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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濫觴)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로 적은 물이란 뜻으로, 무슨 일의 시초나 근원이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濫 : 넘칠 남(氵/14)
觴 : 술잔 상
(유의어)
권여(權輿)
효시(嚆矢)
배를 띄울 정도의 큰 강물도 그 근원은 술잔을 띄울 정도의 작은 물이었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의 시발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순자(筍子) 자도편(子道篇)을 보면, 공자(孔子)가 그의 제자 자로(子路)를 훈계하여 “원래 양쯔강은 민산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시작될 때의 물은 겨우 술잔을 띄울 만하였다(昔者 江出於岷山 其始出也 其源可以濫觴)”라고 한 데서 비롯하였다. 그 밖에 공자가어(孔子家語) 삼서편(三恕篇)에도 실려 있다.
어느 날, 자로가 의관을 잘 차려 입고 공자를 만나게 되었다. 자로의 모습은 본 공자가 말했다. “중유(仲由)야, 너 왜 이렇게 거드름을 피우느냐? 양자강은 민산(岷山)에서 발원하는데, 그것이 처음 나올 때의 흐름은 겨우 술잔을 띄울 정도였다(夫江始出于岷山, 其源可以濫觴). 하지만 강나루에 이르러서는, 배를 띄우거나 바람을 피하지 않고서는 건너지 못하게 된다. 하류에 와서 물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오늘 너는 옷을 화려하게 차려 입고, 얼굴에는 거만한 빛이 가득하니천하에 누가 너에게 기꺼이 너의 잘못을 일러 주려고 하겠느냐?”
공자는, 매사에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이 말은 모든 일에는 시초가 중요하며, 처음이 잘되야 나중이 잘 된다는 뜻이다. 즉 자로에게 옷 입는 일부터 잘 해야 된다고 깨우쳐 준 것이다.
자로는 급히 나가서 옷을 갈아 입고 다시 들어왔는데, 그 표정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공자가 다시 말했다. “말을 꾸미거나, 행동을 자랑하거나, 아는 체 하는 사람은 소인이다. 군자는 아는 건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한다. 또 실천할 수 있는 건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실천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남상(濫觴)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로 적은 물이란 뜻으로, 무슨 일의 시초나 근원이 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번 고사성어는 술잔을 띄울 정도의, 또는 술잔에 넘칠 정도로 적은 양의 물을 뜻하는 남상((濫觴)이다. 어떤 일의 시작을 가리키는 말인데, 순자(荀子) 자도(子道)편에 실린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의 일화가 소개돼 있다. 외양보다는 내실에 치중해야 한다는 교훈에 대해 생각해보자.
남상(濫觴)의 남(濫)은 ‘띄우다’ 또는 ‘넘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상(觴)은 술잔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상’은 ‘술잔을 띄우다’, ‘술잔에 넘치다’라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술잔을 띄울 정도의, 또는 술잔에 넘칠 정도로 적은 양의 물을 뜻하는데, 어떤 일의 처음이나 시작을 가리키는 말이다. 처음에는 아주 적은 양의 물이었는데 그 물이 흐르고 흘러 하류에 이르면 거대한 강을 이루고 그 위에 배를 띄울 수 있으니, ‘넘칠 정도’보다는 ‘띄울 정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이 말은 공자와 그의 제자 자로(子路)의 대화에서 유래했다. 순자(荀子) 자도(子道)편과 공자가어(孔子家語) 삼서(三恕)편에 실려 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순자에 실린 내용이 좀 더 자세하다. 원문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자.
자로가 옷을 잘 차려입고 공자를 만나 뵀다. 공자가 말하기를 “유(由)야! 이렇듯 성대하게 차려 입은 것은 어째서이냐? 옛날 장강(長江)의 물이 민산(岷山)에서 나왔는데, 그 처음 흘러나올 때의 수원(水源)은 술잔을 띄울 정도였다. 그러나 저 강나루에 내려와서는 배를 타지 않고 또 바람을 피하지 않고서는 건너지 못하니, 이는 하류의 물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지금 네가 옷을 이렇게 성대하게 차려 입고 얼굴에 뽐내는 기색이 넘친다면 천하에 또 누가 너에게 잘못되었다고 충고해주려 하겠느냐?”라고 했다.
