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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만리장성(萬里長城), 우리가 몰랐던 기록(記錄)들 [4-2편]
胡人 漫散이 동(東) 混同江에도 있고 서(西) 萬里長城에도 있다
2023년 10월 10일
○ 마지막으로 “사기(史記) 몽념전(蒙恬傳)…진(秦) 본기(本紀)…조고전(趙高傳)” 등에서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기록(記錄)과 또 다른 “놀라운 기록(記錄)”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곳에서도 『“시황제(始皇帝)”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산해관(山海關)이나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까지에 이르렀다, 또는 발해(渤海) 바닷가에 이르렀다는 등의 기록(記錄)은 찾아볼 수 없다.』라는 점이다.
➊ ‘몽념(蒙恬) 전(傳)’에 의하면 : 《築長城, 因地形, 用制險塞, 起臨洮, 至遼東, 延袤萬餘里. :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지형(地形)을 이용하여, 험난한 성채를 만들었는데, 림조(臨洮)로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까지 연무(延袤)【동서남북(東西南北)】로 만(萬) 여리가 되었다. 於是渡河, 據陽山, 逶蛇而北. :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꾸불꾸불 북(北)쪽으로 이어졌다.》하였으며,
➋ ‘시황본기(始皇本紀)’에 의하면 :《二十六年【B.C221】分天下以為三十六郡, 郡置守, 尉, 監. : 천하를 나누어 36군(郡)을 설치하였고, 군에는 수(守)·위尉)·감(監)을 설치하였다. 地東至海暨朝鮮, 西至臨洮, 羌中, 南至北嚮戶, 北據河為塞, 並陰山至遼東 : 그 땅은 동쪽으로 바다(海)와 조선(朝鮮)에 이르고, 서(西)쪽으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에 이르고, 남(南)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에 이르고, ➨ 「북쪽으로는 하(河)를 변새(邊塞)로 삼으니, 아울러 “음산(陰山)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➌ ‘조고(趙高) 전(傳)’에 의하면 : 《徐曰 : 恬罪固當死矣. 起臨洮屬之遼東, 城塹萬餘里, 此其中不能無絕地脈哉? : 서(徐)가 이르길 : 념(恬)의 죄는 죽음에 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림조(臨洮)는 요동(遼東)에 속했고 성참(城塹)이 만(萬) 여리인데, 이것의 그 중간에 지맥(支脈)을 끊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➍ 통전(通典) 흉노(匈奴) 편에서 이르기를 : 《上問狀, 應曰 : 周秦以來, 匈奴暴桀, 寇侵邊境, 漢興, 尤被其害. 臣聞北邊塞至遼東, 外有陰山, 東西千餘里, 草木茂盛, 多禽獸.” : “상께서 물으매, 응(應)이 말하기를 “주진(周秦)이래 폭걸【흉노(匈奴)=되놈(胡)】들이 변경(邊境)을 처들어와 약탈(掠奪)하고, 한(漢)이 흥(興)하니, 서융(西戎)에 의한 피해(被害)가 많습니다. ‘신(臣)’ 응(應)이 들은 바로는, 북변(北邊)의 새(塞)로부터 遼東(요동)에 이르며, 밖의 음산(陰山)은 동서(同壻) 천여리(千餘里)에 이르고, 초목(草木)이 무성(茂盛)하고, 금수(禽獸 : 날 짐승)들이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及秦始皇平天下, 北卻匈奴, 築長城, 渡河以陰山為塞. : 진시황(秦始皇) 때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하였고, 북(北)쪽은 흉노(匈奴)를 물리치고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하(河)【황하(黃河)】를 건너 음산(陰山)에 성채를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니,
➎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 「북(北)쪽의 흉노(匈奴)들을 물리치고, 하(河)를 건너 음산(陰山)에 성채를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하(河) 남안(南岸)에 음산(陰山)이 있다”라고 설명(說明)한다. 그러나 위의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보면 “하(河)를 건너 음산(陰山)이 있다”라고 하였다.
당연(當然)히 “하(河)”를 건너야 “음산(陰山)”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음산(陰山)은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한텡그리산[Khan Tengri, 山 : 6,995m]”이기 때문이다.
《邊長老言匈奴失陰山之後, 過之未嘗不哭也 : 변경의 장로(長老)들은 말에 의하면 : 흉노(匈奴)가 음산(陰山)을 잃은 뒤 그곳을 지날 때 통곡(慟哭)하지 않는 적이 없다고 한다.》
➏ 그만큼 ‘흉노(匈奴)’에게는 “음산(陰山)”이 중요한 산(山)이었다는 뜻이다. 또 밖(外)으로는 「음산(陰山)은 ‘천여리(千餘里)였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산(山)은, ‘하(河) 동(東)’쪽에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특히 원(元) 초(初)의 ‘구장춘【丘長春 : 1,148∼1,227】서유기(西遊記)’【原文 : 海國圖志】에서는 『“천산(天山)”은 곧 “음산(陰山)”』 이라 하였다.
➐ 여기서 “고전(古典)에 의한 고대(古代)의 하(河)”를 이해(理解)할 수 있어야 한다.
