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한국 개신교의 타종교 이해
비판의 논리를 중심으로
1. 서론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동양고전종교’ 전통을 대표하는 유교와 불교, ‘서양종교’ 전통을 대표하는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근대 한국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이른바 ‘민족종교’ 전통이 각기 일정한 세력을 이루면서 공존하고 있고, 이외에도 제도화되지 않았지만 사회저변에 광범위하게 자리 잡고 있는 민간신앙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종교전통들 중 어느 하나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거나 주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는 특정한 어느 하나의 종교전통이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지배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는 사회와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종교적 상황을 일러 ‘다종교 상황’이라할 수 있겠다. 이러한 다종교 상황은 종교 간의 조화에 의해 풍요로운 종교문화를 창조할 수도 있지만 종교 간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사회적인 갈등과 마찰을 빚어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는 ‘종교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일어나고 있지 않지만 종교간의 갈등의 조짐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종교집단 간의 갈등이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의 ‘다종교상황’은 종교 간의 조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갈등적 종교상황’을 야기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갈등적 종교문화의 형성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고 있지만, 각 종교전통의 타종교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고는 한국 개신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어떠한 이해를 보이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는 매우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전통문화와의 괴리감은 여전히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 내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어 왔으나, 타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를 구체적인 자료에 입각하여 살펴본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타종교에 어떠한 이해를 보이고 있었는가를 종교전통별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이글에서는 해방 이전의 개신교에 한정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이 시기의 타종교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사실 해방 이전의 개신교는 오늘날만큼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자체 내에 어느 정도 분화된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차이성보다는 공통성에 주목하였으며, 특히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의 태도보다는 비판의 논리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는 당시 한국 개신교의 지배적인 흐름이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보다는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사문제나 상이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사이의 결혼 등 개인적 혹은 가족적 문제에서부터 단군성전의 건립, 석가탄신일의 공휴일 지정, 공교육에서의 종교교육 시비 등 사회적인 문제들도 야기되었으며, 선거과정에서 후보자의 종교가 당락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면서 종교간 갈등이 표면화되기도 하였다. 최근의 불상훼손 사건은 자못 심각한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지식인 집단을 대표하는 대학가에서의 장승파괴 사건은 주목해야 할 문제이다.
개신교의 타종교 이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개신교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기이해’와 ‘타자이해’는 상호 밀접한 관련을 지니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이해’와 ‘타자이해’를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 장치의 하나는 ‘종교’라는 범주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개항기와 일제시대에 발간된 개신교의 신문과 잡지를 중심으로 당시 개신교가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먼저 살펴본 다음, 각 종교전통에 대하여 개신교가 보여준 이해와 비판의 태도를 살펴본다. 그리고 이러한 개신교의 태도가 한국개신교사, 나아가 한국종교사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2. 개신교의 자기 이해
근대 한국 개신교는 두가지 조건을 이상적 종교의 기준으로 설정하였다. 하나는 유일신 신앙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계시성’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서구사회의 산물인 ‘문명성’이다. 따라서 이상적이고 완전한 종교는 ‘계시종교’이자 동시에 ‘문명종교’로 나타난다. 그러면 당시 개신교는 ‘계시종교’와 ‘문명종교’의 구체적인 특성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가를 ‘계시종교론’과 ‘문명종교론’이라는 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계시종교’론
계시신앙은 유대교·기독교·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유일신 종교전통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동일한 ‘아브라함 종교전통’(the Abrahamic faiths ; Turner 1983 : 21)에 속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게 된다. 이때 제시되는 논리는 기독교만이 “적극적으로 세계의 구원을 추구하고 인간의 역사에 인간과 동일한 높은 도덕적 성격과 목적을 가지고 나타난 사랑의 신”(KMF 1938 : 203)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독특한 ‘기독론’(Christology)을 통해 유대교 및 이슬람과의 질적 차이성을 보여주려고 하는 시도이다. 개신교는 이러한 기독론의 근거가 되는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종교’가 아니라는 역설적 주장을 전개하기도 한다.6) 만일 ‘종교’(religions)를 “신을 추구하고 발견하려는 다양한 인간의 노력”으로 정의한다면, 그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KMF 1940 : 31-32). 다시 말해 기독교는 “신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잃어버린 인류를 찾아 구원하려는 신의 계시”(KMF 1940 : 32-33)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론’의 독특성은 다른 종교전통에서 나타나는 성인(聖人)과 예수를 비교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自古及今으로 東西에 여러 聖者가 踵出엿지만은 예수 獨斷的으로 神의 子되는 意識을 장 明白히 장 有力게 感覺야 此를 發表셧다(金鍾弼,〈기독신보〉1925년 1월 14일자).”
요컨대 이 세상에는 ‘聖者’가 많이 나타났지만 예수만이 ‘신의 아들’로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를 ‘성인’ ‘혁명가’ ‘사상가’ ‘세계문화개척자’ ‘萬代萬邦의 年代와 世紀主人’ ‘東西古今에 特立獨步하는 人格者’ 등으로 믿는 자들이 있으나 예수를 ‘生命’으로 믿는 것만이 ‘信仰의 眞髓’라는 것이다(정영호,〈기독신보〉1933년 10월 11일자). 즉 예수를 단지 ‘예언자’나 ‘종교적 천재’와 같은 ‘純人間’으로 여겨 그 교훈만 중시하고 ‘最高의 道德理想’이나 ‘高尙한 文化宗敎’로 간주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張道源,〈성서조선〉1932년 7월호).
다시 말하여 예수는 ‘超自然 前自然의 神’으로서 인류를 ‘自然과 不自然’에서 ‘超脫’시켜 ‘前自然 超自然의 神의 王國’으로 이끄는 존재라는 것이다(채필근,〈신학지남〉13권 2호, 1931). 그러므로 기독교는 불교나 유교와 같이 ‘倫理의 宗敎’ ‘文化의 宗敎’ ‘哲學의 宗敎’가 아니라 “그리스도 自身을 먹고 마시는 宗敎”라는 것이다(張道源,〈성서조선〉1932년 7월호). 기독교 신앙이 초월성과 계시에 근거한 것임을 잘 보여주는 한 개신교인의 신앙고백이 있다. “나의 宗敎 卽 基督敎는 의 宗敎가 안이고 하날의 宗敎이며 肉의 宗敎가 안이고 靈의 宗敎이며 自力의 宗敎가 안이고 他力의 宗敎이며 儀式의 宗敎가 안이고 信仰의 宗敎이다(宋斗用,〈성서조선〉1929년 1월).”
