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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대초등학교20회동창회
 
 
 
카페 게시글
국 ―··· 자유 광장 스크랩 정든 교단을 떠나며~~
유니세븐 윤희 추천 0 조회 172 09.03.15 22: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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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교단을 떠나며

1968년 3월 2일 초임지인 奉大초등학교에 부임하던 첫날

칸막이를 막았다 열었다 하는 강당교실에서 전교생을 모아놓고

교장선생님의 인사소개로 부임인사를 한 것이 생생하고 엊그제 같은데

41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네.

 

40여년의 교단생활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전국 각지에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많은 제자들이 있고

소식을 전하고 안부를 물어오는 제자들이 있어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네.

 

40여년의 교단생활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만났지만

20대 초반 초임교사로 만난 奉大초등학교 20회졸업생 제자들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고 그리웠다네.

 

나의 정년퇴임식에 참석해서 축하해 준 제자들

오지는 못했지만 전국 각지에서 축하의 마음을 보내 준 제자들

어느 분들보다 반갑고 고마웠네.

 

내가 가르쳤던 노래 홍하의 골짜기를 지금도 잊지 않고

퇴임식장에서 祝歌로 합창해준 우리 제자들 너무 고맙고

나를 20대 초반의 청년교사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 주었네.

 

임실 청웅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다

2005년 개교한 전주용소초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4년을 재직하고 정년을 맞게 되었네.

 

이제, 정든 교단을 떠나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그 동안 못다한 일들을 하며 남은 生을 새 출발 하려 하네.

 

산에 오를 때 벗어내는 옷가지처럼

덜어내는 땀방울처럼 마음 비우며 걸어가

頂上에 올라 야호! 외치는 벅찬 가슴처럼

늘 기쁜 마음으로 살겠네.

 

산골짜기 아픔 쓰다듬어 고즈넉이 안아주는

雲霧와 하나되는 메아리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겠네.

 

초임교사로 만난 奉大초등학교 20회 졸업생

사랑하는 제자들을 생각하며 살아 가겠네.

 

사랑하는 우리 제자들!

항상 건강하고 幸福하길 기원하면서...

 

전주에서 정경룡 

 

41년전 초임 시절 봉대 초등학교 4학년 2반 봄소풍 "닥실수리조합 "

 

 
이제 좀 쉬시고, 여행도 다니시고, 평소 하시고 싶은 일도 하시면서...간혹 저희 카페에 좋은 글도 올려주세요.^^ 09.03.02 16:55

명예로운 정년퇴임식 내내 가슴뭉클 했습니다. 샘 무지무지 존경합니다... 09.03.02 21:23

그동안 40여년이나 교단에서 넘넘 수고하셨습니다. 정년 퇴임하신 분 갖지않게 젊어 보이셨어요. 자녀 분들도 훌륭하게 키워놓으시고 이젠 사모님과 두분이 운동도하시고 여행도 하시며 즐건 생활하시는 일만 남았네요. 저희 카페도 즐겁게 해주세요. 선생님 건강 하세요....

09.03.02 23:10

 41년전 봉대초등학교에 첫 부임 하셔서 그해 봄 소풍을 닥실 수리조합으로 갔다. 20여리도 넘은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간것 같고 우리동네 3년 후배(아마 1학년생으로 기억되는데)는 건지산 샘물에서 물을 마시다 우물에 빠졌다.(돼지가 우물에 빠진날이 아닌~~)오른쪽 끝 유니세븐(나다)이 소년 소녀들이 오십대 중반이 다 되어가며 우리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활을 하고 있다. 선생님께서 군대 입대하시는 바람에 2학기부터(정확한 시기는 기억에 없다)우리 2반은 1반과 합반을 하게되었는데 강당교실 칸막이를 트고 90여명이 다 되는 아이들이 매일 소란스럽고 ~~안욱선생님께서 어느날 키대로 줄을 세우더니 남자와 여자 짝을 키대로 정해주셨다. 그때 상태와 나는 키가 비슷했는지 짝이 되었고 내숭을 떨면서 서로 내외를 하고 책상에 금을 긋고 책이 못넘어 오게 하고 그랬던거 같다~~조숙했던 상설(상태)는 그 시절 여선생님을 흠모하고  여선생님께 관심이 있었대나 어?대나 ~~믿거나 말거나~~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4학년을 보내면서 그해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이 공포되고 우리는 그 과제를 해결하느라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268자를 달달외웠던 시절이 있었다 

 

 

 

사모님은 언니 친구인 갑숙언니다~~갑숙언니는 서무리출신으로 아버님이 치과가 없던시절 야매(?)로 틀니를 하셔서 우리 엄마는 치통이 있으시면 그곳에서 치료를 했고 틀니를 하셨던 인연이 있다.- 어머니와 틀니의 추억이 있다.

