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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페셜 –
조선 왕가 최초의 의문사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는가 ?
https://www.youtube.com/watch?v=_0bWWyjSenE&feature=emb_rel_end
KBS 한국사전 –
새로운 조선을 꿈꾸다, 소현세자빈 강씨 !
https://www.youtube.com/watch?v=pPsIwEx01Y8
소현세자(昭顯世子)
지위 |
왕세자(王世子) |
이름 |
휘 | 이왕 李汪 |
별호 | 호(號)는 산남(山南)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645년 5월 21일(1645-05-21) (33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환경당 |
능묘 | 경기도 고양 서삼릉 소경원 |
부친 | 인조 |
모친 | 인렬왕후 |
배우자 | 민회빈 강씨 |
자녀 | 슬하 3남 5녀 이외 양자 복녕군(福寧君) |
기타 친인척 | 강석기(장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 2월 5일(음력 1월 4일) ~ 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는 조선의 왕세자이며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장남이다.
목차
履歷(이력)
그의 본명은 이왕(李汪)이고, 본관은 전주이며 효종(봉림대군)의 친형이다. 빈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 강씨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으며 베이징에서 만난 천주교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구 문명을 접하게 되었다. 반청 노선보다 대청 실용주의로 전환하였다. 1644년 11월에 석방되어 3개월만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반청 사상을 고수하던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던 중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生涯(생애)~世子(세자) 時節(시절)
1623년 인조반정으로 아버지 인조가 왕이 되자 1623년(인조 3년) 3월 22일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전주로 피신하였으며, 그해 말에는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갔으나 이듬해 정월 동생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들이 피난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인조와 함께 성밖으로 나왔다.
淸(청)나라 人質(인질) 生活(생활)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복의 예를 올리며 항복하자(1637년), 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와의 조청화약(朝淸和約)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에서 인질을 요구하자 그는 1637년 4월 10일 자진해서 부인 강씨와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 수도 심양(선양)으로 가서 심양관에 억류되었다.
인조는 처음 이기축을 그를 배종하는 무관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1637년 3월 4일 소현세자는 좌부승지 한흥일을 시켜 '무재(武宰)의 직임은 일행을 검칙하는 것인데 이기축(李起築)은 서얼이기 때문에 호령을 세울 수 없다'며 '이 사람을 데려가면 단지 원역(員役)만 늘릴 것이니 이 사람을 돌려보내고 일행을 검칙하는 일은 신해(申垓)에게 맡기는 것이 편하고 마땅할 듯하다. 승지가 조정에 돌아가 여쭙도록 하라.'고 인조에게 고하기도 했다. 그뒤 이기축은 8월 별장(別將), 삼척첨사(三陟僉使)에 임명되었다가 뒤늦게 소현세자를 호종의 명을 받고 심양(瀋陽)으로 갔다. 그리고 3년 뒤 신병을 이유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가 조선을 많이 핍박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함께 끌려와 재판을 받은 반청파 김상헌 등과 조선 백성 보호에 많은 힘을 썼다. 몽골어를 배우고 서역원정에 출전하기도 했다.
1644년 음력 9월 명나라 정벌을 위해 나선 도르곤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베이징에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 등의 예수회 선교사와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과 서양 문물을 접하였다. 당시 세자가 신문물(新文物)을 조선에 전하기를 열망하는 포부는 (지금은 라틴어역되어 전하는) 세자가 아담 샬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다.
귀국과 부왕의 냉대
삼전도에서 치욕을 당한 인조와 조정 대신들(주전파)은 세자의 태도를 친청(親淸) 행위라고 크게 비난하였고, 1645년 음력 2월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인조는 가톨릭과 서양 과학을 들여와 조선을 발전시키고자 한 세자를 감시하고 박대했다.
