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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제2장>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부유불거, 시이불거
사실 시작 부분에서 보여준 도올의 개그는 과히 심하게 웃긴건 아니었다.
개그쑈로는 함량미달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다.
진짜로 웃기는건 지금 부터니까. 그리고 횟수를 더해갈 수록,
진도를 나갈 수록 포복절도, 기절초풍, 어안벙벙한 개그의 진수를 보여 준다.
본게임의 막을 올려 보자. 제2장이다.
도덕경 제2장의 첫 줄은 다음과 같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딱 보니까 벌써 걱정이 되제? 서너 글자 밖에 안되는 짧은 문장도 제대로 못 읽는
우리의 도올이 이렇게 긴 한문을 우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팍 되제.
하지만 도올이 누고? 이 시대의 석학 아이가? 겐또의 천재자나. 도올이 해놓은
번역을 먼저 보자. 배꼽들 조심하자.(잃어버려도 책임 못짐)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벌씨로 골이 땡하제? 이기 도대체 무신 소리고? 천하 사람들이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데 그것이 추하다니? 우리 할아방이 노망들었다는 소리가?
천하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아름다운 것은 할아방이 봐도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맞줴? 그런데 지혼자 추하다고 우기는 것은 사상도 아이고
철학도 아이고 걍 노망일 뿐이다. 도올은 노자를 망령난 할방구로 맹길고 있다.
노자건 공자건 구름이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이게 진리다. 안글나?
그런데 그것을 아니다라고 우기는게 위대한 사상일까? 천마네이숀이다. 진리는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상궤를 이탈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음이다.
사이비 종교가 사이비인 것은 모두 그 주장하는 바가 상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 열쇠는 바로 '위(爲)'라는 한 글자이다. 할아방은 <도덕경> 전체를 통털어
『노자는 말한다 "천하의 사람들이 아름다움(美)의 아름다움 됨(爲美)만을 안다(知)"』
그러면서 말하기를, 『최소한 4-5 세기 이전에 이러한 철학적 주제가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하면서 감탄을 하고 있다. 철학적
주제? 그래서 이 문장을 해설하면서 객관주의니 주관주의니 하는 골치 아픈 소리들을
잔뜩 했던 거였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 참으로 포복절도할 명 강의를 내밀고 있다.
『노자의 언어는 경이롭다. 노자는 美의 상대어로서 "醜"(추)를 사용하고있지 않다.
美의 상대어는 惡(오)인 것이다. 중국 고대어에서는 惡을 모두 요새 우리가 생각하는
"악"으로 읽어서는 아니된다. 惡은 악이 아니라 오인 것이다. 오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싫음"이요, "추함"이다. 다시 말해서 "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운운...』
<노자와 21세기> 상권 122쪽 상단
나는 노자보다도 도올의 언어가 경이롭다. 어쩌면 저렇게 횡설수설을 잘 할 수
있는지 탄복치 않을 수가 없다. 하기사 도올이 대천재요 기린아로 극찬해 마지않는
왕필, 앗 나의 실수, 왕필이 아니라 왕삐다. 그 왕삐부터가 만만치 않다. 저 해설 뒤에
도올이 천하의 名注라고 소개해놓은 왕삐의 주도 번지수를 잘못 찾기는 마찬가지니
그 주를 보고 공부한 도올한테서 무슨 신통한 해설이 나올 수가 있겠노 말이다.
애닯은 일이다. 왕삐가 했다는 천하의 명주를 한번 보자.
『美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나아가 즐기는 바의 것이요, 惡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바의 것이다(美者, 人心之所進樂也;惡者,
人心之所惡疾也)』 <노자와 21세기> 상권 122쪽 중단
왕삐가 노자의 주를 단 것이 나이 스물이 되기 전이라 하는데, 십대 소년이 저 정도 쓰면
대견타 할만은 하겠으나 무슨 천하의 명주씩이나 되고 천재씩이나 되는양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안됨이다. 왕삐의 저 글조차도 노자의 글을 제대로 못보고 쓴 것이니
'천하의 명주'가 저럴진대 도올의 해설이야 일러 무삼하리요, 아이겠나?
