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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파 싸움 그만 하시오
國事蒼黃曰(국사창황왈)-나라 일 이렇게 많아 못 할 적에
誰能郭李忠(수능곽이충)-뉘라서 옛사람 충성 다 할고
去邠存大計(거빈존대계)-서울을 떠나는 건 다시 펼 꾀요
恢復仗諸公(회부장제공)-남은 일은 짐(朕)이 할 테니 그대들 믿소
痛哭關山月(통곡관산월)-관산(關山) 달 바라보며 통곡을 하니
傷心鴨水風(상심압수풍)-압록강 바람에 한숨 지우네
朝臣今日後(조신금일후)-모쪼록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寧復更選(영부갱서동)-동서의 편당 싸움 다시금 하지 마오.
선조대왕 어시(宣祖大王 御詩)
※위의 시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난가면서 당쟁을
그만하라는 시
호남을 왜 진보주의 지역이라 말하는가?
2016년 8월 10일 조선일보 신문기사에
위의 사진과 함께
“보수정당 첫 호남 黨대표”라는 헤드라인 기사가 실렸다.
이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호남은 진보주의 지역”에서 보수의 당대표가 나왔다는
의미 아닐까
이런 기사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특히 정치권에서 호남지역이
“진보주의 지역”의 성지(聖地)처럼 말하고 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것 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국어사전(辭典)에서 진보(進步)와 보수(保守)의 설명을 본다.
*진보주의(進步主義progressivism)
요약
현재까지 일반적 가치로 인정되어 오던 전통적 가치나 정책ㆍ체제 등에 반박하여
그 틀 자체를 허물고 새로운 가치나 정책의 창조를 주장하는 사상 또는
태도를 말하며, 혁신주의(革新主義)라고도 한다.
*보수주의(保守主義conservatism)
요약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상이나 태도.
주로 이념(理念Ideologie)적인 근대 정치사상의 특정 조류(潮流)를 가리킨다.
사회심리학적 의미에서 인간의 어떤 심리적 태도 또는 성향(性向)을 가리키기도 한다.
호남이 정말 진보주의(進步主義) 지역일까?
호남이 특별한 진보주의 지역이라면 다른 지역과 “진보”다운 면이 뚜렸하게
달라야 한다.
필자는 직장시절 지방근무 발령으로로 인해
충남 대전에서 3년, 전남 광주에서 6년, 강원 원주에서 수시로 근무를 하였다.
서울생활은 50년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고향이 경남 진주다.
그러니까 제주도를 제외하고 한국 전 지역을 살아본 것이다.
이유는 회사의 지방법인(地方法人) 책임자로 영업을 하고 대리점을 관리하는
직책 이였기 때문에 30대 초반이라도 각 지역의 시장동향을 분석하고 지방의 특색과 풍속 등은 시장개척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업무였다.
필자가 결론부터 말하고자 하는 것은
특히 정치권에서 호남을 “진보주의(進步主義)”지역이라 규정하는데
진보(進步)와 보수(保守)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한국의 전 지역을 살아보았지만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말씨의 억양만 다를 뿐이지 “보수적이다 진보적이다”라고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
별로 편견(偏見)없이 잘 지내는 국민 간에 정치권과 언론이 “진보다 보수다” 말을
만들어서 국민간 지역 간을 이간질 시키고 부추기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마 세계적으로 대한민국만큼 종교가 다양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갈등은 없다.
모든 사회갈등은 정치와 언론에서 만든 원인이 크다
정말 정치만 제대로 하면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다.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는가 어던 것인가를 고전에서 찾아 본다
논어(論語) 제2편 위정편(爲政篇) 11장에서
子曰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것을 반성하고 새로운 것을 충분히 터득하면 능히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셨다
필자는 논어의 지 장(章)을 빌려
온고(溫故)-옛 것을 익히고(보수保守)
지신(知新)-새로운 것을 아는 것(진보進步)이라고 설명한다.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은 “논형(論衡)” “사단(謝短)”편에서 이 말을 알기쉽게 말하기를,
“옛일만을 알고 오늘을 모르는 것을 육침(陸沈), 즉 육지에서 물에 빠져 죽는 것이고, 오늘만을 알고 옛일을 모르는 것을 맹고(盲瞽), 즉 장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온고(溫故)와 지신(知新), 즉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는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
서로 보완적(補完的)인 것이다.