자로가 종종걸음으로 나와서 옷을 갈아 입고 들어갔는데 안색이 태연했다. 그랬더니 공자가 다시 말했다. “유야! 기억해 두어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마. 말을 신중히 하는 자는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행동을 신중히 하는 자는 자랑하지 않는다. 아는 척하고 유능한 체하는 자는 소인(小人)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니 이것이 말의 요체이다. 능한 것을 능하다 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능하지 못하다 하니 이것이 행동의 지극함이다. 말함에 요체가 있으면 지혜로운〔知〕것이요, 행동함에 지극함이 있다면 어진〔仁〕것이다. 이미 지혜롭고 어질다면 어찌 부족함이 있겠는가!”
이 이야기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추측컨대 아마도 자로가 공자의 제자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거나 혹은 벼슬을 시작한 초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자로가 성복(盛服), 즉 옷을 잘 차려입고서 공자를 뵈러 왔다. 왜 옷을 잘 차려 입었을까.
공자의 문하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그랬다면 스승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을 수 있다. 혹 벼슬을 시작한 초기에 그랬다면 좀 더 폼 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다. 어쨌거나 무슨 일을 처음 시작하는 즈음에 옷부터 신경 쓴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좀 더 잘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자로의 이름이 중유(仲由)이기 때문에 공자는 그를 ‘유(由)’라고 불렀다. 공자는 유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옷을 차려입고 왔느냐? 그리고는 장강(長江)의 물 이야기를 한다. 장강은 양자강(揚子江)의 다른 이름이다. 그 수원지(水源地)는 민산인데, 처음에 민산에서 물이 흘려 내려올 때 그 물의 양은 겨우 술잔을 띄울 정도의 적은 양의 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이 흐르고 흘러 나루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되면 거대한 강이 된다. 배를 띄우지 않으면 건널 수 없고 바람을 피하지 않으면 배가 뒤집힐 수도 있는 그런 거대한 강물. 그런데 그 시작은 겨우 술잔을 띄울 정도의 졸졸졸 흐르는 보잘것없는 물이었다.
공부를 시작하는 지금, 또는 벼슬을 처음 시작하는 이때에 그렇게 화려하게 차려입고 잘난체하는 얼굴로 다닌다면, 네가 혹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누가 기꺼이 그것을 알려주고 간언하려 하겠느냐. 자로는 공자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고, 걸음을 재촉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원래 입던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고 들어갔다.
안색이 태연했다는 것은 공자의 말에 당황하거나 화가 난 기색이 전혀 없었음을 보여준다. 스승의 말씀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그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제자로서 자로의 훌륭한 자질은 이런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공자는 자로에게 “기억해 두어라! 내가 너에게 말해주마” 하면서 좀 더 직접적으로 가르침을 준다. 말을 신중히 하는 자는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다. 행동을 신중히 하는 자는 자랑하지 않는다. 반대로 생각하면, 말이 많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말에 신중하지 않은 사람이고, 입만 열면 자기 자랑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행동이 신중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실제 지혜롭지도 유능하지도 않으며 다만 그런 척할 뿐이다. 공자는 그런 자들을 ‘소인’이라고 단정했다. 도량이 좁고 간사하며 오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대체로 ‘소인’이라 부른다. 소인의 반대는 ‘군자’이다. 군자는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또 자기 능력이 미치는 범위의 일이면 할 수 있다고 하고, 그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면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솔직함과 용기가 필요하다. 쉬운 일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몰라도 아는 척, 능력 밖의 일이어도 할 수 있는 척, 없어도 있는 척 하게 된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 중에 ‘있어빌리티’라는 말이 있다. ‘있다’와 ‘어빌리티(ability)’의 합성어로, ‘있어 보이게 하는 능력’이란다.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인데,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아는 척, 있는 척 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 돼 버렸다.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니 아마 공자와 자로가 살던 시대에도 이렇게 ‘척’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그런 사람을 못난 사람, 소인이라고 했다.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 즉 ‘군자’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능력이 미치지 않으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나이를 막론하고, 상하에 관계없이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세, 즉 ‘불치하문(不恥下問)’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자신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말에 신중한 사람은 요란스럽게 떠들지 않고, 행동에 신중한 사람은 쓸데없는 자랑을 늘어놓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말과 행동을 보여줄 뿐이다. 이것을 공자는 말의 핵심이고 행동의 지극함이라 했고, 그것 자체를 ‘지(知)’와 ‘인(仁)’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를 갖췄다면 그는 인격적인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외양보다는 내실(內實)에 치중하고, 허영심이나 과시욕 같은 겉치레는 처음부터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마음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 커져서 결국 너를 삼키고 너를 망치게 될 것이다. 공자가 ‘남상’의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맞은 지 열흘 남짓 됐다. 자못 기대가 된다. 지난 몇 년간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돌아보니 왜 공자가 ‘겉치레’에 치중하는 사람을 그토록 경계했는지 알겠다. ‘의전(儀典)’만을 그렇게도 중시했다던 그 사람. 그가 평소에 보여준 삶의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말의 진정성에 왜 좀 더 주목해야 했는지 알겠다. 그 모든 것이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사상 초유의 사태, 그 ‘남상’이었기 때문이다.
