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81
7월9일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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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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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_0-e-soL09k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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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나이가 좀 더 들면 두려움꺼리가 조금씩 줄어들겠지, 희망해왔습니다. 그러나 웬걸, 정작 나이를 먹어갈수록, 여전히 다양한 측면의 두려움이 남아있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두려움인 노년기와 죽음에 대한 강도 높은 두려움에 시달리는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 건네시는 위로의 말씀이 참으로 달콤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오 복음 10장 31절)
제 개인적으로도 그토록 오랜 세월 죽음에 대해서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꽤나 두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게 최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신 분이 계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우리 시대 탁월한 대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자신이 꿈꾸고 희망했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요약하고 종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친밀함의 대상으로서의 죽음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는 죽음
-세심하게 준비하는 죽음
-반가운 친구 같은 죽음
-상실이 아니라 성취로서의 죽음
-가장 인간다운 행위로서의 죽음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독특한 표현을 동원해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데, 참으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나를 붙잡아주실 존재, 아버지에게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 일생 전체를 아버지께 송두리째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내 손을 아버지 손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죽음을 향한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렇게 격려해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곧 당신이 죽음을 향해서 점프할 때, 저 건너편에는 하느님께서 이미 당신이 도착할 그 자리에 딱 지키고 서 계실 것입니다.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손과 팔을 펼치기만 하십시오. 반드시 그분께서 당신을 꼭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믿으십시오.”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덧붙여서 불후의 명문장 하나를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내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가장 큰 증거요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비록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지만, 영혼은 한 마리 예쁜 나비처럼 그 비루하고 추했던 육신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을 향해 훨훨 날아갑니다.
우리도 조만간 다가올 죽음을 멋지게 잘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100% 우리에게 손님처럼 찾아올 그날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헨리 나웬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 각자의 죽음이 남아있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죽음이 주님의 확고한 현존과 하느님 나라가 반드시 있음을 확증하는 아름다운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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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짙은 어둠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김창옥 강사가 오랜 강의로 지쳐 우울증이 걸려있을 때였습니다. 소통과 치유 등을 주제로 강의했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부질없이 느껴졌습니다. 길을 찾고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노(老) 수사신부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신부님은 침묵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침묵을 어디서 배우냐고 묻자 수도원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프랑스 마콩이라는 수도원에 들어가 잠시 피정을 하라는 권고였습니다.
하도 절박했기에 그는 생전 처음으로 2주의 휴가를 내서 프랑스 시골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는 어차피 말이 안 통하니 침묵을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짧지만 진실 되게 자신과 대화해 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기가 두려웠습니다. 며칠이 지나 그 날도 과수원에 앉아 있는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너 여기까지 잘 왔다!” 별 말이 아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는 그 위로를 그렇게 갈망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강사가 자신이 믿지도 않는 종교가 운영하는 외국 피정 집에 귀중한 2주간의 휴가를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절실하면 얻게 됩니다.
대부분 길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길을 찾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길을 제시해주면 시큰둥합니다. 방황을 끝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혹은 자기 방식으로 끝내고 싶은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지만 또한 끊임없이 그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누군가와의 만남은 내 자신과의 헤어짐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느님이 있다는 증거를 대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통령의 옷까지 벗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대통령의 옷을 벗지 못하면 하느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대통령의 옷을 벗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를 벗어야 그분을 입을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생각을 멈춰야 그분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성경이나 영성가들의 말에 의하면 하느님과의 만남은 늘 어두운 곳에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분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둠에서만 구별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할 때 그 빛이 보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어둠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어둠속에서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둠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김창옥 강사는 자신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 스스로 빛을 찾아내겠다고 돌아다녔다면 자신의 우울증을 끊어버렸던 저 목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방황할 때,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싶을 때,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야 합니다. 어둠이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순하게 홀로 멈추어서면 됩니다.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어둠입니다.
세상 것에서 빛을 찾지 않는 것이고 내 스스로도 빛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앉아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만나지 못할까요? 계속 빛을 찾아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짙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십계명을 내려주셨습니다.(신명 5,22참조) 하느님께서 성막의 지성소에서 모세를 만나 이야기 하실 때도 지성소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짙은 어둠의 공간이었습니다.
각자의 지성소가 있고 그 어둠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이를 십자가의 성 요한은 ‘어둔 밤’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두워지지 않으면 그분은 빛으로 오실 수 없습니다.