필자와 정치권의 보는 눈이 달라서 그럴까?
필자는 회사의 주 업무인 영업활동을 하면서 상품을 현금거래 외상거래도 하면서
평범한 우리국민의 깊숙히 교제하는 기회가 많았다.
술한잔 마시면서 만만하게 하는 것이 TV와 정치 이야기다
정치이야기가 나오면 호남인은 호남 정치인이 정권을 잡기를 바라고
충청도는 충청도 정치인이
영남은 영남출신이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이기주의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지상정(人之常情)이요 애향심(愛鄕心)이다.
대화의 분위기에 따라서 역사이야기도 하고 문학 예술이야기도 한다.
학문이야기도 하였지만 특별하다는 것을 느껴본적이 없다.
때로는 같은 동향(同鄕)이 아니라서 표현이 다르거나 견해 차이는 있지만
특별한 이질감(異質感)은 느껴본적 없다.
그것은 자기 고향을 제외한 한국의 어디서든 마찬가지다.
그러면 정치권에서는 우리 국민을 심리학(心理學)이나 사상적인 눈으로 한국의
각 지역을 분석한단 말인가?
필자는 광주에서 6년 있는 동안 취미인 역사유적지를 탐방하기 위해 충청도와
호남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특히 호남역사에 관해서 지식인들과 대화도 많이
하고 기록도 많이 읽었다.
광주의 한 지인(知人)이 말하기를
“당신은 본적만 옮기면 광주사람 다 되었다”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평범한 국민의 한사람의 입장에서 편견 없이
왜 호남을 진보주의 지역이라 말하는지를 알고 싶어서 독서를 통한 내용과
신문방송의 기사들과 역사유적지 답사한 자료 등을 정리하여
“진보주의 지역”이라는 명분을 찾기 위해 제목 정도의 내용으로
순서 없이 정리하여 보았다.
▲조선조 성리학(性理學)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퇴계(退溪)중심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한 율곡(栗谷)중심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있었다. 오늘날 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진보 보수가 구분될까?
▲신라는 영남과 강원도 지역에서 자생(自生)한 나라이고
백제는 만주땅 발해의 온조와 비류의 유민(流民)이 한강유역과 충청과 호남지방에서 세운 나라로서 이 역사의 유전자(遺傳子)가 이어져 내려 온 것이 진보주의일까?
▲백제가 신라에 패망했기 때문에 망국회복의 정서가 지금까지 남아있어 실지(失地)회복 염원이 진보주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인가?
▲영남(嶺南)은 산(山)이 많고 호남은 평야가 넓어 지리적 영향을 받아 보수와 진보로 구분될까?
▲호남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한(恨)이 많다는 소리를 간혹 듣는데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조선조 당쟁사(黨爭史)를 전혀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다.
영남 차별 200년, 호남 차별 35년이라는 역사는 읽지 못했는가?
조선후기 200년동안 영남인들(남인)은 정권에어 완전히 소외되었다.
거시적(巨視的)으로는 인조반정때 부터다.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광해군의 정치적 사부이던 정인홍도 죽임을 당한다.
정인홍(남인)은 경남 출신이다.
다음이 숙종 때인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이때 남인(영남)의 영의정이던 허적(許積1610∼1680)이 사약을 받아 남인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다음이 1694년 장희빈과 관련되어 발생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숙종 20년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南人영남)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후일 서인)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이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부터
유성룡의 후손인 매산(梅山) 유후조(柳厚祚·1798∼1876)가 대원군의
남인 중용책에 따라 좌의정에 오를 때까지 경상도 남인은 완전히 배척당했다.
조선 정치사에서 호남이 다수인 서인이 집권 기간이 200년이다.
1728년 발생한 무신란(戊申亂)은 바로 이런 소외 받은 경상도 남인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1728년(영조 4)에 소론(少論) 과격파들과 남인(南人)이 영조(英祖)와 노론을 제거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증손(曾孫)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일으킨 난이다.
하지만 무신란(戊申亂)으로 인해 영남은 더욱 철저한 감시 대상이 됐다.
무신란을 진압한 후 대구에 세운 “평영남비(平嶺南碑)영남을 평전하다”가 이를 대변한다.
유성룡(柳成龍) 이래로 영남 출신이 재상에 오른 기록은 없다.
