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확실한 인원의 파악이 필요합니다. 각 백성들에게 호구수를 파악하고 종교별 백성별 일정 가구마다 조를 만들고 그 조의 조장들을 선발해 인원 파악과 관련 이동 지시를 내릴수 있도록 조직을 구성하세요. 최대한 빨리요.
"이동에 필요한 짐은 최소로 해야하지만 물자들을 감안하면 운송수단의 확보가 충분히 필요한 상황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원할수 있는 수레와 우마를 모두 징발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노약자와 어린아이들을 태울 마차도 준비해야 하고 각자 휴대할수 있는 식량에 한도가 있으니 운송이 편이한 건식품의 확보도 서둘러야 합니다."
"이 땅의 에미르로서 관련 통계 자료는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행되는 징발과 포고에 행정망을 동원하여 전력으로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수하들에게 지시하여 관련 이동에 대한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였습니다."
"맘루크의 동향도 주시해야 합니다. 살라딘님께서는 수하의 정찰병들을 보내 근접한 맘루크의 부대 이동을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제 개인적인 추측이기는 합니다만 아마도 우리를 추격할 가장 유력한 부대는 바라카의 직속 부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그쪽의 부대 배치를 주시해 주시길 바랍니다."
"부족하지만 관련 물자가 확보되면 집계와 산출은 저와 저희 유대인 회계사분들을 모시고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집트에서 모세가 백성들을 이끌고 탈출할 때 저희 유대인들이 무사히 나올수 있었던 것은 파라오의 삽질이 아니라 미리 누룩을 뺀 빵을 준비해 식량의 부피를 줄인 사전 준비임을 기억해주십시오. 이번에도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목적지에 도달할때까지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병든자와, 장애가 있는자, 고아와 몸이 불편한 노인들도 다같이 탈출시켜야 합니다. 많이 어렵겠지만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온정이 아닌 같이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협조를 구할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루치아 수녀님께서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폐하를 모시는 일이 우선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돕도록 하지요. 그리고 겸사겸사 응급치료가 가능한 인원도 확인해보고 관련 약품과 비상용품들을 준비해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당신네 시아파들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이런이런… 물론 시아파의 어른들이아 알아서 제 앞가림은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고아들은 종교와 무관하게 따로 인솔하는 사람들을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리고 일부 별도 관리해야 하는 보호해야 할 사회적 약자들은 종교와 무관하게 그룹을 한데 묶어서 움직이게 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그룹을 지도하는 데 수녀님이 가장 맞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후보를 찾아봐야 할까요?"
그로부터 사흘간 그들은 회의실로 빌린 대사관의 연회장에서 모여 열띤 탈출계획을 수립하는데 전념했다. 선발된 멤버들의 주변에는 어느새 산더미 같은 서류와 지도와 각종 계산 및 측정 도구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끔은 열을 올려 목소리를 높이고, 가끔은 차갑기 그지 없게 상대방을 비난하면서도 어느 정도 의견의 조율과 방향을 정립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들만 일하는 것은 아니었다. 각 종교와 백성들의 대표자로 온 그들은 관련 필요한 인력 및 자료, 공지 사항을 그때그때 수시로 사람들을 불러 보내어 업무를 추진하였고, 연회장은 어느새 수십명의 사람들과 산더미 같은 서류들로 인해 발디딜 틈이 없이 빽빽하게 가득찼다.
물론… 데네브 작전의 멤버 중에서 두 사람, 나와 어머니만은 그런 그들의 열띤 논의에 참여하지 못하고 옆에서 그저 멍때리고 보고만 있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감탄했다. 아무리 봐도 서로 어울리기 힘들고 공감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여있음에도 그들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그 거대한 작전의 개요와 변수들을 정리해서 하나의 안으로 만들어갔고 그 계획은 몇일만에 착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우수한 동료들이 모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나는 잠시 초췌한 얼굴로 나오는 멜리장드를 보며 물었다.
"대충 계획의 윤곽이 나오는 것 같네. 이동 경로와 필요한 물자들, 그리고 일정들까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너희들 정말 대단하잖아."
멜리장드는 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뭐… 맘에 안드는 사람들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다들 한가닥은 하는 사람들이라는 건 인정해야 할 듯 하군요. 다들 제국 국무부에 추천하고 싶을 만큼 유능한 사람들입니다. 케두스 왕자는 의견의 조율과 결론 도출이 빠르고 리더쉽이 강합니다. 에라드는 군사 관련으로 상당히 정확한 분석을 보여주더군요. 살라딘공은 이번 작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으려는 듯 오랜 치세의 결과로 확보된 물자와 인력을 총동원해주고 있습니다. 라드도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더군요. 시아파 이맘이 저렇게 느슨한 사람이 있는지도 놀랐지만 수십만 시아파 백성들의 면면과 인솔에 대해 중추적인 역할을 할겁니다.
루치아 수녀도 폐하의 시녀장에 걸맞게 위생과 치료, 구호에 대해 전문적인 의견을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샤도 대단한 아이네요. 전 제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12살인줄 알았는데, 한수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백만단위의 통계와 산술을 순식간에 해결해내고 정확한 숫자를 산출해내고 있어요. 유대인 상인 집단들이 그녀를 인정한 이유를 이해할만도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의견을 취합해서 방향성을 잡고 있는 너도 대단하긴 하지. 정말 다들 대단해.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지만 어쩌면 이거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마저 들어버렸어. 내가 뭔가 도와줄건 없을까?"
나는 희망에 차서 멜리장드에게 말했다. 하지만 멜리장드는 여전히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왕자님이요? 뭘요? 보급계획 회의할 때 우유가 없으면 물을 먹으면 되지라고 하시고선요."
"물먹으면 안되는거야?"
"임산부와 유아들을 위한 보급회의였다고요!"
"아, 그랬던가? 미안... 그래도 내가 뭔가 회의에는 도움이 안되도 다른 방면으로 도울만한게 있지 않을까?"
"그러니깐 그게 뭐냐고요?"
"음… 예를 들자면… 차를 서빙한다던가, 설것이를 한다던가, 아니면 옆에서 힘내라고 응원가를 불러준다던가…"
나의 말에 멜리장드는 아주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무말 없이 그냥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정중한 축객령이지만 왠지 내게는 '밖에 가서 혼자 놀아 새퀴야!'라고 들린 것 같았다. 다소간의 민망함을 덜어준 것은 어머니였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거란다. 복잡하고 어려운건 우리보다 똑똑한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잠시 나가서 우리가 할일을 하자꾸나. 마침 아그네 공주께서도 이곳에 오셔서 회의에 비잔틴 측 대표로 있던 에스더양도 잠시 쉬러나온듯 하니 같이 가면 안심이겠구나."