중학생들을 붙들고 노자 사상이 뭐냐고 물어봐도 '무위(無爲) 사상 아입니껴?'
할아방은 제1장에서 '도(道)'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오면서 곧바로 이 '위(爲)'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할아방이 <도덕경>을
써나간 순서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이다. 제2장의 첫번 째 줄은 바로 '위(爲)에
대한 설명이지, 아름다운게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게 아니다.
생각 좀 해봐바. 제1장에서 도(道)라는 이름을 붙인데 대해서 그 이유를 설명했자나.
그럼 그 다음에 무신 소리가 나와야 되겠어? 자기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그게 본론이자나. 그런데 곽제 무시기 아름답고 추하고
이딴 소리가 왜 나오냐 말이다. 글을 그렇게 쓰면 유치원생이지 사상가겠어?
제2장의 첫 줄은 바로 할아방 사상의 핵심인 '위(爲)'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느니 추하게 보느니 해쌓고 엉뚱한 소리나 늘어
놓응께 할아방이 억장이 막혀 돌아 가실라칸다. 할아방 딴에는 앞으로 자기가 계속
써야될 '위(爲)'라는 글자에 대한 의미를 헷갈리지 말라고 고심고심해서 알아듣기
좋도록 예문을 적어줬더니 얼레! 알아 봐야될 '위(爲)'자는 쳐다도 안보고 '미(美)'자나
'악(惡)'자를 갖고 악다구를 해대니 이기 기가 막힐 노릇 아이가? 암만 할아방이 쉽게
써줘도 돌대가리들한테는 소용이 없는기라. 여게 통신에서 구르미도 그런 꼬라지를
왕왕 보자나.
<도덕경>의 원문으로 함 가보자.
우선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부터 보자.
이 한줄만 가지고는 혹시 부족해서 헷갈릴까봐 할아방이 또 한줄 써놨다.
<도덕경> 전체를 보고 나면 자연히 알겠지만, 할아방은 아름다움(美)과 착함(善)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추(醜)함과 악(惡)함을 멀리하지도 않는다.
할아방은 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의 구별 자체를 싫어한 사람이다. 뒷 장에 가면
'너와 나의 거리가 얼마이며, 선과 악의 거리가 얼마이냐?'라는 말이 나오는데
할아방은 미추와 선악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할아방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바로 '위(爲)'다. 악(惡)을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위선(爲善)을
멀리했고, '추(醜)'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위미(爲美)'를 미워했다.
이 첫 두줄을 엉터리 번역해부니까 이어서 나오는 소리들이 또 연결이 안 되분다.
도올의 번역을 맞다고 치면 제2장은 처음 두줄이 같이 놀고 이하 구절들은 전혀
엉뚱한 소리들이 되고 만다. 하나의 장 안에서 여러 문장들이 문맥상 연결이 안 되고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을 우찌 책이라꼬 읽고 앉았으끼고?
'위(爲)'라는 한 글자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서 할아방이 5천 글자 가운데 스물 세 글자나
투자를 해 놓은 것인데 제일 중요한 '위(爲)'는 갖다 버리불고 번역을 항께로
할아방의 말이 완전히 노망든 노인의 헛소리가 되붕게라.
<도덕경>에서 할아방은 이 '위(爲)'를 '꾸며놓은 것, 가식해 놓은 것, 위장해 놓은 것,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의미로 일관되게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자가 들어간 문장은 대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구절이라서 유심하게 볼 필요가
있다. <도덕경>을 번역하면서 <도덕경> 전체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어를 빼먹은
번역을 우찌 번역이라 말할 수가 있겠노?
도올은 여기서 할아방이 전해주는 '위(爲)'의 의미를 놓치고 만 까닭에 <도덕경>
전체의 번역을 엉터리로 하게 되는 것이다. '무위(無爲)'란 꾸미지 않은 상태,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인데, 도올은 <노자와 21세기>에서 시종일관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뜻으로 풀고 있다. 즉 '무위(無爲)'를 '무행(無行)'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랑께 '노자 강의'가 개그쑈가 될 수 밖에 더 있나 말이지.
계속 가보자.
