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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우석 특허수호단 원문보기 글쓴이: 청라
친일파 자식들이 활개치는...오늘은 '장준하 암살' 40주년 | ||||||||||||||||
문재인 "장준하 선생의 죽음, 일제·독재에 대항한 정의의 좌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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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나처럼 겁쟁이가 된 걸 알까요/장준하는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기 위해 투쟁했는데/ 나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걸까요/왜 나는 적당히 안전하게 살아갈까요/ 왜 나는 남을 위해서 살지 않을까요.”
17일 오전, 장준하 공원에서 ‘부끄러움’이라는 제목의 시가 울러퍼졌다. 시를 쓴 이는 경기도 주엽고등학교 2학년 이현주 학생이다. 그는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장준하 선생의 수필 <돌베개>를 읽게 됐는데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며 “스스로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끄러워서 이런 내용의 시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이현주 학생은 장준하 추모문학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
박정희 집단에 의해 암살당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 40주기 추모식이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준하공원에서 장남 장호권(66)씨를 비롯한 유족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등 추모객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추모식에서 참석자들은 선생이 평생을 바쳐 이루고자 했던 민주주의, 자주독립, 평화통일의 나라를 만들어 가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추모식의 화두는 40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은 선생의 의문사였다.
장준하 선생 장남인 장호권(67) 유가족 대표는 "선친께서 죽임을 당하신 지 40년이 됐다" 며 “반쪽짜리 해방 맞은 70년 동안 민족을 배반하고, 국가를 말아먹고 국민을 도탄에 빠지게 한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한 민족반역자들이 아직 이 나라에서 활보하고 있다.”면서 “더 이상 기다리면 안 된다. 그리하여 정말 자주적인 민족통일과 진정한 민주주의 만들어내야 한다.”고 목소릴 높였다.
문재인 대표는 추모사에서 “독립투사이자 사상가, 참언론인, 민주주의자였던 장준하 선생의 삶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실천을 일깨워줬다. 선생이 주창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이끌었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한 재야 민주화운동의 출발이 됐다”고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문 대표는 이어 “지금 우리가 장준하 선생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직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했고,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한 지도자를 갈망하기 때문”이라며 “다시는 못난 조상이 되지 말자고 누누이 말씀하신 선생의 뜻을 받들어 완전한 통일과 동북아 평화·번영을 주도하는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문 대표는 또한 "선생의 죽음은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줬다"며 "낯선 땅에서 6천리를 걸으며 선생이 곱씹었던 애국정신과 광복군의 기개를 생각하면 결코 우리가 거두지 못할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문 대표는 "아직도 선생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하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선생께 죄송하다."며 "늦었지만 당 장준하선생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렸고 '장준하특별법'을 발의했다. 반드시 (의문사) 진상을 규명해 선생의 한을 풀겠다."고 강조했다.
장준하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도 월간 사상계를 창간,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다.
특히 장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월남 파병을 강하게 비판했고, 박정희 군사독재에 정면으로 항거한 바 있다. 그는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투쟁에 앞장서다 1975년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정부는 실족사라고 발표했으나, 당시 정황들을 토대로 정권에 의한 타살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왔었다.
그의 타살 의혹과 관련,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했으나 ‘진상규명 불능’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2012년 묘 이장 과정에서 장 선생의 유골을 검사하면서 두개골 오른쪽 뒤에 지름 6∼7㎝ 구멍이 확인되면서 타살 의혹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한편 지난 2013년 12월 유기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장 선생의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한 ‘장준하 특별법’을 대표발의했고, 이에 여야 의원 104명이 공동서명했으나, 아직 국회안전행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하지만 정부와 새누리당의 미온적인 태도로 아직 통과하지 못한 상태다.
추모식을 주관한 장준하기념사업회 유광언 회장은 “40년 전 선생을 보내면서 민주주의가 활짝 핀 나라, 인권과 자유가 넘치는 나라, 평화와 통일로 번영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선생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며 “정의는 승리하고 진실은 밝혀지는 것이라 믿고 있으며 우리 아들딸들이 싸움을 이어갈 것”이라고 장 선생을 추도했다.
한편 이날 추도식은 국민의례, 추모사, 유족 인사말, 장준하 추모문학 공모전 시상, 추모공연, 분향과 참배 순으로 약 1시간 30분간 진행됐다.
광복 70주년이 다가오는데 황당한 소리가 들려온다. 임시공휴일 지정과 3일 연휴로 9조 원의 경제유발 효과가 있단다. 전국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해 줄 테니 모두 놀러 나가 소비를 진작시키라는데 광복절을 행락 판으로 만들 셈인가? 광복 70년이 놀고먹는 날은 아니다.
특히 ‘친일파의 나라’를 완결 지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앞장서서 광복절을 모욕해서는 안 된다.