조선 말 순조(1800~1834).헌종.철종(1849~1863) 3대 60년에 걸쳐 왕의 외척으로서
조정의 요직을 독점하고 세도정치를 행한 세력은 안동김씨 시대였다.
안동김씨의 정치, 사회, 문화적 영향력은 지대했다.
안동이 바로 영남 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안동(安東)이라는 관향(貫鄕) 때문에 안동 김씨를 경상도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안동 김씨들은 서울 사람들이다.
족보에만 관향이 “안동”으로 기재되어 있을 뿐 서울 본토박이 사람들이다.
구체적으로 서울의 장동(莊洞)이다.
그래서 안동김씨를 “장동김씨”라고 한다.
장동은 경복궁의 서북쪽, 지금의 청와대 근처인 청운동과 옥인동 근방이다.
이성계가 본관(本貫)이 전주 이씨지만 함경도 화령(和寧) 사람인 것과 같다.
정리하면 1680년부터 1876까지 200년동안을 영남이 권력에서 소외된 기간이다.
영호남은 1960년대부터 지역감정으로 대립하는 관계로 접어든다.
영호남의 지역감정은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시작됐다. 박대통령은
공과(功過)가 있는데, 그 과(過) 중에서 가장 큰 것 중 하나가 지역감정 조장으로,
김대중 일본에서 납치사건, 전두환 군사정권의 김대중 핍박으로 이어져
“호남 차별”로 지역감정이 발전된다.
그 35년간 소외감이 호남 사람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박혀 있다.
김대중 핍박(逼迫)에 대한 호남인들의 반발은
충청이나 영남 제주도 어느 지방이라도 자기 고장 출신의 정치인이 고난을 당하면
그냥 보고만 있을 지역민은 없을 것이다.
일부 호남인들은
“호남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후 1000년이 넘는 동안 계속해서
영남에 눌려 살아왔다“고 하는 “호남피해사관(湖南被害史觀)”으로까지
비약(飛躍)하는 말도 있다.
이런 자기 지방 출신 정치인을 아끼는 정서로 인해 진보지역이라 말할 수 있을까?
▲1980년 5월 18일 전두환 군사정권에 항거하는 광주사태,
엄격히 말해서 5월 17일부터 시작된 사건이다.
필자는 광주시 금남로 3가에서 시작된 광주사태를 10일간 직접
현장에서 끝날 때 까지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였다.
이시기는 광주뿐만 하니라 전국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전두환 군부는 5월 17일 제주도를 포한한 “확대계엄령”을 발표하였다
김대중 김종필은 감금하고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시켰다.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선포하자 광주에서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의 퇴진, 김대중석방 등을 요구했다.
전두환 등 신군부가 광주에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시위대와 유혈충돌로
“비극의 광주사대”가 일어난 것이다.
광주시민의 군부독재 항거 시위로 진보지역이라 할 수 있는가?
▲호남은 서원(書院)보다 누정(樓亭누각과 정자)문화가 발달한 지방이다.
경북 안동 사람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영남인 으로서는 처음으로 3년간
전라도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냄으로써 전라도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김성일이 나주목사로 재직하던 1584년에 이 지역 선비들과 합심하여 나주 금성산
대곡동에 대곡서원(大谷書院, 나중에 景賢書院으로 개명)을 세웠다.
호남 최초의 서원은 1564년(명종 19) 순천에 설립된 옥천서원(玉泉書院)이지만,
대곡서원은 나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이다.
나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에는 서원(書院)보다는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가 발달해 있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 일대에 분포해 있는 여러개 정자(亭子)가
말해 주는 것처럼 호남에서는 서원보다 누정이 발달해 있었던 반면,
영남지역에는 서원(書院)이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호남이 판소리 문화가 발달했는지 모른다.
이로 인해 영남과 호남의 끈끈한 인연이 맺어지게 되고 후일 임진왜란 때
영남의 짐성일과 호남의 고경명(高敬命)가족까지 깊은 인연이 맺어져 지금까지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역사 속에 진보성이 있을까
▲16세기 중국 명나라 서화가 동기창(董其昌)의 남종화(南宗畵)가 18세기 조선으로
유입되고 추사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은 진도에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남종화(南宗畵)의 고향으로 탄생하여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
손자 남농(南農) 허건(許楗)에 이르는 가족계보와 한국화의 대가(大家)를 배출하면서
한국화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울림산방의 남종화(南宗畵)는 뿌리 깊은 보수성이지만
한국적 남종화를 발전시킨 과정으로 진보성이라 할 수 있을까?
