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은 목관[木棺]이 있는 풍경 ▣
날마다 비가 내렸다.
스레이트 지붕 위에는 이따금 푸른 탱자가 맥없이 떨어졌다.
늙은 탱자나무 울창한 가지는 이 낡은 스레이트집 지붕을 감싸고 있었다.
바닥이 낮은 부엌은 이제 직사각형의 어항이 되고 말았다.
이 사글세방의 주인이자 친구인 김정효씨는, 날씨가 아주 맑은 날
직장으로 나간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날마다 비가 내렸다.
“늙은이의 쓸쓸한 해학[諧謔]이라고....”
방 한 구석에는 당연한 가구마냥 놓여진 검은 목관에 대한 설명이었다.
사람이 죽을 때 쓰이는 목관이 실내에 있으니, 좀은 괴기스러웠다.
그 직장이라는 표현도 알고 보면 짓궂은 풍자였다.
이 공업도시 입구라 할 수 있는 역 화장실 곁이 직장이었다.
아주 구어체의 언문으로 사주팔자에서 신수까지 잔뜩 적어 놓았다.
봄이 깊어지던 어느 날, 마땅히 기댈 언덕도 없이 떠돌다가
이 늙은 동양 철학자를 만났던 것이다.
“내가 제자를 한 명 키우려고 했거든.....”
이렇게 하여 명목상 제자가 되었다.
밤이 깊어진 다음에야 자리를 걷어 일어서기에 묵묵히 뒤를 따랐다.
장터 곁에서 콩나물국밥을 사 먹은 다음에야 좁다란 골목길로 들어갔다.
노인은 그래도 사글세 오막살이라는 최소한의 근본은 있었다.
“자네도 이 공부를 하여보게나, 밥벌이는 될 걸세.”
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한 시절 같이 어울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명리학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이 동양철학자도 제자라 칭하기는 하였으나,
애써 무엇을 알려주려 하지도 않았고,
나 역시 그 무엇을 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이 있다네.” 노인은 실향민이었다.
이렇게 하염없이 늙은 노인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기이하고 슬픈 회한처럼 들렸다.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회천이 고향이라 하였다.
그 평안북도에는 이 김 정효의 많은 재산들이 문서로 보관되어 있었다.
아직은 연한 송진내가 나는 검은 목관 속에는, 그 외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갖가지 물품들이 간직되어 있었다.
20세기 한반도 역사에는 참으로 가슴 아픈 슬픈 기록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머지않아 통일이 되면 우리 같이 청천강에다 뗏목을 띄워놓고
한 바탕 노래도 부르고 술을 마시세나.“
이런 로맨틱한 희망을 노인이 품고 있었다.
이 마당이 넓은 집에는 네 가구의 세입자가 살고 있었다.
포장마차를 하는 중년의 내외와 섬유공장에 다니는 두 아가씨와
극장의 간판을 그리는 꼽추사내가 바로 그들이었다.
집주인은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는데, 방 계약 같은 일 외는
집에 오는 경우가 없었다.
집의 시설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알아서 고치라고 오지 않았다.
부엌이 지금 어항이 되어 버렸지만, 연락을 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이 동양철학자는 너무나 오랫동안 외로워는 모양이었다.
오직 술 한 잔 마시는 얼큰함으로 쓸쓸한 세월을 견디어왔던 것이다.
나하고는 날마다 대단한 내용은 없지만,
밤이 깊도록 긴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댔다.
벌써 소식이 끊어진지 일주일이 넘었다.
자칭 화가라는 그 꼽추사내에게 이 노인의 행불을 상의하여 보았지만
마땅한 궁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포장마차 부부도 하는 말이라고는
“글세, 노인네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데도 없다고
했는데...어디로 갔을까?“ 오히려 묻는 표정을 지었다.
취사는 휴대용 가스렌지로 방에서 해결하였다.
단칸방에는 검은 목관을 제외하고는, 사실 살림살이라 할 것도 없었다.
방바닥도 눅눅하여 아예 검은 목관 위에서 잠을 이루었다.
그 지루하였던 장마가 끝이 났다.
사암층으로 이루어진 부엌바닥의 물은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옷가지와 이불들을 마당에 널었다.
집이 없는 달팽이들은 끊임없이 행진을 하였다.
정말로 징그러운 달팽이와의 전쟁이었다.
오래전에 문 닫은 제제소의 톱밥 때문이라고 하였다.
송판울타리는 길게 담을 만들고 있었으나 이미 허술하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역 앞의 파출소에 들어가 물어보았다.
아! 진작 물어볼 것을 그랬다.
술이 취하여 비 내리는 화장실 곁에서 죽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 신고를 받고 현장에 갔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무리 옷가지를 찾아보았으나 신원을 밝혀낼 신분증이 없었다.
시체안치소에도 보관기간이 있는지라, 시청에 연락하여
무연고 행려자로 화장을 하였다고 알려 주었다.
고인을 위하여 향 한 개 피울 방향도 없었다.
설사, 나에게 연락이 온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로 모르는 일이었다.
차분하게 오막살이로 돌아와, 노인의 살림살이를 정리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검은 목관을 열고, 노인의 희망이라는
그 평안북도 회천 땅 부동산문서를 살펴보노라니,
느닷없는 서러움에 흐느끼면서 울었다.
이제 이 문서는 어찌하여야 하는가?
내 방랑의 시절 오랫동안 이 문서들을 가지고 다니기는 하였지만
세상의 어느 길목에 이 문서를 잃어버렸는지, 이제는 알 수 없다.
대충 기일[忌日]을 기억하여 한 잔의 술을 부어 드리기만 하였다.
≪ 조라가망 ≫
첫댓글 턱괴고 앉아 읽다보니...곡차생각이 납니다.생각이 어지러운 채로 돌아 갑니다.
이글을 끝까지 읽고 나니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함경도 어느 곳이던가, 통일 되면 찻으리라고 여관 문서 하나 늘 간수하고 계셨었는데,,, 글 속에 노인에게서 내 아버지의 진한 향기 맡고 갑니다,
우리는 이런 노인들 세대에게서 역사의 현장성과 잊혀져가는 기록들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 生이 그렇게 쓸쓸하게 사라져갔군요..그 검은 목관에라도 모실수 있었더라면....마음이 아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