"네… 근데 폐하와 제가 할일이란게 뭐죠?"
"응? 그건 바로… 군것질!"
정말로 군것질이 맞았다. 거리를 걸은지 15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양손 가득 옥수수와 케밥과, 과일과 군밤을 잔뜩들고 즐겁게 먹으면서 거리를 걸으셨으니깐.
"폐하, 이것 좀 드세요.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라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감사합니다. 맛있는 사탕과자네요. 잘 먹을께요."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 성도에서 다시 추방되느니 박해받아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는데 폐하께서 거두어 주신다니 어떻게든 견뎌보겠습니다."
"목숨보다 소중한건 없습니다. 살아주세요. 어떻게든 살아주신다면 좋은 날은 분명 올겁니다. 그리고 옥수수 맛있게 먹을께요."
"성모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빌겠습니다. 먼 아비시니아에서 종교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온 자유의 땅에서, 이렇게 당신을 만난건 주님의 축복입니다.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당신이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두발로 걸어온 의지를 과소평가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같이 탈출하는 우리는 모두 동료이고 서로의 구원자입니다. 근데 연유대신 시럽을 넣은 커피는 없나요?"
거리는 이미 탈출 소문이 퍼져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통해 들은 공지를 따라 착실하게 탈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는 어수선했고, 상인들은 저마다의 가게를 문닫으며 남은 재고들을 소진하고 있었고, 마침 나타나 이제 난민이 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거리를 걸어다니는 어머니를 보고 저마다 다가와 감사인사를 하고, 손을 뻗고, 소박한 음식을 바치며 어머니의 걸음을 더디게 만들고 입을 바쁘게 만들었다. 나는 쉴새없이 먹을걸 맏으며 걷는 어머니의 뒤를 따르며 좀 어처구니 없어 하며 말했다.
"저어… 폐하, 이제 그만 받으셔도 되지 않을까요? 이미 볼이 한가득 차셔서 다람쥐 같으십니다."
"아들아, 원래 정치가들은 좋은 정책을 세우거나 민생을 해결하기보다는 시민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을 더 잘해야 한단다. 그 첫번째 실천으로서 길가에서 주는걸 잘 주어먹을수 있어야 좋은 정치가란다. 요새 제국 의회에 재선되는 의원들이 그렇게 한 뱃살하는 양반들만 있는거 보면 모르겠니?"
"앞으로 수백년간 정치가들이 새겨들을 현실적인 조언인듯 합니다만… 더 드시다가는 말도 못하시게 될겁니다. 군것질은 적당히 드시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에 전념해주세요."
나의 말에 어머니는 짐짓 토라진듯 말했다.
"난 지금 이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거라니깐. 너야말로 너무 한가한거 아니니? 어차피 데네브 작전에 실무진으로 참여할수 없다면 이런것을 열심히 하도록 하거라. 내 뒤를 따라오지 말고 알아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정든 집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도록 하려무나. 내 아들인 네가 지금 해야 할일은 그거란다."
"정치가처럼 멋진 시식을 보여드릴순 없겠지만, 음유시인으로서 응당 해야 할일임은 틀림없겠군요. 알겠습니다. 저도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니다 대사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아! 그리고 에스더양도 죤을 따라가도록 해요."
우리 뒤에서 말없이 따라오던 에스더는 조금 놀란듯 반문했다.
"제가요? 저는 폐하를 따라 왔습니다. 가능하다면 그대로 모시고 따르고 싶습니다만."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끼리 어울려야 잘어울리죠. 부담가지지 말고 같이 돌아다니다 와요. 나는 동행한 대사관 주재 무관들이면 충분하니깐."
어머니는 그렇게 에스더에게 내 동행을 명하셨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멈춰선 에스더를 뒤로 하고 나에게는 윙크를 하며 뭔가 힘내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며 시장 저편으로 가버리셨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다소 혼잡스러운 바자의 한가운데서 나는 조금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할말을 잃어버렸고… 한참동안 고민하다가 손에 든 군것질 거리를 내밀며 말했다.
"케밥같이 드실래요?"
한편으로는 권유를 하면서도 이어질지도 모르는 로우킥을 대비하여 다리를 들고 피할 준비를 하였으나… 다행히도 에스더는 그냥 한숨을 쉬며 건낸 케밥을 받아들고 걸음을 걸어갔다. 나는 항상 종잡을수 없는 그녀가 오늘은 달리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어께를 나란히 하고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좀 당황스러웠죠. 우리 폐하께서 좀 유별나서 괜한 부담을 드리는군요. 동행뿐만 아니라 이렇게 시장통에 나와서 몸소 시민들을 만나는건 좀 적당히 하셔도 좋으련만."
그녀는 좀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뭐… 유별나다는 건 좀 심한 표현이겠죠. 의외로 저런 모습 콘스탄틴노플에서는 생소한 것만도 아닙니다. 바실롑스가 직접 마차 경기장에 나와 시민들과 같이 응원을 하고, 소피아 대성당에 일요일 미사를 같이 드리며 근거리에서 소통하는 것이 우리 비잔틴의 전통이니깐요. 뭐 당신과 동행에 대해서 부담스러운건 사실이지만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쓴소리는 여전한 것 같다. 나는 조금 쓰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찌되었건 비잔틴의 협조에 대해서는 폐하의 장자로서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할께요. 본인은 원치 않았겠지만 그래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빚으로 따지자면 우리가 제국에 진 빚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니깐요. 폐하께서 이런 무리수를 동반한 일만 아니었다면 단순한 의사 표현 만으로도 우리는 그 어떤 요구도 거절할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건… 당신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겠죠."
"나와 관련된 일? 그게 뭐죠?"
"스미르나 회담 이후 조금 장난스럽게 논의된 일에 대해 들은바가 없었나요? 기밀이기는 하지만 당신에게는 들려주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뇨, 그런건 전혀. 애초에 집에서 한심하다고 쫓겨나는 아들한테 뭔가 중요한 외교 회담의 비밀안건을 말해줄리가 없잖아요. 근데… 그게 뭔데요?"
"모른다면 어쩔수 없어요. 비잔틴의 마지스트리아노스는 그걸 함부로 발설할수 없어요. 나중에 폐하나 마틸다 위체 마스터를 만나면 물어보도록 하세요."
