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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 18, 2013. Romans 8:28. Test of faithfulness. 믿음의 시험
28. Then said Jesus unto them, When ye have lifted up the Son of man, then shall ye know that I am he, and that I do nothing of myself; but as my Father hath taught me, I speak these things.
28.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그인 줄을 알며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 아버지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대로 내가 이것들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복음 8:28)
(3586) (모든 상황에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하나님에 뜻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믿고 주님께만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는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로 모든 일은 사람들에 의해서 생기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It is only a faithful person who truly believes that God sovereignly controls his circumstances. We take our circumstances for granted, saying God is in control, but not really believing it. We act as if the things that happen were completely controlled by people. To be faithful in every circumstance means that we have only one loyalty, or object of our faith—the Lord Jesus Christ.
(3587) (우리의 상황이 갑자기 나빠지면 그것이 주님이 뜻하신 바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의 믿음이 없음이 드러나게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예배하면 그러한 상황이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곧바로 바뀔 수 있습니다.) God may cause our circumstances to suddenly fall apart, which may bring the realization of our unfaithfulness to Him for not recognizing that He had ordained the situation. We never saw what He was trying to accomplish, and that exact event will never be repeated in our life. This is where the test of our faithfulness comes. If we will just learn to worship God even during the difficult circumstances, He will change them for the better very quickly if He so chooses.
(3588) (주님에 대한 믿음은 요즘 찾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주님을 마치 축복을 위한 기계처럼 또는 다른 사역자처럼 취급합니다. ) Being faithful to Jesus Christ is the most difficult thing we try to do today. We will be faithful to our work, to serving others, or to anything else; just don’t ask us to be faithful to Jesus Christ. Many Christians become very impatient when we talk about faithfulness to Jesus. Our Lord is dethroned more deliberately by Christian workers than by the world. We treat God as if He were a machine designed only to bless us, and we think of Jesus as just another one of the workers.
(3589) (믿음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그의 뜻대로 사용하셨듯이 우리도 그리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The goal of faithfulness is not that we will do work for God, but that He will be free to do His work through us. God calls us to His service and places tremendous responsibilities on us. He expects no complaining on our part and offers o explanation on His part. God wants to use us as He used His own Son.
(3590) (오늘의 idiom) (여행자들의 함정) a tourist trap = a shop, a restaurant, a bar, or any place that uses tourists greedily to profit from them
◈ (하나님은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드셨으나 사람의 개성이 본성의 목표를 버려 놓았습니다. 탐욕이 사랑의 위조품이듯이 개성은 영성의 위조품입니다.) Individuality counterfeits spirituality, just as lust counterfeits love. God designed human nature for Himself, but individuality corrupts that human nature for its own purposes.
◈ (성령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운행할 때 주의하세요. 성령은 당신 개성이 끝까지 가서 나는 순종하지 않겠습니다 또는 순종하여 개성의 단단한 틀을 깨고 영적 생활이 드러나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Watch yourself closely when the Spirit of God is at work in you. He pushes you to the limits of your individuality where a choice must be made. The choice is either to say, “I will not surrender,” or to surrender, breaking the hard shell of individuality, which allows the spiritual life to merge.
◈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원하시지만 당신이 당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때 영적 삶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The Holy Spirit narrows it down every time to one thing (see Matthew 5:23-24). God wants to bring you into union with Himself, but unless you are willing to give up your right to yourself, He cannot “... let him deny himself...”--deny his independent right to himself. Then the real life—the spiritual life—is allowed the opportunity to grow.
◈ 투쟁이 없는 자연적 또는 초자연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Life without war is impossible in the natural or the supernatural realm. It is a fact that there is a continuing struggle in the physical, mental, moral, and spiritual areas of life.
◈ 건강이란 나의 몸의 신제적인 면과 나를 둘러싼 환경들과의 균형입니다. 정신적인 세계도 이와 동일합니다. 강하고 활동적인 정신 활동을 유지하려면 투쟁해야 하는데, 사고라고 하는 투쟁의 형태를 통하여 정신적인 평형을 유지합니다. Health is the balance between the physical parts of my body and all the things and forces surrounding me. The same is true of the mental life. If I want to maintain a strong and active mental life, I have to fight. This struggle produces the mental balance called thought.
◈ 도덕성이라는 것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서 미덕을 유지하여야 도덕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Morality does not happen by accident; moral virtue is acquired.
◈ 나는 나에게 도전해 오는 것들과 투쟁하여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함을 유지합니다. I must learn to fight against and overcome the things that come against me, and in that way produce the balance of holiness. Then it becomes a delight to meet opposition. Holiness is the balance between my nature and the law of God as expressed in Jesus Christ.
◈ 주님은 은둔자도 아니셨고 자신을 부정하는 광신적인 성자도 아니셨으며, 사회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내적으로 세상과는 연계가 없으셨습니다. Our Lord was not recluse nor a fanatical holy man practicing self-denial. He did not physically cut Himself off from society, but He was inwardly disconnected all the time.
◈ 거룩한 구별[성별(聖別)은 우리가 해야 하고 성결[聖潔]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주님이 관심을 가지신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판단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 일이 주님이 관심이 있는 일인지 또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Consecration (being dedicated to God’s service) is our part; sanctification (being set apart from sin and being made holy) is God’s part. We must make a deliberate determination to be interested only in what God is interested. The way to make that determination, when faced with a perplexing problem, is to ask yourself, “Is this the kind of thing in which Jesus Christ is interested or is it something in which the spirit that is diametrically opposed to Jesus is interested?”
◈ When we offer open-handed help to the poor, God blesses us for our kindness (Ps. 41:1-3; Prov. 19:17). With His leading, consider how you might “extend your soul to the hungry” (Isa. 58:10) and freely give to help others in Jesus’ name.
우리가 손을 활짝 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하나님은 우리의 친절함으로 인해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시편 41:1-3; 잠언 19:17).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떻게 “당신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이사야 58:10),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 Rather than look for meaning in breathtaking moments, we should find meaning in every breath we take, and make every breath meaningful. 숨을 멈출 만큼 놀라운 순간들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우리가 매일 숨 쉬는 가운데 의미를 찾고, 매번의 호흡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 It is not a simple thing to balance life’s demands against the needs of those we love and serve, but failing to do so is emotional betrayal. As we think about the disciples disappointing Jesus in the Garden, we might want to consider the ways we can today show our care for our loved ones and their interests. Help us, Lord, to love others well.