제1~3공화국(1948.8~1972.10)에서 ‘친일파 득세, 독립유공자 괄시’라는 불변의 진실은 다음 자료를 통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이 기간에 대한민국의 정·부통령, 국무총리, 장관, 국회 정·부의장, 대법원장·대법관, 검찰총장,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포함하는 핵심요직 414개에 앉았던 사람들의 일제강점기 경력을 보면 각 공화국의 정체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전체 414개 중에서 26.8%인 111개 자리를 장악했다. 조선총독부의 관리나 판검사 출신,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장교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독립유공자로 포상한 사람 중에서 요직에 오른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자. 고작 7%인 29개다. 이른바 뉴라이트들은 친일인명사전이 대한민국 건국의 정체성을 훼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제1~3공화국에서 독립유공자들이 권력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객관적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7%대 26.8%가 바로 1~3공화국의 ‘친일성’을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다. 이런 분석틀로 각 공화국의 성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제1공화국 독립유공자 11.4% 대 친일파 25.9%
제1공화국의 185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11.4%인 21개 자리에 오른 반면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25.9%인 48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부통령 김성수는 사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그의 친일행위로 인해 서훈 취소 논란이 끝이지 않고 있어 독립유공자 통계에서 제외했다. 국가보훈처는 김성수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서훈 취소를 유보한 상태다. 윤치영은 1982년 건국 포장을 받았지만 2011년 4월 언론인 장지연 등과 함께 서훈이 취소됐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제2공화국 독립유공자 6.8% 대 친일파 32%단명한 제2공화국의 59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고작 6.8%인 4개에 머문 반면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32%인 19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제3공화국 독립유공자 2.4% 대 친일파 25.9%일본군 소위이자 만주국군 중위 출신인 박정희가 만주군 선후배와 정치군인들을 데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제3공화국에서 독립유공자는 가장 푸대접을 받았다.
모두 170개 요직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2.4%인 4개 자리에 올랐을 뿐이며,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25.9%인 44개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 독립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다음과 같다.
이처럼 44개 요직을 차지했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모두 29명인데 일본군이나 만주국군 출신이 9명이고, 조선총독부의 판검사 출신이 12명, 군수나 시학관 등 관리 출신이 8명이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초급장교·판검사·군수 자리에 앉아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해서 제3공화국에 이르자 각 분야의 최고자리에 올랐다.
국방장관 합창의장 육참총장은 친일파 독무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9년 2월까지 육군 참모총장은 일본군 장교 또는 만주국군 장교 출신들이 독차지했다. 이 자리는 일본군 대령 출신 이응준이 참모총장을 맡은 이래 일본군 중령 출신 신태영, 일본군 소령 출신 채병덕, 만주국군 헌병 대위 출신 정일권, 일본군 소령 출신 이종찬, 만주국군 중위로 간도특설대 군관 출신 백선엽, 이응준의 사위이자 일본군 대위 출신 이형근, 다시 백선엽이 이어받았다. 이상 7명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국방부장관과 합참의장도 사정이 다를 게 없었다.
그 이후 상황은 어떠했나? 일제는 1943년 10월부터 학병제를 실시하여 11월 말 지원을 마감하고 다음 해 1월 20일 첫 입영자가 나왔다. 이과와 사범계를 제외한 전문·대학생 4,385명이 일본군에 끌려갔다. 학병 미지원자에게는 12월 15일 징용령이 발동됐다.
학병들은 단기 교육을 받고 현지에서 장교로 임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그렇다고 모두 장교를 지원한 것은 아니다. 장준하나 김준엽 같은 사람을 목숨을 걸고 탈주를 해서 광복군에 합류했다.
1959년 2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송요찬은 지원병으로 입대해서 종전 당시 일본군 준위였다. 이후 제3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12년 동안 육군 참모총장은 학병출신 일본군 소위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어받았다. 학병 출신 장교들이 자발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진기록은 진기록이다.
그렇다면 제1~3공화국에서 육군 참모총장 16개, 합참의장 11개, 국방부 장관 18개를 합쳐서 45개 군부 요직 중에서 광복군 또는 학병 탈출자 출신은 몇 개 자리에 올랐을까? 정답은 단 한 개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이범석이 1948년 8월부터 1949년 3월까지 국방부장관을 지낸 게 유일하다.
대법관·내무부장관도 친일파 천지
제1~3공화국에서 대법원장과 대법관 자리는 모두 45개였다. 이 중에 47%인 21개를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들이 차지했다. 독립유공자는 일제강점기에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내고 수많은 항일사건을 변론했으며, 해방 후 1948년 8월부터 1957년 12월까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가 유일하다.
검찰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검찰총장 11명 중에서 독립유공자는 일제강점기에 대구애국단 사건으로 투옥됐으며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로 활동했고, 해방 후 1950년 6월에서 1952년 3월까지 재임한 서상환이 유일하다. 친일인명사전 수록자는 4명이다.
한편 치안과 지방행정을 지휘했던 내무부장관도 친일인사가 득세했던 자리다. 제1~3공화국에서 내무부장관은 중복 임명을 포함해서 30명인데 이 중에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가 13명이고, 독립유공자는 이범석 단 한 명뿐이다.
이렇듯 1~3공화국에서 친일파 득세, 독립유공자 괄시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역했던 사람이나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를 외면했던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은 이런 점에서 커다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이들이 역사교과서를 입맛대로 미화한다고 해서 없었던 정통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1~3공화국 특히 제3공화국이 정통성이 결여됐다 하여 21세기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가 모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이룩한 성과가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화해하는 길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진실-반성-화해를 모색해야 할 날에 3일 연휴, 경제유발효과 9조 원을 외치는 박근혜 정권이 그저 한심하고 딱할 따름이다. 하긴 그 아버지에 그 딸이다.
뉴스타파 : 신명식 http://blog.newstapa.org/msshin56/2280 |