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란 이리저리 헤아리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은 동서남북에 한정된 것도 아니고 상하로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모든 방향인 열 방향을 두루 느끼고 참견하는 것이기에 온 허공과 진공을 누비며 두루 도달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과거로도 찰나에 이르며 미래로도 찰나에 도달된다. 그렇기에 추억을 하고 상상을 하는 것이다. 별을 생각하기도 하고 달을 생각하기도 하며 있지도 않은 ‘사랑’을 생각하기도 하므로 ‘생각’이란 도달 되지 못하는 곳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그러한 생각을 드러내는 ‘마음’이란 도달되지 않은 곳이 있겠는가. 만약 마음이 도달되지 못한 곳이 있다면 생각도 도달될 수 없다. 마음 없는 생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공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진공에 둘러싸인 허공과 허공 속에 있는 모든 것은 찰나도 고정되질 못한다. 진공과 마음은 하나다. 그러므로 허공과 그 속에 있는 만유(물질) 즉 모든 별은 생각과 육신이라고 보아야한다. 진공과 별이 만나면 그 사이에 별이 녹은 허공이 생긴다. 그러므로 허공 속에는 대지의 모든 성분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진공 없이는 별이 있을 수 없고 마음 없이는 육신이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별이 부서지면 허공도 사라져 진공이 되고 진공이 뭉치면 별이 되는 것이며 육신과 생각이 무너지면 마음이 되고 마음이 집중되면 생각과 육신이 된다.
일체 만유가 사라지면 인간의 감각기관도 쓸모가 없게 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감정으로 느낄 것이 없어지니 눈, 귀, 코 등의 감각이 필요 없게 되고 결국은 몸이 필요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물질과 감각은 둘이 아닌 둘 즉 불가분의 관계라는 말이니 하나이지만 둘의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물질은 별이고 세상이며 만유다. 그리고 감각은 물질을 뺀 나머지니 곧 공간이다. 우주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우주공간과 별은 하나인 것이다. 공간이 없으면 별이 있을 수 없고 별이 없는 공간은 허공도 진공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기 때문이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 가운데 하나는 느끼는 놈이고 다른 하나는 느낄 수 있게 하는 놈이다. 그러므로 그 중간에서 ‘느낌’인 ‘인식’이 나오는 것이다. 색깔이 없이 눈만 있다면 ‘보인다는 느낌’ 즉 ‘안식(眼識)’이 나오겠는가. 아니면 눈이 없이 색깔만 있다면 보인다는 느낌이 나오겠는가.
하나이면서 극과 극이 대치되므로 ‘느낌’ 즉 ‘자아(自我)’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라는 ‘인식능력’은 감각과 물질을 양쪽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고 ‘육신과 육신을 느끼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 이름을 ‘나’라고 하는 것이다. 물질과 감각이 만나면 ‘느낌’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육신과 감각이 만나서 나온 ‘나’는 ‘인식’인 것이고 ‘인식인 느낌’은 물질도 아니고 감각도 아닌 ‘도깨비’ 같은 것이고 ‘꿈’ 같은 것이다. 감각은 물질과 붙어 있는 하나다. 그러므로 감각 없는 물질 없고 물질 없는 감각이 없다는 것을 앞에서 느꼈다. 그렇다면 물질도 아니고 감각도 아니면서 ‘느낌’이기도 하고 ‘나’이기도 한 이것은 ‘꿈’이라는 것이 아닌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
감각은 인식과는 다르다. 단지 비추기만 하는 능력을 말한다. 눈이나 귀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눈이나 귀가 건강해도 기절을 하면 즉 정신이 없으면 보고 들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정신이 없으면 인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감각자체에는 여섯 가지 즉 색깔이 없고 소리가 없고 냄새도 없으며 맛도 없고 감촉도 없고 뜻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를 느낄 수 있도록 비추어주는 감각인 것이니 마치 거울처럼 아무런 인식이 없으나 인식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물질을 지구라고 본다면 인식은 진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공인 감각(육근)과 지구인 육신(육진)이 만나면 중간에 진공도 아니고 육진도 아닌 중간 성질인 허공이 생겨난다.
음식은 물질이다. 그리고 눈은 감각이다. 이 둘이 만나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나온다. 소리는 물질의 부딪침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쇳소리와 귀가 만나면 쇠라는 ‘생각’이 나온다. 또 소금이라는 물질과 혀라는 감각이 만나면 ‘짜다’는 ‘생각’이 나온다.
진공과 지구와의 사이에서 나오는 것은 허공, 물질과 감각의 중간에서 나오는 것은 ‘인식’, 육체와 감각의 중간에서 나오는 것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느낌’이고 ‘나’이며 ‘생각’이며 ‘도깨비’이며 물질도 감각도 아니므로 없는 것이다. 물질이 있다면 이미 감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였다면 이미 눈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감각이 있다면 물질이 있고 물질이 있다면 감각이 있는 것이지만 ‘자아’ ‘느낌’ ‘나’ ‘생각’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갖는 이 ‘도깨비’는 있는 것이 아니다. 진공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다. 허공은 ‘도깨비’다. ‘생각’이다. ‘느낌’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아’라는 말이 당연한 것이다. ‘나’는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허공은 물질이 녹아있는 진공이다. ‘없는 물질’이라는 말이다.
역시 ‘없는 나’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지심(至心)’이란 ‘지극(至極)한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극지심’이라고도 한다.
‘극(極)에 도달된 마음’ 즉 진공(眞空)과 같은 마음을 말한다. 마음이 진공이고 진공이 마음이라는 말이다. 둘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실이 그렇다. 진심(眞心)이란 진공(眞空)을 말하는 것이기에 ‘지심’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귀명(歸命)이란’ ‘명(命)이 돌아오고 돌아간다.’ 즉 ‘생(生)과 사(死)의 사이’인 ‘수명(壽命)’이 돌아오고 돌아간다는 말이다.
이것은 생기고 사라진다는 뜻(生滅)이니 곧 만유(萬有)를 말하는 것이므로 물질을 말하는 것이다. 사라지고 생기는 것은 환상이다. 허공이 됐다가 물질이 되는 것은 ‘허공으로 된 물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으로 돌아가지만 다시 드러나게 되는 환상(幻像)인 것이다.
물질은 몸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구를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차피 지구의 성분을 모아 옮기면 육신이고 육신이 흩어지면 곧 지구의 성분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지구든 육신이든 수명이든 이 모든 것은 진공에서 드러나고 진공으로 들어가며 마음에서 드러나고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모두가 환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허공인 생각은 진공과 지구의 ‘만남’인 것이므로 이름 하여 ‘어우러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례(禮)’라고 하니 곧 ‘나’‘생각’‘허공’‘느낌’‘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진공이기도하고 지구(星)이기도 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죽기도 하고 죽을 수 없기도 하고 삼라만상... 삼천대천세계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없으면 삼천대천세계도 없고 삼라만상도 사라지지만 나는 허공이고 진공이며 환상인 지구이니 사라지고 드러남이 끝이 없는 것이다. 죽을 수 없는 것이 죽으며 있을 수 없는 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지심과 귀명이 합해진 례’의 모습이고 내 모습이다.
이것을 깨달은 정신이 곧 일체의 불보살 명호인 것이니
이것이 깊이 믿어지면 그 이름 가운데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지심귀명례
승. 이각
네이버 카페 '혜안' 제공
네이버 지식인에서 발췌
첫댓글 즐거운 날 되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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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심귀명례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