위해달라는 사람이 많다. 거짓 종들은 세상을 위하라고 한다. 주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어느 길로 인도한다? 의의 길로 인도한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안 위하여’라면 성도를 어느 길로 인도하겠느냐? 악의 길로 인도를 한다. 그러니까 이걸 보면 주님과 성도와는 인격적으로 직결이 되어있구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는 이게 인격적 관계성적으로 직결이 되는 말이로구나. 다른 말로 하면 성도를 위하는 길은 어디로 인도가 되는 길이다? 의의 길로 인도가 되는 길이다. 그리고 의의 길로 인도가 되는 길은 누구를 위한 길이다? 주님을 위한 길이다. 주님이 성도를 의의 길로 인도하면 주님이 위해지고, 아울러 성도가 올라간다. 같이 올라간다.
그런데 거짓 종들의 세계에서는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어느 쪽으로 내모느냐 하면 충성봉사 하는 데로, 돈을 가지고 건물 높이 짓고 확장하는 그 면으로 들어간다. 이걸 알아야 한다. 이건 목사만 위하는 거다. 이러면 그 일을 하느라고 교인들만 죽어나는 거다. 이렇게 나가는 곳에서는 교회건물을 짓다가 돈이 없으면 집회를 해야 한다. 왜 집회를 하는 거냐? 의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집회를 하는 거냐, 교인들의 주머니를 짜내는 집회냐? 주머니를 짜내는 집회다. 이게 의의 길이냐?
우리가 일반세계나 신앙의 세계나 이치적으로 말을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옳은 일을 하라고 하기 전에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해야 한다. 사람이 옳은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그 사람에게 옳은 정신이 깃들고 옳은 마음이 깃드는 거다. 그러면 이 사람의 모든 언행심사가 옳은 일로 나온다. 따라서 옳은 사람으로,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먼저다. 이것이 의의 길로 가는 첩경이다.
선생이 되려면 평소에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아무나 붙잡고 가르치면 선생이 되는 거냐, 선생이라는 실력이 내적으로 되어있어야 되는 선생이 되는 거냐? 먼저 선생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사람이 의의 길로 가면서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이 사람이 가는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옳은 길로 가게 한다.
선악과 따먹은 일반세상에서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의의 교육이라든지 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있느냐 하면 전혀 없다. 아무리 학박사라도 없다. 이런 건 학문의 분야일 뿐이다. 일반세상에서는 의의 기준이 없다. 그런데 교회의 가르침이 설교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세상의 의를 가르치는 일도 있으니, 모든 성도는 ‘설교 속에 옳은 하나님의 기준이 있나, 없나?’ 하는 걸 구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걸 찾을 줄 아는 사람은 예수를 바로 믿는 사람이다. ‘예수 믿고 천당, 예수 믿고 복’ 하는 이게 의의 길이 아니라 그 말이다.
이방사람들이야 이방 신을 섬기니까 그들의 신의 힘을 빌려서 세상의 복을 구하는 거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 그러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 세상에 있는 거냐? 없다. 오직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다.
혹시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더라도 ‘아, 이건 인간 의를 세우고 있구나. 세상 의를 세우고 있구나’ 한다면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의의 기준은 없구나. 하나님의 의가 없구나. 그러면 결국은 세상을 주는 교회라는 말이 되는 거다. 이러면 그 교회에서는 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는 틀렸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일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인정해주는 의의 길로도 가지 못하는 거다. 의의 길은 오직 성경밖에 없다. 성경 속에 의의 길이 있다. 참 목자는 의의 길로 갈 수 있게 하고, 의로운 일을 할 줄 아는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지게 인도를 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우리 주님은 목자로서 이게 들어있다. 왜 주님을 참 목자로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오늘날 교회의 목사라는 자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어서 너희들도 나처럼 성도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라’ 하는 계시가 들어있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이치가 들어있는 교훈이 있어야 한다. ‘이게 의인지 악인지 선인지’ 하는 판단 구별이 들어가야 한다. ‘세상의 의가 뭔지, 하나님 앞에 의가 뭔지’ 구별이 들어가야 한다. 이런 걸 판단 구별 분별을 못하는 소경 상태라면 무슨 의로운 사람이 되겠느냐? 안 된다.
노아홍수가 일어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의인이라고 했느냐? 노아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당대에 의인이 누구라? 노아라. 왜 의인이냐? 사고방식, 생각, 정신, 마음이 세상으로 쏠리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붙들고 자기 마음을 닦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해서 나갔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데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 살았다. 그러나 노아는 옳은 정신, 옳은 마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설계해 주신대로 방주를 지었다. 이걸 지금 우리의 신앙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대로 신앙 믿음이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가니 그것이 자기를 구원한다 그 말이다. 이게 방주라. 자기를 살리는 구원이라. 옳은 진리지식, 옳은 진리이치, 지혜지식, 하나님의 신적인 도덕성이 자기의 구원이다. 그 실력이 자기가 어디를 가던 자기를 구원해 준다. 하나님의 것이 자기를 구원해 준다.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의로운 일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평이 나고 주님이 기뻐하신다. 그리고 주님이 기쁘니 나도 기쁘다. 세상에서 보면 나는 안 그렇지만 상대가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박장대소를 하며 웃으면 나도 그 웃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또 우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슬픈 일도 안 당했지만 나도 울음이 나온다. 왜 그럴까? 그 이치가 뭘까? 인간은 감염성이 있구나. 인간은 그런 존재다.
