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3)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심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마음과 영혼을 의미합니다
내면의 가난함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팔복 중 처음으로 시작되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 에 들어간 사람치고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이라고 했고 누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라고 했는데,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같은 말입니다.
복음에는 항상 두가지면이 있는데 먼저 끌어낸후 세웁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 입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의 유아시에 그의 팔에 안고 주님에 관해 한말을 기억하면 “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이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세움을 입었고” 라고 말씀 했습니다. [다윗- 왕으로 기름 받고,,,고난.. 모세 -광야 40년후에 40년 동안 쓰임 받았습니다. 예수 -고난의 사역후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
산상수훈은 우리의 힘으로 행할수 있다는 생각들을 즉각 정죄 합니다.
가난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가난의 미덕은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오히려 저주에 가까워 보입니다.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꼭 돈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정신적으로도 가난하게 되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어느 인종이나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모두 ‘소유’, '부', 즉, '넉넉함'입니다. 물질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로운 것을 다 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다 ‘부’를 추구하고, ‘풍요’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은 “ 세속적인 정신에 지배 받지 않고 있다는 가난을 말합니다.
부귀에 의존하는 정신은 성경은 정죄 합니다.
많은 부자들이 부귀에 의존하지 않는 가난한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 영“의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을까요?
본문에서 말하는 '가난'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절대적으로 가난한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난 때문에 어떻게라도 무언가를 구걸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다시 말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도움을 구하고자 상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신념, 자기의지, 자기 표현, 자기 확신.을 얼마나 크게 강조 합니까? 이런 관념이 세상을 지배 합니다.
성공 하려고... 너 자신을 표하라, 너 자신을 믿으라, 네속에 있는 능력을 알라 보라..이런 거짓된 원리가 삶의 원리가 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래서 더욱 공격적[ 도전성], 애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이란 ?
예수님의 삶에서 ... 그는 사람이 되셨고, “ 죄인인 육신의 모양”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셨지만 신성적인 대권을 쥐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수 없노라 ” 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수 없다” 는 하나님으로써 하나님을 “ 절대의존”입니다.
기도 생활을 보십시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39절)
'...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39절)
주님은 가난한 영으로 하나님을 절대신뢰, [의뢰]하면서 기도 삶을 보내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 자만심의 완전한 결여, 자신과 자신의 의존한 결여를 의미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존재라는 의식을 의미 합니다.
다윗을 보면 “ 주여 내가 뉘기에 당신이 제게로 오시나이까?
그 일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이사야 도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을 보고 “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 보게 됩니다.
베드로을 보면 생리적으로 자기 주장적 이요, 자신 만만한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세속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님을 볼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기드온은 그가 주께서 해야할 큰일을 전하기 위해서 사자을 보내셨을 때 그가“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자”입니다. 하고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과 마주 대할 때 느끼는 우리의 철저한 무능에 대한 엄청나 인식 입니다. 이것을 “ 심령이 가난하다. 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가난한 마음이 다시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 내손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사오니
오 주여 당신의 십자가를 붙들뿐 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사람들은 부유한 자와 명랑한 자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두 기쁨과 웃음이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흘려야 하는 눈물이 있다.이것은 영적 애통입니다.
누가복음 6장 보면 “ 화 있을찌 너희 이제 웃는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화를 선언함으로써 이 세상의 웃음과 유괘함과 행복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축복과 행복과 기쁨과 평화를 약속 합니다.
구원의 참 기쁨이 있기전에 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이와같은 애통은 죄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부드러운 양심과 상처받은 마음에서 샘솟아난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반역하고 원수가 되었던 것에 대하여 경건하게 슬퍼하는 것이다.(아더 핑크).
동사의 시제는 현재의 계속적인 체험을 의미한다.
성경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들이 세상의 악을 슬퍼하며 울었던 것처럼, 우리도 더 많이 울어야 한다.
시 119: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충성스런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로 묘사되는 것을 들었다(겔 9:4).
바울은 그 시대의 교회들을 소란케 하는 거짓 선생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애통함의 예]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로마서 7:15)
내가 애통하지 않을수 없는이유?
자신을 대면할 때.
자기와 자기생활을 참으로 검토하는 사람..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사람은.
내가 내속에서 나를 이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어째서 내 성질이 이리 못된가?
어쩨서 이렇게 불친절하고, 화를 잘내고, 시기심이 많고 , 악한생각을 품을까?
참된 기독교 이라고 한다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애통은“ 슬픔을 많이 겪었고 아는자” 이셨던 까닭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그 영이 고통 스러워 습니다.
예루살렘 사람이 그를 배척하고 정죄를 초래하는거슬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애통하셨습니다.
죄 그 자체의 성격을 보고 애통 하셨고...
죄가 세상에 들어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을 보고 애통 하셨습니다.
세상의 표어는 “ 먹고 , 마시자, 즐기자” 이것입니다. “ 이런일들에 너무 집착하지 마라 ” 애통 하는자는 “ 본질적으로 ”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사람은 성령의 사역의 열매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 받는 분명한 사람입니다.
슬픔이 없이 기쁨이 없습니다.
애통하는자는 위로을 받으것이요 “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현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는날 “ 위로:을 받을 것 이요 ,그는 다가오는 영광을 압니다.
죄는 이 땅에서 밀려 날것이요 “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이 ” 임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지만 믿지 않는자들에게 무슨소망이 있겠습니까?
여테것, 교육,,, 국제 연명[UN] 만사가 시도 되었지만 실패 했습니다. ,
세상에 소망은 하나도 없습니다. 위로 도 없습니다.
오직 마지막 영광의 때에 그리스도의 위로가 완전케 될 것이다.
성경을 통해, 묵상, 성령께 자신의 죄을 보게 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크게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때에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계 7:17)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