우리의 삶이 요구하는 것들과 우리가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감정적인 배신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실망시킨 제자들을 생각해보면서,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여, 다른 사람들을 잘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But the journey for the infant Jesus was much farther than 80 miles. He left His place in heaven at God's right hand, came to earth, and accepted our humanity. Eventually, He was stretched out on a cross to die, and He was buried in a borrowed tomb. But the journey was not over. He conquered death, left the tomb, walked again among men, and ascended to heaven. Even that is not the journey's end. Someday He will return as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하지만 아기 예수의 여행은 130킬로미터보다 훨씬 더 멀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오른편 천국 보좌를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인성을 입으셨습니다. 최후에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빌린 무덤에 안장되셨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에서 나와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다니시다가 천국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조차도 여행의 끝이 아닙니다. 언젠가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자 만주의 주님으로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 정리가 전혀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뒤섞여 엉망인 상태를 흔히 뒤죽박죽이라고 한다. 물건이 널브러져 뒤죽박죽인 경우도 있고, 이것저것 요리하다 보면 음식이 뒤죽박죽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럽게 뒤죽박죽되는 경우도 있다. 영어 표현 중에 이런 어감이 있는 단어가 topsy-turvy이다.
[예문] Despite scandals, the politician has a more stable year compared to the topsy-turvy political situation in previous years.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인은 뒤죽박죽이던 예년의 정치 상황과 비교하면 안정적인 한 해를 보내고 있다.
같은 의미로 hugger-mugger라는 표현도 있다.
[예문] He engaged in the hugger-mugger of international finance. 그는 뒤죽박죽인 국제 금융계에 관여하고 있다.
전문가들을 따르면, 쓸모없이 쌓아 놓은 물건이나 잡생각을 버리는 것에서 건강한 삶이 시작된다고 한다. 물건을 제때 정리하고 버리지 않으면 잡동사니만 될 뿐이다. 일부에서는 쓰지 않고 오래 묵혀 둔 물건으로 인해 비만은 물론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고 한다. 사무실 책상 위에 쌓인 물건 중 실제로 필요한 것은 단지 5%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쓰레기라는 주장도 있다.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으면, 창의적인 생각은 고사하고 업무마저 비효율적으로 처리한다는 주장도 있다. 과연 어떻게 하면 뒤죽박죽인 물건들을 잘 정리하고,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자신의 책상부터 정리하는 것이 좋다. 서류 정리함에 필요한 서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다 버리는 것이 좋다.
둘째, 컴퓨터 바탕화면에 늘어놓은 파일들은 한 곳에 모아 두던지 분류해 두는 것이 좋다. 또한, 인터넷 즐겨찾기에 분류 없이 저장된 사이트들도 일제히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
셋째, 책상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는 명함 중 도움될 사람 것만 명함집에 넣어 두고 나머지는 과감히 버리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쏟아지는 정보로 인해 정보들이 뒤죽박죽되는 경우도 있으므로 정확하고 도움되는 정보만 기억하고, 나머지 정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의 성공에 치중하는 것이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 누군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의 특징을 그대로 나타낼 경우 “너답다!”라고 말합니다. 영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어감의 표현들이 있는데, “This[That] is so like you.'와 “That[This] is typical of you.” 등입니다. 구어체 표현으로 주로 사용하며, “This is so like you, never taking the blame. (너답다. 비난은 절대 안 받아들이지.)” 또는 “That's typical of you, doing whatever you need to call attention to yourself. (너답다. 관심을 끌려고 뭐든 하는 걸 보니.)”와 같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친한 친구의 경우에는 그저 ‘typical’이라는 단어 하나로 함축하여 표현하기도 합니다.[예문] Did you hear? Joe lost his wallet at the gym last night. - [sighs] Typical. (너 그 이야기 들었어? 조가 어젯밤에 헬스장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대. - [한숨 쉬며] 그 애답다.)
◈ ‘줄줄이 나가떨어졌다’는 문장에서의 ‘줄줄이’는, ‘연이어, 잇따라, 짧은 간격을 두고 연속적으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는 ‘one after the other, one after another, in a row’ 등의 표현이나 ‘continuously, successively’와 같은 부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The entire team was eliminated out of the competition one after the other. (팀 전체가 대회에서 줄줄이 나가떨어졌다/탈락했다)” 혹은 “She was so sassy that all her suitors successively gave up after a while. (그녀는 매우 도도해서 모든 구혼자가 곧 줄줄이 나가떨어졌다/그녀를 포기했다.)”와 같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줄줄이’라는 단어는 ‘줄지어 잇따라’라는 뜻 말고도, ‘줄마다 모두’, ‘여러 줄로’ 등의 뜻도 있으니, 그 상황에 맞는 표현을 알맞게 사용하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예문 1] That passionate fan always memorizes her favorite celebrity’s entire schedule line after line. (그 열렬한 팬은 항상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의 스케줄을 줄줄이 외운다.)[예문 2] Little hearts were tiered on the cake in neat rows. (케이크에는 작은 하트들이 줄줄이 정렬되어 있었다.)
◈ Sacrifice and offering You did not desire; my ears You have opened. Burnt offering and sin offering You did not require.
—Psalm 40:6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 하신다 하신지라
—시편 40:6
◈ Recently I was having trouble with my ears and decided to try a somewhat controversial treatment. It was supposed to melt the wax in my ears and clear out any impediments that might get in the way of the ability to hear. I have to admit that it sounded like a strange experience. But I was desperate to be able to hear clearly, so I was willing to give it a try. 최근 귀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된 나는 약간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한 치료법을 써보기로 하였습니다. 그것은 귀 속의 귀지를 녹여 듣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깨끗이 치우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상한 방법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로서는 기꺼이 그 방법을 시도해보기로 하였습니다.
◈ As important as good hearing is in life, it is even more important in our walk with God. In Psalm 40:6, David declared, “Sacrifice and offering You did not desire; my ears You have opened. Burnt offering and sin offering You did not require.” The word opened in this verse can be translated “cleared out,” and it speaks of what God desires for us.
잘 듣는 것은 삶에서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데 있어서는 더욱 중요합니다. 시편 40편 6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여기에서 귀를 ‘통하여 들리신다’는 말은 귀를 ‘깨끗이 치운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 He wants our ears to be open and ready to hear Him as He speaks to us through His Word. Sometimes, however, our spiritual ears may be blocked by the background noise of the surrounding culture or the siren songs of temptation and sin.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가 귀를 열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를 둘러싼 문화의 잡다한 배경소음들이나 유혹과 죄로 가득한 사이렌(바다요정)의 노랫소리들로 우리의 영적인 귀가 막혀버릴 수 있습니다.
◈ May we instead turn our hearts to the Lord in full devotion, keeping our ears open to Him so that we will be sensitive to His voice. As He speaks, He will put His Word in our hearts, and we will learn from Him to delight in His will (v.8).
우리는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헌신하여 주님께로 향하고, 주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우리의 귀를 주님께 항상 열어둘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은 우리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심으실 것이며,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주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8절).
