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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5일 [연중 제31주일]
마태오 23,1-12
불가능에 도전하는 이는 위선적일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말은 하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기는 잘하고
인사받기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게 보이려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기 몸을 무화과잎으로 가리기 시작한 이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시작되고 교만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들기에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해지면 다른 이들이 나를 무시함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천에 사시는 한 할머니가 병원장 사모님으로서 잘 나갈 때 의료사고가 터져서
병원문을 닫을 수 있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친구들에게 비웃음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돈이 있다고 많이 자랑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이러저러하게 보이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시선의 노예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는 미국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을 은폐해 온 사실을 신문기자들이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우리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미국 가톨릭교회가 상당한 물적 정신적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 교회는 솔직하지 못했을까요? 하느님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자기 힘으로는 모두를 속일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가리던 서로의 부끄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가죽옷을 입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죽옷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말은 세상과 다른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 시스템 안에 속해서는 세상 시선에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래야 배에 타고 있을 때보다
자유로워집니다.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 아무래도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그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물 위로 뛰어내리면 이제 물 위를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그리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타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덕분으로 새롭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이 지상 사람들과 다른
위치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판단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위 병원장 사모님도 십자가의 길을 하다가 제4처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만나실 때,
예수님께서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주셨고 그 이후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창피해서 나가지 못하던 본당에 나가 먼저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병원장 사모님이 성당 화장실 변기를 매일 닦으면서도 기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이 망해도, 친구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런 것과 무관한 존재가 될 하느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이렇듯 하느님 사랑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아무 능력이 없는 작은 수녀로서 모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비웃음에 무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전 몇 개만 가지고 담대히 커다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병원을 짓겠다고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결국 수녀님의 말대로 병원이 지어지는 것을 본 세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세상 비웃음에 맞서봅시다.
버락 오바마는 학교에서 장차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을 때 항상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흑인 아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하면 대부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무시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죽옷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에 지배받는 노예 생활로 생을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에 도전하며 세상을 이길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5일 [연중 제31주일]
마태오 23,1-12
찬란한 성덕과 비범함을 청빈과 겸손의 덕으로 가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신랄하면서도 강도높은 비난을 받은 당대 지도층 인사들-율법학자
들과 바리사이들을 생각하면 마음 속으로 고소하고 후련하면서도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들의 삶과 제 삶을 비교해보니 도진개진, 50보 100보라는 생각에 참으로 부끄럽기도
합니다.
예수님 질책의 원인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이중성입니다.
언행의 불일치요 하늘을 찌르는 교만, 겸손의 결핍입니다.
안그래도 이런 측면은 사목자로서 가장 마음에 찔리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야단을 맞으면서 드는
한 가지 생각입니다. 야단만 맞고 있을 게 아니라, 위선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대척점에 서있는참 목자로서의 이정표를 세워야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어떻게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보다는 더 잘 살아야겠다는 굳은 다짐이
오늘 제게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가경자가 한분 계십니다.
이탈리아 출신 살레시오 회원으로서 일본선교사로 활동하셨으며,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창립에 큰 역할을 하셨던 빈첸시오 치마티 신부님(1879~1965)이십니다.
‘마에스트로’‘주님의 음유시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릴만큼 그는 당대 유명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동시에 아주 감미로운 바리톤 목소리를 지니셨는데, 음악회가 끝나면 목소리에 반한
귀부인들이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정도였습니다.
그는 돈 보스코의 정신에 따라 음악을 통해 청소년들이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도록
노력했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은 음악 뿐만 아니라 문학나 신학, 영성이나 인품, 등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탁월함과 비범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찬란한 성덕과 비범함을 청빈과 겸손의 덕으로 가리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1935년 미야자키 선교구가 지목구로 승격되자,
그는 초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그에게는 몬시뇰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이를 알게된 이탈리아 친구들이 아주 멋진 고가의 자주색 몬시뇰 복장을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그는 즉시 되돌려보내면서 일본의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쓸 수 있게 그것을
팔아서 현찰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의 복장은 언제나 여기 저기 수없이 꿰맨 자국 투성이의 낡은 수단
한벌 뿐이었습니다.
그의 모범적인 수도생활을 눈여겨본 수도회 장상들께서 그에게 중책을 맡기려고 여러
번 초대를 했었지만, 그때 마다 그는 예의바르면서도 완강하게 사양했습니다.
그는 1938~1948년 사이 , 10여년에 걸쳐 일본 살레시오회 관구장직을 역임했었는데,
로마 총본부에 계신 총장 신부님에게 보낸 월말 보고서 말미에는 항상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하는 총장 신부님, 저는 인간적으로 큰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지나치게 교만하고
예민한 것입니다. 이 약점을 고치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치마티 신부님은 자신의 교만을 물리치기 위해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일하고 또 일했습니다.
늘 형제들을 자신보다 낫다고 여겼으며 형제들을 칭찬했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형제들에게 양보했고, 자신은 늘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목자들이 치마티 신부님처럼 충실한 기도생활, 겸손하고 청빈한 삶을
통해 매일 다가오는 다양한 측면의 유혹들을 극복하고, 하느님 만으로 충분한 착한
목자로 설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일 강론>
(2023. 11. 5.)(마태 23,1-12)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이 말씀에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뜻합니다.
누가 전하든지 ‘하느님 말씀’은 변함없이 ‘하느님 말씀’이고, 우리는 그 말씀을 다
실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언제나 항상 ‘하느님 말씀’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과
‘그들 자신들의 말’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충실하게 실행하고 지켜야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자신들의
말은 잘 가려서 들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듣는’ 사람의 관점에서 한 말이고, ‘말하는’ 사람 쪽에서 생각하면, 아무나
‘하느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면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는 하지만, 말씀대로 살지는
않으면서 말씀을 모독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에 대한 꾸중입니다.
결국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죄가 점점 더 커지는 자들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위선자들이 하는 ‘말만’ 들으면 거룩한 성인들 같지만, 그들의 행실을 보면, 그냥
죄인들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1ㄱ).”
이 말씀에서 ‘양의 옷차림’은 ‘하느님 말씀’으로,
‘열매’는 ‘행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조건 ‘하느님의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온 삶으로’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태 7,21).
우리는 사탄도 성경을 인용해서 말한다는 것을(마태 4,1-11)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사탄이 인용한다고 해도 성경은 성경이지만,
사탄은 사람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은 사탄이 짓는 죄에 휩쓸리게 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참 생명’입니다.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진리도 없고, 다른 생명도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라고 증언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6).”
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과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다른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자기 혼자만의 생각과 의견을, 그리고 그 생각과 의견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데도, 그것을 마치 ‘구원의 진리’인 것처럼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보다
위에 있는, 또는 예수님을 능가하는 스승이나 선생으로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 요즘에도 많은데,
우리는 그자들을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자들은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 내부에도 있습니다.
‘잘못된 성경 해석’에,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내세우는 ‘교만’이 더해질 때,
구원의 길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빠지는 이단자가 되어버립니다.
<자기 혼자서만 다른 길로 빠지면 그 한 사람의 멸망으로 끝나지만, 다른 사람들을
구원의 반대쪽으로 끌고 가서 그들마저 멸망을 당하게 만들어버리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대단히 엄하게
단죄하셨습니다(마태 18,6-7).>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