즉(卽), ‘땅의 중심(中心)’이라는 ‘총령(葱嶺)=곤륜산(崑崙山)=불주산(不周山)’의 동북(東北)쪽으로부터 발원(發源), 타림분지(Tarim, 盆地)【타클라마칸(Takla Makan)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는 땅속으로 흘러【원전(原典)에서는 ‘잠행(潛行)’이라고 표현(表現)함】포창해(蒲昌海)【나포박(羅布泊)】에서 용출(湧出)하여 큰 호수(湖水)를 이루고 흘러서 돈황(燉煌)을 거쳐 오늘날의 황하(黃河)로 이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옛 “하(河)”의 실체(實體)다.
➑ 통전(通典)을 보면 : 《“돈황(燉煌)으로부터 가욕관(嘉峪關), 청해(靑海) 북방지대(北方地帶)의 하서회랑(河西回廊)에 일천(一千) 여리(餘里)에 달하는 커다란 해(海)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 乙弗敵, 後魏聞焉, 在吐谷渾北. 國有屈海, 其海周迴千餘里》
지형지세(地形地勢) 등의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인(要因)은 이동(移動)시키거나 조작(造作)할 수 없다.
➨ ‘포창해(蒲昌海)=나포박(羅布泊)’ : 羅布淖爾、羅布諾爾,意思是「匯入多水之湖」,古稱鹽澤、泑澤、蒲昌海、牢蘭海、洛普池、輔日海、臨海、洛普池、羅布池등으로 불렸다.
이렇게 “하(河)”를 놓고 보면 : “하북지방(河北地方)”이 수차(數次)에 걸쳐 이동(移動)되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 『 ⑴ 고전원문(古典原文) 기록(記錄)에서 말하는 바에 따라 지형지리(地形地理) 곧 지세(地勢)나 자연환경(自然環境), 기후(氣候), 특이지형(特異地形)등을 찾아 나서는 것이 합당(合當)한 역사(歷史) 연구(硏究)가 되는 것이다. 즉(卽) 당시(當時)의 것이 가장 중요(重要)하다는 뜻이다.
⑵ 반대(反對)로 오늘날의 지형지리(地形地理)에 맞춰 고전원문(古典原文) 기록(記錄)을 대입(代入)하는 것은, 곧 역사왜곡(歷史歪曲)이자 역사조작(歷史造作)이다.』
(12) 사기(史記) 몽념(蒙恬) 열전(列傳) :
《始皇二十六年.蒙恬因家世得為秦將.攻齊.大破之.拜為內史. : 시황 26년, 몽념(蒙恬)은 가문 대대로 장군을 하였으므로, 진(秦)의 비장(裨將)이 되어, 제(齊)나라를 공격, 크게 파하였는데, 내사(內史)에 임명되었다. 秦已并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眾北逐戎狄,收河南. :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몽념(蒙恬)은 30만 대군(大軍)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에 있는 융적(戎狄)을 몰아내고, 하남(河南)을 손에 넣었다. 築長城,因地形,用制險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 :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지형(地形)을 이용하여, 험난한 성채를 만들었는데, 림조(臨洮)로부터 시작하여 요동(遼東)까지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만(萬) 여리가 되었다. 於是渡河,據陽山,逶蛇而北. :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에 의지하여 꾸불꾸불 북(北)쪽으로 이어졌다. 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是時蒙恬威振匈奴. : 장성(長城)을 쌓기 위해 밖에 주둔한 지 10여 년, 상군(上郡)에 주둔하였다. 당시 몽념(蒙恬)의 위세는 흉노(匈奴)에게 떨쳤다.》라고 하였다.
➨ 진시황(秦始皇)의 명령(命令)을 받은 몽념(蒙恬)과 30만 대군(大軍)이 축성(築城)했다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라고 만 했을 뿐이고,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라고 했을 뿐이다. 20세기에 만들어진 중국지도(中國地圖)를 보면 : ‘랑산(狼山)과 양산(陽山)’은 하투(河套) 북방지대(北方地帶)에 그려져 있으나 산맥(山脈)으로 표기하고 있다.
➨➨ “양산(陽山)”에 대해서는 그 어떤 기록(記錄)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는 오늘날의 ‘중국어판 위키백과’인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에서도 하투북방(河套北方)의 “양산(陽山)”에 대한 설명(說明) 자체(自體)가 없다.
이런 설명(說明)을 종합(綜合)해 보면 : 진(秦)나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기록(記錄)의 ‘임조(臨洮), 음산(陰山), 하(河)’들과 관련된 것은 모두 “하서(河西) 땅(地)에 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그 흔적(痕迹)과 유허(遺墟)도 마찬가지다. 돈황(燉煌) 및 그 서(西)쪽 땅에 자새(紫塞)의 흔적(痕迹)과 유허(遺墟)가 존재(存在)했음을 어렴풋이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시황본기(始皇本紀), 몽념전(蒙恬傳), 조고전(趙高傳)’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성(築城)한 당사자(當事者)들의 기록(記錄)이다.
이를 배제(排除)한다거나 무시(無視)한 장성연구(長城硏究)는, “단팥빵에 단팥 팥소(餡子: 앙코)가 들어가지 않은 빵과 같다.”
※ 단팥빵 [출처 : 위키백과]
(13) 그렇다면 “사기(史記) 진(秦) 시황본기(始皇本紀)”에서는 왈(曰) :
진(秦) 시황본기(始皇本紀) :《二十六年【B.C221】分天下以為三十六郡,郡置守,尉,監. : 천하를 나누어 36군(郡)을 설치하였고, 군에는 수(守)·위尉)·감(監)을 설치하였다. 地東至海暨朝鮮,西至臨洮,羌中,南至北嚮戶,北據河為塞,並陰山至遼東 : 그 땅은 동쪽으로 바다(海)와 조선(朝鮮)에 이르고, 서(西)쪽으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에 이르고, 남(南)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에 이르고, ➨ 「북쪽으로는 하(河)를 변새(邊塞)로 삼으니, 아울러 “음산(陰山)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 “몽념전(蒙恬傳)” : 〈북쪽으로는 하(河)를 변새(邊塞)로 삼으니, 아울러“음산(陰山)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의 글 “(12)”의 “몽념전(蒙恬傳)”에서는 말하기를 :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라고 하였다.