할아방은 미(美)와 위미(爲美), 선(善)과 위선(爲善)이 들어간 문장을 두 개나 써서
위(爲)에 대한 용례를 보여줬다. 그래서 아마도 후대 사람들이 '위(爲)'라는 글자의
뜻을 헷갈리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했을거다. 그런데도 도올이 같은 까막눈들이
나올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나? 불쌍한 할아방. 이건 할아방의 잘못이 아니다.
할아방은 글을 구르미맹쿠로 친절하게 쓰는 사람이다. 혹시나 남이 이해를 못할까,
잘못 알아듣지는 않을까 세밀하고 섬세하게 살펴서 그런 오해가 없도록 여러가지
장치를 글 속에 마련해놓는 사람이다. 그래도 몬알아 묵는거야 어쩌겠노?
그거야 읽는 사람 잘못이제. 안글나? 쓰는 사람이 그 이상 어떻게 해줄끼고?
<도덕경>은 앞 줄을 몬 알아묵으면 다음 줄의 번역이 안되분다. 그 좋은 예가
여기 제2장이다. 다음 문장들을 보자.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도올이 그래도 동양학을 전공했다는 학자고 칠판에 한자를 써가면서 강의를 하는
사람 아이가. 물론 한번씩 한자가 기억이 안나서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긍께 최소한 이 정도는 번역을 할 수 있다. 도올을 너무 무시하면 안된다. 차말로
대견시럽게도 멋지게 풀어놨다 말이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우리 도올이만 그런기 아이고 <도덕경>을 해설했다고 하는 책들이나, 노자를
연구한다는 세계의 전문가들도 다 마찬가지다. 문장의 글자는 알아보지만 이런
말들이 하필 왜 이 자리에 갑자기 끼여드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는기야.
앞줄하고 뒷줄의 연관성을 찾지를 못항께로 걍 어물쩍 넘어가삘고 마니까
할아방의 책이 웃기는 만화책이 되분다 말이다.
'유가 있어야 무가 성립이 되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고, 높은것이
이게 바로 할아방이 유무(有無), 난이(難易), 장단(長短), 고하(高下), 음성(音聲),
전후(前後)를 주욱 나열하여 말한 요지이다. 첫 두 줄과 이 대목을 제대로 연결해서
읽지 않으면 이 뒤에 따라오는 문장들도 따로 놀아분다. 서로 문맥이 이어지지를 않아.
<도덕경>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가느다란 실 하나로 길게 길게 이어진 문장이어서
중간에 끊기거나 잘라먹으면 이을 수가 없는 것이야. 도올이 해놓은 <도덕경>의 해설은
5천자 길이의 실을 5천 개의 짧은 토막으로 잘라 놓은 것이어서 걍 실 찌꺼기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도대체 테레비에 낯짝을 비춤서 노자를 강의하겠다고
나서는 배짱이 오데서 나왔는지를 몰겄어. 하이간에 내가 우리나라 머시마들 황당한
똥배짱 하나는 인정해 준다. 사줄끼 그것밖에 없는기야. 하기사 그거라도 없으면
한국 머시마들 시체되부제.
내가 중학교 댕길 때 우리집 다락방을 정리하면서 누렇게 색이 바랜데다가 크기는
수첩만한데 표지 뒷면을 보니 소화 13년에 인쇄했다고 적힌 책을 하나 발견했다.
왜넘들이 찍은 <도덕경>이었다. 해석도 없고 풀이도 없이 한자로 적힌 원문만
빽빽한 조잡한 책이었는데 그것을 읽다가 소녀 시절에 구르미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린다. 영혼을 두들기는 북소리가 들렸고 마음의 심연을 흔드는 폭풍이 일었고
무수한 생과 생을 넘어 찾아온 고향을 눈앞에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린다.
한 구절 한구절 얼마나 심금을 울리는 명문들이었던가? 그 어떤 명작 소설이 그토록
아름다우며, 어떤 경전이 그토록 마음을 깨끗히 하여주던가? 노자 할아방의
손을 잡고 무릉도원의 숲속을 거닐며 웃고 까불던 그 날들이 어제처럼 아련하다.
