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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과 수박지
김병우
연일 기록적인 불볕더위가 톱뉴스로 장식했다. 덥다 덥다고 해도 올해만큼 더운 적이 없었다며 이 찜통더위에 어떻게들 지냈느냐는 게 만나면 안부인사가 되었다. 노약자는 야외활동을 자제하고 물을 자주 마시기 바란다는 동사무소의 안내방송도 매일 듣다시피 했으며, 폭염경보 긴급재난문자 또한 국민안전처로부터 수차에 걸쳐서 받았다.
평소에 무릎 신경통으로 에어컨이나 선풍기바람을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번 더위 앞에는 별수 없이 낮 시간에는 에어컨을 컸다. 그러나 잘 때는 아무리 더워도 그냥 버티기로 했다. 에어컨을 켜놓은 채 잠이 들어 감기로 애를 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한 밤중에는 열대야로 뒤척거려야 했으며 등이 땀에 젖어 침대시트가 축축할 때가 많았다.
작년에 퇴직하고 백수처지가 되고 보니 이 더위를 피해서 딱히 갈 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니 직장으로 출근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집에서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시립도서관이었다. 그 더운 날에도 열람실 안은 시원했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고, 더위도 피하고 보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을 수가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나처럼 더위를 피해온 사람들로 평일에도 도서관은 붐볐다. 일거양득의 효과를 톡톡히 본 도서관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더위를 식히고 갈증을 달래는 데는 수박만한 게 또 있을까? 집근처 과일가게에 수박을 사러갔다. 수박이 한통도 없다. 가게주인의 말은 워낙 더운 날씨 탓에 밭작물들이 수확이 신통찮아서 수박이 들어오질 않는다고 했다. 하는 수없이 퇴근한 아내를 꼬드겨서 차를 몰고 대형마트를 찾아갔다.
다행히 과일코너에 수박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발길이 그쪽으로 먼저 향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눈을 의심케 하는 숫자에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고 그 앞을 서성였다. 가격표에는 삼 만원에서 백 원이 빠지는 이만구천구백원이라고 적혀있었다. 과연 이 돈을 주고 사 먹어야하나 갈등을 하고 서있는데 통이 큰 아내가 한방에 결론을 내려줬다. 먹고 싶으면 삼 만원이 아니라 오 만원이라도 사먹어야지 못 먹어서 병이나면 다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유난히 수박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한 아내의 배려가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수박에 얽힌 추억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식구가 많고 먹을거리가 귀할 때, 수박 한통을 깨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참으로 알뜰하게 나눠 먹었었다. 지금처럼 붉은 살이 묻어 있는 껍질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된다. 수박의 빨간 속살을 먼저 파내고, 바닥의 하얀 살까지 껍질이 흐늘흐늘할 정도로 숟가락으로 빡빡 긁어서 큰 양푼에 퍼 담는다. 얼음덩어리와 설탕을 넣어 국자로 휘저으면 먹기 좋게 골고루 잘 섞인 수박 별미가 되었다. 한 그릇씩 할당받은 몫을 다 먹고도 양이 차지 않아서 양푼바닥으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형제들의 숟가락이 부딪쳤다. 돌이켜보니 그래도 그때가 음식이 달고 맛이 좋았다. 가난했지만 정 때문이었으리라.
얼마 전 방영된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수박껍질의 영양가가 속살보다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옛날 생각도 나고 비싼 수박을 샀는데 알맹이만 먹고 껍데기를 그냥 버리기가 무엇 하던 차에 퍼뜩 수박껍질 장아찌가 생각이 났다. 그래 까짓 것 이번 기회에 한번 만들어보자. 나라고 못 하라는 법이 없지 않는가. 아내는 그걸 누가 먹겠냐며 제발 청승 그만 떨고 버리라고 하지만 이왕 마음먹은 것 밀어붙이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얻은 정보를 최대한 활용했다. 먼저 수박껍질을 사과 깎듯이 정성을 다해 깎아서 먹기 좋게 일정한 크기로 썰었다. 작은 김치 통에 그득 찰 정도로 양이 제법 나왔다. 간장과 설탕, 식초, 다시마, 매실엑기스, 버섯… 냉장고에 있는 걸 죄다 끌어 모아서 냄비에 넣고 물을 부어 팔팔 끓였다. 끓인 뜨거운 물을 수박 껍질이 담긴 통에 부었다.