남상(濫觴)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기간 중에 중국의 한 관영(官營) 매체에서, 스키(ski)의 발상지가 중국이라는 기사를 냈다. 발상지(發祥地)는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어떤 일이나 사물이 처음 나타난 곳을 가리키는데, 그 중국 매체의 기사에 의하면 중국이 스키의 원조(元祖)가 되는 셈이다.
원조(元祖)는 (1)첫 대의 조상, (2)어떤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 (3)어떤 사물이나 물건의 최초 시작으로 인정되는 사물이나 물건’ 등의 의미를 갖는데, 발상지와 관련하여서는 (2)와 (3)의 의미가 적용될 것이다. 또한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시작되어 나온 맨 처음’이라는 뜻의 효시(嚆矢)와 ‘나중 것의 바탕이 된 맨 처음의 것’의 의미인 비조(鼻祖), 그리고 ‘사물의 처음이나 기원’을 이르는 남상(濫觴)도 원조와 유사하게 쓰인다.
그중에서 남상(濫觴)은 공자(孔子)가 한 말로 전해지고 있다. 배를 띄울 정도의 큰 강물도 그 근원은 술잔을 띄울 정도의 작은 물이었다는 뜻으로, 모든 사물의 시발점을 가리키는 말이다. 순자(荀子) 자도편(子道篇)에, 공자가 그의 제자 자로(子路)를 훈계하여 “원래 양쯔강은 민산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이 시작될 때의 물은 겨우 술잔을 띄울 만하였다(昔者 江出於岷山 其始出也 其源可以濫觴)”라고 한 말에서 비롯하였다. 그밖에 가어(家語) 삼서편(三恕篇)에도 실려 있다.
남상(濫觴)은 위와 같이 ‘술잔을 띄움’으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잔 하나를 넘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모두 적은 정도의 양을 의미한다. 또한 ‘江出於岷山’의 강(江)은 보통 명사가 아니라 ‘장강(長江)’을 뜻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외국에서는 보통 ‘양쯔강(揚子江)’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강 전체는 ‘창장(長江)’이라 하고, 그 하류 부분을 ‘揚子江’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더불어 공자는 장강의 근원이 민산(岷山)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더 서쪽에 위치한 탕구라산(唐古拉山 당고랍산)이 장강의 발원지라고 한다.
스키의 발상지와 관련하여 원조(元祖)나 효시(嚆矢)나 비조(鼻祖) 대신 굳이 남상(濫觴)의 고사를 들먹이는 것은, 강의 흐름과 연관된 ‘남상’에는 문화의 역사성을 시사(示唆)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일정한 목적이나 이상을 실현하고자 만든 생활양식이나 행동 양식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그 개념을 보면, 문화에는 기본적으로 ‘목적이나 이상’이라는 ‘필요성’이 내재해 있다. 즉 하나의 문화는 어떤 필요성을 전제로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필요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필요에 의하여 태동한 어떤 문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필요성에 변화가 생긴다. 현재적 필요성이 유지되면 그 문화는 계승, 발전하지만, 필요성이 없어지면 그 문화는 쇠퇴와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된다. 그 과정에서 문화는 역사성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일정한 역사성을 지니고 현재적 필요성이 있는 문화는 비로소 전통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전통 있는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장강(長江)의 큰 물줄기는, 남상(濫觴)의 작은 물줄기가 면면(綿綿)히 흐르면서 다른 작은 물줄기들을 수없이 껴안는 수고를 되풀이했기에 이루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의 역사성과 남상(濫觴)의 고사(故事)를 연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남상이 의미 있는 것은 장강을 이루었기 때문이고 장강이 형성된 것은 남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상이 과거의 미미한 출발이라면 장강은 현재의 거대한 흐름이다. 