➨ 시황본기(始皇本紀) : ≪북쪽으로는 하(河)를 변새(邊塞)로 삼으니, 아울러 음산(陰山)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라고 하였으니 그 차이점(差異點)은 금새 눈치챌 수 있다.
즉(卽), 『진(秦)나라는 북(北)쪽으로 하(河)를 변새(邊塞)로 삼으니, 음산(陰山)에서 요동(遼東)까지에 이르렀는데, 하(河)를 건너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성(城)을 쌓았는데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졌다』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요동(遼東)은, 양산(陽山)의 북(北)쪽으로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종점(終點) “요동(遼東)이 있었다”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➊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萬里長城) ‘동극(東極)’이라는 말은 왜곡(歪曲), 조작(造作)이다.
➋ 요동(遼東)은, 양산(陽山) 북(北)쪽에 있다? 그렇다면 ‘음산(陰山)과 양산(陽山)’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이냐? 하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분들이라면 최소(最小)한 위의 글 “➊+➋”의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해야 함은 기본(基本)인데, 누구도 이런 문제점(問題點)을 제기(提起)하지 않는다.
(14) 史記 列傳 ‘조고(趙高)’ 편에서 이르기를 :
《使者曰:臣受詔行法於將軍,不敢以將軍言聞於上也. : 사자(使者)가 이르기를 : 신(臣)은 조서(詔書)를 받아 장군에게 법을 행할 뿐, 감히 장군의 말을 듣고, 상(上)께 말할 수 없다. 蒙恬喟然太息曰:我何罪於天,無過而死乎?」良久 : 몽념(蒙恬)은 한참 크게 탄식하다가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과오(過誤)도 없이 죽어야만 하는가? 천천히 말하였는데, 徐曰:恬罪固當死矣.起臨洮屬之遼東,城塹萬餘里,此其中不能無絕地脈哉? : 서(徐)가 이르길 : 념(恬)의 죄는 죽음에 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림조(臨洮)는 요동(遼東)에 속했고 성참(城塹)이 만(萬) 여리인데, 이것의 그 중간에 지맥(支脈)을 끊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此乃恬之罪也.乃吞藥自殺. : 바로 이것이 몽념(蒙恬)의 죄(罪)다. 그리고는 독약(毒藥)을 마시고 스스로 죽었다.》라고 하였다.
➨ 『起 臨 洮 屬 之 遼 東, 城 塹 萬 餘 里』라는 구절(句節)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일어난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으로 이어졌는데, 성참(城塹)이 만(萬) 여리다.』 또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일어난 임조(臨洮)는 요동(遼東)에 속하였는데, 성참(城塹)이 만(萬) 여리이다.』 등으로 번역(飜譯)할 수 있을 것이다.
●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성(築城)한 당사자(當事者)들인 진(秦)의 시황제(始皇帝)와 몽념(蒙恬)과 대신(大臣) 조고(趙高)는, 당시(當時) 진(秦)의 핵심(核心) 당사자(當事者)들이었다.
➨➨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 ‘임조(臨洮)’라는 지명(地名)이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에 있었는가?” 하는 점인데,
〈진서(晉書) 재기(載記)+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儒者可與守成+연도기행(燕途紀行)+연원직지(燕轅直指)+강한집(江漢集)+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통전(通典)+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자치통감(資治通鑑)〉등에 의하면… …,
➊ “임조(臨洮)”는, 오늘날의 감숙성(甘肅省)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➋ “양산(陽山)”은 중원대륙(中原大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➌ “요동(遼東)”은 하서(河西)의 동(東)쪽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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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守邊勸農疏 [晁錯, 西漢]의 기록(記錄) 하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守邊勸農疏 [晁錯, 西漢] : 臣聞秦時北攻胡貉,築塞河上,南攻楊粵,置戍卒焉。其起兵而攻胡、粵者,非以衞邊地而救民死也,貪戾而欲廣大也,故功未立而天下亂。且夫起兵而不知其勢,戰則為人禽,屯則卒積死。夫胡貉之地,積陰之處也,木皮三寸,冰厚六尺,食肉而飲酪,其人密理,鳥獸毳毛,其性能寒。》라고 하였다.
晁錯[(鼂錯)BC200年∼BC154年]【史記, 漢書, 資治通鑑등에는 “조착(鼂錯)”으로 되어 있는데, ‘西漢初著名政論家’라고 알려져 있다.】
➤ ‘시황(始皇)’이 천하통일(天下統一)을 이루고 나서 “호(胡)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는 예언(預言)이 있으니, ‘부소(扶蘇)’를 감독관(監督官)으로, 대장군(大將軍) ‘몽념(蒙恬)’에게 30만 대군(大軍)을 통솔(統率)케 하여 “하남(河南)”을 토벌(討伐)케 하니, 몽념(蒙恬)과 30만 대군(大軍)은 출병(出兵)하여 하남(河南)을 쳐 오랑캐(胡)들을 물리치고, 임조(臨洮)로부터 장성(長城)을 쌓고, 하(河)를 건너 그 북(北)쪽으로 계속(繼續) 장성(長城)을 쌓아가다가 몽념(蒙恬)의 죽음으로 중단(中斷)된 것이다. 이것이 진(秦)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실체(實體)다.