배부를 때보다 배가 고플 때 그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골똘히 생각할 때보다 생각의 끈을 놓았을 때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기쁠 때보다 어둠으로 짓눌릴 때 그분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고 하십니다. 분명 그분은 어두운 곳에서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밝아집니다
말씀으로 등불을 삼고 싶다면 어둠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어둠속에 머물 줄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을 주님은 예언자로 만드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끊으면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어둠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분과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어둠 속에 있어야 말씀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 머무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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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24-33: 육신만 죽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25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에 우리가 그분과 같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이다. 제자들은 자신을 스승이나 주님보다 더 높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종이라 하시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요한 15,15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박해자들의 위협이나 모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이 심판 날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에서 나오는 “어두운 곳, 밝은 곳, 귓속말, 지붕 위(27절)라는 말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어둠이고 밤이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높은 곳에서 선포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28절) 육체적으로는 죽일 수 있지만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28절)이시다.
이 멸망은 묵시록에서 “두 번째 죽음”(20,6)이라고 하며 이 죽음은 지옥에서 겪게 될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참새는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작은 것이다. 그러나 그 참새조차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알고 계신다는 뜻이다. 미물까지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알고 계시겠는가?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섭리로 돌보신다.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참새의 생명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하느님을 안다고 증언해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32절)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지 않으면,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어도 아무 소용없다.
고백의 뿌리는 마음의 믿음이다. 고백은 믿음의 열매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한, 뿌리는 가지나 잎을 만들어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 사도 바오로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로마 10,10) 하였다. 마음의 믿음이 없다면 입으로 고백할 수 없으며, 마음의 믿음도 입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게 하여 입으로 늘 고백의 씨앗을 뿌리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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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무너져가는 집을 복구하여라.’라는 제목으로 김평만 신부님의 연재가 지난 6월 26일 30회를 끝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연재의 마지막에 신부님께서 했던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하느님의 집인 우리 영혼은 자신의 사명을 거부하고 하느님 아닌 것들을 우상숭배 함으로써 황폐해졌다. 그리고 인간 공동체는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방이 받아 마땅한 것을 그에게 되돌려주지 않음으로써 상생의 집이 되어주는 사명을 등한히 하였다. 또한 우리는 모두 생명체의 집이며 우주에서 보석처럼 찬란히 빛나는 지구를 훼손하여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집들을 재건하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경륜을 펼치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 그리고 교회는 가톨릭사회교리를 통해서 사회 공동체를 치유하고 무너져 가는 지구를 재건할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종은 누가 그것을 울리기 전까지는 종이 아니다. 또한 노래는 누가 그걸 부르기 전에는 노래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것들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구현해 나가는 것이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 때이다.”
무너져가는 집은 우리들 각자의 영혼이며, 우리가 사는 공동체이며, 우리가 잠시 머물다가는 지구입니다. 우리들이 섬기는 우상은 ‘재물, 권력, 명예’입니다.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학원에도 가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유학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 희생, 나눔’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첫째가 되려는 자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우리가 겸손, 희생, 나눔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세리, 죄인, 가난한 이, 불쌍한 이, 감옥에 갇힌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가난한 이, 불쌍한 이, 외로운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만 자연은 받은 대로 돌려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연을 상처내고, 훼손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반드시 되돌려 줄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고, 함께 한다면 자연은 우리에게 삶의 보금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번 주 본기도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내가 마당을 쓸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깨끗해집니다. 내가 꽃 한 송이 심으면 지구의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집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면 지구가 온통 아름답고 밝아집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너져가는 집을 지키고 보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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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대상’과 관련되어 쓰였습니다. ‘의회에 넘기고, 채찍질하고, 미워하고 죽이려는 자들’(마태 10,17-23절 참조), 곧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그들”입니다. 세 번째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하느님이십니다. 네 번째는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인데, 하느님께서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만큼 귀한 이들이 바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두려워해야 할 것’이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며 허세를 부릴 때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말고는 모든 것이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노후, 그리고 일과 사랑에서는 두려움을 느끼지만, 진실을 말하고 정의를 외치며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겁쟁이’가 되었는지조차 모를 수도 있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엄마, 아빠에 대한 믿음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머리카락 한 올도 손댈 수 없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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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육신과 영혼>