의문의 최후
1645년 음력 2월 9년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5월 21일(음력 4월 26일) 갑자기 숨을 거두는데, 일부 역사학자들은 세자가 죽고 난 뒤, 곳곳에 검은 반점이 나고, 시신이 빨리 부패했다는 점에 인조와 인조의 총애를 받던 소용 조씨(조귀인)가 의원 이형익을 시켜 그를 독살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1645년 7월 20일(음력 6월 27일) 《인조실록》에는 진원군 이세완의 아내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사람들에게 말한 내용이 실려 있다.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했다. — 인조실록 인조 46권, 23년,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하다
그러나 이미 소현세자는 한 겨울에 귀국길에 오르며 얻은 병을 가지고 있었으며, 귀국 후에도 죽는 날까지 걸린 병이 낫지 않아 중한 상태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한 줄짜리 간략한 기록으로는 독살로 의심되지만, 실상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매일 세자를 진료한 기록에 따르면 세자가 앓고 있던 병이 추론 가능한 병이며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이라고 <승정원 일기>를 연구한 한의사 방성혜가 주장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이세완의 증언을 살펴보면 소현세자의 시신은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온몸이 검은빛이었다가는 것은 세자가 사망 직전에 청색증이 왔었다는 것을 뜻한다. 청색증이란 혈액 속의 산소가 줄고 이산화탄소가 증가해 온몸의 피부가 파랗게 변하는 증상을 말하는데, 입술, 손톱, 귀, 광대, 점막 부위에 특히 심하게 나타난다. 이목구비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고 한 것은 이목구비의 출혈을 연상케 하는 어떤 짙은 색깔의 자국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는 입술과 귀 그리고 얼굴의 점막 부위에 청색증이 특히 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소현세자는 사망하기 몇 달 전부터 기침 증상을 끊임없이 앓아왔다. 물론 단순한 감기일 수도 있으나 발열, 호흡곤란, 가슴 답답함, 옆구리의 당김 증세가 동반되었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추론하자면 오히려 감기보다는 폐렴에 가깝다고 볼 수 있. 폐렴의 증상은 발열, 기침, 객담, 오한, 흉통, 호흡곤란 등이다. 폐를 싸고 있는 흉막에까지 염증이 퍼지면 옆구리에 통증이 생기게 된다. 호흡기 증상 외에도 두통, 메스꺼움, 구토, 복통 등이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소현세자가 귀국 직후 앓았던 증상들과 거의 일치한다. 만약 폐렴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 있다. 폐렴이 진행될 수록 호흡에 차질이 생기면서 혈액 속 산소가 줄고 이산화탄소가 증가해 청색증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까지 본다면 소현세자는 폐렴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증상을 더 고려해보아야 한다. 소현세자가 죽기 얼마 전 다리에 두드러기 형태의 발진이 생기면서 가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폐렴이 진행되면서 정말 우연히 다리에 두드러기가 함께 생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큰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질병이 있다. 소현세자의 죽기 전 증상처럼 다리에 가려움증이 생기면서 동시에 폐렴과 유사한 증상을 동반하며 사망에 이르는 질병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혈관염이다. 증상은 두드러기 처럼 가려움이 생기면서 피부에 붉은색이나 보라색 출혈반이 생기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혈반염의 증상을 중독으로 인한 증상으로 오인이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소현세자의 독살설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한 핑계에 가까울 수 있다는 뜻이다.
-- 하지만 이같은 병사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다 싶을 정도의 독살(급사)의 간접 정황이 있다.
•8년간의 청 볼모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지 불과 2개월만에 급사했다.
•당시 최고의 식생활을 보장받는 왕성한 30대의 세자 신분에 비추어 당시 흔하게 한번은 겪던 학질이 과연 조선 최고 명의들에게 과연 큰 병이었을까.
•염습에 빈궁도감 당상관급 관료들의 배석을 막고 측근종친 3인 외 참석을 불허한 채 서둘러 끝냈다.
•소현의 귀국시점 소현 부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인조의 후궁의 천거로 특채된 어의 이형익이 치료를 주관했다.
•평소 인품이 특히 망령되고 신중치 못하고 의견을 함부로 내세우고 증세를 판단치 못했다며 이형익을 국문해야 한다는 입장을 사간원 등이 제기했다(실력-인품-정적의 심복-시신의 증좌 등의 근거로 사실상 소현의 죽음에 배후를 캐라는 주장).