그녀는 발언한 것이 조금 실수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조금 붉히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뭔가 내가 알아서는 안되는 일인건가?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녀를 부담스럽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묻지 않도록 하죠. 뭔가 중요한 일이고 내가 몰라야 하는 비밀이라면 그건 모르는 채로 놔두는게 값진 것이겠죠. 그리고 그러는게 당신에게도 부담스럽지 않은 거 맞죠. 더는 물어보지 않도록 할께요."
그녀는 조금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조그만하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군요. 그러면 이제 할일을 하도록 하세요."
"그럴까요?"
"배가 고파. 밥을 줘."
"지금은 안되요. 라마단이잖아요. 저녁까지 참아요."
"응? 그런가… 히잉 배가 고픈데…"
나는 밥을 달라고 보채는 노인과 그에게 말하는 부인을 보다가 의문이 나서 물었다.
"저기… 라마단은 아직 멀지 않았나요?"
"네 아직 멀었죠.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한시간마다 한번씩 방금전에 먹은 밥을 까먹고 다시 밥을 차려 달라고 할 테니 방법이 없군요."
"아… 그렇군요. 무슨 상황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짐짓 유감을 표하는 나에게 대답한 것은 우리 모습을 보고 있던 수레에 짐을 싸던 만만치 않게 늙은 노인이었다.
"카심 영감이 노망난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오. 이 친구야, 정신차려. 왕자님 오셨어."
"왕자님? 아이고 이런 알아프달님이 오셨군요. 카심이 아이유브의 공자를 뵙습니다."
그리고선 몸을 일으켜 땅바닥에 엎드려 나에게 절하는 노인을 만류하며 나는 부인에게 말했다.
"하하하… 이미 그분은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그분의 자제께서 이곳의 주인이시죠. 부인도 많이 힘드시겠군요. 부군께서 이렇게 성치 못한 상태로 피난 준비중이시니…"
그러나 나의 말에 등에 아이를 업고 한손에 또 다른 꼬마의 손을 잡고 피난 준비를 하던 부인은 좀 못마땅한듯 말했다.
"고생인건 맞지만 이분은 제 남편이 아니라 시아버님입니다."
"아, 이런 실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왕자님의 잘못은 아니죠. 솔직히 시어머님들만 살아계셨어도 이 정도로 고생스럽지는 않았을텐데 재작년에 전염병이 돌 때 갑자기 네분의 시어머님들과 남편이 한꺼번에 돌아가시는 바람에 저만 아버님과 아이들과 같이 남아 버렸죠. 그때는 너무 절망적이어서 모진 마음도 품었는데… 아버님이 대노하시며 본인이 생계를 책임질 테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고 이곳저곳에서 일하시며 가족들을 책임지셨어요."
"저런… 고인분들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어르신에게도 실례를 한듯하군요. 이렇게 가정을 유지해나가는 훌룡하신 분이신데 제가 감히 실성한 분으로 여겼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뭐. 그래도 가끔 저렇게 생떼를 부리셔서 그렇지 좋은 분이십니다. 이렇게 가난한 저희들의 피난까지도 챙겨주시는 점 감사드립니다. 알라께서 이교도 왕자님에게도 축복을 내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저의 주님에게 이 가정에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하겠습니다."
"바압 가져와! 이제 밥 먹자!"
다음으로 내가 만난 것은 아까전의 노인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애먹이는 존재들이었다.
"왜 떠나야 하는데요?"
"나쁜 어른들이 너희들을 해치려고 하기 때문이란다."
"왜 해치려고 하는데요?"
"그건 너희가 그 어른들이 믿는 종교와 다른 종교의 가정에서 나온 아이들이기 때문이지."
"왜 종교가 다른데요?"
"그건 너희 부모님이 원래부터 다른 종교를 믿으셨기 때문이란다.
"왜 부모님은 다른 종교를 믿으셨는데요?"
뭔가 무한반복될 것 같은 이야기에 답을 해주느라 나는 애를 먹어야 했다. 나는 구원의 손길을 바라고 뒤에 있던 에스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의 간절한 표정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더니 한숨을 한번 쉬고 쿨하게 안마디 내뱉었다.
"사탕먹을 사람?"
"와아아아아!!!!! 저요! 저요! 저요!"
어머니가 시장통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먹으라고 준 군것질 거리들 중에 우리 손에 여전히 남아서 왕창 들린 것들을 그녀가 획 허공에 뿌리자 뭔가 끝이 없는 질문 공세를 퍼붓던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탕을 향해 달려들어갔다. 뭔가 좀 허망해지네… 나는 아이들을 돌보던 예루살렘 시립 고아원의 보모들을 보며 물었다.
"아이들의 반응은 활기차네요. 도저히 이제 곧 난민이 될거라는 걸 생각치 못하는 것 같군요."
"네 그렇죠. 아이들은 무슨 여행이나 소풍을 가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아원의 짐을 싸는것도 무슨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간혹 없어졌던 장난감을 발견하며 보물찾기라도 한듯 신나하고 있습니다."
"저런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살피면 고생도 많으셨을 듯 합니다만..."
"다행히도 이 땅의 주인이신 살라딘 공께서는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오랫동안 복지의 혜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잦은 내전으로 인해 고아가 된 아이들도 이곳에서는 구김살없이 잘 클수 있었죠.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당장 평화의 땅인 이곳은 아이들의 몇안되는 안식처였는데… 이제 이 낙원을 떠나 광야로 나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 그지 없습니다."
"많이 상심하셨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기운을 내주시길 바랍니다. 저희쪽에서도 사람들을 보내서 아이들을 무사히 구출하는데 전력을 다해 돕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저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꾸밈없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이 대답받을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나는 어느새 에스더가 던진 사탕을 다 먹었는지 이제는 공을 들고 나에게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며 이제 축구라도 한번 해야 하나 생각하며 살라딘 휘하의 고아원 보모들을 보며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오오오… 왕자님을 뵙습니다. 이토록 장성하셨다니 감개가 무량하군요."
"저를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저 역시 제국의 자랑스러운 시민이며 황제 폐하의 백성, 그리고 왕자님께서 태어나시던 시절부터 멀리서나마 지켜보던 황실의 신하입니다."
"아, 네에…"
내가 다음으로 만난 사람들은 뜻밖에도 제국 시민이면서 아직 성지를 탈출하지 않은 순례자의 일행들이었다. 기독교인이면서 제국 시민이면 가장 먼저 탈출 기회를 제공해서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은 데네브 작전의 관계자 밖에 없을 꺼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와보았다. 와본 감상은…
"잡병…들인가요?"