‘진시황(秦始皇)’은, ‘녹도서(錄圖書)의 예언(豫言)’ 곧 『진(秦)을 망하게 할 자는 오랑캐(호胡)다』【因奏錄圖書, 曰亡秦者胡也】라는 믿음 때문에 오랑캐(胡)를 물리치고[卻], 장성(長城)을 쌓도록 한 것이다.
➨➨➨ 그런데 말이다. 북(北)쪽에 있어, 진(秦)을 망하게 할 자(者)였다는 “호(胡)는 누구를 말함인가?” 놀랍게도 『오랑캐(胡)는 바로 “호맥(胡貉)【또는 호(胡)와 맥(貉)】”이었다』라는 것이다. “호맥(胡貉)”의 “오랑캐 맥(貉)”이 어떤 부족(部族)인가? 바로 “구려(駒麗)의 일족(一族)”이다.
그 근거(根據)는 바로 ‘서한(西漢)=전한(前漢)’의 ‘조착(晁錯)’이 기록(記錄)한 “수변권농소(守邊勸農疏)”에서 확인(確因)이 된다. [臣聞秦時北攻胡貉,築塞河上,南攻楊粵,置戍卒焉。守邊勸農疏 : 晁錯, 西漢]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 ‘서한(西漢)은 곧 전한(前漢)’이며, 한고조(漢高祖)가 진(秦)을 소멸(消滅)시켜버렸다. 따라서 서한(西漢) 당시(當時)의 「BC 200 ∼ BC 154年」 경(頃)의 기록(記錄)은, 그 어떤 기록(記錄)보다 신뢰(信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 ‘시황제(始皇帝)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구려(駒麗)【高駒驪】의 침공(侵攻)을 막고, 진(秦)나라를 보호(保護)하려 쌓은 것인데, 결국(結局)은 이것으로 인하여 멸망(滅亡)을 재촉한 것이 되어버렸다.
어떤가? 놀라운 기록(記錄)이 아닌가! 또한… …사적(私的)인 견해(見解)지만 : 연인(燕人) 노생(盧生)이 연(燕)나라를 대신(代身)하여 ‘진(秦)’의 시황(始皇)에게 복수(復讎)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리장성(萬里長城) 축성(築城)으로 인하여 태자(太子) 부소(扶蘇)와 대장군(大將軍)몽념(蒙恬)과 휘하(麾下) 수십만(數十萬) 군대(軍隊)가 변방(邊防)에 나가 있으니, 시황(始皇)은 급사(急死)하며, 내부(內部)에서는 반역(叛逆)의 모의(謀議)가 은밀(隱密)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 星湖全集 제55권 제발(題跋) / 書大明一統志 :《사변(事變)에는 난이(難易)가 있으니… … 무릇 나라가 크면 재주가 큰 자가 나오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 …김일제(金日磾)가 오랑캐(胡貊)의 포로(捕虜)로서 한(漢) 나라에서 손꼽히는 가문(家門)이 되었다【事變有難易不同等… …夫國大則才大。其故何也.… …故金日磾胡貉俘虜而爲漢閥閱】》라고 하였으니,
‘전한(前漢)=서한(西漢)’ 이전(以前)이니 진(秦) 때에도, 이미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까지 “맥(貊)=맥(貉)” 족(族)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북맥 【北貊 : 구려(駒麗)=고구려(高駒驪)의 일족(一族)】”이 날쌔고 용맹(勇猛)한 기병 즉(卽) ‘효기(梟騎)’를 보내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를 쳐, ‘유방(劉邦)’으로 하여금 한(漢)나라를 건국(建國)하게 지원(支援)한 것이다.
『김일제(金日磾) 조국(祖國)인 휴도국(休屠國) 또한 ‘호맥(胡貉)’ 족(族)이었다』라는 것이고, 『그의 조국(祖國)인 휴도국(休屠國)은, 총령(葱嶺) 서북(西北)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이건 필자(筆者)의 私見이 아니다. 필자(筆者)는,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된 원문내용(原文內容)을 충실(充實)하게 빼지도 보태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설명(說明)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상서전(尙書傳)에서 이르기를 : 〈海東諸夷駒麗扶餘馯貊之屬武王克商皆通道焉 : 해동(海東)의 여러 이(夷)에는 ”구려(駒麗)ㆍ부여(扶餘)ㆍ한(馯)ㆍ맥(貊)“의 족속(族屬)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더 놀라운 기록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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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자간고(墨子閒詁) 兼愛 中」 편에 : “以利燕代胡貉與西河之民”이라 하였는데, 그 말인즉 “호, 맥【胡, 貉=胡貉】은 서하(西河)의 백성(百姓)들”이라고 한 것이다(西河之民). 【兼愛 中 : 以利燕代胡貉與西河之民 : (注) : 畢云:「『貉』,《非攻中》作『貊』,是。疑《左傳》云:『狄之廣莫,于晉為都』,廣即少廣,莫即貊也」 案:畢說非也,貊,貉之俗,《說文·豸部》云:「貉,北方豸穜也」職方氏有九貊,漢書高帝紀,顏注云:「貉在東北方,三韓之屬皆貉類也」考工記,鄭注云:「胡,今匈奴」】
“동북방(東北方) 먼 곳에 있었다”라는 “맥(貉)”이 “서하지민(西河之民)”이라는 것이다. 바로 “서(西)쪽의 하(河)”라는 뜻이고, 동북방(東北方)과는 전혀 관계없는 서(西)쪽 땅의 백성(百姓)들이라는 것이다.