할아방의 순진무구하며 티끌 한점 없는 그 마음의 경계를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도덕경>의 글들을 보면 눈물이 그냥 쏟아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도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평생을 걸고.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컴퓨터에서 '정열의 꽃'이 연주되어 흘러나오고 있다.
창밖에는 고즈늑히 어둠이 깔리고 가을 밤이 깊어가면 한줄 고전에 눈물을 쏟고 싶다.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그래서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미지 아니하며, 말없이 행동으로 가르친다'
어쩔 수없이 우리는 도올의 번역도 봐줄 수밖에 없다. 슬픈 운명이다.
도올 번역하여 가라사대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라고 풀어놓았다.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제?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한다'는기 도대체 뭔 소리고? 나는 당췌 무식해서 도올이
하는 말은 알아묵지를 못하겄어. 동양학이 이렇게 골치 아픈 것이면 누가 그 짓을
하겠노? 성인은 일을 할 때 말로서 꾸미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소리를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고 하니 얼척이 없제.
번역은 그렇다치고 해설해놓은 꼬라지를 보면 더욱 가관이다. 무위(無爲)를
차말로 눈앞에 있기만 하면 한대 콱 쌔리주고 싶다. 노자의 위(爲)를 '무엇을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도올은 할아방이 흑이라 하면 자기는 백이라 하고
그것이 바로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이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노자 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행(行)에 있다. '무위(無爲)의 행(行)' 이것이 바로
노자 사상이다. 꾸미고 지어내지 않는 자연스러운 행함이 바로 무위의 행이다.
말로 속이고 말로 사람을 부려먹지 않고 스스로 실천하는 행이 바로 무위의 행인 것이다.
'무위(無爲)'를 '함이 없음'이라고 받아들이면 대책이 없다. 인연이 안 닿는 중생은
부처도 구제해주지 못한다 했다.
기왕에 시작한거니 끝까지 가보자.
도올한테는 쪼까 어려웠을랑가 몰라도 지금까지 나온 한자들은 그래도 좀 쉬운
글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생소한 글자들도 막 나오기 시작한다.
이걸 어쩌면 좋아 그래, 얼매나 웃길른지 기대반 걱정반이다.
다음 문장은 이런건데 우리의 희망, 21세기의 등불 도올의 강의를 따라가 보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도올 가라사대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우선 '만물작언이불사(萬物作焉而不辭)'다. 여기서 사(辭) 자는 '말할 사'다.
할아방의 저 이바구를 쪼께 바까가 말하면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해낸다
'나긴 났는데(生), 있지가 않다(不有)' 이러면 해석 끝난거자나. 문장이 쪼매
그러면 우리의 우상 도올이 뭐라해놨나 봐야지. 도올은 이 '생이불유'를 '
'그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없는 듯 있는 사람. 이것이 바로 성인의 사는 모습'이라고
내가 도올이 테레비에서 하는 강의를 몇 편 보다가 처음에는 웃었지. 근데 나중에는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함 봐 보래이. 우리 도올이 갈수록 태산이다. 이 '위이불시(爲而不恃)'를 갖꼬
앞서 말했다시피 '위(爲)'라는 글자는 <도덕경> 전체의 중심어 역할을 하고 있는
위의 문장에 이 위(爲)가 첫머리에 나오자나. 그람 이기 뭔 말이겠노? '위이불시
위(爲)라는 글자를 '잘 되어 가도록 한다'는 뜻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노자의 사상은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도 마찬가지.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 속에 살지 않는다'는
夫唯弗居, 是以不去
도올의 틀렸을 것이 뻔한 해석을 먼저 보자.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여기서 하나 소개하고 넘어가야 될 일이 있다. 나는 도올이 어떻게 '생이불유'
생이불유(生而不有) : production without possession(소유 없는 생산),
황당하기는 진배없지만 그래도 도올보다는 러셀이 약간 수준이 높제. 그래도 그렇지,
다른거면 몰라도 '노자'를 양코배기가 우찌 안다 말이고? 러셀이 했다는 저 소리는
공산주의 강령에나 나올 일이고 꼬뮤니스트들 선동 팜플릿에나 어울릴 얘기지 저게
노자 할아방하고 무신 관계가 있는 소리고? '나서서 까불지 말고 없는 듯이 살아라'는
말을 '소유없는 생산'이라고 영역을 해농께 양코배기 학자라카마 또 꺼뻑 죽는 도올이가
그걸 보고 그대로 베껴갖꼬 써묵는다는거자나. '꾸밈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기 주장없는 행동'이라고 풀면 노자 할아방 설 자리가 없다. 나도 러셀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
러셀이 뭔 노자를 해설한다 말이고? 우리가 기대할 걸 해야지, 그래 할아방 말씀을
우리가 못 알아듣고 양넘한테서 답을 빌려온다 말이야? 우리 학문의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돼? 세종대왕이 통곡하시는 소리가 안 들리나?