문화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현재의 김치가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거대한 흐름이라면, 채소류를 절여서 먹었던 고대의 문화는 미미한 출발이었던 셈이다. 물론 채소류를 절여서 먹는 문화는 세계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절인 채소에 고춧가루를 넣는다든지, 거기에 덧붙여 19세기에 반결구(半結球) 형태의 배추를 이용한 발효 배추김치를 탄생시킨 것은 오직 우리뿐이다. 따라서 지금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건강식품인 김치의 발상지는 조선이며 그래서 그 원조는 대한민국이다.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에서 발견된 4,000~5,000년 전의 암각화에 스키를 타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대단한 사건이다. 물론 북유럽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스키를 이용하여 이동하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나 중국 암각화는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 이동 수단으로 스키를 이용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문제는 중국의 태도이다. 우선 그들은 암각화의 제작 시기가 최고 1만 2,000년 전이라고 하며 중국이 스키의 발상지라고 선언했다. 함께 연구한 호주 연구진에서는 동의한 바가 없다. 자신들이 원조임을 내세우고자 무리하게 그 제작 시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혹 그들의 주장처럼 1만 전 이상의 시기부터 그 지역에서 스키를 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위구르 사람들의 스키이지 중국의 스키가 아니다.
신장 지역이 중국에 편입된 것은 18세기인 청나라 때이다.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가 1949년 중국 공산 정권에 의해 무력으로 점령되면서 지금의 중국 영토가 된 것일 뿐이다. 암각화의 스키 타는 사람은 위구르 사람이지 중국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위구르의 스키는 역사성이 없다. 그들의 스키가 어떻게 계승되고 발전되었으며 어떤 경로로 다른 지역에 전파되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남상(濫觴)’은 말라 버린 지 오래되었고, 지금은 그 지역에서조차 서양식의 스키를 타고 있다. 그런 것을 암각화 하나만으로 발상지(發祥地)라고 한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기껏해야 스키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일 뿐이다. 스키의 원조(元祖)니 발상지(發祥地)니 하는 말을 붙이려면, 위구르의 스키 문화가 세계화되었거나 적어도 중국에는 퍼졌어야 할 것이다.
김동리의 '화랑의 후예'에는 시대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낡은 관념에 사로잡혀 가문에 대한 자부심만으로 살아가는 황 진사가 등장한다. 급기야 자신의 먼 조상이 화랑(花郞)이었음을 알고는 감격해 한다. 왠지 그 황 진사의 모습에, 김치, 태권도, 한복, 골프, 스키의 발상지 또는 원조가 자신들이라고 우기며 흡족해하는 중국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렇게 원조(元祖) 좋아하면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원조만큼은 왜 한사코 감추려고 할까? 지금 중국은, 20세기 후반에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의 28자 방침을 잊은 것 같다.
冷静观察(냉정관찰) : (외교적 행동을 하기 전에) 국제정세를 먼저 냉정하게 관찰하라.
稳住阵脚(은주진각) : 내치에 집중하여 국내의 질서와 안정을 공고히 하라.
沉着应付(침착응부) : 상황과 능력을 고려해 침착하게 대처하라.
韬光养晦(도광양회) : 밖으로 능력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실력을 기른다.
善于藏拙(선우장졸) : 어리석은 척 낮은 자세를 유지하고 조용하고 겸손해야 한다.
决不当头(결부당두) : 절대로 앞에 나서거나 우두머리가 되려 하지 말라.
有所作为(유소작위) :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때만 나서서 한다.