◆ “서하(西河) 땅이 동북방(東北方)”이라면 :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남부지방(南部地方)에 옛 중국왕조(中國王朝)들이 있었다는 뜻이 되는데, 그곳은 서남아세아(西南亞細亞)다.
‘서하(西河)란 서(西)쪽에 있는 황하(黃河)’를 말하는 것이고, 이 말은 『맥(貉)은 중원(中原) 대륙(大陸)과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다.」 라는 것을 명백(明白)하게 증명(證明)해주는 내용(內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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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글 ‘서두(序頭)’에서 설명(說明)한 바와 같이 “장안(長安) 근교(近郊) 려산(驪山) 자락의 서양촌(西楊村)”에서 발굴(發掘)된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시황제(始皇帝)로 대표(代表)되는 진(秦) 나라의 것이 아니다.』 이는 진(秦)의 것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발굴(發掘) 결과(結果)로 보면 : 시황제(始皇帝)의 진(秦) 나라 유물(遺物) 또는 유적(遺跡)이라는 증거(證據)는 단 하나도 없다. 다만 그곳에서 “구리로 만든 무기[戟 :창]”의 표면(表面)에 “3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이라는 글씨가 있다”라는 그것으로 인하여 시황제(始皇帝)의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걸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현 중국(中國) 당국(當局)의 말을 믿느냐?” 하는 문제(問題)와 똑같다. “결코 신뢰(信賴)할 수 없다.”라는 뜻이다. 그럼 “용(俑)들의 상투”는 어떻게 설명(說明)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수많은 “용(俑)”들이 틀고 있는 상투【추계(推髻), 수계(竪髻)】는 동이(東夷)인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의 반만년(半萬年) 이상(以上) 내려온 ‘절대적(絶對的)인 풍속(風俗)’이기 때문이다. 『장안(長安)을 중심(中心)으로 하는 중원(中原) 대륙(大陸) 땅에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는 없었다』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 이러한 실정(實情)을 감안(勘案)하고 참고(參考)하며, 고전(古典)의 여러 기록(記錄) 들을 함께 고찰(考察)해 보면 두 가지 가능성(可能性)을 열어 놓는다.
➊ 고대(古代)의 진(秦)나라는 삼한(三韓)에 속한 나라였다.
➋ 진(秦)나라는 돈황(燉煌)의 서(西)쪽 지방(地方)【서토(西土)】에 있었던 고대(古代) 왕조(王朝)였다.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에 있었던 『옛 구차국(龜茲國)의 도읍(都邑)인 구차성(龜茲城)의 시읍(市邑)이 ‘장안성(長安城)과 똑같았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西域 / 龜茲國城 :《龜茲國城在亦力把力東南.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역력파력(亦力把力) 동남(東南)쪽에 있다. 漢西域傳:龜茲治延城,去長安七千四百八十里,東至都護治烏壘城三百五十里.或曰丘慈,亦曰屈茲.武帝時,內附.中略. : 한(漢)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 구자(龜玆)는 연성(延城)에서 다스렸다. 장안(長安)으로부터 7,480리 떨어져 있고, 동(東)쪽으로 도호(都護)가 다스리는 오루성(烏壘城) 350리에 다다른다. 혹은 구자(丘慈), 또 굴자(屈慈)라고도 한다. 무제(武帝) 때 내부하였다. 城如長安市邑,宮室甚盛. 中略. : 구자성(龜茲城)은 장안(長安)의 시읍(市邑)과 똑같고, 궁실(宮室)도 대단히 성했다(컸다). 중략(中略).》하였는데,
장안성(長安城)과 구자국성(龜慈國城)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共通點)이 많다. 우선(于先), 『방(方) 6리에 펼쳐져 있었다. 사찰(寺刹)이 많았다. 내성(內城)과 외성(外城) 등이 몇 겹으로 축성(築城)되어 있으며, 성(城)의 규모가 컸고(三重), 궁실(宮室) 또한 크고 성했으며, 시읍(市邑) 또한 장안(長安)과 같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옛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가 ‘구차국성(龜茲國城)에 도읍(都邑)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前提)로 보면 : 위에서 인용(引用)하는 많은 고전(古典) 원전(原典)의 내용(內容)과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한 기록(記錄)을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
즉(卽), 위의 글 “(1)∼(11)”까지의 여러 기록(記錄) 내용(內容)을 지형지리적(地形地理的)으로 충족(充足)시킬 수 있다.
더불어 위의 글 “(12)∼(14)”까지의 사기(史記) 내용(內容)도 충족(充足)시킬 수 있는 것이다. 위에서 열거(列擧)하여 인용(引用)한 옛 기록(記錄)들에서 중요(重要)한 것은 『지세(地勢)이며, 지명(地名)이다.』
○ 『진시황제(秦始皇帝)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중원(中原) 대륙(大陸)의 땅에 있었다』 함은, 곧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는, 설 자리가 없다.』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거다. 오늘날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말하는… …
산해관(山海關) : 시황(始皇)의 장성(長城)과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
의무려산(醫巫閭山) : 시황(始皇)의 장성(長城)과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
병마용갱(兵馬俑坑) : 시황(始皇)과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
양산(陽山) : 하북(河北) 땅에 없다.