 

 

 선생님의 기족소개~~

 

 

 상설 친구의 홍하의 골짜기에얽힌 소개~~

 41년전 초등학교 4학년때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던 "홍하의 골짜기"를 祝歌로 부르고 있는 봉대20회동창들~~

 

어머니와 틀니

나는 틀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우리어머니는 치아가 좋지 않으셔서 내가 어릴 때부터 치통에 시달리시고 민방으로 무슨 나무의 뿌리를 삶은 물을 머금고 계시기도 하고 밤새 치통 때문에 고생을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젊은 나이인 사십초반이였던 것 같은데 치통으로 고생을 하셨고 서무리에 있는 야매 치과(정경룡 선생님 장인어른께서 하시던)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고 그 곳에서의 조언으로 아랫니를 모두 빼시고 틀니를 하셨다. 치과도 없던 시절 그야말로 야매로 끼어 넣으신 틀니가 맞지 않아서 무척 고통스러워 하셨다. 내가 중학교 때로 기억되는데 며칠동안 비가 오지 않아 우리 논이 많던 중뫼에 (너더리 가는길) 한밤중에 물을 대러 가는 길에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어머니와  논둑에 누워서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옛날 이야기, 서울에 유학중인 오빠들 이야기며 시집살이 혹독했던 엄마의 살아온 이야기를  밤 모기에 뜯기며 듣고 밤이 이슥해져 이슬을 맞으며 돌아오곤 했다. 그날도 논둑에 누워 이야기도 하고 깔깔거리다 잠이 들었고 한밤중에 어머니와 터벅거리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이튿날 새벽 아침밥을 지으시다가 사색이 다 되신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새로 끼워 넣으신 틀니가 맞지 않아 어젯밤에 손에 들고 계시다가 그만 잃어버리신 것이다. 나는 그길로 어젯밤에 어머니와 같이 갔던 길을 더듬어 틀니를 찾느라 풀섶을 헤치기도 하고 발이 이슬로 훔뿍 젖을 때까지 틀니를 찾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얼마를 찾았을까 다행히 어젯밤에 누웠던 자리에 반짝하고 틀니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도 기뻐서 펄쩍 펄쩍 뛰었다. 그리고 무슨 보물을 건져내듯 틀니를 조심스럽게 주워서 물로 헹구어서 조심스럽게 수건에 쌌다. 어머니가 기뻐하실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레었다.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틀니를 내 밀었다.어머니도 물론 무척 기뻐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틀니는 쌀 몇 가마니 값이었고 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있어 의기양양해 했던 기억이 오랫동안 나를 흐뭇하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오빠들을 따라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자연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이 줄었고 방학만을 유일하게 기다리게 되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시절도 아니고 전화도 동네에 전화도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동대문 전화국에서 교환에게 전화를 신청하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고 교환원이 어쩌다가 깜빡 잊고 있으면 두 세 시간을 기다려야 간신히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엄마의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눈물이 앞을 가리고 흐느끼느라 통화를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가세는 더욱 어려워졌다. 큰오빠는 교수가 되겠다고 늦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자리도 잡지 못했고 다른 오빠들도 학교 다니는 시기라 자식들 학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청거리셔서 자신을 위해서는 돈한 푼 쓸 수가 없으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여전히 야매로 한 틀니가 잘 맞지 않으셔서 고통스러워 하시면서도 그 세월을 참고 그 틀니로 오랫동안 버티신 것 같았지만  나도 틀니에 대한 생각을 잊고 있었다. 그 이후 틀니를 치과에서 한 번 더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세월이 흘러 오빠들도 자리를 잡고 사회에서 저마다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고 나도 결혼을 하여 안정적으로 살고 있을 때 어머니 틀니를 다시 해드리기로 했다.

치과에 모시고 가서 다시 틀니를 하려고 엑스레이도 찍고 했으나 치과 의사가 아래 잇몸이 마모되고 닳아져서 다시 하기가 힘들다고 하시면서 새로 이를 해 넣어도 지금처럼 밖에 사용하지 못 한다고 그냥 그 틀니를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동안 잘 맞지 않은 틀니를 참고 오랫동안 사용해서 아래 잇몸이 마모되어 버리신 것 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얼마나 가슴을 치며 통곡했던지......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닳아져서 잘 맞지 않은 틀니를 끼고 계셨다. 음식을 잡수시면 잘 맞지 않는 틀니가 허공에서 놀았고 음식을 잡수시고 나면 틀니 사이로 음식물이 끼어서 빼어서 씻어 놓으셨다. 때론 익숙하지 않는 며느리들은 틀니를 보고 기겁하여 놀라기도 하고......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황우석 박사는 줄기 세포를 만들어 난치병도 희망을 갖고 고치고 이도 돈만 있으면 심고 고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오랜 세월 불편함도 참고 인내하시면서 자신의 몸은 조금씩 조금씩 마모되어 가며 정신까지 갉아 먹어가는 줄도 모르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모든 것을 다 주신 어머니 당신의 그 희생 위에 우리형제들은 오늘날 이렇게 잘 살고 있으면서 받은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어리석음이 오늘도 가슴을 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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