이 짧은 표현 속에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는 땅 - 하늘, 육 - 영, 자력 - 타력, 의식 - 신앙이라는 양분법에 근거하여 기독교가 하늘·영·타력·신앙의 종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늘과 영은 초월의 세계를 나타내며, 타력은 타력신앙을 의미하며, 신앙은 의식(儀式)중심의 종교에 대한 비판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관념은 상호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계시신앙의 기반을 제공한다. 요컨대 계시종교론은 유일신 신앙, 타력신앙, 초월성 등을 하위범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러한 기준들을 사용하여 타종교들을 평가하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먼저 유일신 신앙의 잣대는 다신신앙의 형태를 띤 동양종교 전통들을 ‘우상숭배’라는 범주로 설정한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유일신 이외의 존재를 신앙대상으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상숭배’라고 하는 기독교적 범주가 ‘미신’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범주로 전환되는 곳에 존재한다. 근대사회에서 ‘미신’이라고 하는 범주는 ‘종교’와 대립되는 범주로 존재하고 있으며, ‘종교’는 ‘미신’에 대하여 ‘특권적인’ 범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신’의 범주로 설정된 종교 혹은 종교현상들은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되는 동시에 종교의 ‘자격’과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유교의 조상제사, 불교전통에서의 부처숭배나 보살신앙, 다양한 신격을 상정하는 민간신앙과 신종교들은 모두 ‘우상숭배’ 즉 ‘미신’으로 간주되고 만다. 심지어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마저 ‘우상교’로 간주되는 것이다.
두번째로 ‘타력신앙’이라는 기준은 ‘자력신앙’을 비판하는 무기로 작용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타력신앙은 ‘객관적 계시’에 근거한 신앙이고 자력신앙은 인간의 ‘주관적인 의지’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객관적 계시에 근거한 신앙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앙으로 간주되는 반면, 주관적 의지에 근거한 신앙은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신앙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타력신앙과 자력신앙의 양분법은 ‘신본종교’와 ‘인본종교’의 양분법과 연결되면서 ‘자력종교’와 ‘인본종교’를 비판하는 무기로 작용한다. 따라서 수행과 수련을 중시하는 동양종교 전통들은 이 분류법에 의해 ‘자력종교’와 ‘인본종교’의 범주로 설정되면서 ‘불완전한 종교’로 평가된다. 구체적으로는 도덕적 실천을 중시하는 유교와 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진다.
세번째로 초월성의 범주는 현세지향적인 종교를 비판하는 무기로 작용한다. 초월성의 범주는 자연 - 초자연의 양분법에서 파생한 것으로서 초월적 유일신 관념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따라서 이 기준은 초월의 관념이 약하거나 자연과 초자연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은 종교전통들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내세관념이 결여되어 있다고 간주된 유교와 천도교가 이 기준에 의해 단순한 윤리체계나 정치단체라고 비판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당시 한국에 존재하던 타종교들은 개신교의 계시종교론에 의해 윤리·철학·미신·자력신앙·인본종교· 현세지향적 집단 등으로 범주화됨으로써 종교영역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 되었던 것이다.
2) ‘문명종교’론
개신교는 유일신 신앙에 근거한 ‘계시종교론’의 입장에 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문명의 종교’임을 간접적으로 내세웠다. 이때 ‘문명종교’란 근대문명을 산출한 종교를 의미한다. 선교초기의 개신교는 ‘학교’와 ‘병원’으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을 간접선교를 통하여 소개하고 보급하는 과정에서 개신교 자체가 ‘문명종교’라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던 것이다. 개신교를 ‘문명의 기호’(장석만 1992 : 51)로 보는 관점은 이미 개항기 지식인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고 있었다. “크리스도씨의 교를 착실히 하는 나라들은 지금 세계에서 제일 강하고 제일 부요하고 제일 문명하게 제일 개화되어”(〈독립신문〉1897년 1월 26일자)라는 주장이나, “문명 부유한 구라파와 미국은 도덕 종교에도 우리의 모범”(장석만 1992 : 51)이라는 주장에서 그러한 관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개신교 진영 자체가 “지금 셔양 각국에 뎨일 문명고 뎨일 부강 나라를 보라 그 나라들이 무교를 슝샹 뇨”(〈대한크리스도인회보〉1898년 6월 1일자)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개신교가 ‘문명종교’라는 답변을 유도하고 있다.
“··· 우리 예수교로 나라를 다리면 사을 죽이고 를 앗지 아니여도 나라이 부고 군가 강야 문명화에 진보가 될거시니 뎐국에 우리교회가 흥왕면 엇지 복이 아니리오(〈대한크리스도인회보〉1898년 6월 1일자).”
사실 개신교는 선교초기부터 천주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문명의 종교임을 간접적으로 강조하여 왔다. 개신교 선교사는 천주교 선교사처럼 ‘은자’나 ‘수도사’나 ‘독신자’가 아니라 ‘문명의 옹호자’라고 하는 주장이나(Griffis 1912(1985) : 145), 천주교가 들어온 지 수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시아 지역이 변화된 것이 없는 데 비하여 개신교는 전반적으로 ‘문명을 재창조’(Griffis 1912 (1985) : 146)하였다는 주장 등에서 그러한 관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일본·한국·중국의 근대화와 문명화는 모두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가능해졌다는 논리도 나온다.
나아가 개신교는 “보라 ··· 오날 朝鮮에셔 相當 敎育을 밧고 世界大勢를 斟酌야 民衆의 前途를 指導자 十의 七八은 다 基督敎人이 아닌가(〈기독신보〉1925년 7월 15일자)”라고 주장하는 한편, “예수를 救主로 仰拜 나라들은 다 文明고 그를 不信任 우리 民族이 오히려 濃霧중에 잇다”(〈기독신보〉1925년 7월 15일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現世의 文明을 代表만 모든 나라들의 進步發達을 보면 다 그리스도敎의 敎旨에 應야 合理的으로 實現 것”(姜明錫,〈기독신보〉1923년 11월 21일자)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개신교는 새로운 시대의 진보적인 종교로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십셰긔의 과학뎍 졍신을 가진 남녀들이 인의게 만죡을 주지 못 불완젼 종교를 리고 새명을 부어주 그리스도교를 요구은 별노 이샹 일이 아닐 것이다(류백희,〈신학세계〉12권 4호, 1927).”
그러면 개신교는 ‘문명종교’의 조건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었는가? 다시 말해 문명종교는 어떠한 구체적 요소와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개신교는 문명종교의 조건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거기에는 2가지 요소가 암묵적으로 전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근대과학’의 수용이고 다른 하나는 ‘정교분리’ 원칙의 수용이다. 즉 개신교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문명종교는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정교분리 원칙을 수용하는 종교인 것이다. 근대사회의 형성과정에서 등장한 개신교는 과학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점차 과학을 수용하여 왔으며 근대사회의 편성원리로 등장한 정교분리원칙도 수용하여 왔던 것이다.