음산(陰山) : 하남(河南) 땅에 없다.
요수(遼水) : 요녕성(遼寧省)의 지명(地名)은 1900년대 이후의 작품이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 시황(始皇) 장성(長城)과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
자새(紫塞) : 시황(始皇)의 장성(長城) 유지(遺址)는, 서토(西土) 땅에 희미(稀微)하게 존재(存在)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 밖 28리에 강녀묘(姜女廟)가 있고, 비석(碑石)이 있는데, 그 내용(內容)은 《정녀(貞女) 맹강(孟姜)은 성이 허씨(許氏)인데, 형제의 순서가 맏이기 때문에 맹강이라 부른다. 그녀의 남편은 범랑(范郞)으로 진(秦) 나라 때 장성 쌓는 역사에 부역을 나가서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그의 처 맹강이 만 리를 달려 남편을 찾아왔다가 남편이 죽었음을 알고 드디어 그녀도 이곳에서 죽었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정절(貞節)을 표장하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 얼마나 살벌(殺伐)한 역사왜곡(歷史歪曲)이요, 역사조작(歷史造作)인가!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은, 시황(始皇)의 장성(長城)과는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저런 사당(祠堂)과 비석(碑石)까지 만들어 놓고, 현판(懸板)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글자까지 써 놓고, 그곳이 시황(始皇)의 장성(長城)의 끝인 것처럼 꾸며 놓았다. 얼마나 철저(徹底)하고 무서운 놈들인가!
이런 것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외쳐대는 한민족(韓民族)과 한반도(韓半島) 사가(史家)들과 “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 화려강산(華麗江山)”을 외치는 우리는 “역사(歷史) 무지무식쟁이(歷史無知無識人)”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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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은 본시(本是) “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하였고, 본래(本來)의 것은,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서(西)쪽으로 1,900km【구글어스 직선거리(直線距離)】 곧 “5 천리(千里)” 떨어져 있는 “가욕관(嘉峪關)”을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 불렀다』라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바로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하기 위해 역사(歷史)를 조작(造作)한 것이다.
➨➨➨ 또 「가욕관(嘉峪關)」을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이라고 불렀다고 하였지만, 이것 역시(亦是) 그 서(西)쪽 땅에 있었던 것을 ‘가욕관(嘉峪關)’으로 이동(移動)을 시킨 것인지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가욕관(嘉峪關)’을 서달(徐達)이 축성(築城)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시기(時期)【명(明) 홍무(洪武) 五年[1,372]】를 보면 : 《AD 1,371년에 사천(泗川)을, 1,387년에는 운남(雲南)과 감숙(甘肅)을 포함한 영토(領土)를 통일(統一)했다》라고 했고,
또 AD 1,372년 서달(徐達)을 보내 북원(北元)까지 정벌(征伐)하려 했으나 ‘코케 테무르’의 반격(反擊)을 받아 크게 패배(敗北)했다고 했고, 1,387년에 가서야 운남(雲南)과 감숙(甘肅)까지 진출(進出)했다고 한 것을 보면 :
➤「AD 1,372년 홍무(洪武) 5년에 가욕관(嘉峪關)을 축성(築城)했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왜냐하면 이후(以後) 십여(十餘) 년이 지난 AD 1,387년에 가서야 운남(雲南)과 감숙(甘肅)에 진출(進出)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욕관(嘉峪關)’ 곧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천하제일웅관(天下第一雄關)”은 누구의 작품(作品)이며,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발해(渤海) 바닷가에 있는 ‘산해관(山海關)’은 누구의 것일까?
이 모두는 “조선(朝鮮)”의 것이다.
즉(卽) 『興復哈密國王記 [馬文升, 明]에 의하면 : 합밀(哈密)【신강성(新疆省) 동부(東部) 옛 이오(伊吾)】의 동(東)쪽에는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진시황(秦始皇)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지금의 ‘돈황(燉煌) 서(西)쪽 땅’에서 그 흔적(痕迹)을 찾아야 할 일이다. 『그 동방(東方)은, 조선(朝鮮)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잊지 말아야겠다.
○ 『호인(胡人) 만산(漫散)이 동(東)쪽으로 혼동강(混同江)에도 있고 서(西)쪽으로 민리장성(萬里長城)에도 있다.』라는 말은, 동방(東方) 땅의 이야기가 아닌, 조선(朝鮮) 영토(領土) 서변(西邊)과 서북변(西北邊)에서 일어났던 사건(事件)이자,
이들이 결국(結局)은 남(南)쪽의 조선(朝鮮) 땅으로 내려올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합당(合當)한 방비책(防備策)을 강구(講究)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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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적(一般的)인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의 특징(特徵)은 『국가(國家)와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성격(性格)이 강(强)하고, 자국(自國)의 이익을 극대화(極大化)하려 한다.』
대부분(大部分) 나라들에 있어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의 특색(特色)이다. 미국(美國)의 공화당(共和黨)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은 전혀 다른 “특징(特徵)”을 갖고 있다.
(1)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은 민족적(民族的)이지 않으며, 특히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들의 “민족적(民族的) 움직임을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로 매도(賣渡)할 정도(程度)로 보수적(保守的)이지 않다” 아주 독특(獨特)한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인데 거기에 그만한 이유(理由)가 존재(存在)한다.