◈ Open my ears, that I may hear
Voices of truth Thou sendest clear;
And while the wave-notes fall on my ear,
Everything false will disappear.
주님이 명확하게 보내시는 진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열어주소서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올 때
그릇된 모든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 God speaks through His Word to those
who listen with their heart.
하나님은 마음을 열고 듣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 So shall My word be that goes forth from My mouth; it shall not return to Me void, but it shall accomplish what I please.
-- Isaiah 55: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1
◈ As a workplace chaplain, I’m privileged to be in conversation with many different people. Some are skeptics of the Christian faith. I’ve discovered three major hurdles that keep them from trusting in Christ for salvation.
직장 사역을 하는 목사로서 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립니다. 그들 중에는 기독교신앙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세 가지 주요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The first barrier, surprisingly, isn’t an unwillingness to believe that God exists; instead some doubt that they’re important enough for God’s attention. Second, some believe they are unworthy of His forgiveness. People are often their own harshest judges. The third hurdle? They wonder why God is not communicating with them if He is out there.
첫 번째 장애물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존재를 안 믿으려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실 정도로 중요한 존재인지를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이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가장 냉혹하게 판단합니다. 세번째 장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자신들과 교통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 Let’s work backward through the hurdles to see what God’s Word says. First, God doesn’t play head games. He promises that if we read His Word, He will make sure it accomplishes His purpose (Isa. 55:11). In other words, if we read it we will discover that God is communicating with us. This is precisely why the Bible speaks so often of His grace and mercy toward all (v.7). His willingness to forgive surpasses our own. Once we learn that we can hear God in the Bible and once we see the emphasis on His mercy, it becomes easier to believe we have His attention when we cry out to Him.
이 장애물들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거꾸로 하나씩 생각해봅시다. 우선, 하나님은 우리를 현혹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성취하실 거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사야 55:11). 다시 말해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우리와 교통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 모두를 향한 그분의 은혜와 자비에 대해 그렇게 자주 언급하는 이유입니다 (7절).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는 우리 자신을 훨씬 능가합니다. 일단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자비가 강조된 뜻을 알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크게 소리쳐 찾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믿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 God’s story is amazing. It can give hope for all of us.
하나님의 이야기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 There can be times when one’s mind is in doubt,
Times when one asks what the faith is about;
But we can believe Him, we know that He cares—
Our God is real, as the Bible declares.
우리의 마음속에 의심이 들 때가 있고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으며 주님의 돌보심을
알고 있다네 성경이 선포하듯이 우리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기에
◈ Honest skepticism can be the first step
to a strong faith.
솔직한 의심은 굳센 믿음으로 가는 첫 걸음이다.
◈ (개성이란 영적인 삶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자연적인 보호막입니다.) Individuality is the hard outer layer surrounding the inner spiritual life. Individuality shoves others aside, separating and isolating people. We see it as the primary characteristic of a child, and rightly so. When we confuse individuality with the spiritual life, we remain isolated. This shell of individuality is God’s created natural covering designed to protect the spiritual life.
◈ (하나님은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드셨으나 사람의 개성이 본성의 목표를 버려 놓았습니다. 탐욕이 사랑의 위조품이듯이 개성은 영성의 위조품입니다.) But our individuality must be yielded to God so that our spiritual life may be brought forth into fellowship with Him. Individuality counterfeits spirituality, just as lust counterfeits love. God designed human nature for Himself, but individuality corrupts that human nature for its own purposes.
◈ (성령이 당신의 마음속에서 운행할 때 주의하세요. 성령은 당신 개성이 끝까지 가서 나는 순종하지 않겠습니다 또는 순종하여 개성의 단단한 틀을 깨고 영적 생활이 드러나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The characteristics of individuality are independence and self-will. We hinder our spiritual growth more than any other way by continually asserting our individuality. If you say, “I can’t believe,” it is because your individuality is blocking the way; individuality can never believe. But our spirit cannot help believing. Watch yourself closely when the Spirit of God is at work in you. He pushes you to the limits of your individuality where a choice must be made. The choice is either to say, “I will not surrender,” or to surrender, breaking the hard shell of individuality, which allows the spiritual life to merge.
◈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과 하나되기를 원하시지만 당신이 당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때 영적 삶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The Holy Spirit narrows it down every time to one thing (see Matthew 5:23-24). God wants to bring you into union with Himself, but unless you are willing to give up your right to yourself, He cannot “... let him deny himself...”--deny his independent right to himself. Then the real life—the spiritual life—is allowed the opportunity to grow.
◈ (오늘의 idiom) (혀가 꼬이게 하는 발음하기 어려운 말) A tongue twister = a sentence, phrase or word that is difficult to say without making an error
◈ 투쟁이 없는 자연적 또는 초자연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Life without war is impossible in the natural or the supernatural realm. It is a fact that there is a continuing struggle in the physical, mental, moral, and spiritual areas of life.
◈ 건강이란 나의 몸의 신제적인 면과 나를 둘러싼 환경들과의 균형입니다. 정신적인 세계도 이와 동일합니다. 강하고 활동적인 정신 활동을 유지하려면 투쟁해야 하는데, 사고라고 하는 투쟁의 형태를 통하여 정신적인 평형을 유지합니다. Health is the balance between the physical parts of my body and all the things and forces surrounding me. The same is true of the mental life. If I want to maintain a strong and active mental life, I have to fight. This struggle produces the mental balance called thought.
◈ 도덕성이라는 것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서 미덕을 유지하여야 도덕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Morality does not happen by accident; moral virtue is acquired.
◈ 나는 나에게 도전해 오는 것들과 투쟁하여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함을 유지합니다. I must learn to fight against and overcome the things that come against me, and in that way produce the balance of holiness. Then it becomes a delight to meet opposition. Holiness is the balance between my nature and the law of God as expressed in Jesus Christ.
◈ (오늘의 idiom) (팜 음악계 전체) Tin Pan Alley = entire pop music industry.
◈ 주님은 은둔자도 아니셨고 자신을 부정하는 광신적인 성자도 아니셨으며, 사회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내적으로 세상과는 연계가 없으셨습니다. Our Lord was not recluse nor a fanatical holy man practicing self-denial. He did not physically cut Himself off from society, but He was inwardly disconnected all the time.
◈ 거룩한 구별[성별(聖別)은 우리가 해야 하고 성결[聖潔]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주님이 관심을 가지신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판단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 일이 주님이 관심이 있는 일인지 또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Consecration (being dedicated to God’s service) is our part; sanctification (being set apart from sin and being made holy) is God’s part. We must make a deliberate determination to be interested only in what God is interested. The way to make that determination, when faced with a perplexing problem, is to ask yourself, “Is this the kind of thing in which Jesus Christ is interested or is it something in which the spirit that is diametrically opposed to Jesus is interested?”