에스더가 나의 심정을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뭔가 글씨가 다 낡아 이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부대 명칭에 우스광스럽기 그지 없는 부대 깃발… 잡병들 맞았다. 짐작할수 있는건 부대 명칭에 붙은 동지회라는 희미한 명칭에서 보여주는 그들이 정규군이 아닌 예비역이나 전역자들이 모인 자체 민병대와 같은 사람들이란 점이었다. 그래서인지 다들 나이도 지긋한 40대에서 50대를 넘어서고 각자 제 멋대로 규칙과 통일감없이 갖춰입은 장비들이 더욱더 그들을 볼품없게 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더 볼품없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깃발과 그들의 부대장이었다. 군의 상징인 군기에 뭔가 강력하고 위엄있는 것을 붙이는 것은 어느 군대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역한 이들이 사적으로 만든 조직일수록 그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그들의 깃발은 아무리 봐도… 그냥 악의 넘치는 광대가 장난으로 그려준것이라는 생각밖에 안드는 생활도구를 희화한 문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부대장…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쉴새없이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하며 나불거렸는데… 그 정도가 좀 과한게…
"그러니깐 내가 창을 꼬나들고 그 용을 향해 달려갔죠. 다들 비켜라! 용감한 기사 키호트경이 나가신다! 그러니깐 다들 무모하다고 말리더군요. 하지만 나는 말했죠. 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는 법! 그리고 어떤 녀석은 그러더군요. 저건 용이 아니라 풍차라고요. 그래서 내가 말했죠. 그런 마법을 기사의 용기 앞에 깨어질 것이다라고요! 그리도 박차를 걷어차 내 애마 로시를 몰아 달려가는데…"
어지간하다는 에스더도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같은 제국인으로서 창피함을 애써 숨기며 그에게 말했다.
"네, 네… 좋은 무용담이었습니다. 나중에 가능하다면 노래를 붙여 서사시로 만들고 싶어지는 군요."
"물론입니다. 황제폐하께서 머무시는 곳에 제국의 병사가 떠날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희가 황제 폐하를 모시는 근위대로서 같이 동행하겠습니다. 어차피 폐하의 근위대인 퀸스가드도 이곳에 없는 상황이라면 저희가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부대가 완편인 상황이 아니라 평소보다는 좀 약하겠지만 그래도 맡은 임무는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자님께도 잘 부탁드립니다. 무사히 모든 역경을 헤쳐나가시면 저희가 나중에 퀸스가드 녀석들을 만나보고 이런 상황에 폐하의 곁에 있지 못한 불충과 무책임을 질타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뭐 어찌되었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진심으로 그들이 퀸스가드와 만나는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빌었다. 눈앞에서 퀸스가드들이 그들을 보고 순식간에 몰살당하는 이 허풍쟁이 민병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후로도 몇몇 피난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며 나는 저녁 늦게서야 대사관에 돌아왔다.
대사관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케두스 왕자와 멜리장드에게 보고를 듣고 있다가 들어오는 나를 보며 말하셨다.
"어서 오려무나. 사람들은 잘만나고 왔니? 뭐 그리고 에스더양과도 좋은 시간이 되었나 모르겠구나. 지금 대략적인 데네브 작전의 초안이 만들어져서 보고를 듣고 있는 중이었단다."
"벌써요? 생각보다 빨리 완성되었네요. 겨우 3일만에… 물론 저희에게 남은 시간이 없기는 합니다만."
놀란 나에게 멜리장드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급조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 과연 성공할지 의문입니다. 군데군데 엉성한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네요. 아오… 전 지금이라도 이 계획을 철회하고 폐하를 본국으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케두스 왕자는 낙관적으로 대답했다.
"멜리장드양의 겸손이 지나치군요.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대안 경로와 외교적 마찰에 대한 시나리오, 소외되거나 낙오할 사람들의 케어 프로그램까지 준비를 하고선 준비가 부족하다니요. 너무 걱정이 과하십니다. 이 계획은 충분히 자랑으로 삼아도 될만큰 3일만에 만든것이라 믿어지지 않는 훌룡한 수준입니다. 물론 저희도 사람인지라 조금 놓친 부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오로지 주님만이 주관하실 부분일겁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전에 제가 아비시니아가 맘루크에 정복당할 때 탈출하기 위해 세운 계획에 비하면 걸작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수준입니다."
멜리장드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케두스 왕자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건낸 요약된 보고서를 슬쩍 흩어보며 말했다.
"흐음… 탈출일자는 일주일뒤, 그리고 경로는 해안가도를 따라 안티오크로 북상하는 길이네."
"큰 개요는 그렇습니다. 가장 정석에 가까운 방법이죠. 백만 단위의 백성이 이동하는 길이니 가장 도로 사정이 좋고, 큰 기대를 하긴 어렵지만 필요한 물자들을 해상으로 운송하여 난민들의 이동을 따라 같이 움직이며 보급을 하는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과연… 하긴, 여기서 다른 방식을 생각하는건 무리겠지. 어차피 나는 전문가도 아니어서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멜리장드가 말하는 방식이 가장 합리적인 대안이겠지."
"아, 난 몰라요. 나중에 이게 실패했을 때 이거 계획서 짰다고 저한테 뭐라고 하면 가만두지 않을겁니다. 이런 부실한 계획에 한가닥 희망을 걸어야 하다니… 할아버지가 이런 저를 보셨으면 아마도 한심해서 두통에 시달리셨을거예요."
그녀의 말을 받은건 어머니였다.
"필립경의 두통 원인은 주로 나와 안젤모 재무관이 주범이었지. 그래도 괜찮았을꺼야. 의사셨으니 퇴근하면 어떻게든 자가 치유하지 않으셨을까?"
"할아버지가 무슨 도마뱀도 아니고 자가 치유를 하시나요!"
"그렇게 되나? 뭐 하여간 수고했다는 점은 나도 칭찬해줄께. 할아버지께서는 분명 자랑스러워 하실꺼란다. 아, 그러고 보니 몽고메리 대사는 아직 안돌아왔나?"