노자가 뭔지도 모리는 러셀이 해논 소리를 갖꼬 도올이 '소유니 생산이니'
떠들고 있능기야. 그래가 우찌되는 주 아나? 저 뒤에 가보면 우리 할아방을
원시공산주의자로 맹길고 있다. 잘못하면 할아방이 뽈갱이들 족보에 시조로
등장할 판이다. 그라면 구르미도 뽈갱이 호적에 오르겄네. 이런 황당한!
제2장의 원문 전체를 놓고 도올의 번역과 구름의 번역을 비교해서 보자.
◆ 도올 역 ◆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겨루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노래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함이 없음의 일에 처하고
말이 없음의 가르침을 행한다.
만물은 스스로 자라나는데
성인은 내가 그를 자라게 한다고 간섭함이 없고
잘 생성시키면서도 그 생성의 열매를 소유함이 없고
잘 되어가도록 하면서도 그것에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져도 그 공속에 살지 않는다.
대저, 오로지 그 속에 살지 아니하니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가 문장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쓸 때는 그 앞의 문장에 '그러한 이유'가
나와야 하고 그 이유와 뒷 문장의 '어떠하다'가 논리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건 초중학생 논술 지도에서나 나올 얘기인데 명색이 노자 사상을 논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자체가 서글픈 일이다. 그런데 현재 나와 있는
<노자 도덕경>의 해설을 볼라치면 앞글과 뒷글이 따로 노는데다가 논리적인
연결이라고는 전혀 안되고 있는데도 오히려 그런 점을 견강부회 억지점철로
끼워 맞추어 노자 사상의 심오함이 그런데 있기나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학계의
현실을 볼 때에 구름이 암만 좋은 말로 점잖게 말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만든다. 도올 한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메 사실 도올은 억울할 수도 있다.
'쓰바, 내만 그랬나? 딴넘들도 다 나하고 비슷하게 해석들 해왔는데 왜 나만 이리
모질게 두들기냐?' 하고 구름을 원망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도 있고 긁어 부스럼 맹긴다 소리도 있고, 가만 있으면 50점을 받으낀데
나서서 빵점 받는다 소리도 있자나. 우리나라에서 노자를 내놓고 팔아묵은 사람은
도올이 첨이다. 그랑께로 도올이 시범케이스로 매를 맞을 수 빠이 더 있나?
사설은 고만 줄이고 2장에 대한 구름의 번역을 보고 3장으로 진도 나가자.
♡ 구름 역 ♡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꾸며진 아름다움이니
이것(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다운 것처럼 꾸며서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악한 짓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선하다고 믿고 있는 것(또는 사람)이
사실은 선함을 가장한 것이니
이것(선하지 않으면서 선한 척하는 것)은 불선이니라.
없음에서 있음이 생기고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게 되고
긴 것을 두고 짧은 것을 재는 법이며
높은 것과 견주어 낮은 정도를 보고
소리와 비교해서 음악을 알아듣고
앞이 정해져야 뒤가 따를 수 있음이다.
(만약에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게 지어내거나
선하지 않은 것을 선하게 꾸미거나
어려운데 쉬운 것처럼 가장하거나
짧은데도 긴 것처럼 속이거나
낮은 것을 높은 것처럼 과장하거나
소리를 음악이라고 우기고 앞과 뒤가 헷갈리면,
세상 사람들이 진실로 아름답고 추한 것과
선한 것과 악한 것과 있고 없음과 길고 짧음과
어렵고 쉬운 것과 높고 낮음과
음악과 소리의 구별을 하지 못하며
무엇이 앞이고 무엇이 뒤인지를 알지 못하나니)
그러한 이유 때문에 성인은 일을 함에 있어서
꾸며대지 않는 것이다.