실온에 이틀을 뒀더니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다시 그 물을 채에 걸러 받아서 한 번 더 끓였다. 이번에는 충분히 식혀서 통에 부어 냉장고에 넣었다. 그렇게 시작된 수박껍질 장아찌 담그는 작업은 며칠이 걸려 끝이 났다.
드디어 내 손으로 처음 담근 수박장아찌를 시식할 시간이 왔다. 주말 아침식사 때 내어놓기로 했다. 아내도 쉬는 날이라 느긋하게 늦잠에서 일어나 맛을 보여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드디어 식탁에 수박장아찌가 올려졌다. 이제 남은 건 맛이다. 긴장하며 수박지를 한입 물었다. 신기하게도 물컹거리지 않고 아싹아싹했다. 일단은 성공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맛도 달지도 짜지도 않고 괜찮았다. 식초 맛이 강하다는 것 외는 딱히 나무랄 데가 없는 합격점이었다. 아내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라는 반응이다. 올 겨울 김장김치는 당신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칭찬인지 조크인지 애매한 말을 던진다. 폭염 때문에 비싼 수박을 사 먹게 되었고 그 덕에 수박장아찌까지 만들어 봤으니… 올여름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수박껍질처럼 아무 쓸모없이 버려질 때가 있었다. 십여 년 전 인사과에 근무할 때다. 시샘과 부러움으로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높은 가지가 부러지기 쉽다는 이치를 그때는 몰랐다. 나름 법과 규정에 따라 엄격하게 일처리를 했었으니 마냥 승승장구할 줄로만 알았다. 오히려 그게 적을 만들었다. 세상인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급기야 모든 걸 버리고 스스로 강원도 오지로 떠나기로 작심했다. 주위에서는 다들 놀라며 말렸으나 이미 마음을 그렇게 결정하고 실천에 옮겼었다.
그곳에 6년 동안 살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하고자 무진장 애를 썼다. 그 방편의 하나로 선택한 게 불교였다.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 또한 있다고 했던가. 불교공부를 통하여 알게된 도반들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세상을 보는 혜안도 조금 생겼다.
수박껍질도 장아찌가 될 수 있듯이, 비우면 채워진다는 단순한 진리가 통한건지, 부처님의 가피가 작용한 건지, 승진도 하고 다시 전근무지로 인사발령이 났었다. 그때 그 결단이 아니었으면 강원도의 산천초목을 어찌 샅샅이 구경할 수 있었겠는가? 수박지의 맛이 바로 그런 맛이 아닐까. (2016. 9. 3)
첫댓글 우리 어릴적 먹던 수박이 생각납니다. 하얀 겉살까지 파내어 설탕도 귀한 시절에는 사카린을 넣어 단맛을 첨가 했던 그시절 온가족이 둘러 앉아먹던 그 수박 하얀부분이 영양적 가치가 더 많다고 요즈음 기사가 자주 나오더랍니다. 구름님께선 또 수박지 까지 만드는 요리법 으로 손수 만드셨다니 수박지가 먹고 싶네요. 쓰레기도 줄이고 영양도 챙기고 그야말로 일석이조 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힘든 세상사도 지난 후 되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폭염은 수박의 맛을 더욱 진하게 느끼게 하고, 수박껍질은 알뜰히 잘 활용하면 맛나는 수박지로 태워납니다.
수박껍질은 오이, 호박 못지않은 좋은 식재료로 생각하며, 앞으로 적극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에, 글을 통하여 조리법까지 잘 배우게 되었습니다. 수박과 수박지를 통하여 풀어간 여름과 인생이야기 참 잘 읽었습니다.
수박에 얽힌 이야기, 옛날을 생각하게 하는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 수박지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수박지라니? 무슨 연못명인 줄 알았는데 수박껍질 장아찌네요. 수박껍질 속에서 인생사를 논하는 경지가 대단합니다.
수박껍질 장아찌. 첨 들어봅니다. 지금까지는 껍질은 버리기만 했는데 이젠 장아찌를 만들어야겠습니다. 피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재미나고 진솔하며 생활의 지혜를 터득할수 있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올여름 폭염속에서 고가의 수박값과, 수박지 제조까지 그러다 가을이 찿아왔습니다. 불교에 인연등 제미있게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