(2)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는, 일반적인 보수우파(保守右派)와는 다르게 특이(特異)하다고 말한다. 즉(卽)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는 보수우파(保守右派)요, 그렇지 않은 자(者)들은 몽땅 두리뭉실 진보좌파(進步左派)로 분류(分類)한다는 것인데, 이는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의 일방적(一方的)인 정치(政治)판 구호(口號)다.
여기에는 많은 일제(日帝) 부역자(附逆者)들과 일부(一部)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빨갱이들이 자신(自身)들의 과거(過去)를 감춘 채 보수우파(保守右派)로 숨어든 결과물(結果物)이다.
(3)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은, 친일주의자(親日主義者) 및 친미주의자(親美主義者)들로 사대(事大) 이념(理念)을 가진 자(者)들이 많다.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은, 사대(事大)를 망국적(亡國的) 행태(行態)로 비난(非難)해야 함이 지극히 정상적(正常的)이지만, 정반대(正反對)로 이를 찬양(讚揚)하며, 자주(自主)와 자립(自立)보다는 사대(事大)에 국가(國家)의 안위(安危)마저 저버리는 행동(行動)을 한다〉 특히 특정국(特定國)인 ‘미국(美國)과 일본(日本)에 사대(事大)’함을 당연(當然)시한다.
(4)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고 침략자(侵略者)들을 도와 부역(附逆)한 부역자(附逆者)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 냉전시대(冷戰時代)의 산물(産物)인 빨갱이로 표현되는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
(5) 이러한 자(者)들이 변신(變身)하고, 변신(變身)하여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가 되어 “보수우파(保守右派)를 자칭(自稱)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 ‘인물(人物) 중의 인물’들의 정체(正體)이자, 진면목(眞面目)이다.
➨➨➨ “보수우파(保守右派)”라면 :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고 침략자(侵略者)들을 도와 부역(附逆)한 부역자(附逆者)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나 냉전시대(冷戰時代)의 산물(産物)인 빨갱이로 표현(表現)되는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을 색출(索出),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이들을 처단(處斷)해야 함이 마땅한 것이 바로 “보수우파(保守右派)”다.」
그런데 뭐냐?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파(保守右派)는 왜 존재(存在)하는 것이냐?’ ◆ 누굴 위해서… …?
➨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들 속에 이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고 침략자(侵略者)들을 도와 부역(附逆)한 부역자(附逆者)들과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나 냉전시대(冷戰時代)의 산물(産物)인 빨갱이로 표현(表現)되는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 이 모두 기생(寄生)하며, “보수우파(保守右派)”를 자칭(自稱)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憤怒)한다.」
이래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을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집단(集團)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론적(結論的)으로 보면 :
➊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한 부역자(附逆者)들,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과 각 지방의 부역(附逆) 토호(土豪)들과 연계(連繫)된 관련(關聯)된 자(者)들과
➋ 공산주의(共産主義)를 신봉(信奉)하고 추종(追從)했던 ‘빨갱이’가
➌ 영악(獰惡)하게 시류(時流)를 쫓아 그 시대(時代)가 요구(要求)했던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로 변신(變身)한 자(者)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파(保守右派)”의 ‘주요인물(主要人物)’들이었고,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파(保守右派)”의 기둥이 되었다.
이러한 자(者)들을 ‘보수(保守)의 인물(人物)’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파(保守右派)” 집단(集團)이다. ‘➊+➋+➌’의 변신자(變身者) 들은 보수(保守)와 우파(右派)를 가장(假裝)한 자(者)들이다. 가장(假裝)하고 그 뒤에 숨은 것이다. 이게 그 실체(實體)다.
➨ 이 설명(說明)이 틀렸으면, 잘못되었다면, 오류(誤謬)라면 말해보시라!
군주(君主)에게 반역(叛逆)한 자(者), 또 친일분자(親日分子)들과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한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와 부역자(附逆者)들은 말 그대로 국가(國家)에 반역(叛逆)하고 가담(加擔)하고 동조(同調)한 자(者)들이다. 이들은 어떤 경우(境遇)라고 하더라 용서(容恕)할 수 없는 천하(天下)의 원수(怨讎)와도 같은 자(者)요, 무리(群)들이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들은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하늘에 사무치도록 한(恨)이 맺히게 된 원수(怨讎)】와 같은 자(者)들이다.
해방(解放) 이후(以後)의 ‘빨갱이’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 또한 위에서 말한 것과 똑같은 경우(境遇)다. 이것은 국가(國家)에 대한 반역행위(叛逆行爲)다.
이런 부역자(附逆者)들이 해방(解放)되자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을 잡아 가둬놓고 취조(取調)하며 고문(拷問)까지 서슴치 않았다고 전해진다. 정부수립(政府樹立) 이후(以後)에도 권력자(權力者)들은 이들을 이용(利用)하고, 이들은 권력자(權力者) 밑에서 기생(寄生)하며, 공생관계(共生關係)로 온갖 악랄(惡辣)한 행위(行爲)는 똑같았다. 이걸 어떻게 잊을 수 있으며, 이를 어떻게 용서(容恕)할 수 있겠는가? 보수우파(保守右派)들아! 말을 좀 해볼래!
이런 놈들을 “보수우파(保守右派)”라고 한다면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보수우파(保守右派)가 죽어야 대한민국(大韓民國)과 한민족(韓民族)이 살 수 있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또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빨갱이’ 또한 똑같은 것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보수우파(保守右派)”에서 “인물(人物)”이라고 떠받들고 있는 자(者)들의 ‘인물(人物)’의 과거(過去) 행적(行跡)을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일이다.