"그러게요. 대사님이 좀 늦어지고 계시네요. 본국에 보고를 위해 본국까지 가신건 아니고 아크레에 정박한 엠프레스호로 가셨을텐데 원래대로라면 어제는 돌아오셨어야 하는데… 설마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신건…"
"일단 내일까지는 더 기다려 보자꾸나. 다들 오늘은 수고가 많았다. 계획대로라면 내일부터는 관련 물자의 수송 준비와 난민들의 이동 순서를 알려주어야 하지? 계속 바쁜 날들이 이어지겠구나. 내일을 위해서 오늘 잔업이 남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숙면하도록 하자꾸나."
어머니가 그렇게 말하자 멜리장드는 좀 피로한 기색으로 말했다.
"숙면은 폐하와 왕자님께서 취하시길 바랍니다. 아직 계획에 미진한 부분들이 좀 남아 있습니다. 관련 내용들에 대해 추가적인 검토를 더 해봐야 하고, 이동중 필요한 식량과 식수를 파악하러 간 아이샤와 에라드가 돌아오는 걸 기다려 자료의 업데이트도 좀 더 해야 합니다. 실무진들은 저희끼리 알아서 돌아가며 잘 테니 먼저 주무십시오. 루치아 시녀장님 폐하를 모시고 가세요."
"음… 그런가? 아직 일이 많은 상황이라면 나도 잠들긴 어려울 듯 한데…"
어머니의 말에 루치아 시녀장이 와서 말했다.
"주무십시오. 하루종일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오셨잖습니까. 그것도 피로한 일입니다. 그리고, 폐하는 우리의 리더이십니다. 리더가 건강하지 않거나 부재인 상황이라면 조직은 와해될수 밖에 없습니다. 달리 도와주실 일은 더 없으니 숙명하시고 내일 다시 힘차게 일어나주시는게 저희들에게 더 도움이 됩니다."
"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아. 자도록 하지. 하지만 루치아 시녀장은 내 수발을 들 필요는 없어요. 당신도 데네브 작전의 멤버이니 가서 그들을 돕도록 해요."
"네? 폐하 하지만 저는…"
"걱정하지 말고 그들을 도와주도록 해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죤을 불러서 도와달라고 할 테니 다들 아무쪼록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죤을 믿고 하던 일에 전념해주길 바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기침하십시오."
루치아 시녀장을 비롯한 사람들은 물러났고 어머니는 방으로 걸음을 하셨다. 나도 어머니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따르는 나를 보며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너도 내 걱정이 되는거니?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거라. 아무렴 세수랑 양치도 안하고 잘까봐서?"
"네에… 그렇긴 하죠. 그저 잘 주무시라고 인사를 하러 따라왔을 뿐입니다. 오늘 많이 피곤하셨을 테니 편안히 주무시길 바랍니다. 소자 들어가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내 방으로 향했다. 그때… 어머니가 말하셨다.
"아들아."
나는 머무처서서 몸을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는 편안한 미소를 띄며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그리고 잠시후 말하셨다.
"힘내거라."
나는 조금 진지한 어머니의 말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애써 미소지으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네,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쉬십시오."
"그래… 나는 이제 좀 쉬어야 할 것 같구나. 다시 볼때까지 평안하기를… 내일 아침에 혹시 내가 늦잠자면 내 방에 깨우러 오너라."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시고 문을 닫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나도 조금 멋적은 기분을 느끼며 발걸음을 돌려 내방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옥스포드의 어린 시절… 아무 생각없이 해맑게 웃으며 어머니에게 장난 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눈을 떴을 때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한 뒤에 상쾌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회의실에서는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남아 일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아이샤! 아, 야근했는데 홀로 잠이나 쳐자고 일어나서 너무 이기적인 인사인가?"
"왕자님, 아니예요. 전 어제 건량 보유고 확인하고 돌아와서 눈좀 붙였어요. 좀전에 일어나서 밀린 식수 보유고를 배분할 수레와 마차 목록을 짜던 중이었습니다. 되려 잠을 못이룬건 멜리장드예요. 어제 밤새 방대한 계획을 수정하고 또 수정하며 여러 차례 보완하면서 날새우다 좀전에 잠들었어요."
나는 쇼파 구석에 서류에 파묻혀서 잘 보이지 않는 그녀를 보며 좀 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여기저기 회의실에 널부러진 사람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드물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아그네 공주를 발견하고 인사를 올렸다.
"어제 갑작스레 회의에 합류하셔서 고생이 많으셨죠?"
"아닙니다. 회의는 즐거웠어요. 각자 다른 곳에 다른 입장에 있던 이들이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모여서 뭔가를 하려는거 싫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되려 어서 귀국하시라고 만류했는데도 부득부득 저를 따라오겠다고 남은 순례자 어르신들이 더 고민이죠. 왜 이렇게들 말을 안들으시는지…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아그네 공주는 상큼하게 웃으며 나에게 답했다. 나는 비잔틴 주재관에서 봤던 순례자 노인들을 떠올리고, 그리고 비슷하게 어머니를 따라오겠다던 어제 만난 민병대들을 더올리고 그 유사한 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다들 정신을 맑게 해주는 시원한 커피가 필요할 듯 하군요. 폐하를 깨운 뒤에 음유시인이 커피를 준비해서 돌아오겠습니다. 같이 아침을 들면서 오늘의 할일을 고민해보도록 하죠."
"네, 부탁드립니다. 그 사이에 저는 다른 동료들을 깨우고 있겠습니다."
아그네 공주의 멤버들을 동료라고 부르는 울림이 나는 기분 좋았다. 그래서 조금 들뜬 기분으로 어머니의 방에 도달했고, 방문을 두들기려다, 잠시 어머니를 놀라게 해드릴 생각이 들었다. 어린시절의 꿈을 꿔서였을까? 나는 장난을 치기 위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살며시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머니의 침대로 다가갔다.
커튼이 쳐서 아직 새벽의 어두움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쉽게도 이미 일어나 계셨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비몽사몽이신지 가운을 두르고 침대에 앉아 저너머 창문을 바라보고 계셨고 나는 살며시 다가가 어머니를 놀라게 해드리려 했다. 그리고 손이 닿을만큼 가까워졌을 때… 나는 몸을 던져 어머니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서프라이즈! 언제까지 주무실겁니까? 어머…니?"
나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어머니보다 훨씬 젊은… 나보다 서너살 정도 위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어진 그 정체 불명의 여자의 목소리에 더 놀라고 말았다.
"죤왕자?"
허스키한 목소리…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여성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분명히 남자의 가성이었다. 그러나 난 어이없는 상황에 얼떨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곧바로…
"어? 어? 으아악!"
날 사정없이 땅바닥에 패대기쳐버린 뒤 팔을 뒤로 돌려 꺽고 제압해버렸다. 난 이 어이없는 상황에 소리쳤다.
