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2일 더위가 절정이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땀으로 범벅이되어 버린다. 그래도 자투리 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수 없어 일행과 함께 두어시간 비로사를 둘러 보기로 했다. 휴가철이건만 한낮이라 차량 이동도 거의 없어 소통도 원할하고 산길에도 등산객이 보이지 않아 공원관리소 직원의 양해를 구하여 일주문 턱밑까지 달구지를 타고 올라왔다.
소백산 정상이 비로봉이라 했던가? 그래서 비로사로 이름 붙혀졌을까? 사찰명으로 미루어 보면 고구려와 접경지역인 소백산 자락 의상이 창건한 여타 절처럼 종교적인 목적과 국방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었을 것이다.
"683년(신라 신문왕 3)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한 화엄종 사찰로, 신라 말에는 소백산사(小白山寺)라고도 불렀다. 창건 직후 의상 대사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진정(眞定) 대사가 비로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진정은 출가 전 군인으로 틈틈이 품을 팔아 가난하게 홀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다. 하루는 한 스님이 진정의 집으로 와서 절을 짓는 데 쓸 쇠붙이를 보시해 달라고 청하므로 그의 어머니가 집안의 유일한 재산인 다리 부러진 솥은 시주하였다. 진정은 어머니의 보시를 매우 기뻐하며 질그릇에 밥을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 대사가 태백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소문을 듣고 효도를 다한 다음 출가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바로 출가하도록 엄하게 말씀하였고, 그러한 어머니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3일 만에 태백산으로 가서 의상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렇게 공부한 지 3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어 명복을 빌었고, 나중에 그러한 이야기를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錐洞)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진정의 꿈 속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한다. 소백산 추동은 곧 지금의 비로사 옆 계곡을 말하며, 계곡 상류에는 비로폭포가 있고 부근에 의상 대사가 공부하던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신라 말에는 당대의 고승 진공(眞空, 855∼937) 스님이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그 때 고려 태조가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하였다. 그가 이 절에서 입적하자 태조는 진공 대사라는 시호와 보법(普法)이라는 탑호를 내려주었다. 1126년(인종 4) 인종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으로 하여금 불치아(佛齒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고, 1385년(우왕 11) 환암(幻庵)이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세조(1417∼1468) 때 복전(福田) 5명을 두어 『화엄경』을 강의하도록 하였고, 1468년(예종 1)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사비로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비로사는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주둔지가 되었다. 부산진(釜山鎭)에 상륙하여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왜병의 일부 부대가 강원도 영월로 진격하기 위하여 지름길인 비로사 앞을 가려하자 이를 저지하려던 1,000여 명 의승군과 격전을 벌였고, 결국 의승군 전원이 순국하고 비로사도 석불상 2위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1609년(광해군 1) 경희(慶熙)가 중건하였다.
이어 1684년(숙종 10) 월하(月下)가 법당과 산신각 등 40여 칸을 중창하였고 1907년 범선(泛船)이 요사를 증축하였다. 그러나 1908년 갑오경장 당시 일어난 병화로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1919년 범선이 법당을 중수하였고 1927년 요사를, 1932년 다시 법당을 중수하였으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다시 전 당우가 소실되었다.
최근에는 중건의 불사가 계속되어 1995년 적광전, 1998년 반야실, 2000년 삼성각을 중건하였다. 2001년에는 나한전을 복원하였으며, 심검당을 중수하였다."
일주문을 지나 왼쪽 언덕에 서 있는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7호 영주 삼가동 석조 당간지주(榮州三街洞石造幢竿支柱)이다. 맞보는 두 기둥 안쪽 면은 평평하며, 맨 위와 가운데에 각각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을 두었다.
바깥 면은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일부에 넓게 면을 깎아두어 굴곡을 만들었고, 앞뒷면은 바깥 둘레로 도드라지게 띠를 새겨 그 가운데에 세로선을 하나씩 더 두었다. 꼭대기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2단의 굴곡을 주면서 둥글게 깎아 놓았다. 기둥 사이에는 당간의 받침돌이 남아 있는데, 그 윗면에 당간을 꽂아두던 구멍이 뚫려 있다.