한국 개신교도 초기부터 근대과학의 필요성과 정교분리원칙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왔다. 물론 선교초기에는 근대과학을 선교의 보조수단으로 이용하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자의 종교비판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과학의 양립가능성과 함께 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는 과학의 적은 ‘종교’가 아니라 ‘미신’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미신’이야말로 과학과 종교의 공동의 적이라는 논리이다. 개신교는 이러한 논리에 근거하여 타종교의 비문명성과 미신성을 공격하게 된다.
한편 한국 장로교는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가지 조건”(1901)이라는 지침에서 교회의 비정치화를 선언하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는 당시의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종교’의 원칙을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근대사회의 형성 자체가 정치와 종교의 분리로 특징지워지기 때문에 근대사회의 산물인 개신교는 이러한 원칙을 수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이러한 정교분리의 원칙에 입각하여 정치와 종교의 미분화 상태를 보이는 종교나 정치지향적인 종교를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3. 개신교의 타종교 비판의 논리
1) ‘윤리’로서의 유교와 ‘미신’으로서의 조상숭배
개신교의 선교활동 과정에서 유교는 매우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비록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조 사회는 해체되고 있었으나, 유교적 세계관이 강인하게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통지식인의 일부는 ‘개화’지식인으로 변모하여 갔지만, 대다수의 전통지식인은 유교적 이념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하층계급도 유교의 핵심적 의례인 조상제사를 대부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 한국의 유교는 기독교나 불교 혹은 신종교처럼 독자적인 교단조직을 결성하지 못하였으며 당시 대부분의 유림이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고종(高宗)이 발표한 조칙문(詔勅文)인〈존성윤음〉(尊聖綸音)(1899)은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규정하고 있다. “세계만국이 宗敎를 숭상함은 다 인심을 맑게 하고 治道를 내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의 宗敎는 어찌하여 높힘이 없으며 알참이 없는가? 우리나라의 宗敎는 孔夫子의 道가 아니냐? ··· 우리 대한은 箕聖이 八條의 가르침을 베풀고仁賢의 化를 펼침으로써 비로소 나라의 宗敎가 그 터를 잡았다(장석만 1992 :54).”
이처럼 고종은 ‘孔夫子의 道’ 즉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고종이 근대적 개념인 ‘종교’를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고종은 “人倫이 사라지고 變怪가 일어나고 亂逆이 잇달아 일어나는”(장석만 1992 : 54) 원인을 종교의 쇠퇴에서 찾으면서 종교로서의 유교의 부흥을 꾀하고 있다.
“짐이 동궁과 더불어 장차 一國의 儒敎의 宗主가 되어 孔子의 道를 밝히고 聖祖의 뜻을 이을터이니 너희 臣僚와 여러 執事들은 각각 悉心對揚하여 尊聖하여 ···(장석만 1992 : 54)”
이처럼 유교를 ‘종교’로 간주하는 태도는 당시 유림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다. 당시 기호지방 유림에 의해 간행된《尊華錄》(1900)과 영남지방 유림에 의해 간행된《大東正路》(1903)에는 모두 유교를 종교로 선포한《尊聖綸音》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병장 유인석(柳麟錫)도 유교를 ‘聖賢宗敎’(금장태 1990 : 55)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시 대부분의 유림이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추론하여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지닌 유교에 대해 개신교는 여러 측면에서 비판과 공격의 화살을 가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비판은 유교가 종교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과 유교의 비문명성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유교의례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하면서 철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개신교는 ‘眞宗敎’의 이상적 조건으로 5가지 항목을 내세우고 있다. 첫째는 “人格이 完全한 敎祖”, 둘째는 “準據할 經典”, 셋째는 “永遠不易의 敎理”, 넷째는 “確乎한 信仰”, 다섯째는 “死의 問題의 解決”이다(金昶濟,〈동명〉1923. 3. 11). 이러한 5가지 요소에 근거하여 볼 때 유교는 한가지 요소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一) 儒敎는 元來 一定한 敎祖가 업고.... 孔子는 元來述而不作이라 도유한 바가 업슨즉 敎祖로 하기는 좀 不完全하다 할 것이오 (二) 儒書의 四書之經을 純全한 宗敎書類라고 볼 수 업고 (三) 永遠不易의 敎理라 할 것을 摸捉하기 難하며 (四) 確乎한 信仰의 對象이 不完全하고 (五) 死의 問題를 解決함이 卽 宗敎의 眞髓라 할터인데 儒敎는 此點에 甚히 瀕弱하다 할 것이외다(金昶濟,〈동명〉1923. 3. 11).”
요컨대 유교에는 교조, 경전, 교리, 신앙대상, 내세관 등이 불명료하기 때문에 유교를 하나의 ‘참종교’로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초월적 신앙대상에 대한 믿음을 결여하고 있는 유교는 인간을 ‘교만’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12) 이는 유교가 “하님의 조물쥬가 되심을 알지 못야 근본은 니져리고 그 지엽(枝葉)만 강습”(崔炳憲,〈신학월보〉7권 4호, 1909)하고, “인간보다 더 높은 이상적 존재”인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교는 신봉자들을 “도덕적이게 할 수는 있으나 영적이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해지는가 하면, “유교인은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서 끝난다”(KRP 1895 : 403-404)고 폄하되기도 한다. 나아가 ‘샹뎨’와 ‘하’을 혼동하는 유교는 ‘획죄우텬’(獲罪于天)(崔炳憲,〈신학월보〉7권 4호, 1909)을 야기한다고 비난되기도 한다.
개신교가 유교를 ‘비종교’ 혹은 ‘불완전한 종교’로 인식하는 보다 결정적인 근거는 유교에 내세관념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교는 다만 “젼지만 의론”(崔炳憲,〈신학월보〉7권 4호, 1909)하고 “神秘的 神明的思想”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 단지 “倫理學 敎育學 政治學”에 불과하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 유교는 “너무 人生의 表面만 觀察하는 것 갓고 人生의 眞正한 中心인 精神方面은 除外”(蔡弼近,〈신학지남〉12권 3호, 1930 : 17-18)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유교는 “倫理 道德 政治 哲學의 書經”으로서 “永遠한 世上에 對하야는 明白한 敎示가 別無”(申鉉彰,〈기독신보〉1934년 8월 1일자)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유교는 종교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파괴하며 물질적인 빵과 버터의 세계 저 너머에 있는 진리를 믿지 못하게”(KRP 1895 : 403)한다고 비판되고 있다. 이러한 ‘유교비종교화’의 논리는 결국 ‘종교’로서의 기독교와 대비되는 것이다.
“孔子敎 現時 人事의 道德이니 人事敎이라 宗敎안이며 我救主의 敎 神人을 通는 萬世道德이니 乃 生民以來 前萬世 後萬世 大一統宗敎이라(愈吉濬 1988 : 217-218).”