◈ When we offer open-handed help to the poor, God blesses us for our kindness (Ps. 41:1-3; Prov. 19:17). With His leading, consider how you might “extend your soul to the hungry” (Isa. 58:10) and freely give to help others in Jesus’ name.
우리가 손을 활짝 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하나님은 우리의 친절함으로 인해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시편 41:1-3; 잠언 19:17).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떻게 “당신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이사야 58:10),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 Rather than look for meaning in breathtaking moments, we should find meaning in every breath we take, and make every breath
meaningful. 숨을 멈출 만큼 놀라운 순간들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우리가 매일 숨 쉬는 가운데 의미를 찾고, 매번의 호흡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 The apostle Paul expressed his desire for the believers: “May the Lord make you increase and abound in love to one another and to all, just as we do to you” (1 Thess. 3:12). How much should we love God and others? More and more! .
바울사도는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3:12)고 하면서 신자들을 향한 자신의 소망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까요? ‘더욱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 [Jesus] found them sleeping, and said . . . , “Could you not watch with Me one hour?” —Matthew 26:40
[예수께서] 그 자는 것을 보시고......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태복음 26:40
◈ Some years back, another man and I were reading together Matthew 26 about Jesus in the Garden of Gethsemane. “I know this much,” he told me as we read along, “if I’d been with Jesus in Gethsemane, I’d have had His back. No way would I have fallen asleep!” Indignant, he continued, “How could anyone fall asleep after hearing Jesus tell them how troubled He was? He was practically begging!” (v.38). 몇 년 전, 어떤 사람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에 관해 기록된 마태복음 26장을 읽고 있을 때 그가 말했습니다. “이것 만큼은 확실합니다. 만일 내가 예수님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다면, 나는 그분 곁을 지키면서 절대로 잠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말씀하신 것을 듣고도 어떻게 제자들이 잠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거의 애 원하셨는데도 말입니다!”(38절 참조)라고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 Knowing that our families struggled with our long work hours, I wondered out loud to my friend: “How many times have our children looked for us in the crowd at their school activities, hoping to see us? Do our kids face troubles alone because we are away or busy?
우리가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때문에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행사 때 우리가 와 주었으면 하면서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를 찾으려고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 Our families and friends have an intense need for personal attention from us. Even Jesus asked His disciples to watch and pray with Him” (see vv.40-45).
우리가 바쁘거나 옆에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어려운 상황을 홀로 겪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우리의 개인적인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조차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위해서 깨어 기도해 달라고 부탁 하셨으니까요”(40-45절 참조)
◈ It is not a simple thing to balance life’s demands against the needs of those we love and serve, but failing to do so is emotional betrayal. As we think about the disciples disappointing Jesus in the Garden, we might want to consider the ways we can today show our care for our loved ones and their interests. Help us, Lord, to love others well.
우리의 삶이 요구하는 것들과 우리가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감정적인 배신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실망시킨 제자들을 생각해보면서, 오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관심사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주여, 다른 사람들을 잘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 Open my eyes, Lord, to people around me,
Help me to see them as You do above;
Give me the wisdom and strength to take action,
So others may see the depth of Your love.
주님, 주위 사람들을 향해 내 눈을 뜨게 하셔서
주께서 천상에서 보시듯 나도 그들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나에게 지혜와 실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의 깊이를
보게 하소서
◈ One measure of our love for Christ is
our sensitivity to the needs of others.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재는 하나의 척도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민감한가 하는 것이다.
◈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reasure hidden in a field, which a man found and hid; and for joy over it he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Matthew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태복음 13:44
◈ In 1867 on a farm in South Africa, 15-year-old Erasmus Jacobs saw a stone glistening in the sun. The shining rock was eventually reported to a neighbor, who wanted to buy it from the family. Not knowing its value, Erasmus’ mother told the neighbor, “You can keep the stone, if you want it.”
1867년 남아프리카의 어느 한 농장에서 열다섯 살 난 에라스무스 제이콥이 돌덩이 하나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한 이웃이 이 반짝거리는 돌덩이에 대해 듣고는 그것을 사고 싶어했습니다. 그 돌덩이의 가치를 몰랐던 에라스무스의 어머니는 이웃에게 “원하시면 그냥 가지세요.”라고 말했습니다.
◈ Eventually, a mineralogist determined the stone to be a 21.25 carat diamond and worth a great sum. It became known as the “Eureka Diamond.” (The Greek word eureka means “I found it!”) Soon the fields near the Jacobs’ farm soared in value. Underneath the land was one of the richest diamond deposits ever discovered.
결국 그 돌덩어리는 광물학자에 의해 21.25 캐럿에 달하는 다이아몬드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돌덩어리는 “유레카 다이아몬드”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유레카는 “찾았다!”라는 뜻입니다). 곧 제이콥 농장 근처의 땅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그 땅은 이제껏 발견된 곳 중에서 다이아몬드가 가장 많이 매장된 곳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 Jesus said that the value of being part of God’s kingdom is like treasure: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reasure hidden in a field, which a man found and hid; and for joy over it he goes and sells all that he has and buys that field” (Matt. 13: 44).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되는 것은 마치 보화와 같은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태복음 13:44).
◈ When we put our faith in Christ, a spiritual “eureka moment” arrives. God gives us forgiveness in His Son. It is the greatest treasure that could ever be found. Now all of life can begin to center on the value of becoming a joyous member of His eternal kingdom. It’s our joy to share that valuable discovery with others.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적인 “유레카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용서를 베푸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보화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삶은 주님의 영원한 나라의 즐거운 백성이 된 가치에 초점을 맞출 수 있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 귀중한 발견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됩니다.
◈ How we need a keen awareness
Of the joys God wants to share!
Priceless treasures found in Jesus—
We are rich beyond compare!
하나님께서 나누고 싶으신 기쁨을
늘 마음속에 의식하며 살아가세!
예수님 안에 있는 엄청난 보화
우리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한 자들이라네
◈ God’s kingdom is a treasure meant to be shared.
하나님 나라는 나눌만한 의미가 있는 보화이다.