"너! 누구야? 어머니는 어디 계신거야? 설마 너희들 어머니를 살해…"
그러나 내 말은 그의 팔목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내 뺨에 닿자 멈춰질수 밖에 없었다. 그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내 뺨에 칼을댄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난 눈치 못해고 있던 어머니의 방에 있던 십여명의 사람들이 저마다 칼을 들고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어둠속으로 천천히 뒷걸음쳤다. 그리고 그는 다시 칼을 내 뺨에 대고 말했다.
"소리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풀어드리죠."
"알았어… 소리치지 않겠어. 어서 비켜줘."
그는 약속을 지켰고 날 제압한 다른 손을 놔주고 뒤로 물러났고 나는 몸을 일으켜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여자라고 밖에 믿을수 없는 수려한 외모… 약간 붉은 곱슬머리에 마른 체형인 그는 마음을 읽을수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의외로 답은 순순히 해주었다.
"체스입니다."
"체스라고? 지금 여기에 체스는…"
나는 순간 이곳에 처음왔을 때 에라드가 말해준 이곳의 체스 담당자의 부임이 늦어지고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파멜라 부인 다음 체스 담당자로 본국에서 파견된 사람인건가?"
"그렇습니다. 리엔 느베리, 신임 예루살렘 체스 지부장입니다."
느베리? 내가 아는 느베리라면 왕년에 어머니의 최측근이었던 그분과 그분의 가솔들 뿐인데… 근데 그분한테 이런 내 또래의 자식이 있었나? 만약 그렇다면… 루이 첩보관님, 그 대단하신 분도 자제분의 성정체성만은 어쩔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나의 그런 생각이 읽혔는지 내 눈빛에 조금 기분나쁜 표정을 짓고 있던 그에게 나는 농담은 잠시 넣어두고 더 급한 질문을 했다.
"어머니는… 아니, 폐하는 어디 가셨지?"
"폐하는… 저희가 안전한곳에 모셨습니다."
"누구의 명령으로!"
"그야 당연히 체스마스터의 명령이죠."
마틸다 아주머니가?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마틸다 아주머니가 그럴리가… 아니, 그 이전에… 아무리 그분이 제국의 체스마스터라고 할지라도 이런 행동이 용서 받을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건 거의 반역에 가까운 행동이잖아."
그러나 나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이건 절대 반역이 아닙니다. 정당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내역입니다. 체스는 여전히 조안 폐하의 충성스러운 첩보국입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어딨어! 당장 어머니를 뵙게 해주고 어머니의 구금을 풀어줘."
"폐하를 뵙게 해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받은 명령도 그것이니깐요. 하지만 구금을 풀어드릴수 없습니다. 어제 이미 폐하는 자정에 저희측에 신변이 구속되어 안전한 곳에 이동중이십니다. 저는 남은 인물중에 당신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병력과 함께 남아있었던 겁니다. 저희와 동행하시죠."
"대체 왜!!! 왜 이런 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거야! 너희들도 폐하의 신하들이면서…"
나의 경악스러운 항의에도 그는 평온하게 대답하였다.
"그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바로 당신께서 명칭까지 그렇듯하게 가져다 붙인 성지 탈출계획 때문입니다. 본국에서 그 얘기를 듣고 '아, 그렇습니까? 참 불쌍하군요. 폐하께서 좀 도와주시죠.' 라는 반응이 나오길 기대하신겁니까? 당연히 난리가 나고도 남죠. 이제 그만 이런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시고 저희를 따라서 순순히 철수하시죠. 우선순위에 따라 폐하의 신변은 확보되었지만 이제 성지에 남은 마지막 탈출기회인 엠프레스호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을겁니다. 더 지체하다 이곳에서 괜히 포로로 잡혀 외교적 망신거리를 추가하지 마시고 순순히 동행하시죠."
나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했다. 의외로 그의 말에 무리수는 없다. 아마도 그는 체스이지만 나에게 거짓을 고하지는 않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아마도 어머니가 이곳에 없다는 것은 확실한듯 했다. 맙소사… 대형사고다. 지금 이 무책임한 일을 발의한 당사자가 현장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체 이를 어쩌면 좋지? 나는 당장 동행을 요구하는 그들의 기세보다도… 저 뒷편에서 이곳저곳 탈출에 동행해주겠다고 백만명에게 해놓은 무책임한 공약과, 그 덕분에 몇일간 날밤을 새서 눈이 퀭해진 멤버들을 보고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장 어제 만나고 온 고아들의 보모들에게 도와주겠다고 헛소리를 지껄인게 몇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이 사실을 멜리장드가 듣는 순간 그 녀석이 날뛸걸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사람을 공포스럽게 했다. 그 순간 나는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들고 그에게 물었다.
"신변을 확보해야 하는건… 나뿐인건가? 여기 다른 어머니의 측근들중에 잔류인원들이 제법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설마 버리고 갈 생각인건…"
나의 말에 그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받은 명령은… 왕자님의 신변을 확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외의 인물에 대해서는 저희 소관이 아닙니다."
"지금 저기에는 비잔틴의 포르피로게니타와 체스마스터의 장남도 있는데?"
"그런건 제가 판단할 상황이 아닙니다. 저는 명을 받은대로 수행할뿐 의문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 자의로 판단한다고 해도… 이미 이건 무리수가 도를 넘어선 상황입니다. 제가 결정할 권한이 있다 해도 이 상황에서는 동일한 결론을 내렸을 겁니다. 왕자님은 지금 얼마나 큰 일을 저지르셨는지 자각이 없으신 겁니까?"
맙소사… 이거 정말로 장난이 아닌 상황이구나. 자기 자식까지 포기하면서 내린 결정이란 말인가? 나는 어렸을때는 그냥 밝게만 보였던 마틸다 아주머니의 본 모습에 경악하며 동시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의 일인지 알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이대로 끌려간다면 남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지. 나는 뭔가 항의하고 그를 만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을 했다. 그때였다.
"폐하, 비잔틴의 포르피로게니타께서 잠시 뵙기를 청하십니다. 죤 왕자님이 이곳에 오셨다는데 아직 기침중이신지요?"
문밖에서 노크와 함께 말을 건 것은 에스더였다. 리엔은 조금 불편한 얼굴로 닫힌 문을 한번 보더니 내게 칼을 겨누고 조용히 말했다.
"물러가서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이상한 소리를 섞으시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아… 알았어."