요컨대 유교는 하나의 도덕에 불과한 ‘人事敎’인 반면 기독교는 ‘大一統宗敎’라는 것이다. 한편 개신교는 유교의 ‘비문명성’을 비판하고 있다. 유교의 ‘비문명성’의 중요한 표지로 간주되는 것은 ‘국가종교’와 ‘계급주의’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국가종교’란 ‘부족종교’의 단계는 벗어났으나 ‘세계종교’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종교’의 윤리는 “機械的이며 局部的이며 習慣的”(鄭景玉,〈신생〉18권 1호, 1933)인 것으로 규정된다. ‘기계적’이라고 하는 것은 “遺傳과 敎育으로 傳授된 一定한 規例를 그대로 服從하는 것”(鄭景玉,〈신생〉18권 1호, 1933)으로서 ‘형식윤리’를 의미한다. ‘국부적’이라고 하는 것은 “倫理의 普遍的 範圍가 없이 各各地位와 形便을 따라 善의 標準이 다르다든가” 혹은 “그 適用範圍가 階級과 環境을 따러 不同한 것”(鄭景玉,〈신생〉18권 1호, 1933)을 가리킨다. 요컨대 유교윤리는 형식윤리적이고 계급윤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적 윤리가 될 수 없으며, 국가의 영역을 초월하는 ‘보편종교’의 문명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교는 ‘人民’을 ‘奴隸’로 간주하는 ‘君機萬能’과 ‘獨裁專制’의 윤리를 지닌 것으로 비판되기도 한다. 즉 유교윤리는 “今日 民本主義와는 到底히 相容치 못할” 것으로 간주되는 동시에 “民主共和團體와는 抵觸이 甚한者”로 비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윤리의 골자를 이루는 삼강(三綱)이나 오상(五常)이 모두 “片務的 不平等의 道德, 階級尊卑의 具現”이며, 더구나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 같은 것은 도저히 오늘날의 “自由平等公正共榮協同의 道德的 基礎우에 立할수 업는 暴論”으로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유교윤리는 “今日 朝鮮, 아니 東洋人의 精神, 道德을 支配할 能力이 업슴”(金昶濟,〈동명〉1922. 11. 12)이라고 규정되고 있다. 요컨대 유교는 시대에 뒤떨어진 ‘비문명적’ 종교라는 것이다. 결국 개신교는 ‘종교’로서의 유교가 지니고 있는 특성인 ‘현세지향성’과 ‘윤리지향성’을 ‘유교비종교화’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한편, 유교윤리의 ‘국가윤리적’ 성격과 ‘위계적’ 성격을 ‘유교비문명화’의 전략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는 개신교가 유교를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거나 주변화 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철학’과 ‘미신’으로서의 불교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과 함께 세계 3대종교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의 경우처럼 ‘종교가 아닌 것’으로 ‘쉽게’ 배제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개항기부터 이미 서양인들에 의해 불교의 미신성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한국을 여행한 영국 인류학자 비숍(Isabella L. Bishop)은 불교 승려들을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Bishop 1898(1994) : 171-172)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재한 프랑스 외교관 쿠랑(Maurice Courant)도 불교를 “민중의 미신과 높은 양반들의 악덕의 타협으로 가득차 있는 가르침”(Courant 1894(1989) : 123-124)으로서 ‘가정과 시민 사회의 파괴자’(Courant 1894(1989) : 124)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개화지식인’의 하나였던 윤치호도 일기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고백한바 있다. 그는 불교를 ‘애매하고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허구와 신비주의’의 특성을 지닌 ‘망할 종교’라고 표현하고 있다(윤치호일기 Ⅲ : 229). 당시 한 개신교인18)은 절에 가서 다음과 같이 불교를 노골적으로 공격한바 있다.
“형뎨들아 뎌거 다 쓸업 우샹이니 셤기면 졈졈 죄을 더지으려니와 독일무이신 진신과 그의 아님 예수크리스도 밋은즉 오날지 부쳐셤기던 죄지라도 다 샤심을 엇으리라 형뎨들이 방쟝디옥에 결박지여 갓친 거 보니 답답도다 디옥은 곳 졀이오 죄 곳 부쳐라(〈죠션크리스도인회보〉1897년 9월 1일자).”
이는 부처숭배를 ‘우상숭배의 죄’로 간주하는 한편, 절을 ‘지옥’으로 규정하고 불교 자체를 ‘죄와 지옥의 종교’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불교의 교리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人格修養’과 ‘人格의 完成’을 말하는 불교가 ‘宇宙’를 ‘死’로 對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불교 스스로 ‘無神의 宗敎’라고 주장하면서 석가를 ‘神’ 즉 종교심의 대상으로 예배하고 있는 것은 모순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金永羲,〈기독신보〉1933년 9월 10일자). 이러한 비판은 ‘자력신앙’과 ‘타력신앙’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前者[자력적 해탈]는 너무 努力主義에 기우러저서 神의 攝理와 宇宙의 運命을 모다 度外에 내여던지고 聖道를 行함으로만 解脫을 엇는다하고 後者[정토주의]는 너무 歸依主義에만 기울어저서 자기의 努力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阿彌陀佛의 助力만 企望하는 것이다. 이러한 兩極端은 모다 眞理에 適中하지 못하엿다(蔡弼近,〈신학지남〉10권 2호, 1928).”
요컨대 불교의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은 ‘진리에 적중하지 못한’ 극단적 논리인 반면, 기독교는 ‘努力과 攝理를 兼하야 보기’ 때문에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여기에 ‘眞正한 救援’이 있다는 것이다(채필근,〈신학지남〉10권 2호, 1928).