◈ '허둥대다' 또는 '허둥거리다'는 어찌할 줄을 몰라 '갈팡질팡하며 다급하게 서두르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be flurried[fluttered, flustered]'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He was flustered and stammering. (그는 허둥대며 말을 더듬었다.)” 또는 “He was flurried and flustered now. (그는 지금 허둥대고 있다.)”와 같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서는 'panic'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도 있는데, “We got some time left! Don't be panic! (시간이 아직 남았어. 허둥대지 마.)”와 같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 그 나라는 부유층 아이들과 저소득층 아이들 간의 영어 양극화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말은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지역 간 격차(North-South divide)라는 말에서 나왔다. 미국의 경우, 북부는 산업이 발달한 진보 성향이었으며 남부는 농업이 발달한 보수 성향이 있었다. 남과 북의 사고방식에 격차가 나면서, 둘 사이에 마찰이 불거져 남북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의 경우, 19세기 초 북부는 부유하고 남부는 빈곤한 상황에 부닥쳐 있어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 이 말은 북부에 있는 선진국과 남부의 후진국 간의 격차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예문] The leader erased the traditional North-South divide in that country. 그 지도자는 그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있었던 지역 간 격차를 없앴다.
divide가 들어간 또 다른 단어로 digital divide라는 말이 있다. 이른바 디지털 양극화 또는 정보 격차라고 불리는 것으로, 계층·지역·연령 간의 인터넷 및 컴퓨터 사용의 격차를 의미한다. 이 말은 인터넷과 컴퓨터를 잘 사용하는 계층이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지위와 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문] The education system will reduce the digital divide between the class exposed to the digital culture and the one isolated from it. 그 교육 제도는 디지털 문화에 노출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간의 정보 격차를 줄여 줄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때, English divide를 없애기 위해 파격적인 영어 교육을 제시하면서, 인터넷이 뜨겁게 달아오른 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영어를 생활화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몰입(immersion) 교육이었다. 몰입 교육은 ‘immersion(담금)’과 같이 아이들을 영어를 쓰는 환경에 빠뜨리는 방식이다. 모든 과목의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겠다는 방식도 이 몰입 교육 방식이다. 캐나다의 교육 방식이 몰입 교육의 전형으로 꼽히는데, 유치원 때부터 교과 과정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가르친 결과 캐나다 초등학생들은 대개 3~4년 안에 두 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 (투쟁이 없는 자연적 또는 초자연적 삶은 불가능합니다.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영적인 영역에서 지속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Life without war is impossible in the natural or the supernatural realm. It is a fact that there is a continuing struggle in the physical, mental, moral, and spiritual areas of life.
◈ (건강이란 나의 몸의 신제적인 면과 나를 둘러싼 환경들과의 균형입니다. 정신적인 세계도 이와 동일합니다. 강하고 활동적인 정신 활동을 유지하려면 투쟁해야 하는데, 사고라고 하는 투쟁의 형태를 통하여 정신적인 평형을 유지합니다.) Health is the balance between the physical parts of my body and all the things and forces surrounding me. To maintain good health I must have sufficient internal strength to fight off the things that are external. Everything outside my physical life is designed to cause my death. The very elements that sustain me while I am alive work to decay and disintegrate my body once it is dead. If I have enough inner strength to fight, I help to produce the balance needed for health. The same is true of the mental life. If I want to maintain a strong and active mental life, I have to fight. This struggle produces the mental balance called thought.
◈ (도덕성이라는 것은 우연하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서 미덕을 유지하여야 도덕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Morally it is the same. Anything that does not strengthen me morally is the enemy of virtue within me. Whether I overcome, thereby producing virtue, depends on the level of moral excellence in my life. But we must fight to be moral. Morality does not happen by accident; moral virtue is acquired.
◈ (나는 나에게 도전해 오는 것들과 투쟁하여 승리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거룩함을 유지합니다.) And spiritually it is also the same. Jesus said, “In the world you will have tribulation...” (John 16:33). This means that anything which is not spiritual leads to my downfall. Jesus went to say, “ .. but be of good cheer, I have overcome the world.” I must learn to fight against and overcome the things that come against me, and in that way produce the balance of holiness. Then it becomes a delight to meet opposition. Holiness is the balance between my nature and the law of God as expressed in Jesus Christ.
◈ (오늘의 idiom) (팜 음악계 전체) Tin Pan Alley = entire pop music industry.
◈ 주님은 은둔자도 아니셨고 자신을 부정하는 광신적인 성자도 아니셨으며, 사회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내적으로 세상과는 연계가 없으셨습니다. Our Lord was not recluse nor a fanatical holy man practicing self-denial. He did not physically cut Himself off from society, but He was inwardly disconnected all the time.
◈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주님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 때문이며 그 어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The only basis on which God can forgive us is the tremendous tragedy of the Cross of Christ. To base our forgiveness on any other ground is unconscious blasphemy.
◈ 거룩한 구별[성별(聖別)은 우리가 해야 하고 성결[聖潔]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주님이 관심을 가지신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판단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 일이 주님이 관심이 있는 일인지 또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Consecration (being dedicated to God’s service) is our part; sanctification (being set apart from sin and being made holy) is God’s part. We must make a deliberate determination to be interested only in what God is interested. The way to make that determination, when faced with a perplexing problem, is to ask yourself, “Is this the kind of thing in which Jesus Christ is interested or is it something in which the spirit that is diametrically opposed to Jesus is interested?”
◈ Christ is the answer to heartache,
Christ is the answer to pain;
Though by all others forsaken,
He at your side will remain.
상한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응답이라네
고통에도 그리스도가 응답이라네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아도
우리 곁에 계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거기 계시네
◈ God will never leave us nor forsake us.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신다.
◈ In creation we see God’s hand,
and in redemption we see His heart.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 Christmas is the season of peace. The Old Testament tells the story of how God set the stage to introduce the Prince of Peace (Isa. 9:6). Jesus came to break the cycle of sin and blame by making peace for us with God "through the blood of His cross"(Col. 1:20). Instead of blaming us for all the trouble we cause, He bore the blame for all of us. He is now recruiting followers who, having received His forgiveness, want others to receive it as well. 성탄절은 평화의 절기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평강의 왕(사 9:6)을 소개하기 위해 무대를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에 대해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골 1:20)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함으로써 죄와 비난의 악순환을 깨려고 오셨습니다. 우리가 일으킨 모든 문제에 대해서 우리를 비난하는 대신, 우리 모두를 위해 그 비난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로서 또한 다른 사람들도 이와 같은 용서를 받도록 원하여, 주님을 따를 사람들을 주님은 지금 찾고 계십니다.
◈ May the Lord make you increase and abound in love to one another and to all, just as
we do to you. —1 Thess. 3: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데살로니가전서 3:12
◈ The apostle Paul expressed his desire for the believers: “May the Lord make you increase and abound in love to one another and to all, just as we do to you” (1 Thess. 3:12). How much should we love God and others? More and more! .
바울사도는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3:12)고 하면서 신자들을 향한 자신의 소망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해야 할까요? ‘더욱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 You shall open your hand wide to [the poor].