비로사의 창건시기와 비슷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당간지주를 돌아서면 멀리 적광전 중정이 보인다. 짧은 계단이었지만 무더위의 기승으로 108계단 보다 더욱 힘이 들었지만 물 한병 준비 못한 나의 탓이었으니.
복연의 하대석, 간주석, 옥개석만 남은 석등부재. 다른 사람의 사진에는 적광전 불상의 깨어진 광배가 석등옆에 있었는데 보이지 않았다.
전각부재가 널부르져 있다.
과연 활용방법이 없었을까?
안상이 곱기도 하다
진공대사 보법탑비(眞空大師普法塔碑).나말여초 비로사에 주석하였던 진공 대사의 탑비로 939년에 조성되었다. 비문은 최언위(崔彦僞)가 짓고 글씨는 자경 2cm의 구양순체 해서로 이환추(李桓樞)가 썼다고 한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귀부이수가 떠오른 까닭은 뭘까?
우리카페 '동해의 푸른바다(이상기)님'이 올린 비로사 답사기에 언급된 비문의 일부를 옮겨왔다.
"홀연히 미병(微病)이 생기고 날로 점점 심해져서 천복(天福) 2년 9월 1일 (결락)에서 입적하였다. 햇빛은 참혹하고, 구름은 우울하였으며 강물은 마르고, 땅은 진동하며 산은 무너지는 듯하였다. 사방(四方) 멀리까지 모든 사람은 슬픔에 잠겼을 뿐만 아니라, 인봉(隣封)까지 모든 사람들이 식음을 전폐하였다. 임금께서도 갑자기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으시고 깊이 슬픔에 잠겼다. 특사를 보내 조문하는 한편, 장례에 필요한 자량(資粮)도 함께 보냈으니, 왕의 전인(專人)과 문상객들의 왕래가 기로(岐路)에 상접(相接)하였다."
귀부(龜趺)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인데, 비몸이 갈라져 일부가 파손되었다. 비몸 하단의 비편은 2008년 누각 중창중에 발견되어 붙였다고 한다. 거북받침은 새겨진 조각이 얕아 둔중해 보이며 등 중앙에 비를 꽂는 비좌를 마련해 두었다. 등에는 육각형 문양을 새겼다.
山자 모양의 이수 모서리는 파손이 심하며 구름과 용무늬를 새겨 놓았는데, 화려하긴 하나 깊이 새긴 것은 아니다.중앙 전액에는 이환추의 고진공대사비라는 제액이 있다.
진공대사(855∼937)의 속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신라의 왕계인 확종(確宗)이고 어머니는 설씨(薛氏)이다. 가야산(伽倻山)에 입산하여 선융(善融)의 제자가 되어 874년(경문왕 14) 가야산 수도원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삼장(三藏)을 연구하였다. 937년(고려 태조 20) 태조의 후삼국 통일을 축하하고 열반하니, 태조가 시호(諡號)를 내리고 939년에 이 탑비를 세웠다. 시호는 진공이며, 탑호는 보법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부도탑은 남아있고 부도비신이 멸실, 파손된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로사에는 반대로 부도비만 남았다. 부도는 어디로 갔을까? 적광전 앞 석조 부재를 탑처럼 쌓아둔 조형물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당장 허물고 싶었다. 절집 마당은 마음의 평안을 얻어야하건만 이렇게 불안하게 부재들을 쌓아 둘 수 있을까?
석탑 몸돌 1개, 옥개석 2개, 뒤집혀진 노반과 지대석은 석탑 부재로 생각되며, 안상에 가릉빈가와 꽃그림이 새겨진 부재, 사자가 새겨진 부재는 진공대사부도 부재이며 맨위 옥개석은 석등 부재로 보인다. 이렇게 두어야할까? 복원이 어렵더라도 전문가의 감수를 거쳐 각각 구분하여 쌓아두면 좋겠다.
배례석은 탑 앞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부도 하대석으로 추측되는 부재 안상의 가릉빈가
부도탑비만 남은 진공대사의 탑부재로 추측되지만 어떤 근거도 찾지 못했다.
느낌.