불교를 ‘범신론적 신앙’에 근거한 ‘신비사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趙龍基,〈기독신보〉1936년 7월 22일자). 이는 불교가 ‘주관적 감정주의’(趙龍基,〈기독신보〉1936년 7월 22일자)에 빠져 ‘객관적 진리와 역사적 계시’(趙龍基,〈기독신보〉1936년 7월 22일자)를 경시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비판은 기독교의 ‘객관적 진리 / 역사적 계시 신앙’과 불교의 ‘주관적 감정주의 / 신비적 범신론’을 대비시키면서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로서 불교를 ‘개인주의’라고 비판하는 관점과 연결된다. 이러한 비판에 의하면 불교는 ‘個人的’이고 ‘佛의 나라’가 없으며 “個人이 自己의 信仰 或은 功德으로 自身을 求하는 것이 問題의 始作이오 終局”(함석헌, 〈성서조선〉1936. 3-4)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학’(禪學)은 ‘自身一人의 精神鍛鍊法’(金鍾弼,〈기독신보〉1925년 1월 14일자)으로는 좋을지 모르나 ‘國民一般의 宗敎’(金鍾弼,〈기독신보〉1925년 1월 14일자)가 될 자격은 없게 된다. 요컨대 불교는 “이타적인 것보다 오히려 이기적인 것에 관심”(Underwood 1908(1989) : 77)을 두는 ‘개인주의’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를 주관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불교를 ‘인간본위’의 종교로 판단하고 있는 데서 연유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는 ‘人間中心的 現實本位의 宗敎’인 불교와 ‘神中心的 現實의 宗敎’인 기독교 사이의 ‘妥協的 中間物’은 容納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된다(李龍大,〈기독신보〉1935년 4월 17일자). 이와 관련하여 윤회설처럼 구체적인 불교교리에 대한 비판도 행해지고 있다. 즉 “前生論과 畜生輪廻說은 空想的이며 認定키 難한 것”(申鉉彰,〈기독신보〉1934년 8월 1일자)이며, “人生이 罪惡으로 因하야 永罰을 受함은 可也어니와 畜生還生은 無理”(申鉉彰, 〈기독신보〉1934년 8월 1일자)라고 하면서 불교의 핵심교리를 비판하고 있다. 한편 불교의 교리는 너무 ‘高遠難行’하기 때문에 ‘히말라야산을 처다보는 격’(蔡弼近,〈신학지남〉12권 3호, 1930)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불교가 ‘時代的 要求’에 應하기 위하여서는 ‘現實的인 實在論的 立場’에 근거한 ‘平易한 時代的 이데오로기’를 제조하여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反佛敎的’인 理論을 再建하는 방향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여기에 불교의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論壇, 개신교는 유교가 불교를 비판하였던 전통적인 논리도 차용하여 불교비판을 행한다. 곧 불교는 “人間社會와 關係를 絶고 南無阿彌陀佛로 極樂地獄說에 沈淪”(崔尙鉉,〈기독신보〉1922년 2월 8일자)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불교가 가정과 사회를 버리고 염불과 참선 공부만을 강조하는 종교로서 이 세상의 ‘륜상’과 ‘인죵’을 파멸시킬 수 있는 반윤리성과 반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불교에 대한 개신교의 비판논리는 두가지 축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불교의 ‘철학화’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의 ‘미신화’이다. 불교의 ‘철학화’란 불교에 인격적 신이 결여된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불교는 철학에 머물 뿐 종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고, 불교의 ‘미신화’란 민간신앙과 습합된 불교의 성격을 부각시킴으로써 불교는 종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잡신숭배’ 또는 ‘우상숭배’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개신교가 유교를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로 규정하는 동시에 조상숭배를 ‘미신’으로 규정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개신교는 유교와 불교 모두를 지적 전통(elite tradition)과 민간전통(popular tradition)으로 분리하여 지적 전통에 대해서는 ‘윤리’ 내지 ‘철학’이라고 명명하는 동시에, 민간전통에 대해서는 ‘우상숭배’ 내지 ‘미신’으로 규정함으로써, 두 종교를 사실상 모두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3) ‘유사종교’와 ‘미신’으로서의 신종교
신종교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는 주로 동학(東學)과 천도교(天道敎)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드물다. 그러나 동학과 천도교는 한국 근대 신종교의 효시이자 모태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개신교의 이해를 통하여 신종교 전반에 대한 이해를 간접적으로 추론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신교는 먼저 동학을 기성종교의 교리를 조합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동학이 유교로부터 ‘오륜관계의 책’, 불교로부터 ‘마음을 정화하는 법’, 도교로부터 ‘자연적 도덕적인 오염으로부터 몸을 정화하는 법’, 그리고 천주교로부터는 ‘텬쥬’라는 신 명칭을 취하였다는 것이다(KRP 1895 : 57).
또한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도 “儒佛仙 三敎에 取長捨短하여서 만든 것”야 헌신치 리고 심산궁곡에 불당과 암를 건츅고 쥬야로 부쳐압헤쳠며 아미타불 관셰음을 쉴업시 부르고 을 히며 셩픔을 본다야 참션공부를 힘쓸에 사의 륜긔와 셰샹에 의리를 아조 니져리라 니 사마다 불교를 진 륜샹이 허지고 인죵이 민멸지라”(崔炳憲 1911)
(趙龍基,〈기독신보〉1937년 1월 27일자)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천도교는 “五倫五常을 세워서 仁에 居하며 義를 行하며 正心誠意 몸을 닦아서 世上에 미침”은 儒敎에서 취하고, “慈悲平等을 맘으로 하야 몸을 버려서 世上을 救援하며 道場을 淨潔케 하고 입으로 神呪를 誦하고 손으로 念珠를 取함”은 佛敎에서 취하고, “玄을 하야 無極에 이러 榮利名聞을 除하야 無慾淸淨으로 몸을 가지며 神髓를 닦아서 奈終에는 昇天을 希望함은 道敎”에서 취하였다는 것이다(趙龍基,〈기독신보〉1937년 1월 27일자). 결국 개신교는 동학과 천도교를 일종의 ‘모자이크 종교’(mosaic religion) 혹은 ‘혼합종교’(syncrestic religion)로 간주하면서 동학과 천도교가 지닌 종교적 독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개신교는 동학의 ‘천주’(天主)신앙에 착안하여 동학교도들을 ‘일신교인들’(monotheists)(KRP 1895 : 57)로 간주하기도 하였지만, 천도교에 대해서는 ‘汎神的 非人格的 神觀’(趙龍基,〈기독신보〉1937년 1월 27일자)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동학이 천도교로 바뀌면서 신관이 ‘시천주’(侍天主) 중심에서 ‘인내천’(人乃天) 중심으로 변화된 것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가 동학과 천도교를 비판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종교들의 정치지향성이다. 동학은 원래 ‘종교집단’으로 출발하였으나 동학농민전쟁을 거치면서 정치적 요소가 지배하는 ‘혁명가들의 단체’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며(KRP 1895:59),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자제의 태도를 보이기는 하나외곽단체를 통한 정치사회적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천도교의 정치지향성을 비판하기 위하여 ‘유사종교’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천도교는 “第一 巨大한 宗敎類似團體”(蔡弼近,〈신생〉1930년 12월호 : 12)로 불리우게 된다. 물론 개신교 내에서는 ‘宗敎的 行事’와 ‘數十萬敎徒를 包含한 大宗敎團體’라는 점에 주목하여 천도교를 ‘종교’라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趙龍基,〈기독신보〉1937년 1월 27일자), 전반적으로 볼때 개신교 진영은 “天道敎가 宗敎이냐 아니냐에 對하야는 諸說이 區區하나 그 歷史와 信條로 보아 純然한 宗敎는 아니다”(柳光烈,〈신민〉1931년 1월호 : 37)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유사종교’로서의 천도교의 사회참여적 성격은 현실 타협적이고 천박한 인생관으로 평가된다. 즉 천도교는 “人生의 根本問題를 解決하여 주기보다도 그 人生觀이 너무나 淺薄하며” 또 “妥協迎合하는 點이 없지아니하므로 現實是認의 忠僕이 되고 말 憂慮”가 있다는 것이다(趙龍基 ,〈기독신보〉1937년 1월 27일자). 나아가 천도교는 ‘낙관적 인생관’과 ‘현실 타협적 구원관’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관과 인생관의 착오’(趙龍基,〈기독신보〉1937년 1월 27일자)를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개신교가 신종교를 비난하는 또 한가지 주요한 측면은 ‘미신성’이다. 여기에 포함되는 신종교들은 대체로 동학의 분파나 증산교 계통의 신종교들로서 동학이나 천도교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太乙敎 흠치교 白白敎 仙道敎라 稱 者는 迷信이 多야 惑世誣民의 傾向이 有 故로 多少心念을 노라(“朝鮮宗敎界의 現狀”,〈기독신보〉1921년 1월 26일자).”로다.”〈기독신보〉1921년 1월 26일자.
