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 공터 외 4편
공터
우리는 과장주의자. 칠 벗겨진 정글짐이 무서워서 공터를 벗어나지 못한다. 마침 해가 넘어가려는 때였고 너는 희망을 드리블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차도 생겨나지 않는 골대. 도심에 이렇게 큰 공터는 흔치 않아. 울음소리만 들리는 어제의 새에 대해 말해줄까. 새소리의 궤적으로 점점 차오르는 공터. 쉴 새 없이 공명하는 기관들. 이제부터 저 새를 공터의 성대라고 부르자. 우리는 귀가 먹먹해지도록 희망을 굴린다. 정말 도심에 이렇게 큰 공터는 흔치 않아. 너는 반복해서 말하는 버릇이 있고 나는 흘려듣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광장주의자. 정글짐 위로 새소리를 힘껏 날린다. 어제 날아간 새가 하늘에 단단히 박힌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어두워지는 공터를 본다.
레몬의 창가에서
나무를 잠가버린 건 내 잘못
가지가 환해지려면 우정이 필요하고
레몬의 신맛에 대해서는 누구나 관대해질 수 있다
레몬의 말투를 우려낸 창틀
무릎선을 눈썹까지 밀어 올린 지붕들
땅딸보 아저씨네 강아지는 아직도 꽃씨를 물어뜯을까
레몬을 반으로 자르면 세계에 불이 켜진다
말하자면
흰 고양이의 춤과
음표를 파고드는 손가락
무혐의를 흔드는 저녁의 지느러미
고백하는 것만으로 창가는 어두워지고
레몬을 모두 꺼버린 나무 아래
너와 내가 서로의 절반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잘 부탁해
풀밭 서재에 꽂힌 어느 계절의 안녕들
그러니까 한 번 열리면 닫히지 않는 레몬의 저녁들
내가 튤립입니까
난 화단을 가꿔요
꽃의 자매처럼
그녀가 더 이상 피지 않는 것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을 주다 돌아보았다고
내가 튤립입니까 그건 이치에 맞지 않잖아요 네?
아름다움의 기둥이 미지란 건 익히 알고 있죠
확고할수록 미궁에 빠진다는 것도요
물조리개를 기울여
대지와 환호성과
꽃들의 호흡이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물줄기들로 짚어보았다
사랑은 일시적 구원
일시적이라는 말이 두려워 영원을 발명했다
잘못 짚었어요
그녀가 컵에 물을 따르며 말했다
내가 틀립니까
여름 인쇄하기
밤이 포장지를 뜯어서 달이 튀어나오고 새를 깨뜨려서 꽃이 핀다
너와 동그라미를 나란히 놓으면 분수가 시작되지 마음에 빠진
수평선이 구명보트를 던져 풍랑 일으킨다
빠짐없이 받아적었니
울어도 소리 난 적 없는 너를 위해 악보는 있고 울음으로 빚은
음정들이 팽창하고 폭발하고
음표로 다시 모여들어
음악이 감긴 두루마리야 너는
풀어도 풀리지 않는 귓속말이
선율을 쥐고 달린다
마음이 호흡하지 않는다면 우린 어떻게 울창해질까
너는 말이 인쇄된 흙이고 한 사람이고 공기여서 깊이 파묻히거나 내뱉을 수 있다*
달이 밤을 삼키고 도화지에 물결을 그려서 풍랑을 가둔다
동그라미를 지워서 분수대가 사라진다
읽을 수 있겠니
같은 자리에만 맺히는 꽃을 깨진 새를 구명보트를
전원을 끄자 화음으로 가득 찬 귀가 쏟아진다
*강주, 「비인칭의 오늘」
휴일들1
카프카를 읽다가 스카프를 고쳐 매는 사람들
수신호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운명을 운전이라고 우기는 사람들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또 끓어오르는
농담과 냉담의 싱크로율
활공은 한 통 남은 두통약을
한꺼번에 삼킬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눈물 위에서 서핑하는 사람들
그림자를 접어 지갑에 넣는 사람들
애정행각은 뿔이 몇 개일까
화가도 아니면서 자주 화가 나는 사람들
카모족族은 양의 내장으로 비 오는 날을 점친다
달력을 넘기다 로마로 가면
달려가던 아이가 풍선을 놓친다
시간에 푹 빠진 사람들이 서둘러 시든다
풍선은 남고 아이는 높이 높이
물은 끓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 지관순 약력
제10회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
2024년 아르코창작지원금(발표지원) 수혜.