건방지지만 그런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부도 하대석으로 추측되는 부재 안상의 꽃문양
부도 중대석으로 추정되는 부재의 사자상
부도 중대석과 석탑 옥개석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근자에 중수한 루대. 조만간 진입동선도 바뀔 듯
비로사 금당 적광전.
벽화
곽시쌍부. 부처님께서 세 번에 걸쳐 마하가섭존자에게 그 마음을 보이신 삼처전심(三處傳心) 중에 한 이야기이다.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 또는 비로자나 삼존불이 계셔야하는데 왼쪽에 비로자나부처불이,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두 부처님만 모셔져 있다. 다른 전각에 봉안된 두 부처를 전화로 인해 적광전에 함께 모셨는지 삼존불중 도난과 화재로 파손되어 두 분만 모셨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미타와 비로자나를 동시에 봉안하는 예는 보지 못했기에 전자의 경우로 추측하고 싶다.
이 전각은 본래부터 적광전이었을까? 미타전이나 무량수전이었을까? 다른 조건과 가설은 배제하고 아미타후불탱으로 보면 아미타불을 봉안한 미타전이었을 것 같다.
광배와 대좌를 상실한 아미타불좌상이다. 장방형의 얼굴에 삼각형으로 높게 솟은 육계, 늘어진 귀,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보인다. 당당하게 보이는 어깨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을 하고 있는데, 왼쪽 팔에 감겨진 옷주름은 약간 어색해 보인다.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는 아미타구품인을 결하고 있다.
법신불 석조비로자나. 약간 긴 얼굴에 늘어진 귀, 뚜렷한 삼도, 팔과 어깨에 흐르는 옷주름이 자연스럽다. 수인은 왼손가락의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지권인을 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하대 9세기 불상의 양식을 보인다. 불상은 1989년 보물 제996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이 불상은 863년에 조성한 대구 동화사 비로자나불상, 경북대학교 소장 비로자나불상 양식과 비슷하다.
적광전 후불탱은 아미타탱화이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도광(道光) 12년 (1832)에 화담당(花潭堂) 교화(敬和)와 동월당(東月堂) 행만(幸晩)에 의해 조성 봉안되었고 한다. 연화좌에 앉은 아미타불을 화면 정중앙에 두고 관음과 지장의 두 보살을 협시로 2명의 제자, 동자 2명을 주변에 배치한 비교적 간단한 구도이다.
본존은 연화좌 위에 앉았지만 대의 자락에 가려 연잎은 확인이 안 되고 연 줄기만 보인다. 세장한 상체에 비해 하체가 큰 편이다. 협시는 지장과 관음의 입상으로 지장상은 화물이 새겨진 석장을 지니고 오른손으로는 보륜을 들었던 것으로 보이나 손상이 있어 확인이 안된다.화면의 여백은 어두운 청색조이며 상단은 채운을 일부 배치하여 전체 화면이 좌우대칭을 이룬다.
비로사 적광전의 불상은 각각 다른 전각에 모셨다가 어떤 이유로 인해 한 곳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불병좌상이 없지는 않다.우리나라에 알려진 이불병좌상은 괴산 원풍리 마애불,그리고 청주 보살사, 군위 동림사에는 이불병립상 있으며 석가여래와 다보여래상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사진을 가져오니 상세내용은 옛님방 글을 검색해보기 바란다.
괴산 원풍리 마애불 좌상 군위 동림사 청주 보살사 나한전 심우도 벽화 근자에 조성된 듯
비로사 뒷편에 모셔진 대오선사 부도비와 부도
비로사를 들렸건만 비로사지를 답사했다는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옛부재를 활용하여 복원, 중수하는 사례는 경비 절감이 아니라 오히려 경비가 더 소요되는 일이지만 온고지신이라 하지 않았는가? 연륜 아니지 사격은 절로 빛나는 것이지 화려한 외양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한시 바삐 적광전 앞 탑모양으로 조성한 부재는 정리하여 조성하였으면 좋겠다. 절집에서 귀하게 대접 받아야 찾아오는 순례객에게도 귀한 예배의 대상으로 여겨지리라 생각된다. 2010.08.12 한국전통관광사찰정보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