“天道敎 以外에 훔치敎, 白白敎, 太乙敎, 靑林敎, 水雲敎 等이 있으나 모다 敎徒를 迷信으로 引導하는 便이 만아 足히 보잘 것이 업고 그 中에는 民衆을害毒함이 만흐며 ···(柳光烈,〈신민〉1931년 1월호 : 37).”
이처럼 대부분의 신종교는 ‘惑世誣民’의 종교 혹은 ‘미신’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태도는 “普天敎는 迷信의 宗敎”(宋斗用,〈성서조선〉1929년 1월호)라는 주장이나 “太乙敎 或은 흠치敎와 如 敎會에셔는 一種의 心理的 催眠으로 迷信的 奇事異蹟을 行다”(崔尙鉉,〈기독신보〉1922년 2월 8일자)는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의 대상에서 천도교가 제외된 것은 천도교의 교세와 사회활동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를 “一種의 政略으로 愚夫愚婦의 金錢弄略는 手段”(崔尙鉉,〈기독신보〉1922년 2월 8일자)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일제 말엽에 발생한 일명 ‘백백교(白白敎) 사건’을 계기로 하여 신종교들은 더욱더 ‘무지몽매한’ 종교로 매도된다.
“東學때로부터 至今까지 車京錫의 普天敎 李相龍의 水雲敎 全龍海의 白白敎 누구의 흠친敎 만나는대로 듣는대로 집팔어바치고 牛팔어바치고 甚至於子女의 貞操까지 바쳐가며 水火를 不計하고 말려들어 亡하는 이 百姓을 볼 때 一便 無知蒙昧를 責望할 點도 있지만 一便으로 저들은 福音의 씨를 뿌리기에 沃土될만한 素質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韓聖果,〈활천〉1940년 5월호).”
결국 개신교는 ‘유사종교’와 ‘미신’이라는 두가지 범주로서 신종교를 비판할 뿐만이 아니라 신종교 자체를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시키고 있는 것이다.
4) 민간신앙의 미신화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한국에는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체계에 불과하고, 불교는 역사적 요인으로 인해 산간불교로만 잔존하고 있으며, 신종교는 ‘유사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각 지역에 가득차 있는 민간신앙은 한국인의 ‘종교적 열정’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한국은 “종교적 열정은 풍부하지만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역설적 진단을 내렸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이러한 종교적 조건을 선교의 장애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선교에 매우 유리한 잠재적 토양으로 간주하였다. ‘미신’은 선교사들에게 매우 큰 저항을 불러일으키지만(Gilmore 1892 : 198) 동시에 이러한 ‘오도된 종교적 열정’을 ‘복음’을 통해 잘만 여과시키면 한국은 가장 선교가 성공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요청된 것은 민간신앙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민간신앙을 ‘정령숭배’(spirit worship)로 특징지우면서, 이를 다시 ‘조상숭배’(ancestor worship)와 ‘샤마니즘’(shamanism)으로 대별한다. 이때 교육받은 층은 조상숭배를 중심으로 보다 ‘문화화’된 특성을 보이는 반면 하층계급은 샤마니즘적인 미신으로 퇴락하였다(KRP 1895 : 144)고 구별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두가지 형태는 모두 정령숭배의 일종으로 파악된다.
조상숭배는 주로 제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제사행위의 허위성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거나, 제사가 ‘문명화’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즉 제사는 아시아 지역의 정신적 영적 발전에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 사고의 질곡, 그리고 과거 지향적 태도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비판된다(Griffis 1912(1985) : 165). 반면 “유럽이 정신적 자유, 지적 풍요, 그리고 일반적 진보를 이룩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제사와 같은 케케묵은 제도를 야만과 반문명화된 사람들에게 일찌감치 넘겨주어버린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Griffis 1912(1985) :165).
결국 “한국인의 마음과 영혼을 완전히 소유”(Gale 1909:69)하고 있는 조상숭배는 ‘반시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상숭배는 관직생활의 방해, 여행의 방해, 신이 부여한 토지사용의 금지, 조혼에 의한 손상과 불행, 과거지향적 태도 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Gale 1909 : 77). 특히 ‘문명화’의 원동력 역할을 하는 ‘자연개발’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는 조상숭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조상숭배는 ···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토지강탈자이다. 산자는 여리고로 가거나 말라리아로 가득찬 들판으로 쫓겨나 몰려 산다. 반면 조상의 그림자는 언덕 높은 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나무와 푸른 잔디로 뒤덮인 유쾌한 환경은 죽은 자를 위해 존재하고, 산자는 시장 바닥의 먼지와 더위와 냄새에 맡겨져있다(Gale 1909 : 75).”
이는 조상에 대한 경외가 ‘조상령의 안락한 휴식’을 ‘후손과 황금’보다 훨씬 중시하므로 광산자원의 개발을 금하게 만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Gale 1909 : 76).