▲호남의 판소리는 과히 독보적(獨步的)이다.
남원 운봉의 송흥록(宋興祿)은 동편제(東便制)의 시조(始祖)이며,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던 박유전(朴裕全)은 서편제(西便制)의 시조(始祖)로, 호남을 예향(藝鄕)으로 불리게 한다.
이 또한 판소리의 보수성을 지켜오고 있다.
음중양(陰中陽)이요 양중음(陽中陰)이라하였는데
판소리가 진보와 관련성이 있을까?
▲필자는 광주에서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있으면서 당시에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될 때 였다.
광주주재 기업인들과 지방 유지들과 종종 친목모임이 있었다.
이때 광주 유지한분이 한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광주에는 타도(他道) 사람들이 살러 오지 않는다. 부산이나 대구에는 여러 지역 사람들이 전입을 하는데, 아마 광주의 애향심으로 인한 보수성 때문에 외지사람들과 잘 융화가 안 되는 원인이라 본다” 면서 광주시민이 외지인 이주에 적극 참여하여 경제발전에 협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말은 그분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전체 광주시민을 대표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속에 진보의 성격이 있을까?
▲당시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난을 받던 시절이라 호남인의 김대중을 아끼는
정서가 보통이 아니었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적인 말을 호남사람들 앞에서 하면 싸움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것은 애향심의 발로라 생각한다.
이런 애향심 속에 진보의 성격이 있을까?
▲고려 태조 왕건이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942년(태조 25)에 몸소 지은 열 가지
유훈(遺訓)인 훈요십조(訓要十條)가 있다.
이중 8항이 특정지역을 지칭하는 잘못된 해석으로 지역감정을 유발시키고 있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銜統合之怨, 犯 生亂,
且其僧屬官寺奴婢, 津驛雜尺, 或投勢移免, 或附王侯宮院, 奸巧言語,
弄權亂政, 以致 變者, 必有之矣, 雖其良民, 不宜使在位用事】
국사학계에서는 “ 車峴以南과 車嶺山脈以南이 같고 公州江과 錦江이 같다”고 하여
지방색을 촉발(促發)한사람이 일제가 만든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대표적
편수위원인 이병도(李丙燾)라 하였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일본이 조선역사를 바꾸기 위한 식민통치 역사회다.
광복후 이병도(李丙燾)는 시대가 바뀌자 종친인 이완용의 매국행위를 지우려 원광대에 있던 이완용의 자료를 훼손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국사학계 장악에 나섰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지금 50대 나이 이상 되는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국사책은 전부 이병도가 쓴 책으로 공부하였다. 한반도를 “토끼”모양이라 왜소(矮小)하게 표현한 것도 이병도 국사 교과서때 나온 말이다.
여기에 진보의 이유가 있을까?
▲정여립(鄭汝立)의 대동계(大同契) 역모 문제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희증(希曾)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83년(선조 16)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율곡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서인(西人)이었으나,
이이가 죽은 뒤 동인(東人)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선조의 미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落鄕)하였다
이후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1587년(선조 20)에는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다. 이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2)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틈타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정철(鄭澈) 등의 서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완주군 상관면에서 전주로 유입(流入)되는 전주천(全州川)은 옛 한벽루(寒碧樓) 밑 절벽에 부딪쳐 물길을 북쪽으로 급하게 바꾸는 “역수(逆水)”라하여 훗날 전라도 지역을 모반의 땅 역향(逆鄕)의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하였다.
이후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이런 내용들은 당쟁(黨爭)에서 반대당을 제거하기 위한 구실이다.
조선조때 반정부 난(亂)은 많다
이시애(李施愛─亂)의 반정부 난
홍경래(洪景來)의 반정부 난
임꺽정의 난-신분해방 운동 난
이징옥 난(李澄玉─亂)-계유정난에 받대하는 난
이괄(李适)의 난-인조반정에서 논공행상에 불만한 반정부 난
김직재(金直哉)의 난-광해군5년에 대북파가 소북파의 세력을 없애려고 김직재 등을
모반혐의로 처형 시킨 난
칠서(七庶)의 난-광해군때 서얼출신이라고 차별을 받았던 서자7인이 상인을 습격한 것을 북인세력이 역모사건으로 조작한것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효종의 북벌계획을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한 사건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조선 후기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
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 19) 구식군대가 일으킨 병란
갑신정변(甲申政變)-1884년(고종 21)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의 정변
임술민란(壬戌民亂)-1862년(철종 13)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의 농민항쟁
계유정난(癸酉靖難) 중종반정(中宗反正) 인조반정(仁祖反正)도 반정부 난이다
만적(萬積)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은 고려때 노비해방을 요구하는
민난이다
정여립(鄭汝立)의 반정부난도 이 많은 반정부난중의 하나일 뿐이다.