마태오 10,24-33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육신과 영혼>
육신은 움츠러들지언정
영혼은 굳건하여라
육신은 비틀거릴지언정
영혼은 꼿꼿하여라
육신은 쓰러질지언정
영혼은 솟아올라라
육신은 더럽혀질지언정
영혼은 깨끗하여라
육신은 죽을지언정
영혼은 끝까지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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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두려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경외심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합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효가 늘어갔습니다. 진정한 두려움은 주님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창세15,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게도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곁에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준다.”(이사41,10) “내 가르침을 마음속에 간직한 백성아, 사람들의 모욕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악담에 낙심하지 마라.”(이사51,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하다.”(마태10,31)고 하셨고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고 하시며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2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힘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전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분명 ‘아니오’하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적인 힘도 천상 생명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나를 귀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드러나게도 부르시고, 때로는 침묵하시고, 때로는 어떤 일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때에 그분의 뜻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응답은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이 뒤 틀릴 때, 그때야말로 결단의 순간이고 신앙이 증거 되어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은 사랑이시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8,38). 주님께서는 우리의 힘이시니 주님을 경외하고 세상 것에 두려워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잘 왔다. 그간 내 뜻대로 살았으니 이제 편히 쉬어라.’ 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까? 아니면, ‘너는 아무래도 잘못 온 것 같다. 좀 더 단련을 받아야 하겠는 걸?’ 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주변 사람에게 원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과 봉사의 삶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세례명을 받은 선택받은 신앙인의 품위를 지켜 주님과 하느님 아버지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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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트에 갔다가 바닥에 엎드려서 울며 떼쓰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엄마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난리입니다.
엄마는 “이 장난감은 너 가지고 있잖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없어. 없단 말이야.”라는 말만 반복해서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엄마가 없는 것을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없다고 우기는 아이를 향해 누나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 말이 맞아. 너 이 장난감 분명히 가지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이 누나도 엄마와 입을 맞춰서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일까요?
아이는 보통 모든 것을 자기 관점으로만 본다고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주의가 가득한 사람은 보통 철부지 어린이였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누구에게 무엇인가를 배려하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다 컸네.”
철부지 어린이 같은 어른도 참 많은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손님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원에게 갑질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방의 생각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자기가 받지 못한 것, 자기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냅니다. 아직 정신적으로 어린이 철부지입니다.
상대 입장을 먼저 생각해보고 느끼는 것, 남이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황금률을 실천하기 전에 일차적으로 갖추는 우리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처럼 위선으로 가득 차서 겉으로 보이기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주님의 진리를 큰 소리로 선포하기를 바라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 힘을 쏟는 위선의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를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세상은 나의 육신에 큰 상처를 줄 수는 있지만, 내 영혼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다 컸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다 컸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다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영적 성장에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성장하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시선에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시선, 하느님의 평가에 온 힘을 기울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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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사람>
-진보나 보수냐 가톨릭이냐?-
아침성무일도 찬미가중 '모세의 노래'중 다음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생각없고 미련한 백성들아,
너희는 이 따위로 주님께 은혜갚음 하느냐.
주님은 너를 낳아주신 아버지가 아니시며,
너를 만드시고 보존하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독수리가 제 새끼를 보호하듯이,
당신은 두 날개를 펴시어
너를 품어주시고,
주님의 날개로 너를 인도하셨도다.”(신명32,6.11)
이런 하느님을 만나야, 체험해야 비로소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면 결코 참사람이 되기 힘들 것입니다. 어제 ‘선교사의 여행’이란, ‘남북한을 사랑한 메리놀회 함제도 신부 이야기’란 책 후반부의 내용에서 오늘 강론을 착안했습니다. 인용합니다.
-‘얼마 전에 함 신부님께 물었다. 이젠 친해져서 이런 질문도 가볍게 할 수 있다.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있는 신부님 사진을 본 것이 생각나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신부님은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
“나는 가톨릭이에요.”
그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쓰는 나의 이야기는 어쩐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될 것 같다.’-
평범한 내용이지만 저에겐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함 신부님은 1951년부터 장익 주교님과 메리놀 소신학교 시절부터 무려 70년간을 깊은 우정을 나누며 절친으로 지냈다는 사실에서 두 분 역시 참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사후 분명히 진가를 알게 되는 장익 주교님입니다.
얼마전 타계하신 이문희 대주교님의 재발견도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아주 소탈한 분이셨다. 친히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것을 즐겼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마르틴 아빠스 님의 증언입니다. 역시 참사람 이문희 대주교님입니다. 타계한 두 주교님들이 전화 받을 때는, “예, 이문희입니다”, “예, 장익입니다” 다만 이름을 말했다 합니다.