조상숭배는 ‘이기주의적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살고 죽기 때문에 ‘가족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며, 이는 미국인들의 ‘개인의 자유’와는 구별되는 예속상태로 간주된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적 연대로부터 일탈하는 것에 의해서만 기독교인의 특권인 ‘자유’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차옥숭 1993 : 590-591). 결국 조상숭배는 가장 ‘억압적인 정령숭배 체계’이자 ‘절대적인 우상숭배의 체계’로서 한국인에게는 ‘최대의 저주’29)로 작용한다는 것이다(차옥숭 1993 : 589-590). 따라서 초기 선교사의 한 사람인 아펜젤러는 조상숭배를 “정복해야 할 투쟁의 요새”라고 간주하면서 이것만 정복되면 승리가 보장된다고 말할 정도였다(Davies 1988 : 387). 이러한 조상숭배의 기원은 샤마니즘에서 찾아진다. 즉 정령이 고통과 불행을 일으킨다는 믿음으로부터 위로의례(propitiatory sacrifice)가 생겨났으며 이것이 효 및 영혼불멸 관념과 결합되어 조상숭배를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유교에서 행해지는 실제적인 숭배행위는 ‘샤마니즘’ 혹은 ‘악마숭배’(Demonolatry)이며, 악마숭배는 미신, 서물숭배(fetishism), 사술(sorcery), 그리고 악한 정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희생제의의 ‘거대한 복합물’(MRW, Hardie 1897. 12 : 926-929)로 간주된다. 요컨대 조상숭배는 ‘샤마니즘’ 혹은 ‘악령숭배’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악령(demon)만이 한국인들의 숭배대상이므로 불상, 유교의 위패, 조상의 무덤, 혹은 어떤 악령의 제단 앞에서 절을 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귀신예배’ 혹은 ‘악마숭배’(demonolatry or devil-worship)(MRW, Hardie 1897. 12 : 926-929)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형태의 신앙이 한국인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요소인 ‘애니미즘’(animism) 즉 ‘정령숭배’라고 주장된다(Jones1907 : 49-50).
정령숭배의 일종인 샤머니즘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런데 샤머니즘은 일종의 ‘자연숭배’이므로 ‘옳고 그르다는 의식’이나 ‘올바른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도덕적 감동’(Underwood 1908(1989) : 77)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이외의 민간신앙들도 모두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풍수(風水)신앙은 자연에 관한 ‘조야한 관념의 백과사전’(Jones 1907 : 326-336)으로 평가되며, 산신숭배는 유대인의 바알숭배(KMF 1919 : 33)와 동일시되고, 수살이와 장승은 ‘종교적 부패’(religious decay) 혹은 ‘관습적 부패’(customary decay)의 매우 흥미로운 예(REP 1895 : 144)로 간주된다. 그리고 ‘周易理致’에 근거한 ‘卜筮’와 ‘圖讖’에 關한 ‘豫言’(채필근,〈신학지남〉13권 3호, 1931)은 미신으로 여겨지며, ‘鄭鑑錄一書’는 “民衆의 心理를 公然 又는 隱然히攝治하는 一大鬼符”(〈동명〉1923. 5. 6)라고 간주되고 있다.
한편 “巫黨의 푸닥구리 占匠伊의 讀經 至於山川水火 木石 等에 致誠”은 “邪惑에 朦朧고 迷信에 惡化된 習性”(〈기독신보〉1920년 12월 22일자)으로 평가되고 있다. 결국 개신교는 민간신앙을 하나의 종교현상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우상숭배’ 즉 ‘미신’의 일종으로 규정하였다. 요컨대 민간신앙을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민간신앙을 기독교적 진리의 ‘서투른 모방’으로 보는 관점도 존재하고 있었으나, 미신으로 간주하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 민간신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통하여 개신교가 얻은 실천적 결론은 ‘우상타파’이다. 개신교는 우상타파의 당위성을 내세우기 위해 공자도 ‘우상타파’를 칭송하였다는 기록을 인용하는가 하면, 선교사 아펜젤러는 “우상숭배와 미신과 관습과 같은 쓰레기들을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Griffis 1912(1985):147)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개신교계는 무당들을 쫓아내려는 결의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5) ‘거짓기독교’와 ‘참기독교’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처음부터 스스로가 천주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교임을 애써 강조하려고 하였다. 개신교의 이와 같은 태도는 과거 의미하고 ‘유도’란 말은 유교를 의미하며 ‘선도’란 도교를 의미한다. 이 단어들의 종결어 접미사인 ‘도’는 ‘원리’를 의미하는데 이 접미사를 한국의 무속신앙에 붙이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
1세기 동안 천주교가 받은 숱한 ‘수난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천주교 수난의 일차적 원인을 천주교의 ‘잘못된’ 선교방식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즉 천주교의 ‘불법적이고 정치적인’ 선교방식이 조선정부와 마찰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이라고 본 것이다. 한불조약 이후 종교의 자유가 점차 보장되어 감에 따라 천주교와 개신교 상호간의 선교경쟁은 갈등적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물리적인 충돌까지 야기하였으나 상호간의 갈등은 점차 상대방의 교리를 비판하는 이른바 ‘문서논쟁’의 형태를 취하여 나아갔다. 따라서 천주교에 대한 개신교의 비판은 천주교의 선교방식에 대한 비판과 천주교 교리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다.
먼저 천주교의 선교방식에 대해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은 그리피스(W.E.Griffis)이다. 그는 “가톨릭적인 선교활동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Griffis 1912(1985) : 145)라고 말하면서, “선교문제에 관한 서적 가운데 과학적인 정확성과 재판관 같은 태도”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조적인 선교일꾼들에 대해 논하는 책이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Griffis 1912(1985) : 146)을 피력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에 의하면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조국에 대한 ‘반역자’의 역할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황사영 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실제 외국의 군사적 침략을 유발했다는 것이다(Griffis 1907(1976) : 38). 그리고 프랑스의 선교사들은 군대와 침략자들의 ‘첨병’으로서 입국하였으며, 프랑스 신부들은 ‘함포의 잎잡이’로서 입국하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엄연한 논리이며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한다(Griffis 1907(1976) : 38-39). 요컨대 프랑스의 주교는 프랑스 ‘군함의 첩자이자 길잡이’였으며 프랑스의 신부는 ‘해적질의 안내자’였다는 것이다(Griffis 1907(1976) : 39). 또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선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악을 행하여도 좋다는 불법적이고도 ‘그릇된 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부들의 거룩한 소명은 그 빛을 잃었고, 그와 같은 교리는 ‘신약성서를 즉각적으로 모독하는 것’인 동시에 가톨릭교회가 가장즐겨 원용하는 ‘궤변’이라는 것이다(Griffis 1907(1976) : 68).
한편 북장로교 선교사 빈톤(C.C.Vinton)은 로마가톨릭의 ‘그릇된’ 가르침 때문에 한국사회에 진리가 잘 수용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서 가톨릭은 “세속적인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을 굴복하도록 강요하기 위해 서로서로 지지하고 있는 광대한 조직”(차옥숭 1993 : 591)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펜젤러도 천주교 신부들이 “상복을 입고 정체를 숨긴 채” 다니는 것과 ‘솔직하고 개방적인’ 개신교의 선교태도를 비교하고 있다(이만열 1985 : 290). 그는 천주교를 ‘기독교의 형식’(the form of Christianity)(이만열 1985 : 265)이라고 비꼬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은 기념연설에서 천주교와의 연대가능성을 질문하였다.