—Deuteronomy 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명기 15:8
◈ A homeless man spends time in our local library. One afternoon, while I was writing there, I took a lunch break. After I finished the first half of a turkey and Swiss cheese sandwich, an image of the man’s face came to mind. A few minutes later, I offered him the untouched part of my lunch. He accepted. 노숙자 한 사람이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어느 날 오후,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있던 나는 점심시간이 되어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터키와 스위스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의 반쪽을 먹다가 그 사람의 얼굴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잠시 후, 그에게 아직 손대지 않은 다른 반쪽의 샌드위치를 먹겠냐고 했더니 그가 받았습니다.
◈ This brief encounter made me realize that with all that God has given me, I needed to do more to help those who are less fortunate. Later, as I thought about this, I read Moses’ instructions on providing for the poor. He told the Israelites: Do not “shut your hand from your poor brother, but . . . open your hand wide to him” (Deut. 15:7-8).
이 짧은 만남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으로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더 많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는 모세의 가르침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형제에게......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네 손을 그에게 펴라”(신명기 15:7-8)고 말했습니다. 활짝 편 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 An open hand symbolizes the way God wanted His nation to provide for impoverished people—willingly and freely. No excuses, no holding back (v.9). God had given to them, and He wanted them to give generously enough to supply whatever was “sufficient” for the need (v.8).
활짝 편 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기꺼이, 그리고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도와준다는 의미입니다. 변명하거나 망설이지 마십시오(9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공급해주셨고, 그들도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넉넉할”(8절) 정도로 충분히 공급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 When we offer open-handed help to the poor, God blesses us for our kindness (Ps. 41:1-3; Prov. 19:17). With His leading, consider how you might “extend your soul to the hungry” (Isa. 58:10) and freely give to help others in Jesus’ name.
우리가 손을 활짝 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하나님은 우리의 친절함으로 인해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시편 41:1-3; 잠언 19:17).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떻게 “당신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이사야 58:10),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 Grant us, then, the grace for giving
With a spirit large and free,
That our life and all our living
We may consecrate to Thee.
넓은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나누어주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과 하루하루의 삶이
주님을 향한 헌신이 되게 하소서
◈ You may give without loving,
but you can’t love without giving.
사랑 없이 줄 수는 있어도,
주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다.
◈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fountain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John 4:14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 East Africa is one of the driest places on earth, which is what makes “Nairobi” such a significant name for a city in that region. The name comes from a Masai phrase meaning “cold water,” and it literally means “the place of water.”
동부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있는 “나이로비”라는 도시이름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차가운 물”을 뜻하는 마사이 족의 언어에서 유래된 그 이름은 글자 뜻 그대로는 “물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 Throughout history, the presence of water has been both life-giving and strategic. Whether a person lives in a dry climate or a rainforest, water is a nonnegotiable necessity. In a dry and barren climate, knowing where to find the place of water can mean the difference between life and death.
역사를 통해 볼 때 물은 생명의 원천이요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것입니다. 건조한 곳에 살건 열대 우림에 살건 물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건조하고 척박한 지역에서 어디에 물이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 나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Our spiritual life also has certain nonnegotiable elements. That is why Jesus, upon encountering a spiritually thirsty woman at a well, declared to her that He alone could provide living water. He told her, “Whoever drinks of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will never thirst. But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fountain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John 4:14).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협상의 여지가 없이 꼭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적으로 갈급한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만이 생수를 줄 수 있다고 여인에게 선포하셨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고 말씀하셨습니다.
◈ Like the deer mentioned in Psalm 42:1-2 who pants for water, our souls thirst for God and long for Him (63:1). We desperately need the sustenance that comes only from Jesus Christ. He is the source of living water that refreshes our hearts.
물을 갈급해하는 시편 42:1-2의 사슴과 같이,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을 갈급해하며 그분을 갈망합니다(63: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올 수 있는 자양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생기를 찾게 되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 Rivers of living water,
Rivers of life so free,
Flowing from Thee, my Savior,
Send now the rivers through me.
생수의 강물
자유로운 생명의 강물
내 구주에게서 흘러나와
그 강물 이제 나를 통해 흐르게 하소서
◈ Jesus is the fountain of living water.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fountain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John 4:14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4:14
◈ East Africa is one of the driest places on earth, which is what makes “Nairobi” such a significant name for a city in that region. The name comes from a Masai phrase meaning “cold water,” and it literally means “the place of water.”
동부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있는 “나이로비”라는 도시이름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차가운 물”을 뜻하는 마사이 족의 언어에서 유래된 그 이름은 글자 뜻 그대로는 “물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 Throughout history, the presence of water has been both life-giving and strategic. Whether a person lives in a dry climate or a rainforest, water is a nonnegotiable necessity. In a dry and barren climate, knowing where to find the place of water can mean the difference between life and death.
역사를 통해 볼 때 물은 생명의 원천이요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것입니다. 건조한 곳에 살건 열대 우림에 살건 물은 협상의 여지가 없는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건조하고 척박한 지역에서 어디에 물이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 나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Our spiritual life also has certain nonnegotiable elements. That is why Jesus, upon encountering a spiritually thirsty woman at a well, declared to her that He alone could provide living water. He told her, “Whoever drinks of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will never thirst. But the water that I shall give him will become in him a fountain of water springing up into everlasting life” (John 4:14).
우리의 영적인 삶에도 협상의 여지가 없이 꼭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영적으로 갈급한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자신만이 생수를 줄 수 있다고 여인에게 선포하셨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고 말씀하셨습니다.
◈ Like the deer mentioned in Psalm 42:1-2 who pants for water, our souls thirst for God and long for Him (63:1). We desperately need the sustenance that comes only from Jesus Christ. He is the source of living water that refreshes our hearts.
물을 갈급해하는 시편 42:1-2의 사슴과 같이,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을 갈급해하며 그분을 갈망합니다(63: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올 수 있는 자양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생기를 찾게 되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 Rivers of living water,
Rivers of life so free,
Flowing from Thee, my Savior,
Send now the rivers through me.
생수의 강물
자유로운 생명의 강물
내 구주에게서 흘러나와
그 강물 이제 나를 통해 흐르게 하소서
◈ Jesus is the fountain of living water.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
◈ (주님은 은둔자도 아니셨고 자신을 부정하는 광신적인 성자도 아니셨으며, 사회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내적으로 세상과는 연계가 없으셨습니다.) If I dwell on the Cross of Christ, I do not simply become inwardly devout and solely interested in my own holiness—I become strongly focused on Jesus Christ’s interests. Our Lord was not recluse nor a fanatical holy man practicing self-denial. He did not physically cut Himself off from society, but He was inwardly disconnected all the time.