제19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이메일 ksvioletta@hanmail.net
■ 심사평
이번 제19회 지리산문학상에는 120편이 넘는 시집 원고가 응모되었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들의 이름이 눈에 많이 띄었다. 예심부터 쉽지가 않았다. 1차 예심을 통과한 30여 작품집을 예심위원들은 꼼꼼하게 읽었다. 그중 6명의 작품집이 본선에 오른다. 신정민 강재남 강 주 예심위원들은 시집발간을 위한 원고이기에 전편이 고른 응모작을 우선 추천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아깝게 본심에 올리지 못한 작품이 많아서 아쉬웠다고 전했다. 30여 작품집을 전수 읽은 예심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본심에 오른 시집 제목(예심 통과 접수순)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철크덕 철크덕』 『우는 이와 웃는 이』 『양수인간』 『한 여자를 스무 가지의 이름으로 불러보다』 『꽃의 배후』
모두 여섯 분의 작품이 무기명으로 심사위원 앞으로 전달되었다. 다양하고 깊이 있는 미학적 성취와 가능성으로 이분들의 작품은 한결같이 지리산문학상의 제고된 위상을 보여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온라인 심사 결과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철크덕 철크덕』 『우는 이와 웃는 이』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오프라인으로 모임을 갖고 다시 토론 끝에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우는 이와 웃는 이』로 압축이 되었으며 심사위원의 최종 결정은 지관순 시인의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이었다. 아래는 각 심사위원의 심사평을 종합해 놓은 것이다.
감각과 감성의 조화
세 명의 심사위원은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 외 49편’(이하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로 표기)을 올해 지리산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에 합의하였다. 이견은 없었다. 물론 마지막 단계까지 함께 거론된 다른 시인들의 작품이 있었지만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를 선정한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시에 대한 원론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어서였다.
다시 말해 시가 다양한 방식과 시도를 통해 시 자체의 완성도를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면 버찌의 스물여섯 번째 도서관는 시인의 독창적 감각으로 시 언어, 세계에 대한 시선, 상상력, 그리고 빗댐을 끌어들이면서 공감적 감성을 드러내어 과도하지 않게 시인의 의식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시 쓰기의 경험을 오래 한 사람만이 가능한 독창적 상상과 개성적 표현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심사 의견이 있었다. 더불어 시적 대상을 매개로 한 새로운 상상과 세련된 어법을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분적 시상들의 연결고리가 단단하여 작품 전체의 완결성과 안정감을 확보하고 있다는 의견과 함께 시편들이 주제의식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고 문맥 깊숙이 내장하는 솜씨로 신뢰감을 주고 있다는 심사 의견이 있었다. 또한, 심사 대상인 시편들이 모두 일정한 수준의 균질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심사 의견도 있었다.
특히 시 「공터」는 현대인의 내면을 ‘공터’로 치환하여 보여주는 녹록지 않은 시력(詩力)을 보여주고 있으며 시 「내가 튤립입니까」에서는 언어유희라기보다는 언어통찰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적 미감이 돋보였다. 그리고 시 「휴일들1」에서는 세계에 대해 한 걸음 물러서서 그 본질을 파헤치고자 하는 시인의 비판적 감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언어유희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한 심사 의견이 있었다. 수상 시인은 시가 하나의 언어유희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보면서 진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문제를 유희적 감각을 가지고 접근했을 때 그 진정성이 감쇄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수상작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동음이의적 시어의 착종이 빚어내는 색다른 이미지와 의미로 말미암아 의외성을 경험하게 하고 이 점은 수상 시인의 전략적인 의도로 보이며 다른 시인의 시와 변별하게 하는 개성으로 읽혔다. 시에 대한 시인의 이 유희적 인식이 현실을 너무 멀리 두거나 깊숙이 감출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하게 한다면 우리 시단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것임을 믿는다.
올해 지리산문학상 수상작의 전반적인 강점은 ‘감각과 감성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형식이나 내용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적절한 조화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시의 활력은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후보에 오른 다른 시인들의 작품 역시 탄탄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모두의 좋은 시들을 읽어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수상을 축하한다.
이처럼 지리산문학상 심사 과정의 공정성과 엄정함을 피력하면서, 지관순 시인의 수상을 거듭 축하한다. 한국 시의 진경을 열어가는 모습을 지속해서 보여주길 소망한다.
심사위원 : 복효근(시인), 이형권(문학평론가), 윤의섭(시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