“우리는 이 기념비석을 한국에 있는 로마주의자들의 노동과 열정을 위해 세울 것인가? 우리는 그들의 교리를 인정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의 헌신과 명예, 그리고 신앙을 위한 그들의 희생을 인정할 것인가? 특히 이교도들을 앞에 놓고 그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로부터 최소한 그들의 선행에 대한 소극적인 인정으로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킬 때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1866년의 가공할 시련의 때에 신앙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존경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런 정도의 자선을 해서는 안되는가, 그리고 서로간의 차이점을 잊은 채 ‘당신의 손을 나에게 달라’ 라고 말해서는 안되는가?(Davies 1988 :391)”
이에 대해 그는 ‘아니요’ 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대심판의 불, 성 바톨로메의 공포, 그리고 저지대 국가들(Low Countries : 네덜란드 지역 – 필자 주)에서의 잔학행위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환영의 손길을 펼칠 수도 그 위계제를 조금도 인정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Davies 1988 : 391). 그리고 “나는 한국에 로마교회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하느님에게 감사할 수 없다”(Davies 1988 : 391)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한편 천주교 교리에 대한 비판은 서구의 종교개혁 당시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들이 거의 그대로 한국사회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장로교 최초의선교사이자 후에 외교관으로 재직하였던 알렌은 일기에서 천주교 비판을 한 바 있다. 그의 비판의 요점은 첫째 천주교에서 ‘여자이며 그리스도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경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둘째 죄를 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 이외에 신부에게 부여하는 것은 신부를 부패하고 타락시킨다는 것, 셋째 독신남자인 신부에게 부인네들이 개인적 고민이나 죄과를 고백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알렌의 일기 1991 :121).
천주교에 대한 교리적 비판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예수텬쥬량교변론》(1908)이라는 역술서(譯述書)를 통해서이다. 이 책은 개신교의 호교론서이자 천주교 비판서로서40) 성서중심주의에 입각하여 천주교를 비판하고 있다. 먼저 천주교에서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자유로이 읽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며,41) 이외에도 우샹, 혼인과 식물, 교황, 긔도, 유젼, 셩챤, 셰례, 샤죄, 쇽죄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 천주교의 교리, 의례, 제도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교황제도와 소위 고해성사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교황제도에 대하여는 “교황을 셜립고 쥬 예수 신야 무를 관리케 얏스니 텬쥬교의 셔 이러케 오야 교황을 셜립은 진리의 위반됨”이라고 강력히 비난하고 있으며, 고해성사에 대해서는 “칼랄을 구로 잡고 칼자루는 신부의 게 줌”(뎨九쟝, 샤죄)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또한 천주교가 자의적으로 ‘예적 본교회의 규례’를 ‘변경’한 사실도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이러한 천주교 비판의 논리는 거의 수정되지 않은채 그후에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유통되어 갔다. 이때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천주교를 ‘우상종교’로 비판하는 것이다. 즉 “羅馬에셔는 敎堂은 聖殿化고 基督敎의 像을 聖像이라야 禮拜과 其他 마리아지 像으로써 位야 聖母로 事며 禮拜에는 燭을 焚고 經을 頌이 一種의 祭祀가 되며 其主敎나 神父는 맛치 猶太의 祭司長과 如야 一種의 偶像敎로 化지라”(金昶濟,〈기독신보〉1920년 10월 20일자)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천주교를 아예 ‘기독교’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도 나타나고 있다. 즉 천주교 ‘聖堂의 內部施設과 古典的 儀式’이 ‘至極히 敬虔한 感’을 일으켜 그 분위기에 도취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나 거기에 나타나는 신앙은 ‘廣義의宗敎的 感情’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기독교 신앙’은 아니라는 것이다(趙龍基,〈기독신보〉1937년 1월 27일자).
결국 개신교는 천주교의 선교방식을 제국주의적인 정치적 야심의 표현이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천주교 신앙 자체를 우상숭배를 내포한 비기독교적 신앙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천주교는 개신교를 ‘거 예수교’라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호비판은 어느종교가 ‘참 기독교’인가 하는 것을 둘러싼 논쟁이라고 볼 수 있겠다.
4. 결론
이상과 같이 개신교는 ‘계시종교론’과 ‘문명종교론’이라는 두가지 척도로 타종교를 이해하고 평가하여 왔던 것이다. 개신교는 먼저 유교를 종교성이 결여된 하나의 윤리체계로 간주하는 동시에 유교의 조상숭배를 비문명적인 미신으로 평가하였으며, 불교에 대해서는 주관적 감정주의, 범신론적 신비사상, 개인주의, 그리고 모순적 교리체계라고 비판하는 동시에 불교의례를 미신으로 간주하였다. 신종교에 대해서는 유사종교 내지 미신으로 평가하였으며, 한국의 전통신앙인 민간신앙 역시 미신으로 보았다. 한편 같은 기독교 전통에 속하는 천주교는 ‘우상종교’로 간주되었다.
요컨대 개신교는 타종교를 ‘윤리’, ‘철학’, ‘유사종교’, ‘미신’, ‘우상교’ 등의 범주로 이해하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범주들은 ‘종교’라는 특권적인 범주와 대립하는 개념들로서 ‘종교성’이 결여된 ‘비종교’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물론 타종교들이 ‘종교’의 영역에 포함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 타종교들은 대체로 ‘종교적 피라미드’의 주변부에 위치하게 된다. 이는 개신교가 스스로를 종교영역의 ‘정점’에 위치시키면서 타종교들을 위계체계 내의 주변부에 배치시키거나 아예 ‘종교’의 영역에서 배제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이러한 개신교의 태도는 일종의 ‘종교적 오리엔탈리즘’(Religious orientalism)으로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종교적 오리엔탈리즘’이란 “결핍(absence) / 충만(presence)”이라는 양분법적 인식틀 하에서 타종교를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개신교는 스스로를 ‘계시성’과 ‘문명성’이 충만한 종교로, 타종교는 이러한 요소가 결핍된 것으로 평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타종교들은 종교영역에서 주변화되거나 ‘배제’되었던 것이다. 개신교의 이러한 자기-타자 이해는 ‘기독교 오리엔탈리즘’(Christian orientalism),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개신교 오리엔탈리즘’(Protestant orientalism)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개신교의 이러한 이해와 태도는 전통 종교문화와의 괴리를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사회의 갈등적 종교상황을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화적 국지주의’(cultural parochialism)가 극복되고 건전한 종교문화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개신교의 자기-타자 이해의 구조에 대한 보다 철저한 자기성찰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 참고문헌
〈기독신보〉
〈대한크리스도인회보〉
〈동명〉
〈성서조선〉
〈신민〉
〈신생〉
〈신학세계〉
〈신학월보〉
〈신학지남〉
〈윤치호일기〉〈죠션크리스도인회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