말없이 실천함으로서 가르치고
천하 만물을 자기 손으로 만든다해도
떠들어 자랑삼지 않는다.
살면서도 (드러내지 않기를) 없는 듯이 하고
꾸며서 지어내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어도 쌓아 두지 않음이니,
대저, 오로지
쌓지 않음으로서 그 공이 없어지지 않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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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올의 해설은 우리말이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데에 반하여 '우리말을 오염시킨다'는 불만이 있긴 하지만, 구름이의 설명은 알아 듣긴 하겠습니다. 도덕경의 본 뜻과 같은지 여부는 내가 언급할 주재는 아니지요.
구름이 '우리말을 오염시킨다'라고요?
누군지 시기질투 아닌가 모르겠네요
저는 구수하고 좋기만 한데요,
'우리말을 오염시킨다'는 불만은 남의 말을 인용한 것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니 '시기나 질투'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까닥질을 치다'는 일본말 '사까다찌(거꾸로 서다)'를 빌어온 말인 듯하지만, 그냥 '발광을 하다', '난리를 벌이다' 등 순화된 어휘를 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좀 어이없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하
1. 노자의 도덕경 이야기에 도올의 해괴한 변설이 등장할 이유가 없지 않을가요? 혼동만 되는군요.
2. 궤변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제가 꼭같은 논법으로 궤변을 만들어보겠습니다.
"모든사람이 푸르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는 푸르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푸른 것이 아니다"
또는
"모든사람이 청산칼리를 독약이라고 한다고 우리는 그것을 독약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것은 독약이 아니다 "
그냥 괄호안에 말만 가져다 넣으면 문장이 돼지만 이것은 화두도 결론도 다 무의미한 말장난입니다.
이런 경우 누군가가 반박을 하면 의례이 궤변가는 "당신 누구의 무슨 책 읽어 봤어?" 하고 묻습니다.
못읽었다고 하면 "거봐! 그러니까 내 말을 이해를 못하쟎아" 하면서 장황하게 아무 관계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고 이것에 대해 계속 지적을 하면 옆에 있던 똥개 (꼬붕) 들이 합세해서 덤벼듭니다.
한국인의 지능이 일본이나 유태인들에 비해 한단계 아래이고 그래서 한국인의 민도가 낮다고 제가 섭섭한 말을 하는 이유는 이런 궤변을 무슨 멋있는 것으로 듣고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특히 서울대 인간들이 그중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무식한 할머니가 봐도 아닌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을 항의하는 타 대학생들이 서있는 길 건너편에 피둥피둥한 서울대 년놈들이 명품 유행옷 입고 서서 북한 김정은에게 쌀을 보내주자고 피켓을 들고 멋을 부리고 있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민통당에서 서울대 폐쇄론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 참 잘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슴드립니다.
누가 하는 말이던 궤변은 궤변입니다.
"있는건 없는것이고 없는건 있는 것" 이라는 식의 만유 사원소설 시대에나 통하던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양 떠드는 사람이 인기를 얻는 일이 지속되는 한 그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사회의 문제는 용기있게 궤변을 궤변이라고 지적하는 참된 지성인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사회 지도자들이 푸른 것을 푸른 것이 아니라고 해가지고 일단 사람들을 색맹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 색갈이나 자기 맘데로 칠해서 나무는 붉다 하고 떠드는 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입니다.
그러다보니 정치지도자는 국가 안보를 해치는 짓을 해야 인기를 얻고, 목사나 중은 여신도들을 욕설로 협박해서 금품을 갈취하고 발가벗겨 희롱을 해야 성령과 법력이 충만한 영적 스승으로 추앙을 받고 신도들은 그래도 아멘, 나무괸세음 보살 하고 굽신거려야 신앙과 불심이 충만한 사람을 인정을 받고, 자기 아버지뻘 돼는 어른한테 대고 입에 담지못할 쌍욕
쌍욕을 하지 않으면 연예인으로서 인기를 얻지 못하는 그야말로 도착된 세상이 되어있는 것이 한국 사회입니다.