나는 문밖에 에스더에게 소리쳤다.
"아, 폐하께서 조금전 일어나셔서 지금 씻고 계시는 중입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테니 아그네 공주님에게 잠시 응접실에서 기다려달라고 해주십시오. 아이샤양."
이건 내 나름의 도박이었다. 부디 나를 포위한 체스의 요원들이 현재 이곳에 있는 멤버들의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다행히 리엔은 크게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는지 미동없이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후… 에스더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휴… 다행이다 뭔가 알아챘구나.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에스더가 사람들을 데리고 몰려…
'와장창! 콰쾅!'
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격한 소리를 내며 문짝채로 실내로 날아들어와 벽에 부딪쳤다. 그 덕분에 몇몇 요원들이 문에 맞았는지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와 이 과격한 아가씨… 곧바로 기습이냐? 대체 문은 어떻게 부셔버린겨? 내 의문은 문으로 들어온 사람을 통해서 곧 풀렸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왕자님?"
들어온 것은 2m가 넘는 거구에 근육질을 한 검은 사나이, 보기만해도 위압감을 주는 우리의 믿음직한 동료인 케두스 왕자였다.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왕자와 동행하고 있었구나. 나는 당황하는 리엔을 밀치고 앞으로 달려나가 케두스 왕자의 뒤로 피했다. 그리고 곧이어 들어온 에스더도 칼과 채찍을 양손에 들고 내 앞에 서서 체스를 막아섰다. 그러나 리엔은 조용히 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시는군요. 왕자님 그만하시고 돌아오시죠."
그러나 나는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그럴수 있을 것 같냐! 어서 피해야해요. 저들은 체스의 정예예요. 저들이 폐하를 납치한 것 같아요."
나의 말에 어지간하던 두 사람도 당황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리엔은 손가락을 튕겨 신호를 하자, 방안에 있던 체스의 요원들이 하나둘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리엔이 말했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정 저희에게 협조하지 않으시겠다면 별수 없군요. 힘으로 모셔가는 수 밖에요."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믿음직하긴 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보기만해도 흉흉한 기세를 풍기는 체스의 최정예 요원 십여명이다. 두 사람이 그들을 막는 다는 건 무리였다. 그때 케두스 왕자가 한걸음 나서며 말했다.
"상황이… 조금 심각한 것 같군요. 에스더양은 왕자님을 보호하십시오. 제가 상대하도록 하죠."
"케두스 왕자, 위험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뭔가 폐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듯 하니 지금은 당장 눈앞의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우선인듯 합니다."
리엔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케두스 왕자… 그러고 보니 관련 자료에서 본적이 있군요. 아비시니아의 검은 사자. 당신의 무용이 출중함은 잘 알지만 만용이 지나치군요. 과연 당신이 우리 체스의 최정예 전원을 상대로 버틸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나도 그를 만류하며 소리쳤다.
"무모합니다. 지금은 이곳을 피하는게…"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시간을 벌 사람을 필요하겠죠. 5분, 5분만 기다려 주시죠. 그 정도의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그가 한걸음 내밀었다. 그리고 리엔이 그 아름다운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드리우며 명령했다.
"쳐라!"
곧이어 수많은 체스의 요원들이 아비시니아의 검은 사자와 부딪쳤다. 그리고 나는 그 참혹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눈을 돌릴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2분 30초 정도 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체스의 완패로…
"으아아아… 내 다리… 내 다리…"
"내 팔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꺽여 있어. 아아아… 누가 진통제 좀."
아비시니아의 검은 사자는 정말 사자였다. 사람 따위는 장난감 취급하듯이 이리던지고 저리 던지며 두들겨 패고 발로 차고 밟아버리며 한방에 한명씩을 날려버렸다. 그들은 숨겨둔 단도를 꺼내 덤벼들었지만 칼날만 요리조리 피하고 칼등을 주먹으로 치니 주먹이 아니라 칼몸이 분질러져 버리는 황당한 상황에 다들 어이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분만에 십여명의 요원들은 다들 땅바닥에 나뒹굴며 고통을 호소하였고, 케두스 왕자는 조용히 리엔에게 물었다.
"정중하게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이 폐하를 납치하여 구금한것입니까?"
"……"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지금 이곳에 폐하가 부재이신 것이 당신의 소행입니까?"
"……"
"과연 이름높은 첩보조직 체스의 요원이로군요. 패하였을 지언정 입은 열지 않는 다는 자존심은 확고하군요."
나는 케두스 왕자의 감탄에 한가지 지적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닭았다.
"저어… 케두스 왕자님, 지금 그 사람은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왜 그렇죠?"
"그야 당신이 그의 가는 목을 손으로 움켜쥐고 허공에 매달고 있으니깐요. 이제 그만 내려주시죠. 지금 눈에 흰자 보이고 거품물기 시작했는데요."
"아, 이런… 저희 고향에서는 이 정도로는 사람이 잘 죽질 않아서 그만 실례를… 내려줄테니 말해보시죠."
그는 리엔을 바닥에 내려줬다. 그러자 한참동안 급소에 여러대 얻어맞고 한참동안 목에 졸려 고통스러웠던 듯 리엔은 켁켁거렸다. 그런 그들을 보며 에스더가 말했다.
"케두스 왕자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체스가 겨우 이 정도였나요. 나름 우리 마지스트리아노스의 라이벌 조직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실망스럽네요. 그냥 여장 변태 부녀자 납치 집단?"
그러자 리엔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럼 당신이라면 저 거인을 상대로 이길 수 있습니까?"
그녀가 잠시 케두스 왕자를 흩어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애초에 우리 마지스트리아노스라면 이런 불필요하고 상대도 안되는 싸움을 할일을 만들지는 않았겠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는 허리에 찬 위스키보틀같은걸 무의식적으로 만지며 조금 속삭이듯이 조용히 말했다.
"살아남을 생각만 포기한다면 상대가 누구냐는 상관없이 죽일 방법도 있긴 하구요.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죠. 대답해보시죠. 지금 이 상황을 만든게 당신입니까?"
나는 에스더의 조금 허풍이 아닌가 싶은 말에 살짝 놀라며 다시 리엔을 바라보았다. 리엔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렇소. 유감스럽지만 이미 폐하의 신변은 우리의 수중에 있소. 당신들이 방해만 하지 않았다면 왕자도 그대로 데리고 귀환하고 우리 임무는 마쳤을 거요."
"지금… 폐하는 어디에 계시죠?"