➨➨➨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헌법(憲法)”에서는 :
〈제3조 :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또한 제4조 :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제정(制定)하여 밝히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남북통일(南北統一)에 관심(關心)을 가지고 통일(統一)에 대한 말을 하거나 문제(問題)를 제기(提起)하면 ‘좌파(左派)’로 몰아붙이는가?
북한(北韓) 땅은 대한민국(大韓民國) 영토(領土)가 아니었던가! 【“일본(日本)은 북한(北韓) 땅에 대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영토(領土)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모두는 장기적(長期的)인 노림수가 철저(徹底)하게 계산(計算)되어 있으며, 이는 자국(自國)의 이익극대화(利益極大化)에 있는 것이다.】
●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파(保守右派)’들은 “북한(北韓) 땅이 대한민국(大韓民國) 영토(領土)가 아니라는 건가?”
‘남북한(南北韓)’의 영토(領土)는 ‘대한민국(大韓民國) 영토(領土)’다. 너무도 당연(當然)하게 국민(國民)들과 지도자(指導者)는 통일(統一)에 대한 지대(至大)한 관심(關心)을 가지고 노력(努力)해야 하며, 특히 “미국(美國)…러시아(Russia)…중국(中國)”과의 외교관계(外交關係)를 적극적(積極的)으로 펼쳐 남북한(南北韓) 통일(統一)에 대한 장애물(障碍物)을 하나하나 없애는, 제거(除去)하는 노력(努力)을 경주(傾注)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헌법(憲法)을 수호(守護)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민족(韓民族)이 하나가 되는 것은, 곧 남북한(南北韓) 영토(領土)가 대한민국(大韓民國) 영토(領土)가 되는 것이고 이는 곧 헌법(憲法)을 수호(守護)하는 것이다. 이건 선택(選擇)이 아니라 필수적(必須的) 과제(課題)이어야 하는 것이다.
한민족(韓民族)이 하나가 되는 일, 남북한(南北韓)의 통일(統一)에 대한 열망(熱望)은, 보수(保守)나 진보(進步)를 떠나, 망라(網羅)하여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가장 중요한 과제(課題)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왜 이러한 주장(主張)이나 과제(課題)를 제기(提起)하는 자(者)들을 좌파(左派)라고 비난(非難)해야 하는 건가? 그럼 우파(右派)는 뭐냐?
보수우파(保守右派)라는 자(者)들은 과실(果實)만을 골라 따먹는 놈들이냐? 독일(獨逸)을 한 번 봐라! 그들이 통일(統一)을 이루기 위해 얼마만 한 노력을 기울렸는가를 말이다.
〈남북통일(南北統一)에 대한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열망(熱望)이 가득 차 넘치고 넘쳐흘러도, “미국(美國)…러시아(Russia)…중국(中國)”의 양해(諒解) 또는 승인(承認) 없는 “남북통일(南北統一)”은 불가능(不可能)한 구조(構造)다. 그래서 이 “세 나라”와의 긴밀(緊密)한 외교관계(外交關係)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重要)하다고 역설(力說)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노친(老親)네들이 나라를 망(亡)친다고 한다. 노친(老親)네들이 시대(時代)가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관치(官治)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筆者)도 노친(老親)네다. 우리 노친(老親)네들 스스로 각성(覺醒)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들의 후손(後孫)들에게 악몽(惡夢)을 유산(遺産)으로 물려줄 수밖에 없게 된다.
➨ 대한민국(大韓民國) 보수우파(保守右派)에 대하여 누가 그 정의(正意)를 설명(說明)해줄 수 있겠나?
필자(筆者)와 같은 민족적(民族的), 국가적(國家的)이며.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우선(于先)시하는 자(者)들을 “보수우파(保守右派)”라고 비난(非難)해야 함에도, 정반대(正反對)로 ‘진보주의자(進步主義者)’로 비난(非難)받고 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그러나 이건 우리의 오늘의 현실(現實)이요, 팩트[Fact]다. 지도자(指導者)를 잘못 선택(選擇)한 것은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이것에 교훈(敎訓)을 얻지 못한다면 한민족(韓民族)은 미래(未來)가 없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4-2편 끝]
2023년 10월 10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1955년 이전의 출생자는 '노친네'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지금 젊은이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노친네들때문에 망하기 일보직전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우리들의 자식들이며, 우리들의 후배들인 젊은이들이 왜 이런 고약스런 말까지 하고 있는 걸까?
노친네들은 이걸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 우리들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 세대를 생각해 보라.
물론 그 분들도 선대들로부터 받은 것이 없었지만, 우리들 역시 손에 받아든 것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하며 살아온 인생이 아니었나!" 그래서 월남전에도, 쾀에도, 45-50도의 열사의 나라까지 가서 돈 몇 푼을 벌기 위해 낮과 밤을 지샜다. 있는 자들은 결코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어 낸 것이다.
*** 노친네들아! 우리 스스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들의 자식대에 까지 이런 '생고생'을 유산으로 물려줘야 되겠는가? 거기다가 동족 상잔의 남북전쟁의 위험까지 꼭 물려줘야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 왜 변화를 두려워하는가? 왜 개혁을 두려워하는가?
다 늙어 한 발을 관속에 넣고 다니면서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변화와 개혁을 두려워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