어쨌는 윗 구절에 대해 노자가 말한 뜻을 해석해 놓은 것을 어느 책에서 본적이 있어 여기다 옮겨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상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다들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는 (세상 어디엔가)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이 선한 것을 다들 선하다고 하는 이유는 (세상 어디엔가) 악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美醜나 善惡은 色感이나 味覺처럼 인간의 오랜 진화 끝에 인간의 심리 속에 형성된 인간적 개념이지 그러한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 나는 노자의 이러한 절대적인 세계관에 100% 찬성을 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노자가 말한 뜻은 대략 위에서 제가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노자와 같은 계열이라고 믿어지는 장자가 한이야기라고 제가 알고 있는 명언한마디 소개 합니다.
"세상의 가장 큰 골치꺼리는 소위 학자라는 놈들이다.
그놈들이 제멋대로 자유롭게 살아야할 인간들을 국가와 법이라는 제도로 묶어놓아 훔치기 좋게 만들어가지고 누구든 나라를 훔치면 왕후장상이 되게 해 놓았단 말이야!"
Plato 역시 이상적인 국가를 유지하려면 시인들을 모두 추방하라고 했다고 들었습니다.
엄정해야 할 법에 인간의 감성을 한데 엮다보니 오늘날 저 감상적인 민족주의에 젖어 개같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이 대한민국 사법계에
득시글 거리는 것 아닙니까?
한국인이 일본인이나 유태인보다 머리야 좋지요
평균 아이큐 수치의 공식 비교 데이터에 의하면은요
그러나 모두 세상에서 지가 젤 잘났다는 가정교육의 세뇌로 인한
허세로 매사를 망치는 것이 문제이고 어느 잘못이든 그건
다 남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니라는 태도가 골수에 박혀있는 것이 문제지요.
저는 같은 동양인이라도 100M 전방에서도 한국남자는 알아봅니다..
그 구토가 날 정도의 거드름 피우는 걸음걸이!!
언급된 그릇된 사회지도자를 뽑은 사람들이 누굽니까?
그릇되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뽑았습니다
그래놓고 딴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인냥 하는 꼴도 봐주기 힘듭니다
안 믿어 지시겠지만 실제 유태인들의 평균 아이큐는 옛날 70년대까지 있었던 경기고등학교의 평균 (>133) 과 맞 먹습니다..
인구와 국토가 좁은 한국이 강대국을 상대하여 살아 남으려면 국가의 장래를 위해 오히려 경기고같은 학교의 정원을 대폭 늘리고 이들을 지원해야 할 판에 평준화를 했다는건 대단한 실수입니다.
게다가 유태인들의 아이큐는 표준편차가 큽니다. 따라서 수퍼천재가 나올 확률이 큽니다.
세계적인 인물의 대부분이 유태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역시 그 정도는 아니어도 평균보다 표준편차 하나정도 높습니다. (~114)
그러나 일본인들은 표준편차가 작기 때문에 바보가 나올 확률이 적고 비슷하게 똑똑하
비슷하게 똑똑하기에 통솔하기에 쉬운 장점이 있어 사회가 잘 굴러가는 것입니다.
한국은 그보다 한참 아래입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하는 짓거리가 일본인들을 못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강대국국민들은 경계를 피하기 위해 자기들의 아이큐를 감추고 남을 계속 추어댑니다.
바보 한국인들은 그게 진짜인줄 알고 마구 우쭐대다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제발 정신좀 차립시다.
국가사회가 말성없이 잘 굴러가려면 사회 구성원 각자가 모두 다르고 자기자신 역시 남과 다름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똑똑하지도 못 하면서 남에 대한 시기심만 많아 공부든 운동이든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을 깎아내리고 뒷다리를 잡아당기는 버릇만 있어서 어딜 모여도 밤낮 자기들끼리 싸움질 뿐인 것입니다.