집안에서 부모의 얼굴이 환하고 기쁘면 자녀들도 그걸 보고 기분이 좋다. 그렇지 않고 부모가 흐린 날씨처럼 얼굴이 오그라져 있으면 자녀들도 눈치를 슬슬 보면서 기분이 이상해진다. 인간은 감염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기쁘니 상대방이 또 기쁘고, 이게 얼마나 좋으냐?
주님의 교육은 우리를 당신처럼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 아가페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처럼 주님은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다. 데리고 다니면서 사건 환경도 겪게 하고, 존재를 부딪치게 해서 자극이 되게 해서 주님 당신처럼 의롭게 만드는 일을 하신다.
자기에게 대립되는 일이 있느냐? ‘아, 주님이 나를 만들려고 하시는구나. 감사합니다’ 하면 원망불평의 마음이 없어진다. 상대방이 나에게 대립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아, 내 속에도 저런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자기를 쳐다보며 고치면 된다.
쉬운 예를 들면 자식이 부모의 말에 순종을 안 하면 부모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느냐? ‘너 이놈,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야 되겠다’ 라고 해야 되겠느냐? 하나님 앞에 의로운 생각을 가져야 의로운 부모가 되는 건데,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아, 내가 ‘신앙 신앙’ 하면서도 내 마음부터가 하나님 앞에 정착이 안 돼 있고 세상으로 돌고 있구나” 하고 부모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서 그 다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식에게 교육이 들어가야 한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뭘까? 산이 많은 곳은 해가 지면 산골짝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그러니까 신앙적으로 말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란 죽음의 그늘로 뒤덮인 골짜기를 말한다. 말하자면 죽은 자들이 많은 골짜기다. 죽어가는 자들이 많은 골짜기다. 사람이 이 골짜기로 한 번 굴렀다고 하면 살아나올 재간이 없다. 죽는 거다. 서서히 죽어가면서 필연적으로 죽는 거다.
골짜기에는 돌도 굴러 떨어지고, 비가 오면 사태가 나고, 홍수가 나고, 그래서 죽는 사고소식이 많은 곳이다. 골짜기는 계곡이고, 계곡은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어두컴컴한 음침한 골짜기다. 그런데 진리성도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라고 했는데, 다윗이 왜 죽음의 음산한 골짜기로 다니느냐?
이 말은 다윗이 그 골짜기로 다니고 싶어서 다닌다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 따먹고 저주받은 세상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한 거다. 이 세상은 사망의 골짜기다. 이방세상에서는 사는 것이라고는 없다. 이 세상은 죽은 곳이요 죽는 곳이다. 살아나는 법이 없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쪽으로 살아나는 것은 전혀 없다. 그래서 사망의 골짜기라고 표현을 하는 거다.
세상이라는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무서운 곳이다. 육으로 가려져서 잘 몰라서 그렇지 영의 눈으로 보면 더 무서운 곳이다. 눈으로 보이는 면에서도 악독한 세상이지만 영의 눈으로 볼 때 마귀나 거짓 종들에게 붙들려 갔다고 하면 그들에게 먹히는 거다. 신앙사상 정신적으로 이걸 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육신적으로 보는 것은 임시성이고 잠깐이다. 그런데 육신적으로 왜 보여주느냐 하면 영적인 면에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보이는 것만 자극이 되지 그걸 영적인 면으로 끌어들여서 영적으로는 별로 못 느끼고 있다. 이러면 믿음의 사람이 안 된다.
뱀의 혀가 무슨 색이냐? 검은 색이면서 혓바닥이 두 개로 갈라져 있다. 거짓말쟁이의 혓바닥은 뱀의 혀처럼 둘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면 하나로 보이지만 아니다. 둘이다.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둘로 보인다. 자기 혓바닥이 육신의 눈에 둘로 보인다면 기겁을 할 거다. 짐승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혀가 둘이라는 거다.
타락된 이 세상은 사단 마귀 귀신 등 악령류들이 날뛰는 곳이고, 그들의 사자인 거짓 종들이 사람을 미혹하고 유혹하여 자기들의 부귀와 명예와 영광을 위해 이용을 하다가 죽게 한다. 그 방편으로는 대립과 마찰과 충돌로 다가오기도 하고, 또는 호응적으로도 다가와서 사람을 못 쓰게 만들어 놓고 가버리기도 한다. 이게 다 뱀의 혓바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영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이 약속을 할 때 ‘그 약속을 지키리라’ 절대로 그렇게 보지 말아라. 지켜주면 고마운 거지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다. 왜냐? 네가 인간을 믿느냐? 의도적으로 안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는 지키려고 해도 사건 환경이 지킬 수 없게 돌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 사람들의 약속을 믿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네가 누구 말을 더 믿느냐?’ 하는 게 있는 거다. 인간이 아무리 철썩 같이 약속을 해도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서 홱 돌려버리면 그 약속은 깨져버린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우리는 육이 주격이 되어있는 사람의 약속을 쉽게 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예를 들면 계돈이 어느 날 나온다고 하며 찰떡 같이 약속을 해서 빌려줬는데 돈이 나온다고 한 날에 꼭 갚느냐? ‘계주가 도망을 갔다네’ 하게 되면 그걸 믿고 있던 내 쪽에서는 펄펄 뛰게 되는 일이 생긴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