가톨릭이 지칭하는 바 극우나 극좌 어느 쪽에도 경도되지 않은 참사람입니다. 진보나 보수, 좌파와 우파도 아닌 하느님파, 그리스도파, 가톨릭입니다. 요즘은 좌나 우냐, 진보나 보수냐 보다는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또는 상식이냐 비상식이냐 묻고 싶습니다. 비상한 참사람, 온전한 사람이기 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정상적인 사람, 상식적인 참사람, 온전한 사람인데 찾아보기 힘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참사람, 온전한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날 때 체험할 때 비로소 참사람이요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알고 놀라움의 감각도 살아납니다. 이사야 예언자나 예수님께 좌파냐 우파냐 묻는 다면 두말 할 것 없이 하느님파라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사야의 소명체험을 소개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체험한 이사야처럼 우리도 매일 미사를 통해 하느님의 거룩함을 체험함으로 회개와 더불어 참사람으로 회복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그대로 거룩하신 하느님은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 나를 발견하고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놀라움도 회복합니다. 경천, 경배, 경건, 경애, 경청, 경외등 ‘경敬’이 사라져 급기야 괴물들로 전락한 시대 ‘경敬’의 영성을 회복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 비로소 참나를 발견하고 세상에 파견되는 하느님파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우리 역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파, 그리스도파, 가톨릭이 되어 세상에 참사람으로 파견됩니다.
참사람은 하느님파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하느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면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거룩하신 하느님 체험없이 참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극단의 좌나 우의 사람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체험할 때 그리스도파 사람이 되어 담대하게 주님을 증언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복음 소주제 역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 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것과 세상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라 신신당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하느님을 체험할 때,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공경하는 두려움 경외입니다. 참으로 경외의 사람이, 참사람이며 두려워할 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문득 개신교 신학자 옥중서간의 저자 독일의 본훼퍼의 말이 생각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이런 하느님을 경외하며 믿고 사랑할 때 웬만한 두려움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참사람의 회복에, 두려움과 부끄러움, 놀라움의 감각의 회복에 거룩하신 하느님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래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가 그렇게 소중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요즘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적반하장, 후안무치의 사람들도 참 많이 눈에 띱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할 때 회개와 치유에 따른 참나의 회복이요 거룩한 온전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후 우리 모두 당신의 참사람으로, 하느님파, 그리스도파, 가톨릭파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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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오늘 복음(마태 10,24-33)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집주인(예수님)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사도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5)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증언하라고,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도 우리를 안다고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돈과 건강과 죽음인가?'
'돈을 빼앗길까봐, 건강을 빼앗길까봐, 생명을 빼앗길까봐 두려워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의 열쇠를 쥐고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면, 나머지 것들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지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 영원한 벌(지옥)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보편적 두려움인 돈과 건강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과 건강과 죽음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당당하게 기쁘게 삽니다. 복음을 살아갑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10,29-31)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 곧 하느님만을 두려워하고, 그 외의 것들로부터는 자유로워집시다!
함께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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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구노 구노 신부님]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무서우십니까? 저희 성당에 주일학교 선생님 중에 뱀을 정말 무서워하시는 선생님이 한분 계십니다. 다른 분들도 뱀을 무서워하시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선생님께서 뱀을 무서워하는 건 다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심지어는 뱀이라는 말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무서워하세요. 여기는 뱀 없잖아요라고 하는데도 뱀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움찔하며 놀라십니다.