정여립의 난에서 진보의 역사 흔적이 보이는가?
▲호남의 역사적 긍지와 자존심은 1906년 4월 규장각 직각이었던 고정주(高鼎柱)설립한 창흥의숙(昌興義塾창평초등학교 전신)이다.
둘째아들 광준(光俊), 사위 인촌 김성수(金性洙) 외척인 가인 김병로(金炳魯)
친지 송진우(宋鎭禹)등이 1회졸업생이며 그후 호남의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것은 교육입국의 진보정신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애국지사들이 교육입국의 기치를 세우고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박은식 양기택등 이승훈의 오산학교등 교육을 통한 애국지사가 많았다.
▲매일경제와 통계청이 실시한 1985년~2005년 인구조사를 토대로 만든 종교 지도(地圖)에는 소백산맥을 경계로 불교는 동쪽지역이 많고 기독교 서쪽지역이 많은 양상이 20년 동안 변화를 보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불교를 보수로 기독교를 진보성향으로 볼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 1929년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이 있었다
이때는 광주뿐만 아니라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 되었다.
동덕여고보 · 휘문고보 · 중앙고보 · 법정학교 · 중동학교 · 중등야학교 학생들은
경성 RS협의회를 조직했다. 함흥의 함흥고보 · 함흥농업학교 · 함흥상업학교 · 영생고보 · 영생여고보 학생들은 학생공동위원회를 조직했다.
평양신학교 ·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은 농촌연구회라는 연합 조직을 결성하여 학생운동을했다.
항일학생운동이 진보의 역사라 할 수 있을까
▲호남에는 예향(藝鄕)다운 특이한 것이 있다.
보통 개업(開業)하는 곳에는 축화 화분을 가져가기 마련인데 호남에는
글씨나 한국화 한 폭을 벽에 걸어주며 축하한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이런 정서는 진보보다 보수쪽이 더 짙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광주에 6년임기를 마치고 떠나면서 좋은 인상이 남았다.
당시는 회사의 지점법인이라 막대한 상품을 판매하였다
그때는 외상 거래를 많이 할 때라 전라남북도에 판매망을 넓게 구축할때였다
내가 6년 임기를 마치고 서울 본사로 올라올 때에 약 40여개소의 외상거래처에서
상당한 액수의 외상이 있었지만 외상값을 떼이지 않았다.
만일 돈이 없으면 상품이라도 반품을 시켜서 인수인계하는데 협조를 하였다.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도둑놈도 있고 사기꾼도 있게 마련이지만
나는 큰 대가 없이 임기를 잘 마쳤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사회는 “진보다 보수다” 구분지을 지역은 없다.
지금 입으로는 통일을 열망하면서 국론 분열과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정치권과 언론이다.
정치를 잘하겠다면 국민을 위한 자신의 정치 포부(抱負)를 밝히고 실천하면 된다.
이상야릇한 말을 만들어 지역감정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
특정지역을 거론하는 것은 정치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하는 짓이다.
우리 국민은 개인적인 성격은 다르지만 국민전체로 볼 때
진보다 보수다 구분할 정도로 양분되어 있지 않다.
괜히 말로만 “진보다” “보수다” 할 뿐이다.
기업인은 사업성취외에 다른데 쓸 정신이 없고
학생은 공부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구하기에 딴 생각이 없고
일반 국민은 먹고 살기 바뻐 “진보 보수” 용어 자체가 생각이 없다.
명색이 지식인이네 하는 정치 한량들의 정치력 부재에 대신하는 용어에 불과하다
통일을 열망하면서 지역간 계층간 구분을 짓는 것은
국론분열을 조장하는 망국의 행위이므로 요사스런 말장난에 현혹되어서는 안되며
이런 망국적 용어들은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