▶️ 濫(넘칠 람/남, 동이 함)은 ❶형성문자로 滥(람)은 통자(通字), 滥(람)은 간자(簡字), 灠(람)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범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監(감, 람)으로 이루어져 물이 넘쳐 퍼진다는 뜻이 전(轉)하여 넘친다는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濫자는 '넘치다'나 '퍼지다', '탐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濫자는 水(물 수)자와 監(볼 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監자는 물이 담긴 대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대야를 보고 있는 모습을 그린 監자에 水자를 결합한 濫자는 물이 넘치는지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정도가 과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남발(濫發)하다'라고 하면 말이나 행동 따위를 함부로 하는 것을 뜻하고 '남용(濫用)하다'는 기준을 넘어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濫(람, 함)은 ①넘치다 ②퍼지다 ③뜨다 ④띄우다 ⑤훔치다 ⑥탐(貪)하다 ⑦외람(猥濫)하다(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분수에 지나치다) ⑧담그다 ⑨함부로 하다 ⑩마구하다 ⑪범람하다 ⑫뜬 소문 ⑬허언(虛言) 그리고 동이 함의 경우는 ⓐ동이(질그릇의 하나)(함) ⓑ목욕통(沐浴桶)(함) ⓒ샘(함)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주제넘을 참(僭), 넘칠 범(氾), 넘칠 일(溢), 넘칠 창(漲), 외람할 외(猥)이다. 용례로는 정해진 규정이나 범위를 벗어나서 함부로 쓰거나 행사함을 남용(濫用), 법령이나 증서 따위를 마구 공포하거나 발행하는 것 또는 말이나 행동 따위를 마구 함부로 하는 것을 남발(濫發), 재물을 함부로 소비함을 남비(濫費), 차례나 방법 및 체계가 없이 아무렇게나 읽음을 남독(濫讀), 짐승이나물고기 따위를 마구 잡는 것을 남획(濫獲), 나무를 함부로 벰을 남벌(濫伐), 물건의 질은 보장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많이 만듦을 남제(濫製), 마구 제조함을 남조(濫造), 일정한 기준도 없이 함부로 상을 줌을 남상(濫賞), 이유 없이 함부로 벌주는 일을 남벌(濫罰), 글의 내용을 사실에 어긋나게 함부로 적음을 남기(濫記), 법령이나 규칙 등을 함부로 범함을 남모(濫冒), 법령을 어기거나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 함부로 무역함을 남무(濫貿), 분수에 지나치고 번다함을 남번(濫煩), 분수에 지나치게 넘침을 남분(濫分), 지나치게 여색을 좋아함을 남색(濫色), 물이 넘쳐 흐름 또는 바람직하지 못한 것들이 크게 나돎을 범람(汎濫), 하는 짓이 분수에 지나침을 참람(僭濫), 너무 한도에 지나침을 태람(太濫), 거짓됨과 문란함이나 참람함을 가람(假濫), 거짓이 범람함을 위람(僞濫), 번거롭고 지나침을 번람(煩濫), 분잡하고 지나침을 분람(紛濫), 구차하고 지나침을 구람(苟濫), 탐욕을 부림이 지나침을 탐람(貪濫), 하는 짓이 완악하고 외람됨을 완람(頑濫), 우를 함부로 분다는 뜻으로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체하는 것이나 또는 외람되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말함을 남우(濫竽), 술잔에 겨우 넘칠 정도의 작은 물이라는 뜻으로 큰 강물도 그 근원은 술잔이 넘칠 정도의 작은 물에서 시작한다는 남상(濫觴), 무능한 사람이 재능이 체하는 것이나 또는 외람되이 높은 벼슬을 차지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남우충수(濫竽充數) 등에 쓰인다.
▶️ 觴(잔 상)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뿔 각(角; 뿔)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상은 昜(볕 양)자, 矢(화살 시)자가 결합한 모습으로 傷자의 상단에 있는 것은 화살을 뜻하는 矢자가 변형된 것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觴(상)은 ①잔(盞) ②잔을 내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한 번 받은 술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남길 때 벌주로 크게 한 잔 더 마시기로 하는 따위의 술 자리에서의 약속으로 술좌석에서의 이른바 주령을 상정(觴政), 술을 마시면서 시가를 읆음을 상영(觴詠), 보옥으로 만든 술잔을 보상(寶觴), 잔을 물에 띄워 보냄을 유상(流觴), 강신降神을 빌기 위하여 술을 땅에 따를 때의 잔을 뇌상(酹觴), 술이 들어 있는 술병과 술잔을 호상(壺觴), 환갑잔치 같은 때 오래 살기를 비는 뜻으로 잔에 술을 부어서 드림을 칭상(稱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함을 교상(交觴), 옥으로 만든 술잔 또는 술잔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을 옥상(玉觴), 술잔에 겨우 넘칠 정도의 작은 물이라는 뜻으로 큰 강물도 그 근원은 술잔이 넘칠 정도의 작은 물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남상(濫觴), 한 잔 술을 마시고는 한 수의 시를 읊음을 이르는 말을 일상일영(一觴一詠), 작고 큰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즐기는 모습을 이르는 말을 접배거상(接杯擧觴)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