아마 지금도 이 방송을 들으신다면 뱀이라는 소리에 움찔하실 것 같네요. 왜 그렇게 놀라는지 너무 궁금해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어릴 때 누가 뱀을 자기 집 손잡이에 걸어놓았었는데 그걸 모르고 잡았다가 놀라 기절했는데 그날 이후로 뱀만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지며 깜짝 놀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처럼 뱀은 무서워하지 않지만 어릴 때 개한테 호되게 당해서 개는 무서워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개는 무서워하지 않지만, 다른 동물을 무서워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동물뿐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몹시 힘든 고통을 당해서 사람들을 무서워하는 분들, 아니면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박해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받는 모습을 보며 유대인들, 특히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너희들이 호되게 당할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왜냐하면 기껏해야 그들이 너희들 목숨밖에 더 가져가겠냐는 것이죠.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분명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부활하신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음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을 두려워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더 이상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예수님을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그 무엇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껏해야 우리를 괴롭히고, 심해봐야 죽이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마음만 한결 같다면 다른 모든 것은 어떻게 되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과 함께 두려워하지 말고 오늘 하루를 자신 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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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강한 하느님 체험으로 예언자가 된 이사야>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환상 가운데 부르심을 받는다. 이사야는 왕이신 하느님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스랍(하느님의 보좌를 지키는 존재로서 날개달린 뱀이라 할 수 있다.)들은 하느님께 경배 드리면서 온 땅이 하느님의 권능을 증언한다는 것을 큰 소리로 선포한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위엄 앞에서 이사야도 스랍들과 함께 찬미해야 마땅하지만 죄인이기 때문에 그럴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는 사람이 보아서는 안 되는 거룩하신 하느님(탈출 33,20)을 보았기 때문에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스랍 하나가 분향단에서 끄집어낸 뜨거운 돌을 이사야의 입술에 댐으로써 그의 허물을 불에 태워 없앤다. 이제 그는 하느님 앞에서 새롭게 태어났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 준비되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이에 이사야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예언자의 소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사야는 다른 어떤 예언자보다도 하느님을 깊이 체험했다. 그의 체험은 거룩하신 하느님을 뵈었으니 이제 죽게 되었다는 두려움이 생길 정도로 대단히 강렬했다. 이처럼 큰 체험을 통하여 이사야는 새롭게 변화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느님을 체험한 그에게 있어서 세상살이는 하잘 것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그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으로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면서 편안히 살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하느님과 비길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주님의 사자요 예언자가 되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로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하지 않았다. 하느님에 대한 강한 체험은 그가 겪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는데 충분할 만큼 컸던 것이다.
마태복음(17,1 이하)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산에서 기도하다가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를 본 베드로는 너무 기뻐서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린다.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을 체험하기 전에는 수난을 예고하시는 주님께 안 된다고 펄쩍펄쩍 뛰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하고 꾸지람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체험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결코 주님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았다. 주님 체험은 베드로로 하여금 주님의 참 제자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도중에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리 1,21)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필리 3,8)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라고 말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바오로는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나 박해를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으로 봉헌했던 것이다.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에게는 오직 하느님만이 삶의 행복이요 기쁨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필요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하고 무가치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행복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얻거나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느님 때문에 살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사는 예언자로 살아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언자들처럼 하느님을 강하게 체험하지 못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을 강하게 체험하면 자칫 죽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처럼 강한 체험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대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만큼의 체험들을 주신다.
그 체험이 예언자들의 체험에 비해서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체험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여 키워나감으로써 예언자들이 체험했던 큰 체험처럼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통한 참 행복과 기쁨,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체험들을 간직하고 키워나가자.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나를 변화시켜 주님의 예언자가 되고 사도가 되도록 체험을 쌓아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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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재현 요셉 신부님]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닥쳐올 온갖 위험을 말씀하셨습니다. '잡혀가고 채찍질 당하고 고발당하여 죽게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위험을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차례나 말씀하십니다.
26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28절 육신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31절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가. 이성을 초월하는 신비한 일을 당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천둥이나 번개 , 거센 바람, 파도, 지진, 화산 폭발.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 사람은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첫째 편지 3,14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2,17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시오”
사도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시편의 노래를 들읍시다.
답답할 제 주님을 내 불렀더니 내 소리 들으시고 구하여 주셨도다
주 함께 계시거늘 무서울 것 있을소냐 인간이 나에게 무엇을 할까보냐
주께서 함께 계서 나를 도와 주시니 원수들의 망신을 나는 보리라 (시 118,5)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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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6S_hizD0e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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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 28)
두려움을
치유하는
존귀함이
하느님의 참된
사랑이다.
두려움은
소중함을
이길 수 없다.
복음의 이야기는
존귀함과
소중함의
이야기이다.
존귀함은
소중함을
다시
끌어안는다.
참다운 삶을
회복하는 힘은
소중함에서 온다.
부족함을
채워주는
소중함이다.
소중한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관계이다.
소중함은
존중으로
이어진다.
존중은
삶의 의미를
다시
만나게한다.
모든 생명은
소중함을
따라간다.
기도도
소중함이고
기다림도
소중함이다.
행복을
깨우는 것은
두려움이 아닌
소중한 사랑이다.
구원의 문을
여시는
소중한 사람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두려움을
봉헌한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소중한 사랑의
관계는 구원으로
완성된다.
오늘도
소중함을 배우는
소중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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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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