◈ (예수님 시대의 종교가들은 예수님이 먹는 것을 좋아하고 술주정뱅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성령의 성결이 세상 어떤 것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으셨습니다.) He was not aloof, but He lived in another world. In fact, He was so much in the common everyday world that the religious people of His day accused Him of being a glutton and a drunkard. Yet our Lord never allowed anything to interfere with His consecration of spiritual power.
◈ (주님은 우리가 외형적으로는 세상에 머무르나, 마귀의 침범으로부터 보호받고, 내적으로 죄악된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기도하였습니다.) It is not genuine consecration to think that we can refuse to be used of God now in order to store up our spiritual power for later use. That is a hopeless mistake. The Spirit of God has set a great many people free from their sin, yet they are experiencing no fullness in their lives—no true sense of freedom. The kind of religious life we see around the world today is entirely different from the vigorous holiness of the life of Jesus Christ. “I do not pray that You should take them out of the world, but that You should keep them from the evil one” (John 17:15). We are to be in the world but not of it—to be separated internally, not externally (see John 1&;16).
◈ (거룩한 구별[성별(聖別)은 우리가 해야 하고 성결[聖潔]은 주님께서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주님이 관심을 가지신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판단이 어려운 일을 만나면 이 일이 주님이 관심이 있는 일인지 또는 마귀가 좋아하는 일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We must never allow anything to interfere with the consecration of our spiritual power. Consecration (being dedicated to God’s service) is our part; sanctification (being set apart from sin and being made holy) is God’s part. We must make a deliberate determination to be interested only in what God is interested. The way to make that determination, when faced with a perplexing problem, is to ask yourself, “Is this the kind of thing in which Jesus Christ is interested or is it something in which the spirit that is diametrically opposed to Jesus is interested?”
◈ (오늘의 idiom) (계속적으로) time and time again = often or on many occasions.
Q. Not only has Dr. Dublin been a _______ regarded economist, but he has also proven in the past his ability to undertake massive economic transformation of the country.(A) luckily(B) highly(C) largely(D) gracefully
[번역] 더블린 박사는 아주 저명한 경제학자일 뿐 아니라 과거에 그 나라의 대규모 경제 개혁 맡았을 정도로 능력이 증명된 분이다.[정답] (B)
이것은 regarded라는 형용사를 수식하는 부사를 고르는 문제이다. 의미상으로 답에 접근하는 것이 highly와 largely일 것이다. 과연 이들 부사의 구분은 어떻게 할까?
* ‘very, extremely’의 의미를 가지는 highly - 아주, 매우[예문 1] Mr. Park is a highly successful salesman. 박 씨는 아주 성공한 판매원이다.
[예문 2] They met to discuss the highly controversial issue. 그들은 아주 논란이 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만났다.
* 100%는 아니지만 거의 100%에 가깝게(mainly)의 의미가 있는 largely - 대체로, 주로[예문 1] I am largely working with people who already are motivated. 나는 대체로 이미 동기가 부여된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예문 2] In the past, navigation depended largely on the position of the stars. 과거에 항해할 때는 주로 별의 위치에 의존했다.
highly와 largely의 의미가 충분히 구분되므로, 위 문제의 답 역시 구분된다. 참고로 나머지 두 가지 부사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luckily는 문장 내에 사용되는 경우보다는 문장 첫머리에 오는 경우가 많다.[예문 1] Luckily, we both love football.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둘 다 미식축구를 좋아해요.
[예문 2] Luckily for me, my husband spoke very good English. 다행히도 남편이 영어를 아주 잘해요.
gracefully는 ‘우아하게’라는 의미로 사용되며, 형용사 앞에서 수식하는 경우는 드물다.[예문] Experts say the keys to aging gracefully include accepting changes and finding meaningful activities. 전문가들은 우아하게 나이 먹는 방법의 핵심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활동을 찾는 것이다.
The singing bowl reminds us that we can’t expect life to go well if we ignore the instructions of the Designer (Deut. 4:40). Failing to obey divides us from one another and separates us from God. To fulfill His plan for the world and make the way of salvation known (Ps. 67:2), we need to follow His instructions about living and working peacefully together. When life doesn’t go well, it may be that we’ve stopped following God’s plan.
그 노래하는 그릇은 우리가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지시를 무시하면 인생이 잘 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신 4:40).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서로 분열되며 하나님께로 부터도 분리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을 만방에 알리기 위하여(시편 67:2), 우리는 함께 평화롭게 살고 일하라는 주님의 지시를 따라야 합니다. 삶이 순탄하지 않다면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은 주님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 때문이며 그 어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The only basis on which God can forgive us is the tremendous tragedy of the Cross of Christ. To base our forgiveness on any other ground is unconscious blasphemy.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인한 속죄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오직 초자연적인 영역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The revealed truth of God is that without the atonement He cannot forgive—He would contradict His nature if He did. The only way we can be forgiven is by being brought back to God through the atonement of the Cross. God’s forgiveness is possible only in the supernatural realm.
Christ is the answer to heartache,
Christ is the answer to pain;
Though by all others forsaken,
He at your side will remain.
상한 마음에는 그리스도가 응답이라네
고통에도 그리스도가 응답이라네
다른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아도
우리 곁에 계신 그리스도는 여전히 거기 계시네
God will never leave us nor forsake us.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으신다.
In creation we see God’s hand,
and in redemption we see His heart.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 (아래 내용은 다음에서 인용함) http://bethelpress.org/dailybread.php
Oh that men would praise the LORD for his goodness, and for his wonderful works to the children of men! For he satisfieth the longing soul, and filleth the hingry soul with goodness. 오 사람들이 주의 선하심과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행하신 그분의 놀라운 일들로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기 원하노라! 그분께서 사모하는 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혼을 선하심으로 채워 주시는도다. —시편 107:8, 9
Our granddaughter Julia spent the summer working in an orphanage in Busia, Uganda. On the final day of her internship, she went to the children to tell each one goodbye. One little girl named Sumaya was very sad and said to her, “Tomorrow you leave us, and next week the other aunties [interns] leave.” 우리 손녀 줄리아는 여름을 우간다의 부시아에 있는 고아원에서 일하면서 보냈습니다. 수습기간 마지막 날 줄리아가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다가가 작별인사를 할 때, 수마야라고 하는 어린 여자아이가 매우 슬퍼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은 이모가 떠나고 다음 주에는 다른 이모들(견습생들)이 떠나요.”
When Julia agreed that she was indeed leaving, Sumaya thought for a minute and exclaimed, “But we will be all empty. None of you will be left!” Again, Julia agreed. The little girl thought a few moments and replied: “But God will be with us, so we won’t be all empty.” 떠나는 게 맞다고 줄리아가 말하자 수마야는 잠시 생각하더니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여기는 텅 비어버리겠네요. 아무도 남지 않잖아요!” 줄리아는 그렇다고 다시 대답했습니다. 소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거니까 완전히 텅 비지는 않을 거예요.”