"내가 그걸 발설할 것처럼 보이나?"
"그래요? 케두스 왕자님 부탁드립니다."
"잠시 실례…"
그리고 한 15분 리엔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고 조금전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어머니의 행방으로 알려주고 싶은 선의의 마음이 들고서야 땅바닥을 밟을수 있었다.
"이미 엠프레스호에 감금되셨다고요?"
"아마도 이동중에 차질이 없다면 그럴겁니다. 애초에 계획이 그거였으니깐요. 어제 자정에 신변 확보를 마쳤으니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았을겁니다."
나는 그의 말에 무릎을 꿇었다. 아… 이제 정말로 모든게 틀려버렸다. 어머니가 부재시라니… 대체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어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땅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절망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모르겠어요? 지금 우리는 이 거대한 작전의 리더를 잃은 거라고요. 개인적으로는 과거 알렉시우스 대제에게 사기친 십자군 기사들의 만행을 백년도 넘게 지나 다시 당한 기분이 들어 당신들 서방의 사람들을 용서할수 없지만… 그럴 시간 조차도 아깝군요. 당장 일어서세요, 왕자. 지금 당신이 해야 할일은 땅바닥에 기면서 절망하기 보다는 당장 폐하의 각료들을 소집해 상황을 설명하고 대책을 논하는 겁니다."
"아… 그…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어서 움직여요. 이곳은 나와 케두스 왕자가 남아 이 멍청이들을 포박하고 있을 테니 당장, 그리고 은밀하게 사람들을 불러와요. 어서요."
나는 그녀의 박력 넘치는 기세에 질려 일단 엉거주춤 일어서며 회의장을 향했다. 회의장의 모습은 조금전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샤와 아그네 공주는 뭔가 서류를 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비몽사몽하며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고 미소지으며 조용히 멜리장드에게 다가갔다.
"멜리장드, 멜리장드… 잠깐 일어나볼래?"
"아우 짜증나! 아 왜요? 잠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국이 멸망하거나 황제페하가 사라지셨다는 등의 상황이 아니면 저기 눈뜬 사람들도 대충 해결할수 있으니 좀 자게 놔둬요."
얘가 신기가 있나? 나는 짜증내며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달래며 넌지시 물어봤다.
"오, 말 잘했다. 그게 말이지… 만약에 말이야. 정말로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폐하가 이곳에서 사라지신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하하… 그런가? 그러니깐 만약에 만약을 감안해서… 우리는 어떻게 될지를 묻는거지. 아니 너무 질문이 난해하면 그냥 너랑 나는 어떻게 될까? 한번 예상해볼수 있을까?"
그녀는 나의 말에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대답했다.
"뭐 어려울 것 없죠. 만약을 감안한 예상이니깐요. 하지만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분명히 지금 폐하를 따라 모인 이 사람들이 유지될리가 없고, 그런 강력한 리더쉽도 없는 상황이니 작전은 대 실패를 할것이고… 이미 탈출수단들도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저랑 왕자님은 맘루크가 파견한 노예사냥을 위한 부대에 잡혀 노예 신세가 되겠죠"
"하하하… 그것 참 최악이네."
"하하하… 뭘 그 정도를 가지고요? 그 다음부터가 문제죠. 노예가 된다면 아마도 왕자님은 딱히 쓸데라고는 노래하는 재주밖에는 없으니 두 다리를 자르고 눈알도 파내서 도망가지 못하게 한 다음 여기저기 무슬림들의 은밀한 연회에 일하는 노예 가수로 부려먹히겠죠. 아, 가끔 하렘에도 연주하러 갈수도 있는데, 그때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걸 대비해서 거세를 해버릴지도 모르겠네요. 뭐 상황이 그 지경이면 딱히 필요한 물건이 아니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요.
그리고 저의 경우라면…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나름 예쁘장하니 부유한 맘루크 귀족들에게 성노예로 공급되겠죠. 성노예에게 필요없는 혀와 이빨과 손가락은 잘라내버리고, 도망치지 못하게 뒷꿈치도 베어버린 다음에 각종 미약으로 정신을 맛가게 만들고 국부에는 남성을 만족시키는 문신들을 새겨서 닿는 것 만으로도 자지러지는 뭐 그런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않은 상태로 만들어서 가지고 놀지 않을까요? 하하하…"
그녀의 참으로 태연하게 늘어놓는 상황이… 상당히 그럴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서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것 참 끔찍하네. 아유, 상상만 해도 그냥 소름이…"
"하하하… 그렇죠? 근데 그걸 갑자기 자는 저를 깨워서 물어보시는 이유가 뭔가요?"
"응? 아니 그냥… 뭐…"
"설마 정말로 황제폐하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든가 뭐 그런건 아니겠죠? 하하하… 아무리 세상이 어처구니 없어도 설마 그런 일이… 지금 황제 폐하 어디 계시나요?"
한참동안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나와 만담을 주고받던 멜리장드는 뭔가 갑자기 잠이 확 깬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하하… 아냐, 뭐 일단 눈 좀 더 붙이고 있어. 지금 당장은…"
"폐하 어디 계시냐구요?"
"하하하… 날씨가 참 좋네. 오늘도 외출하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아."
"느그 어머니 어딨냐고! 이 망할 왕자야!!!!!"
결국 멜리장드가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졸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다들 내게 모여 있었다. 나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데 받으며 멋적은 웃음을 지어보이고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란 것처럼 대답했다.
"하하하… 아침에 일어나 봤더니 납치당하시고 안계시네. 이것 참 큰일이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후… 나는 어마어마한 비명소리와 경악성과 아우성에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첫댓글 1등으로 잘 보고 갑니다. 선장을 잃은 저들은 과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련지?
근데 잃은 선장이 원래 산으로 가길 좋아하는 선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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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마스터니깐요... 캐슬링이 직업병이 된걸지도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다음편에 마틸다에게도 할말은 있다는 내용이 나올겁니다. 그도 스팸전화 같으냐고 하면... 사실 스팸전화라기 보다는 그냥 먹으라고 스팸을 하나 던져줬다는 상황이 더 맞을지도요...
아즈텍은 엔제 나오려나 궁금하네요
에필로그에 나올지도 모릅니다.
으아아아아아 노예 플래그가! 노예 플래그가!!! 죤에게 잠들어있던 카리스마가 안보인다면 케두스 왕자말고는 답이 안보이겠네요ㅜㅜ
여기서 우리는 평소에 멜리장드가 보는 책이 대체 뭔지를 의심해봐야 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