•이런 여러 주장에도 부왕이 어의가 신중하지 못한 점은 없었다며 국문과 관례인 최소한의 책임 추궁마저 거부했다.
•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를 사대부와 같은 3일장으로 극도로 축소시켰다.
•1년 입던 상복 규정도 왕실과 대신은 3개월만에 인조 자신은 7일만에 벗었다.
•다른 왕족과 달리 가파른 언덕에 묻어 홀대했고 세자의 칭호인 ‘원’을 사용치 않았고 무덤에 시립되는 무인석 문인석이 종래의 절반인 2점이었다.
•세자 사망후 1년도 안돼 남편 의문사를 의심하던 세자빈을 왕을 독살하려한다는 근거없는 누명을 씌워 신료의 만류를 뿌리치고 폐출 사사했다.
•세자가 유고하면 세자직을 원손이 물려받던 법도를 무시하고 자신의 차남 봉림을 세자로 봉했다(왕통계승법을 거스르면서까지 소현의 후손을 제거).
•소현의 세 아들을 제주에 유배, 그중 둘을 유배지에서 사망케 했다.
•’독살이 의심되며 독살 은폐 의혹이 있다’는 당시 사관의 평가가 실록에 있으며 염습에 참여한 종친 이세완의 아내의 목격담이라 적시되어 있다. 이세완은 성종의 5대손으로서 인조 입장에서는 아버지 항렬이다. 이세완의 처의 '시신이 흑빛이었으며 시신의 모든 구멍에서 선혈을 쏟았다'는 증언은 현대 법의학은 물론 당시 의료법에서도 독극물 중독사의 특징과 일치한다.
-사대의 기본 정서는 물론 임진란에 군사원조를 받은 은혜가 섞여 명에 대한 부왕 인조와 조선 조정(이하, ‘인조’)의 충의가 대단했고.
-중립외교주의자 광해군을 꺽고 반정한 인조와 집권층은 정권의 정통성 사수를 위해서라도 ‘유일진리’시 되는 주자 성리학의 나라 명을 포기할 수 없었고.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인조의 청에 대한 원한이 컸고.
-‘계속 숭명배청 정책을 고수한다면 인조를 폐하고 새로 후계자를 세우겠다’는 청의 협박은 이미 전조에 원나라가 고려왕을 폐하고 세자를 왕위에 봉한 사례를 아는 인조에게는 아들 소현이 인생 최대의 정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큰 위기감과 청에 대한 원한을 동시에 느끼도록 했을 게 자명한데,
•세자가 청나라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소문이 인조에게 들려 오고.
•소현이 사냥만 즐겨하고 학문은 전폐한 채 오직 돈벌이만 궁리하는 등 청나라인이 하는대로 따라해 인망을 크게 잃었다는 인신공격과 배신이라는 비판이 있었으며, 급기야 인조가 세작을 보내 소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까지 했는데,
•이 마당에 조선으로 돌아와, 천주교에 물든 언행을 하는 것이나, 자금성에서 70여일간 교유했던 독일 신부 아담 샬에게 선물로 받아온 자명종, 세계지도, 천문의, 천문서 포함 여러 서양의 한역 기술서적을 내놓은 소현의 행위가 인조나 조선 조정의 눈에는 명의 원수인 청에 붙어 배신한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혼을 서양 귀신에 팔아먹은 것으로 오도됐을 가능성이 다분했을 것으로 여길만하다. 실제로 소현이 아담 샬에게 받아온 서양 기술서적 등 일체에 대해 사람들에게 보이거나 나눠주지 말라는 인조의 차단령이 있었다.