If we are honest with ourselves, we know that “all empty” feeling. It is an emptiness that friendship, love, sex, money, power, popularity, or success can never assuage—a longing for something indefinable, something incalculably precious but lost. Every good thing can remind, beckon, and awaken in us a greater desire for that elusive “something more.” The closest we get is a hint, an echo in a face, a painting, a scene . . . . And then it is gone. “Our best havings are wantings,” said C. S. Lewis. 우리는 사실 “텅 비어버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정이나 사랑, 성관계, 돈, 권력, 인기, 혹은 성공이 결코 달래줄 수 없는 공허함을 말하며,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말할 수 없이 소중하지만 잃어버린 그 무언가에 대한 갈망을 의미합니다. 모든 좋은 것은 그같이 표현하기 힘든 “더 나은 어떤 것”에 대한 더 큰 욕구를 갖도록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손짓하며, 또 일깨워줍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껏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떤 힌트나 얼굴에 스치는 메아리, 그림이나 장면 등, 그런 것일 뿐 그것도 곧 사라지고 맙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우리가 지닌 것 중 최고의 것은 갈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We were made for God, and in the end, nothing less will satisfy us. Without Him, we are all empty. He alone fills the hungry with good things (Ps. 107:9).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고 결국 그분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우리는 모두 텅빈 존재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린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시편 107:9). Dear Lord, fill me with Your goodness and love. I desire nothing in heaven and earth but You. Without You, I have nothing. Thank You for the abiding satisfaction that we can find in You.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으로 저를 채워주십시오. 이 천지간에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이 없다면 제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영원한 만족을 찾을 수 있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God cannot give us a happiness and peace apart from Himself because it is not there. 하나님은 하나님과 무관한 행복과 평화를 주실 수 없다.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Be who God meant you to be and you will set the world on fire.” (St. Catherine of Siena) |
✤ 2013년 12월 17일) 민주의사회 성명서 발표:
민주의사회가 대한의사협회 노환규 회장과 집행부를 향해 의료민영화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을 촉구했다.
민주의사회는 17일 성명을 내고 "지난 15일 전국의사 궐기대회의 이유는 원격의료 반대와 영리병원 반대를 포함한 잘못된 의료제도를 바로세우기 위한 것인데, 집회 이후 연일 방송과 인터넷에서는 의료민영화를 반대하기 위해 의사들이 집회를 했다고 보도해 투쟁의 본질이 왜곡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의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의료민영화와 시민들이 생각하는 의료민영화의 본질이 같아 보이지 않는다"면서 "종편 인터뷰에서 아나운서의 의료민영화 질문에 확실한 답변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분명한 답을 하지않고 질문을 피해가는 노환규 회장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하겠다"고 지적했다.
이 단체는 "실제 회원들이 바라는 것은 영리병원과 의료민영화에 대한 설익은 반대가 아니라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간섭에서 벗어나 정당한 보상을 받고 환자 진료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구축"이라고 강조했다.
민주의사회는 이와 함께 의사들이 주장해온 당연지정제 폐지와 건강보험 보험자 다변화에 대한 입장 표명도 요구했다.
[ 박진규 기자 hope11@rapport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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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doctorsnews.co.kr /news/articleView.html?idxno=92973
(다음은 홍*주 선생이 페북 플라자토크에 올린 글입니다.)
12.15 의사집회에 대한 16개 광역시도회장들의 평가가 한결같다...
1. 참석률이 높고, 좌파 언론의 반응이 좋으면, 무조건 성공한 집회인 건가? ---일면 이해가 된다. 이제까진 의사들이 일요날 모여 아무리 떠들어봐야 정부도 시민사회도 언론도 들어주는 이 없었으니...민주당과 보건의료노조,좌파 시민단체가 민영화 반대 "철도파업"과 엮어 의사집회를 한껏 띄워주고, 총리까지 나서서 앗 뜨거라 의료민영화 계획없다...즉각 반응하고 사회적 정치적 파장이 커지니 성공이라면 성공일 것이다. 특히, 노환규 집행부는 집회 기획의도 자체가 처음부터 자신들의 존재감을 입증하고 정치주가를 높이는 것이었을테니 틀림없이 성공했다....
2. 그러나 무엇을 얻기위한 투쟁인가가 완전히 빗나가버렸다. 의료사회주의자들의 프레임에 갖혀버렸다.---사적 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민간의사"들이 <의료민영화 반대>한다면, 앞으로 자진해서 병의원을 국가공공기관화 할테니 정부가 알아서 의사생계 책임져라...이런 얘기인 건가? 민주당 김용익과 좌파 의료사회주의자들이 그동안 주구장창 주장해왔던 <민간의료기관의 공공화, 의사의 공익적인간화>를 전격 수용한단 말인가? 16개 시도회장들은 이번에 한국의사들이 좌파의 <반시장경제 반민영화 반전문직자율성> 프레임에 갖혀버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나보다. 그것도 지난 대선에 패배하고 자신들이 원래 지니고 있던 민중민주주의 "종북성"을 여실히 드러내며 '막장 정쟁'에 올인해 망해가고 있는 좌파의 프레임에 갖혀 허우적대다니...참으로 민망스럽다!
3. 정부의 무모한 원격의료도입 정책에 대한 우려와 위기의식이 직접적 발단이 된 집회가 철도노조파업과 맞물리면서 의료민영화 반대로 귀결되는 건 한국의사 스스로를 부정해버리는 전략적 실패다.--- 반대로, 철도노조 파업 상황을 염두에 두고 그동안 우리 의료계가 숙원으로 생각해왔던 전략적 목표, 즉 방만한 건강보험공단 독점체제의 경쟁체제화, 민간보험도입을 통한 공공과 민간의 상호 경쟁체제 수립, 요양기관 강제지정제 폐지와 영리법인 허용 등 진짜 "의료민영화"의 목표들을 제기했다면, 철도노조파업의 주된 이슈인 민영화 반대와 대비되면서, 사회정치적 파장이 더 컷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시장경제론자들을 의사들 편으로 끌어들이고 우파 시민사회 속에서 강력한 동맹군을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또 그래야 의료계의 30년 앙시앙레짐이었던 소위 "관치의료"의 멍에를 풀고 "선진의료"를 구현할 기회가 오는 것 아니겠는가! 93%가 '민간'인 한국의료를 가지고 국가사회주의 무상의료를 실현하려는 좌파의 시대착오적 프레임에 덜컷 걸려들어 "날 잡아잡수쇼!" 하고 있는 처지가 된 것도 모르고...집회가 성공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