저게 똑똑한 짓입니까? 저게 아이큐 높다는 인종들이 하는 행동입니까?
이제 한민족 우수하다는 말좀 하지 말았으면 할때가 많습니다.
일본사람들이나 유태인들이나 유럽인들이 그런말 하는 것 들어보셨어요?
이 글을 올리면서 잠깐 숙고했었습니다
한문 원본과 구름(이경숙)의 해석만 짤막하게 올릴까, 아니면
오역을 설명하는 글 전체를 올릴까...전문을 싣기로 결정한 이유는
1) 제가 찾아본 도덕경의 주해서 대부분이 도올의 해석과 비슷합니다
도올처럼 눈에 띄게 밥맛없는 사람만 오역을 한게 아닙니다'
도올의 모습은 곧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나는 저렇지 않다가 아닙니다
하다못해 道는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란 말이
이 카페에서도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지 않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도올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2) 도올의 오역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한문의 이해가 더 명확해 집니다
3) 취사선택해서 쓸만큼 도덕경이나 한자의 해석에 제가 박식하지 못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어느 누구의 해석보다 이경숙의 해석이 납득이 가고
옳다고 믿지만 그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수 있도록 하려면
펌글 전체를 그대로 게시해야 옳다고 믿습니다
4) 글이 기막히게 재미있는 하이코메디 입니다
양해하여 주시옵고 도올은 이름을 보는 것만도 역겨우시면
읽으시는 분께서 그 부분은 건너뛰시길 바랍니다.
이선배께서 보신 누군가의 해석:
세상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다들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는
(세상 어디엔가) 아름답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틀린 것으로 보입니다.
斯惡己에 있다 없다는 개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더러 하라면
斯는 이 사
己는 자기 기
之는 갈 지 이므로
세상사람 모두가 아름다운 것을 알므로
아름다우려고 그 아름다움을 꾸미는데 이것은 나쁜 것이다
라고 하겠습니다. 제게는 이경숙의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예예, 알겠습니다.
나는 그저 내가 가진책에 그렇게 씌였더라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누구의 해석이 맞든 별 의미없이 들린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 뿐입니다.
(아이고, 그거 한마디 했다고 또 그냥 . . )
장자와 노자가 말하는 道가 같은 계열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장자도 저는 맘에 들지 않습니다
열심히 읽지않아 말할 자격이 없기는 하지만
맘에 안들어 열심히 읽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전에도 글에서 비친바 있지만 장자의 무위는
노자의 말없이 行함이 아닌 것으로 느껴집니다.
다 같이 넋빼고 쓸개뺀 괴로울 것도 없는
바보가 되자는 무위인 것 같습니다.
나도 그들에 대한 깊은 공부를 한적은 없기에 확실한 말은 할 수가 없고, 단지 그들이 같은 학파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것을 어느 책에서 본적이 있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장자도 노자도 공자도 읽으라고 권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우기 글자 한자에 매달리는 것은 더웃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창조한 사람들이 아닌바에야 그들이 써 놓은 글에 무슨 우주의 진리가 있다고 거기에 매어 달려야 하나요?
김영신양이 자신의 오감으로 느끼는 것을 분석하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똑똑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 김영신양을 똑똑하다고 칭찬 했던 이유는 본인이 가지고 태어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노자도 공자도 다아 한시대 살다간 사람들로서 오늘날의 숙자나 영자보다 하나도 나을것이 없기에 드리는 말슴입니다.
오래전 우리 큰아들이 태어났을 때 아내의 산구완 때문에 미국을 방문하신 장모님이 마침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에서 노르만디 해안에 상륙하려고 몰려드는 미군들이 독일군의 기관총에 볏단 쓰러지듯 무더기로 죽는 광경을 보시다가 품에 안으신 아기를 내려다 보며 "이렇게 힘들여 키운 아이들을 저렇게 마구 죽이는 저놈의 전쟁을 뭣뗌에 하는고" 하고 한탄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평화를 역설하는 백권의 책보다 일제때 초등학교밖에 안 나오신 우리 장모님의 이 한마디가 왜 전쟁이 나쁜지를 훨신 더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시대에 맞는 눈과 언어로 사물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