•이 모두를 이어 보면 소현의 사망이 의문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볼만 하다. 타살이냐에 대한 어떤 조사 시도도 배척되었다는 점은 심지어 인조가 아들 소현 사망의 배후에 있었고 부왕과 부왕 측근의 공모사건이라는 인상이 든다. 즉 인조가 끼어 있는 아들내외손주 살해사건이라 짐작 가능하다. 아무튼 조선이 그토록 섬기던 명나라의 비참한 최후를 소현세자는 생생하게 코앞에서 목격하고 돌아왔다. 중국 주변 오랑캐 국 몇몇만 아는 근시안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조선을 재건할 청운을 품은 채 귀국했던 소현세자의 사망은 50여년 전 임진왜란-정유재란의 교훈을 못살린 채 정체되어 있던 조선이 제대로 도약할 절호의 기회가 강탈당한 사건인 셈이다.
事後(사후)
1645년 음력 6월 그의 동생 봉림대군이 귀환하자 본인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세자에 책봉시켰다. 친아버지 인조는 세자를 폐위시키고 '폐세자'라 부르다가 고종때 세자로 복권되었다. 그해 음력 8월 강빈의 동생 강문성이 장사 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인 최남을 찾아가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해서 강문성과 문명, 문두, 문벽 4형제를 먼 고을에 유배시켰다. 그 뒤 세자빈 강씨와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고, 조소용은 세자빈 강씨가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고 무고하였다
1646년 세자빈 강씨의 궁녀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옥에서 죽었다. 이 혐의로 강씨는 별궁에 유치되었으며, 강씨가 인조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김자점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에 첫째 석철은 12살이었고, 둘째 석린은 8살이었으며, 셋째 석견은 4살이었다. 청나라 장수 용골대는 석철을 아깝게 여겨 데려다가 기르겠다고 했지만, 석철은 결국 1648년 11월 2일(음력 9월 18일) 제주도에서 장독으로 죽었고, 둘째 석린은 같은해 음력 12월 23일(양력 1649년 2월 4일) 병으로 사망했다. 셋째 경안군 석견은 효종의 즉위 후 복위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강빈의 친정 노모와 4형제 또한 죽음을 피하지 못하였다.
능원
그러나 세자의 죽음 이후, 인조는 세자의 장례를 크게 간소화했고 인조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세자의 무덤에 방문한 적이 없다. 능원은 원래 소현묘라 불렸으나 고종때 세자의 묘를 봉원토록 하는 제도를 시행하며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으며,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家族關係(가족관계)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부 | 인조대왕 仁祖大王 | 전주 | 1595년 - 1649년 | 원종대왕元宗大王[5] 인헌왕후 구씨 仁獻王后 具氏 | 제16대 국왕 |
모 | 인열왕후 한씨 仁烈王后 韓氏 | 청주 | 1594년 - 1635년 | 서평부원군 한준겸西平府院君 韓浚謙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檜山府夫人 昌原 黃氏 |
아내
세자빈 | 시호 | 본관 | 생몰년 | 부모 | 비고 |
민회빈 강씨 愍懷嬪 姜氏 | 금천 | 1611년 - 1646년 | 강석기 姜碩期 신예옥 申禮玉 | 인조 5년(1627년) 세자빈 책봉 인조 24년(1646년) 사사됨 숙종 44년(1718년) 복권 |
작호 | 이름 | 생몰년 | 생모 | 배우자 | |
장녀 | 군주 郡主 | 1629년 - 1631년 | 민회빈 강씨 | ||
차녀 | 군주 郡主 | 1631년 - 1640년 | |||
장남 | 경선군 慶善君 | 백 栢 | 1636년 - 1648년 | ||
삼녀 | 경숙군주 慶淑郡主 | 1637년 - 1655년 | 능창부위 綾昌副尉 구봉장 具鳳章 | ||
차남 | 경완군 慶完君 | 석린 石磷 | 1640년 - 1648년 | ||
사녀 | 경녕군주 慶寧郡主 | 1642년 - 1682년 | 금창부위 錦昌副尉 박태정 朴泰定 | ||
오녀 | 경순군주 慶順郡主 | 정온 正溫 | 1643년 - 1697년 | 황창부위 黃昌副尉 변광보 邊光輔 | |
삼남 | 경안군 慶安君 | 회 檜 | 1644년 - 1665년 | 분성군부인 허씨 盆城郡夫人 許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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